-4 #80
―두두두두두두두….
수만 기(騎)의 기마가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을 내닫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 장관의 목표가 되는 쪽에서는 그것만큼 등골 서늘한 풍경이 또 없었다.
“웬 대군이지?”
―둥둥둥둥둥둥둥둥….
망루에 올라 초원을 감시하던 초병은 지체 없이 비상을 알리는 북을 울렸고, 후산(後山)의 봉우리에선 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가 피어올랐다.
“무슨 일이냐?”
“예, 정체를 알 수 없는 군사들입니다.”
제평의 금군 대장 기도오(基桃嗚)는 망루에 올라 지평선에 이는 흙먼지를 바라보았다. 저 정도 대군이 움직이는데 제평 주위 사흘 거리까지 순찰을 도는 순군(巡軍)이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았다. 흑막 전역의 물산이 모이는 제평이었다. 단물이 있으면 거기에 꾀는 파리가 있게 마련이듯이 제평부에는 거의 항상 마적이 활개쳤기에 그 마적과 항상 싸우고 추적하는 정예 순군이 있었다. 그 순군들이 저들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은 순찰대 내부에 간자가 있거나 저들이 제평으로 돌아오는 걸 막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기 대장님, 저것 보십시오. 절세웅랑기(絶世熊狼旗)입니다.”
“크음….”
기도오는 바람에 나부끼는 흑막 웅랑교의 상징인 붉은 바탕에 두 발로 선 채 위협하는 검은 곰이 그려진 웅기(熊旗)와 푸른 바탕에 포효하는 회색 늑대가 새겨진 낭기(狼旗)을 확인하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필이면 웅랑교라니….”
흑막은 거칠고 삭막한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흑막 사람은 그 기상이 억세고 호전적인 기질이 다분했다. 어떤 인물이 나서 주위 부족을 제압하고 막대한 부(富)를 가진 제평을 노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제평의 높은 담을 넘지 못했다. 제평이 제평인 이유는 제평을 통해 막대한 양의 상품이 거래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흑막의 시장을 틀어막으니 식량 수급이 제대로 되지 않고 반란군은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웅랑교는 대초원을 음으로 양으로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웅랑교가 제평을 원한다면 제평에도 웅랑교를 따르는 자들이 많이 있어 성을 지키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힘들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적이다! 금군은 적을 맞아 싸울 태세에 만전을 기하라!”
“꿀꺽, 조… 존명!”
제평은 두 개의 산이 교차되는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서 우뚝 솟은 높은 언덕 ‘V’ 형태로 자리잡고 풍부한 물이 있어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제평 사람들이 산이라 부르는 언덕을 오르는 데는 반각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거칠 것이 없는 흑막 대초원의 상당히 먼 곳까지 감시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런 곳에 거대한 성시가 자리잡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37만 명의 목을 축이고도 남아 농사를 가능하게 했으며 거센 바람을 막아주고, 산맥(山脈)은 성벽이 되어 적의 위협을 막아주었다. ‘V’형의 지세에 입구를 거대한 성벽으로 틀어막은 형태의 제평은 그야말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채였다.
“기 대장님, 지금 성에 남아 있는 금군은 1만 5000 정도입니다.”
“5000은 병을 나누어 각각 현산(玄山)과 무산(武山)으로 올려 보내고, 1만으로 남벽(南壁)을 지킨다.”
“현산과 무산에요?”
“저들은 웅랑교다. 본시 곰과 늑대는 산을 잘 타는 법이지. 그리고 싸울 수 있는 자들을 모아 의군을 편성한다.”
“알겠습니다.”
제평의 금군에 속한 군사는 5만이지만 대부분 순군으로 제평 밖에 나가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흑막이다. 흑막의 사내는 홀로 초원에 나가 사냥만으로 100일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인했다. 그리고 어느 집이든 집 안에 활을 가지고 있어 누구나 활을 쏠 수 있었다.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더라도 10만에 가까운 군세를 순식간에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웅랑교였다.
“현(玄)과 무(武), 과연 현무(玄武)의 그것처럼 단단해 보이는 등껍질이로군.”
“호인,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웅랑교의 영향력으로 약간의 시간만 투자하면 제평을 손에 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가?”
“천패, 대초원은 힘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곳일세, 오랫동안 최강 세력으로 군림해온 제평을 힘으로 누르는 것을 보여준다면 그 누가 있어 우리에게 대항하겠나?”
“….”
“그리고 이미 기치를 든 이상 제평은 그 효용성이 떨어지지. 원주 조정에서 반란자인 우리에게 물품을 제공할 이유가 없지 않나?”
“하지만 후려와 교역을 하기로 했지 않나?”
“그래서 제평은 필요 없네. 힘과 식량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웅천패(熊天覇)는 낭호인(狼好仁)의 말에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낭호인은 웅천패만 겨우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굉(宏)과 조(祚)가 500년 간 놀았으니, 다음은 우리가 놀아야 하지 않겠나? 우(于).”
“글쎄? 굉(宏)과 조(祚)는 마계의 문이 이곳에서 열리기 때문에 선점한다는 차원에서 움직였지 않나? 난 아직도 우리가 움직여도 좋을지 확신이 서질 않아. 그러나 심심한 것보다는 낫겠지. 내가 앙(殃) 자네의 말을 들은 것은 그것 때문이야! 그보다 강무세가가 신(伸)과 관련 있다는 것이 확실한 건가?”
“대륙의 다섯 신룡 중 유일하게 이름만 있는 놈이니 알 수가 있나? 하지만 자네도 느꼈지 않나? 일가(一家) 전체가 기재(奇才) 중 기재(奇才)들이었어. 한 가문에 그토록 많은 천재(天才)가 나온다는 것은 어딘가 어색한 일이지. 게다가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은 화기(火氣)가 강해. 신(伸)은 불의 권능을 가진 적룡이니 그렇게 생각한 거지….”
“그럼 신(伸)도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어쩌지?”
“우린 둘이고 그는 하나다. 그리고 만약 진정 신(伸)이 관련되어 있다면 우리가 그를 감지했듯이 그도 우리의 존재를 느꼈을 거다. 나중에 뭔가 움직임이 있겠지.”
알 수 없는 그들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이 듣기에 웅얼거림 이상의 의미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음으로 하는 대화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제평은 아직도 멀리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서는 지평선에 걸쳐 보이는 것이 상당히 가깝게 느껴지는 법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다에서 섬을 발견하고도 하루를 더 항해해야 섬에 닻을 내릴 수 있는 것과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