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6일 영남대학교 풍수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내용.
1. 전체적 국세 遠七近三이라는 말이 있다. 멀리서 전체적인 모습을 7번 보고 가까이서 3번 살피라는 뜻이니, 나무를 보기 전에 숲을 먼저 점검하라는 말이다.
(1), 주산

주산은 혈처를 형성하는 근본이 되지만, 멀리서 바라본 국립묘지의 봉우리들은 그만그만한 모습으로 특별한 형체를 이루지 못했다. 좋은 땅을 만드는 봉우리는 지금보다 더 기품 있게 솟아주어야 했다. 그나마 박정희 대통령 묘소로 연결된 A의 형태가 그 중 낫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장군봉까지 오는 용맥은 얼핏 보면 A에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현지의 지형을 자세히 보면 C로부터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박정희대통령 묘역과 장군봉 사이에 작은 물길이 형성되었으니,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봉우리 A는 박정희대통령 묘소에서 끝나며 장군봉이나 창빈 묘소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한편 봉우리 C의 후면을 자세히 보면 오목하게 형성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마치 기왓장을 엎어 놓은 것 같다하여 仰瓦라 한다. 그러나 좋은 땅을 만드는 봉우리는 위에서 보았을 때 일그러짐이 없이원만해야 한다. 이러한 모습은 스스로 바람을 불러들이는 꼴이므로 외풍에 취약한 상태임을 말해주는 것이니, 주산으로서 바람직스럽지 못한 형태이다.
(2), 용세 부실한 주산이 새롭게 솟구쳐 장군봉을 만들었으므로 주산C의 허물을 어느 정도 커버하고 있다. 이때 장군봉에서 용맥이 2개로 나누어 졌는데, 하나는 이승만 묘역으로 지나고 다른 하나는 창빈묘소로 흐르고 있다.
두 개의 용맥 중 창빈 묘소로 이어지는 것은 장군봉의 정점에서부터 두툼하게 연결되지만, 이승만 대통령 묘소로 연결된 용은 장군봉의 하단에서 불분명한 상황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창빈의 묘로 이어지는 용은 후부하지만 이승만대통령 묘소의 능선은 가냘프고 뻣뻣한 것이다. 따라서 창빈묘로 이어지는 능선이 국립묘지의 중심맥이며 正龍인 것이다.


(3), 청룡·백호


청룡과 백호가 혈처를 위해 적극적으로 감아주지를 못하고 곧고 길게 형성되었다. 마치 두 팔을 앞으로 나란히 뻗은 것과 같은 모습이니, 매우 바람직스럽지 못한 형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백호를 유심히 살필 것 같으면 A지점은 짧고 변화가 없으며, B 지점은 길고 완만하게 능선이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백호는 B지점이 面이며 A지점이 등이 되는데, 이 말은 백호는 국립묘지에 완연히 등을 돌린상태라는 뜻이다.
龍虎穴之左右砂也, 彎抱有情爲吉 (용호는 혈의 좌우에 있는 산이니, 둥글게 감싸주어야 정이 있어 길함이다)
(4), 안산 안산의 소임은 물의 直去와 전면의 바람을 막아주는 것이지만, 안산이 없으므로 해서 藏風과 得水에서 매우 불리한 상황이다.
尤嫌無案山 衣食必艱難 (더욱 두려운 것은 안산이 없는 것이니. 반드시 의식이 어려울 것이다)
(5), 內·外水 역시 안산이 없는 까닭에 內水인 현충천 물이 直去水로 빠진다.
水穿堂直過 謂之水破天心 主財不聚 人丁稀少 (물이 명당을 곧게 뚫고 지나게 되면 수파천심이라 하여, 재물이 모이지 않고 사람도 드물게 된다)

또 外水인 한강 물은 곧고 둔탁하게 묘역 전체를 치다가, 다시 反弓水가 되는 형상이 되었다. 혹자는 한강의 물이 앞에서 들어오는 물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구부구불 들어와서 나의 몸체를 감싸고 뒤로 흘러야 朝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의 한강물은 국립묘지를 향해 들어오다가 갑자기 등 돌려 외면하는 형상이므로 朝水라 할 수 없으며, 마치 크게 치고 빠지는 불길한 형상이 아닐 수 없다.
若欲催官催富 必得朝水之地 (만약 속발하고자 하면 반드시 물이 들어오는 땅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조수임을 입증하려면 창빈의 묘 이후로 금시발복의 효과가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곳에 묘를 쓰고 10년 후 그의 아들 덕흥대원군은 30세의 나이에 夭折하니 速發이 아니라 速敗의 땅이 되고 말았다.
(6), 종합평가 주산은 至尊으로서 위엄이 없고, 특히 등 뒤의 바람에 취약한 상태이다. 용호는 혈처를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물과 바람을 내부 깊숙이 안내하는 형상이 되었다. 내명당의 물은 直去水로 빠지면서 명당을 칼로 베듯 2등분 하였으며, 외수인 한강은 무섭게 밀려와서는 반궁수로 빠져 나간다. 그 와중에도 龍脈은 장군봉을 만들며 중출맥으로 진행하고 있으니 水賤龍貴의 땅이 되었다. 하지만 眞穴은 용혈사수가 상호 보완적으로 조화롭게 배치되었을 경우에만 맺는 것이다.
水賤龍貴不爲全, 禍福兩相兼 (물은 천하고 용이 귀한즉 온전한 것이 아니니, 화복이 서로 상반된다)
(7), 제왕의 땅 이렇듯 불리한 지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창빈의 손자가 18년 후 임금이 되었으며, 그 후 조선이 망할때까지 14명의 제왕을 배출하였기 때문에 교과서적인 명당이며 표본적인 혈이라 부른다. 임금이 되었으므로 명당이라는 등식은 과연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가? 만약 임금을 배출하였기 때문에 명당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려면 대다수의 왕릉과 근대 대통령들의 선영이 명당임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 거의 대부분은 득보다 실이 많은 땅이었다.
따라서 제왕이 되었으므로 명당이라는 등식은 귀납적이며 감상적 접근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풍수의 동기감응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나 풍수의 응험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 다만 제왕에 오르는 것만큼은 인간과 땅의 한계를 뛰어 넘는 초법적인 힘이 작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8), 창빈 묘소의 발응 한편 명당인지 흉지인지의 여부를 가장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이해관계가 밀접한 후손들의 역사를 도외시한 체 먼 훗날의 길흉을 말한다는 것은 견강부회이다.

특히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까지 약 50년 동안 힘없는 백성들은 수십만 명이 죽고 또 수십만 명이 왜국과 청으로 끌려갔다. 두 임금은 도망 다니기 바쁘고, 분노한 백성들에 의해 궁궐은 불타며, 침략자들에게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하였다. 조정은 동인, 서인, 남인, 북인으로 갈라져 당파싸움에 제 잇속 차리기 바쁘며, 군주에게 버림받은 백성들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져 人肉까지 먹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럼에도 이 모든 상황을 福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 임금이 되었으므로 다른 것은 아무래도 괜찮은 것인가 ? 몇 십 년의 절대 권력을 위해서는 주변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좋은 것인가? 명당의 發應이 그렇게 극단적인 것인지, 혈은 그토록 무서운 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9), 소결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동작동 국립묘지의 전체적 지세는 水强山弱, 小貪大失, 外華內貧의 땅이 되었다.

2. 김대중 대통령 묘소의 미시적 접근 창빈 묘소와 김대중 대통령 묘소는 불과 30m 거리에 근접해 있기 때문에 주산과 청룡·백호, 물의 모습 등이 동일하다. 다만 바뀐 것이 있다면 좌향과 안대만 다를 뿐이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경우에 종종 體와 用을 말하는데, 하드웨어의 개선 없이 소프트웨어의 변화는 큰 의미가 없다. 비유하면 엔진이 부실한 차가 타이어를 바꾼다고 改過遷善하지는 않는다.
(1), 葬乘生氣 기맥은 능선의 중심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陰地一線) 박환된 상태라면 고운 흙으로 형성될 것이고, 박환되지 못한 능선이라면 능선 중심이 억센 뼈대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까닭에 조선 왕릉을 포함한 모든 묘소가 능선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DJ묘소는 중심에서 벗어난 경사면에 위치하였으니, 풍수의 가장 핵심적인 乘生氣를 못하였다. 혹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隱脈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러자면 穿壙지점이 지금처럼 꺼진 모습이 아니라 약간이라도 도드라진 지형이 되어야 한다.
기가 넉넉한 땅은 반드시 살이 찌기 때문이다. 土肥卽氣厚 (살이 찐즉 기가 후함이다)

(2), 당판의 경사 마찬가지로 능선에서 벗어난 경사면이다 보니 당판이 안정되지 못하고 앞으로 기울어진 상태이다. 하지만 어떠한 怪穴일지라도 묘를 쓰는 지점은 평탄하고 완만해야 함은 기본적인 사실이다.
凡山形土脈所落處 必須在平夷之地 (무릇 산형토맥이 멈추는 곳은 반드시 평탄한 곳이어야 한다)
(3), 주룡의 진행방향 DJ묘소에서는 창빈묘의 능선이 이해관계가 가장 밀접한 내청룡이 된다. 그런데 지형도를 보면 장군봉에서 창빈묘소의 전순까지 右旋龍으로 흐르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지형도가 아니더라도 右旋龍인 근거는 DJ묘 우측 상단에서 가지 A를 형성했으며, 창빈 묘의 하단 1시 방향에 돌출된 바위로 또 하나의 요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右旋龍인 또 다른 근거는 창빈 묘의 좌우측 경사면을 보면 우측은 완만한 반면, 좌측은 오목거울처럼 형성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용의 회전에 따른 당연한 물리적 현상이다. 결국 창빈 묘의 능선은 DJ묘를 등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DJ묘의 內靑龍으로 삼기에는 역부족이며, 물의 흐름을 거두어 주는 下水砂의 역할로서도 미흡한 상태이다.
(4), 안산

묘소 건너편 동쪽으로 보이는 산을 보고 좌향을 정했지만, 그 산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국립묘지 전체를 등지고 있는 모습이었으니, 무정한 뒷면을 바라보는 형태가 되었다. 현재와 같은 지형에서는 a에서 파생된 가지가 좀 더 적극적으로 감아주어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는 의사표명을 분명히 했어야 한다.
(5), 內·外水

DJ 묘의 내명당 물은 우측에서 발원하여 좌측으로 흐르지만, 득수는 짧고 파구는 긴 형태로서 마치 천원을 벌면 만원을 쓰는 모습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청룡의 역할이 중요했던 것인데, 창빈 묘소가 자리한 청룡은 등 돌리고 있어서 물 빠짐에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굳이 外水인 한강의 모습까지 거론하지는 않겠다.
(6), 혈토 혈이라면 토색이 밝고 윤기가 있으며 특히 입자가 고운 것이 특징인데, 이곳에서도 좋은 흙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토색과 토질이 혈을 판단하는 최종적인 기준은 될 수가 없다.

形勢不吉而 土色具備 用之者, 禍不旋日 (형세가 불길한데 토색을 갖추었다고 해서 묘를 쓴다면, 禍를 돌이킬 수 없다)
혈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조건과는 상관없이 단순히 흙의 색깔과 土質만을 갖고서 명당이라 말하는 것은 자제되어야 한다. 실제로 이곳의 흙보다 더 좋은 흙은 무수히 많지만, 그렇다하여 그곳이 모두 명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3. 맺음말 이상으로 국립묘지 전체국세와 김대중 前大統領 묘소를 형세론적 접근으로 분석해 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많은 부분에서 부족함이 노출되었다. 본인이 지나칠 정도로 산에 대해 엄격하다고 말하지만 지난세월 얼마나 많은 실수와 실패가 있었는지를 생각한다면 결코 지나침이라 말할 수 없다.
각설하고 나는 이곳을 풍수이론을 대입한 定量的평가에서는 매우 비판적이었지만, 定性的평가로 보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김대통령의 가족과 지지자들의 입장에서는 용인선영에 묘를 정할 경우 교통의 불편함과 관리의 문제점으로 인해 추모객들이 현저히 줄어들 것은 불문가지이다. 개인 선영에 계신 윤보선 대통령과 대전국립묘지에 영면하신 최규하 대통령의 경우를 고려했을 것이며, 또 1년 전에 비극적 죽음을 맞은 노무현 전대통령의 묘소를 보고 그러한 생각을 굳혔을 것이다. 아무리 풍수적 조건이 좋다할지라도 찾아오는 이 없어 쓸쓸하고 혹 훼손이라도 된다면 망자와 산자 모두에게 편치 않을 것이다.

따라서 풍수관점에서는 미흡할지라도 世人들이 인동초의 정치철학을 오랜 세월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는 접근이 편리한 동작동 국립묘지를 결정했을 것이다. 결과는 예상대로 수많은 추모객들로 동작동 국립묘지의 새로운 명소가 되고 있는데, 그 결정이 망자를 배려한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장군봉 정상이나 이승만대통령 묘소의 아래쪽이 더 낫지 않느냐고 異論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장군봉의 정상은 지나치게 노출되어 장풍이 불리한 곳으로 과룡처이자 주필산일 뿐이다. 또 이승만 대통령의 묘 앞에서는 龍虎의 飛走와 案山의 허결함으로 더욱 불리한 곳이다.
駐蹕山者乃行龍暫止 (주필산이란 행룡이 잠깐 멈춘 곳이다.)

공사총책임자의 말에 의하면 후보지를 복수로 추천하지 않고 처음부터 이 터를 제시했다고 하는데, 그분들이라고 그 두 곳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國立墓地라는 제한된 조건에서 물의 직거와 한강의 충함을 피했으며, 용호의 노골적 비주가 보이지 않는 현재의 터가 최선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풍수가 여러 변수와 요인으로 인해 항상 최선을 고집할 수 없지만, 주어진 범위에서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若不得之正穴 埋向陽之藏風 (만약 정혈을 얻지 못했다면, 양지바르고 바람 잔잔한 곳을 찾아라)
끝으로 30년 전 박정희대통령께 육영수여사의 묘 자리가 나쁘다고 移葬을 건의하자 박정희대통령은 “이곳은 수많은 호국영령들이 잠 들어 있는 곳인데 이곳이 자리가 나쁘다고 어찌 옮겨 가겠는가? 나는 이곳이 나쁘다고 하여도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들과 함께 하겠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이곳의 풍수조건이 다소 미흡하더라도 인동초의 이념과 정치철학은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에 게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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