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레터쿠스
나는 국어선생이었다. 그러나 맞춤법이나 문법을 체계적으로 익히지 않았다. 그리고 체계적으로 가르치려 해본 적도 없다. 나는 그저 진실에 반응하고 심장을 때리고 영혼을 흔드는 한 문장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같이 맞춤법과 비문이 많은 국어선생도 없었다. 알면 고치지만 나는 애써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강조하지는 않았다.
소통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나 기타 문법규칙은 중요하지 않다는 게 내 기본 입장이다. 오히려 나의 몰인정한 문법적 잣대를 아이들에게 대는 것이 괴롭고 두렵다. 그래서 처음 아이들의 글을 교정할 때 가책을 느꼈다. 나중에는 업무와 타협해 익숙해져버렸지만. 여전히 나는 문법과목을 제일 싫어한다. 기준을 설정하고 거기에 맞지 않는 것을 틀렸다고 하고 고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폭력으로 느껴진다. 그건 틀린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런 것은 모르는 것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필요를 느끼지 않고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교사를 하며 제일 쉬운 게 바로 비문이나 맞춤법 따위를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 그럴 때 교사는 자신의 권위와 존재의미를 실감할지도 모른다.
자칫 교정은 아이들이 부탁하는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아이들의 표현의 즐거움을 억압하고 회피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너무나 빨리 옳은 것으로 바로잡으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대신 우리의 관심을 진실과 사랑에 두자. 일상생활의 문화 안에서 소통의 즐거움과 감동을 계속 만들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신문, 쪽지, 문자 뭐든지 상관없다. 사랑과 즐거움과 감동을 담아 글로 주고받고 그것의 필요가 많아지면 저절로 강화 된다. 위대한 작품은 서로 선물하고 나누자. 표준어를 조장하는 어설픈 교과서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궁극의 표준어와 맞춤법 교육은 일상생활의 풍성한 언어문화를 만드는 것 외엔 없다.
얼마 전 대관령에서 인터뷰를 하며 참 재미난 현상을 접했다. 강원도 산간의 벽난로인 고클에 대해 어떤 분은 코쿨이라고 하고, 어떤 분은 고쿠리라 하고, 어떤 분은 고굴이라고 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의 대상이 아니었다. 저마다의 생활경험과 느낌이 다르게 담겨 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어떤 유혹을 느꼈다. 내 안에서 그들의 말을 자동적으로 표준어로 변환해 기록하고자 하는 욕구였다. 이미 표준어에 대한 권위가 내면화되어 나는 무의식적으로 표준어의 권력을 생활어에 마구 휘두르고자 한다. 그래서 표준어가 아니고 맞춤법에 맞지 않는 것은 틀리고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웃음이 나온다. 뭘까? 내 안에 미묘하게 도사리고 있는 이 우월의식은. 글에서 진실과 마음을 표현보다 더 중요시하고, 맞춤법보다 진실과 이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온 내게도 깊게 내면화된 이 표준 문자의 우상을 뭐라 불러야 할까? 내가 싸워야 할 것은 오히려 우상화된 맞춤법과 표준어상이 아닐까?
글은 말을 옮긴 것이다. 하지만 글이 발달하면서 말과는 다른 글의 규칙과 스타일이 탄생한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문장으로 말하라고. 군대식으로 말하자면 ‘-다-까’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친구와 편하게 대화를 나눈 것을 녹음했다 문장으로 옮겨 보라. 말의 논리와 글의 논리에 미묘한 차이가 발생한다. 말은 파상적이다. 욕망과 연상에 따라 표현이 중단되고, 다른 것이 끼어들었다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같은 말이 두 번 세 번 심지어 수십 번 반복되기도 한다. 이걸 문장으로 옮기자니 가정된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전략으로 글의 논리를 구사하게 된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입말을 옮기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글로 익명으로 타인에게 생각과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 방편을 사용하게 된다. 이것이 문법이 발달하게 되는 요인이다. 말이 글로 변하면서 우선 반복을 생략하고, 주어와 목적어 같은 명사를 자주 등장시킨다. 말이라면 숨을 쉬기 때문에 당연히 쉼표가 많겠지만, 글에서는 의미로 압축해버리고 대신 문장의 마침표로 의미단락을 강화한다. 소위 문법규칙은 표현의 효율을 위해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표현이 역으로 문법을 발전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산스크리트어나 라틴어 독일어이 발전과 문법이 그런 예이다.
한 나라의 언어가 통일되고 발전하는 것은 과연 진시왕 같은 표준의 제정과 준수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위대한 작품에 기대인 것일까? 내 생각에는 후자다. 산스크리스트어나 라틴어가 위대한 언어였던 것은 표준의 제정과 준수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위대한 작품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의해 문법이 발전하고 표준이 제정되게 된 것이다. 문법학자들이 모여 합의하는 표준어 제정처럼 인위적인 문자의 권위화는 오히려 표현의 다양성과 새로운 가능성을 억압하여 언어를 빈곤하게 만든다. 독일어가 발전하게 된 것은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모두가 독일어로 된 문장을 읽고 저절로 독일어의 표준을 습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괴테 같은 문호나 칸트, 니체 같은 철인이 나타나면서 독일어의 장점과 가능성이 백배로 확장되고 표준이 자리를 잡았다.
진정 좋은 것은, 진정 감동적인 것은 저절로 따라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문구나, 최인훈이나 조세희 같은 이들의 글이 <바가바드 기타>, <성경>, <숫타니파타경>, <일리아드>, <국가> 같은 작품 같이 우리의 일상에 깊이 침투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문학을 호흡하며 그 언어의 어법과 표현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적용하게 될 것이다.
한 때는 온통 한자어투의 문자생활이 지배하더니, 그리고 일본어투의 문자생활이 지나가고, 영어투의 문자생활이 지배하고 있다. 더구나 책과 신문과 같은 출판물에 의거한 언어 전달 방식이 핸드폰으로 대표되는 문자교환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여기서 나타난 현상은 구어화이다. 마침표를 찍는 문장의 논리 대신, 호흡에 따라 짧게 짧게 말하는 파상적 문구의 양식이다. 논리 대신 호흡과 이미지다.
활자매체 문화의 산물이 전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고 전자매체 문화의 산물이 전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다. 문자는 시비의 대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과 감동을 담고 나누는 새로운 방식의 창출일 것이다.
무엇이 기준이란 말인가? 계급장 떼고 얘기하자는 말이 있다. 표준어가 가진 기득권 계급장을 떼고 얘기해보자. 인구수에 따라 표준어를 정한 것이니 적은 쪽은 포기하고 따르라고 할 텐가? 국가가 제정했으니 무작정 따르라고 할 작정인가? 이왕 그럴 바에야 한국어를 포기하고 중국어나 영어를 쓸 일 아닌가? 국가에 맹종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진실과 감동이다. 홍길동전을 맞춤법을 공부한 허균이 쓴 것은 아니다. 조선 여인들의 위대한 내간들이 맞춤법을 배워 쓴 것도 아니다. 그냥 ‘가갸거겨’ 배우고 읽고 쓴 것일 뿐이다. 간절하니 쓴 것이고, 간절해서 자꾸 읽히는 것이다.
읽고 쓰고, 쓰고 쓰라. 소통하라. 모방하고 싶고 반복하고 싶을 정도로 위대한 작품을 낳아라. ‘가갸거겨’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