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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0. 18~19.
1박 2일 한빛장애인후원회 경주문화체험 자원봉사.
후원회원의 한 사람으로 이번 문화체험에 동행하게 되어 회장님 이하 많은 자원봉사자들께 누가 되지 않았는지 몹시 걱정이 되었습니다.
파트너를 정하는데 내 파트너가 없다. 어? 이번 문화체럼에 동행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심 갈등이 많았습니다.
1호차나 2호차인 버스에 탔더라면 그래도 그런 마음이 조금은 사라졌을 텐데말입니다.
회장님과 운영위원 여러분, 자원봉사자 여러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챙기시고 몸을 아끼지 않은 헌신과 수고를 보았습니다.
참가한 장애우들이 너무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손길들,
행여 짝꿍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잠시 눈앞에서 사라지면 두리번거리며 찾아다니느라 땀을 흘리는 모습들도 보았지요.
여러분들의 헌신과 수고로 이번 문화체험이 무탈하게 잘 이루어졌음을 감사드리며 함께 참석할 수있게 배려해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이번 문화체험에 함께 하게 되어 이틀동안 고생하는 자원봉사자들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다녀온 소감과 후기를 메모한 것을 바탕으로 써봅니다.
어설픈 부분이 있더라도 이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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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아침 8시. 월드컵경기장 주차장 집결.
떠나기 전 회장님의 전하는 말을 듣는 식구들
장애우와 자원봉사자들100여 명이 탄 차들이 경주를 향해 오전 9시 10분경 출발하였다.
1970년 중학교 때 가을 수학여행길에 경주에 다녀간 후, 38년 만에 다시 찾는 길이라 많이 설레고 기대되었다.
남원휴게소, 지리산 휴게소, 거창 휴게소를 거쳐 평사 휴게소에 잠시동안 머물예정이라고 안내책자에 기록되어 있다.
첫번째로 남원휴게소에 잠시 정차하였다. 화장실에 다녀오고 차가운 커피였지만 서로 커피도 나누었다.
지하 암반수를 끌어올려 식수로 이용하는 약수터 시설 옆 항아리와 작은 단지들을 쌓아 놓았는데 눈과 입을 뚫어 놓은 항아리의 미소가 익살스럽다.
평사 휴게소에서 맛있는 점심 식사를 한 후 다시 경주를 향한다.
붉은 남천열매와 노오란 남천열매가 아름답다.
산야의 나무 숲엔 구름이 피어나는 듯 몽실몽실 단풍이 곱게 물들기 시작하였다.
들판에는 군데군데 아직 추수하지 않은 황금빛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농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첫 번째 목적지인 경주국립박물관을 향하여......
경주는 유네스코에서 '졍주역사유적지구'로 지정하였다.
5개 구역으로 나뉘는데 남산 지구는 불교미술의 진수가 펼쳐져 있고, 월성(반월성) 지구는 신라의 궁궐 터, 대릉원지구는 신라의 옛 무덤들이 모여있는 곳, 황룡사 지구는 거대한 절과 목탑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곳이며, 산성지구는 경주를 지키던 명활산성이 있다.
경주 역사 유적 지구와는 별도로 '석굴암'과 '불국사'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 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경주는 도시 전체가 세계의 전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 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경주로 들어서는 입구의 오른쪽으로는 금오신화의 탄생지인 금오산이 펼쳐지고 한참을 끼고 들어가면 '서라벌 광장'이라는 큼지막한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 땅 남동쪽에 진한이라는 나라는 작은 나라들로 이루어진 나라인데, 그 가운데 하나인 사로국에는 여섯 마을이 있었다.
여섯 마을 촌장들이 있었는데 알에서 나왔다 하여 '박'이라는 성과 세상을 밝게 비춘다 하여 '혁거세'라는 이름을 가진 박혁거세는 이 사로국에 '서라벌'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첫번째 왕이 된다. 이 서라벌이 바로 경주이다. 귀족들만 서라벌에서 살 수 잇었다고 한다.
첫번째 목적지인 '경주국립박물관'
선덕대왕신종(에밀레종, 봉덕사종) 앞에 다다랗다.
단체사진부터 한 컷.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실측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봉덕이라는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은 부왕(父王)인 성덕왕의 위업(偉業)을 추앙(推仰)하기 위하여 구리 12만근을 들여 이 대종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뒤를 이어 아들 혜공왕(惠恭王)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동왕(同王) 7년(771)에 이 종을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하였다.
이 종은 처음 봉덕사(奉德寺)에 받들어 달았으므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종을 만들 때 아기를 시주(施主)하여 넣었다는 애틋한 속전(俗傳)이 있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러 왔다. 봉덕사가 폐사(廢寺)된 뒤 영묘사(靈廟寺)로 옮겼다가 다시 봉황대(鳳凰臺) 옆에 종각(鍾閣)을 지어 보존하고 있었다. 1915년 종각과 함께 동부동(東部洞) 구박물관(舊博物館)으로 옮겼으며, 박물관이 이곳으로 신축 이전하게 되어 1975년 5월 26일에 이 종각으로 옮겨 달았다. 네번의 이사를 함.
산과 같이 크고 우람하나 조화와 균형이 알맞고 종소리 또한 맑고 거룩하여 그 긴 여운은 은은하게 영원으로 이어진다.
용은 잘 운다는 특징이 있는데 용을 무서워하는 고래를 종을 치는 도구인 당목(범종을 치는 나무)에 새겨 '포래를 때리는 고래'로 종을 치면 '왜 때려~어~엉 어~엉" 하고 우는 소리가 바로 종소리라고 하는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우리 모두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맥놀이 현상'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
맥놀이 현상은 주파수의 차가 근소한 2개의 파동이 간섭을 일으켜, 두 주파수의 차에 따라서 진폭이 주기적으로 변하는 합성파가 이루는 현상. 이를테면 동시에 전해 오는 두 음이 규칙적으로 강해졌다 약해졌다 하는 현상을 말한다. 두 파동체뿐만 아니라 한 파동체에서도 진동수가 부분적으로 다를 때에는 맥놀이현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범종(梵鐘)의 은은한 여운 같은 것인데, 이것은 재질이나 두께의 불균일, 모양의 비대칭성 등이 원인이 되어 종의 각 부분에서 다른 진동수의 소리가 나오기 때문에 생기는 맥놀이의 일종이다. 단 소리가 똑똑히 들릴 경우의 맥놀이주파수는 6∼7Hz 이하일 때이며, 그 이상이면 소리가 흐려 분간하기 어렵다. 또 두 주파수가 같으면 맥놀이는 사라진다. 이 현상은 이미 알고 있는 주파수에 의해 다른 미지의 주파수를 알아내는 데 이용된다. 전기적인 파동일 경우에는 이 밖에 주파수의 변환에도 이용되는데, 라디오의 헤테로다인 방식이나 수퍼헤테로다인 방식 등의 수신원리는 이를 응용한 것이다.
지금은 그 아름다운 종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다고 한다.
종소리를 녹음하여 하루에 한 번 들려준다고 하니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이제 박물관 안으로 이동.
고고관에는 '신라실 1'이라고 하여 별도의 전시관이 있다. 전시관 입구에는 '반구대 바위그림'이 벽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바위에 새긴 소망'
경상남도 울산광역시 울주군에 가면 '반구대'라고 하는 바위 절벽에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이 반구대 바위 그림을 탁본으로 떠서 전시하고 있다.
* 바위 그림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
*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울산지역에서 고기잡이와 사냥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사냥의 풍성과 다산을 기원해서 새겼을 것이라고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떠올려본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천마총 구조모형 등 다양한 보물들이 그득하다.
'황금의 나라 신라' 라는 문구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금드리개(귀걸이와 비슷하나 길게 늘어뜨린 장식용으로 용도가 다름), 금그릇, 은그릇, 금굽다리 접시(5세기) 금관모, 나비모양금관식, 목걸이(요즘 세공하는 이들도 당시의 목걸이를 재현해 내지 못한다고 한다. 신기의 경지에 이른 보물들이라는 해설사의 말을 귀동냥으로 들었다), 팔찌, 새날개모양금관식(6세기 보물) 등.
이 새날개모양금관식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듣기 위해 귀를 세우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며 보며 메모하는데 일행과 멀찌감치 뒤떨어진 마음은 콩닥콩닥, 해설사의 설명이 좀 빨랐으면 하는 바람이다.
바닥을 발로 쳐서 울리니 새날개모양금관식의 장식이 아주 작은 떨림으로 반짝이는데 그 아름다움을 렌즈에 담을 수는 없다. 눈이 아니면 보고 느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보물이란 이런 건가 보다.
다음으로 '가슴걸이' 를 감상하였다. 금과 까만 옥구슬만 남아있다. 끈은 삭아서 없어지고 그 형태 그대로 발굴당시를 재현하여 전시해 놓았다. 옥은 자식, 아들을 뜻한다고 한다.
금관을 머리에 쓰고 마스크처럼 금으로 목을 감싼 후, 금가슴걸이를 하고, 금허리띠로 다리까지 장식을 한 후, 금동신발을 신었다고 한다. 금허리띠에는 작은 장식품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모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쇠부터 물고기(다산 상징), 칼을 가는데 쓰는 숫돌까지 온갖 것들이 달려있다. 목욕을 잘 하지 않았던 신라인들은 금허리띠에 몸에서 나는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향낭(향주머니)까지 달고 다녔다고 한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금으로 장식을 했다고 하는 신라인, 과연 황금의 나라 신라인 다운 모습이었겠다.
다음 전시관에서는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모아 전시해 놓았는데 천년이 나무배가 있다. 동물들의 뼈와 철재 장신구들, 마구들, 사람이 들어가서 양식을 퍼올리지 않으면 안될 커다란 항아리가 있는데 그 곳에 양식을 보관하였다고 한다.
일행과 뒤쳐진 나는 또 발걸음이 빨라진다. 뛰다시피 일행의 뒤를 쫓는다. 미술관을 모두 관람했는지 아니면, 그냥 나가는 길인지 썰물처럼 모두 빠져나가고 저만큼 연두빛 조끼를 입은 이가 몇몇 눈에 띈다.
여기까지 왔는데 미술관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조금 늦더라도 후회없도록 둘러보고 가야 직성이 풀리지 않겠는가.
잰걸음으로 미술관을 향하였다.
바쁘지만 모형탑인 다보탑과 석가탑도 핸폰 카메라에 담고.
미술관 앞 국보 20호인 다보탑(모형)
국보 21호 석가탑(모형) - 박물관 쪽을 배경으로 찍음
미술관에 들리지 않고 그냥 지나쳤더라면 대단히 후회했을 것이다.
미술관에는 불상들만 있는 게 아니고, 신라 불교미술의 대표급인 갖가지 불상들과 함께 한쪽에 다소곳이 모셔져 있는 '이차돈 순교비'를 만날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법흥왕이 이차돈신부의 목을 베었을 때, 붉은 피가 아닌 하얀 유윳빛 피가 솟구쳤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얘기를 말로만 전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한 컷 남기고 가야 아이들에게 들려줄 꺼리를 만들지 않겠는가. 하여 한 컷을 부탁.
국립경주박물관 內 미술관의 이차돈 순교비
이 비는 이차돈이 순교한지 290년이 지난 후에 세운 6면으로 되어 있는 비석이다. 5면에는 글씨를 새겼으나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힘들고 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돋을 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순교 장면은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는 흰 피가 솟아 오르고 왼쪽 아래에는 잘린 목....... 이차돈의 머리에는 고깔같은 모자를 쓰고 저고리는 무릅아래까지 내려왔으며, 바지는 현대 여성들의 바지 모양을 하고 있어 당시 신라인들의 복식 문화를 알 수 있다.
불교가 신라에 전개되었을 때 신라의 귀족들은 불교가 서역에서 전래된 사악한 종교라 여기고 불교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반대를 하면서 절이 지어지고 불교가 전래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다. 이에 법흥왕과 이차돈은 절을 짓기로 하였다.
이차돈의 의견에 따라 이차돈이 왕명을 어기고 절을 지으려 했다는 죄목으로 이차돈을 죽이려는 계획을 하였다.
이차돈은 "제가 죽으면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이고 이를 본 귀족들이 왕의 명을 쫓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머뭇거리자 이차돈이 자신을 죽일 것을 또 청하였다. 이윽고 이차돈의 목을 베자 그의 목에서는 흰 피가 솟구치고 솟구친 피가 꽃비가 되어 흩어졌다고 한다.
이에 신라의 귀족들이 왕에게 굴복하고 신라에는 불교가 퍼져나갔다고 한다. 이후 이차돈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긴 사람들이 이차돈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절을 짓고 비석을 세워 그 뜻을 기렸다고 한다. 이 절이 자추사로 현재의 백률사이다.
-출처 : 네이버
미술관을 나오며 출입구 위쪽 쳐다보니 에밀레종 문양이 걸려 있고, 그곳에서 나와
미술관 옆을 바라보니 탑신들이 즐비하다. 호기심 발동, 확인하고 가야겠다.
미술관 한 켠에 놓인 고선사터의 탑신들
- 올려놓은 탑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덩그라니 탑신들만 남았을까?
고선사지 삼층석탑 - 탑신들 옆에 외로이 서 있다.
고선사(高仙寺)는 삼국유사에 원효대사(617~688)가 머물던 절이라는 기록이 있다.
미술사학자인 우현 고유섭(1905~1944)선생에 따르면 1914년 5월 이 삼층석탑이 있던 주변에서 원효대사의 비석인 서당화상비 조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삼국유사의 기록이 믿을만 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1975년 고선사터가 덕동댐 건설로 물에 잠기게 되자 이 탑을 비롯한 여러 문화재가 이곳 박물관으로 옮겨져다는 기록이 있다.
감은사터 삼층석탑과 너무나 흡사하다고 하여 쌍동이 탑이라고 할만 하다고.
2단으로 된 기단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 노반까지의 높이가 10.1미터, 82장의 돌로 이루어졌다는 것 등이 똑 같으나 다만 고산사터 몸돌에 문(가운데 창문 모양)을 표현한 점이 다를 뿐이라고 한다.
미술관쪽으로 석등도 한 컷.
이 석등은 통일신라 석등 중 가장 큰 석등일 것이라고 추측된다는 설명이다.
일부만 남아있어 복원하여 제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원래 있던 소재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고.
석등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읽어보니 등공양을 한 이는 죄가 없어진다고 하는 부분을 읽으니 초파일에 연등행사를 하는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복을 빌고 죄를 없이하고 죽으면 도리천(천국)에 가는 길잡이가 바로 석등이라. 의미가 깊다.
대웅전 부처님과 석등은 일직선상에 놓인다는 것도 한마디 덧붙인다.
수박 겉핥기 식이지만 이렇게라도 경주국립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아직 출입구에 나오지 않은 몇 사람을 기다리느라 모두들 기다리고 있다. 내가 타고 온 차를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버스 옆 어디쯤에 있겠지 하고 찾아보는데 없다. 이윽고 인원점검을 마친 버스 두 대가 모두 출발한다.
왠지 불안하다. 다른 작은 차도 출발하였는데 내가 탄 차만 보이지 않는다.
차 넘버를 외워놓지 않다니...... 이런 낭패가. 하는 수 없이 회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두 번의 통화 끝에 차를 발견하였다.
눈물 날 뻔 했다. 분명히 주차해 둔 곳을 두어바퀴 돌았지만 발뎐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음번엔 주차 확인 꼭 해야지.
(회장님, 1300년 전 신라땅 서라벌에 저를 버리고 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죄송 만땅입니다)
겨우 차를 탔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 목적지는 '대릉원-천마총'.
청-화랑(남)
홍-화랑(여) 입구에 있는 화랑과 한 컷.
원래 화랑은 여자였다? 진흥왕이 화랑을 뽑았는데 원래 화랑은 여자들이었다.
근거 삼국유사'에 화랑이 한자로 花郞'이 아니라 花娘'(郞은 남자, 娘은 여자의 뜻)으로 기록돼 있다.
처음에 청년들을 이끌 지도자로 '원화'라는 여자들을 뽑아 훈련을 시켰는데 원화들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고 뽑힌 원화를 죽인 경쟁자 여인도 결국 죽었다. 그 후 여자를 뽑지 않았고 남자 화랑을 뽑았다고. 국선화랑 1~2명, 그 아래 14~18세 정도의 화랑이 3-8명 정도, 그 아래 낭도가 수 백 혹은 수 천명씩.
국선화랑과 화랑은 집단의 친화를 유지시킬 수 있는 지도력을 지닌 자로서 반드시 귀족 출신이어야만 했다. 낭도는 계급을 불문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의 화랑도 조직은 신라의 귀족사회와 평민사회를 연결하는 교량적 역할을 담당했던 셈.
천마총을 향하여......
먼저 천마총 발굴에 관하여 설명을 들었다.
대릉원 안에는 고분이 23개가 있다. 그 외에도 많은 고분들이 있었겠지만 평지가 되었고, 이 곳에 있는 능이 모두 왕릉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능 하나하나가 작은 동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규모가 매우 웅장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석물장식이 하나도 없다. 신라시대에는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어 무덤안에 많은 부장품들과 심지어 양식까지 넣어 장사를 지냈으나 겉은 無장식이다.
후세로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무덤의 내부 장식보다는 외부장식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나보다.
우뚝우뚝 세워놓은 석물들이 집안의 체면과 위엄을 상징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오늘날의 현실이다.
화장 문화의 발달로 장례문화가 좀 변화되어가나싶었건만, 가족묘라고 하여 이젠 아예 석물로 집을 지어 집안 대대로 그곳에 납골로 안치하는 장례문화가 성행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무덤안에 후손들이 자랑스러워할 유물들을 고이고이 넣어 두었지만 무덤 밖엔 단순한 석물 하나 표시석 하나 세우지 않았다.
요즘 현대인들은 어떤가?
내부엔 단지에 담긴 타다남은 뼛조각을 신주단지 모시듯 담아놓았다. 그 안에 유물, 보물 한 점 넣어두는 예가 있는가?
겉은 또 얼마나 화려한가. 백년, 천년이 지나도 풍화작용에 의해 씻기고 흩어지지 않으면 영원히라도 사라지지 않을 매끄러운 대리석으로 치장을 하고 그 안에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아들 손자 며느리 모두 들어앉아 있을 것이 아닌가.
무덤 겉에 좌 우는 물론이고 무덤 앞에 덩그라니 상까지 놓아 뼈대있는 대단한 가문의 집안이라는 듯 그 앞을 지나는 이들의 기를 죽인다.
현대의 장례문화는 반드시 달라져야 한다.
내로라하는 뼈대있는 집안에서는 이미 설치한 납골묘 안에 화장한 뼛가루와 함께 후손들이 두고두고 우려먹으며 살아갈만한 온갖 진귀한 보물들로 그 안을 가득 채워두는 것은 어떨까? 천 삼백여년 전 신라인들처럼 말이다.
혹여라도 이 다음 우리 후세들이 그 납골묘를 열어보았을 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뼛가루 한 줌만 덩그라니 남겨두지는 말 일이다.
이곳 대릉원에는 천마총, 미추왕릉, 황남대총이 있는데 규모가 작은 천마총을 먼저 발굴하였다고 한다.
다음으로 더 큰 황남대총을 발굴했는데 무덤에서 나온 유물은 천마총에 나온 유물이 훨씬 의미가 있는 유물들이었다.
3만여점이 나온 황남대총의 유물들은 천마총 유물만 못 했다.
왜 평지에 무덤들을 만들었을까?
인구수가 적었을테니 굳이 시신을 높은 산에 장사지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신라 후기에는 높은 산으로 무덤들이 올라갔다.
천마총 내부로 들어가다.
무덤내부의 토층두께가 5.0m 점토층이 0.2~0.3m
이곳에 있는 진품 유물들은 모두 경주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이곳은 모형을 전시해 놓았다.
굽은옥은 축복과 탄생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금으로 만든 관도 있다. 금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모두 왕관은 아니라고 한다.
금허리띠 등 박물관에서 보았던 유물들 모형을 볼 수 있었다.
시신이 놓였던 자리를 보며 누군가 키가 아주 작은 숏다리였나보다고 하여 자못 엄숙해야 할 천마총 안에서 우린 한바탕 웃고 말았다.
이렇게 오늘 낮 일정이 끝났다.
아니 저녁 식사 후 첨성대와 안압지에 가기로 되어 있어 일단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해야 했다.
저녁식사를 하기 전 이삼 십분 동안 레크리에이션이 진행 되었다.
율동과 노래 게임이 어우러진 신명나는 잔치가 한바탕 벌어졌다.
레크리에이션이 진행되는 동안 집행부에서는 연등을 만들기 위해 식당으로 모였다.
철재 등모양에 종이 옷을 입히는 작업이다.
재단된 종이 위에 풀을 칠하고 분홍과 하늘색, 흰색 종이로 하나하나 등을 완성해갔다.
이윽고 등이 완성되고 손잡이를 달아 한 곳에 모아 놓고 식사시간이 되어 모두들 저녁식사를 맛있게 하였다.
저녁 7:30분까지 탑승하라는 안내에 따라 버스를 타고 안압지를 향했다.
목적지에 다다라 등에 하나 둘 불을 켰다.
성질 급한 친구들은 불을 켜면서 소원도 미리 빌었을까?
손에손에 등을 들고 길다란 행렬이 이어졌다.
첨성대 앞에 다다랐다.
야간 조명에 신비감을 더하는 첨성대, 우스갰소리로 선덕여왕의 몸매를 본떠 만들었다고 했던가.
별을 관측하던 곳, 어떤 학자는 첨성대가 제사를 모신 '제단'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건 하나의 설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역사를 뒤집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까.
학교에서 학습 하였던 대로 나는 첨성대를 천문관측소라 하고싶다.
첨성대는 피사의 탑처럼 북쪽으로 0.5도 기울어졌다고 한다.
안을 거칠고밖은 매끄러운 편이다.
6.25 때 첨성대 바로 뒤로 도로가 났는데 지반침하로 기울어졌으며, 기운 그대로 개.보수를 전혀 하지 않고, 도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 다시 길을 냈다고 한다.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경주시민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는 안압지를 찾았다.
서울시립 교향악단의 연주가 한창이었다. 몇 곡 듣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한밤에 펼쳐지는 국악의 향연,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야경이 정말 아름답다는 말을 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과연 내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임해전지(臨海殿址)는 통일신라시대 별궁 안에 있던 곳으로, 이 안에는 임해전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건물과 정원이 있었다고 한다.
못 이름은 원래 월지(月池)라 하였는데, 조선시대에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어 안압지(雁鴨池)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 문무왕 때(674년)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들을 길렀다고 한다.
경순왕 때(931년)에는 고려 태조 왕건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군신들의 연회나 귀빈 접대장소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컷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복원된 건물을 모형으로 전시해 놓음.
카메라에 담은 것보다 눈으로 본 야경은 훨씬 더 운치있고 멋이 있다.
현재 안압지(雁鴨池) 서쪽 호안(護岸) 위에 누각(樓閣)과 정자(亭子)같은 3동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이 건물의 평면과 주칸은 신라의 건물 그대로이다.
동궁의 건물사이로 물이 흘러가는 석조(石造)의 수로(水路)를 설치하여 특이한 조경을 하였다.
신도나 무산(巫山) 12봉(峯)을 조성한 것을 보면 신선사상과 연관성이 있고 신선의 세계를 조영(造營)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안압지(雁鴨池)는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땅속에 묻혀있었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변형되지 않고 통일신라의 고유한 조경양식을 원형대로 잘 보존하고 있는 동양의 명원중 하나이다. - 출처:네이버
이렇게 오늘 하루 일정이 모두 끝나고 숙소로 돌아왔다.
모두들 피곤했던지 눕자마자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와 한 방을 쓰게 된 박선임님, 정참님, 임준희님, 모두가 오랫동안 사귀어 온 친구처럼 편안하다.
넷이서 한 방을 쓴 기념으로 사진이라도 한 컷 남길걸 그랬다.
내일은 석굴암과 불국사에 간다고 하니 안내 책자를 다시 한번 읽고 잠자리에 들어야지.
낮에 못 다한 메모도 끄적이고......
2008. 10. 18(토). 경주에서 첫 밤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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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삐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행복한 날 되십시오.
좋습니다. 모든 행사마다 초청 해야 할것 같습니다.
쑥스럽습니다. 어여삐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날 되십시오.
연세가 52~53 ㅋㅋ 38+15=?
^^* 미소로 답하겠습니다. 사학년 중반이랍니다.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우~~~아 나 지금 경주에 있는것 같아.ㅋㅋㅋ너무나 좋아요.그리고 고마워여.아우님 나중에도....???ㅋㅋㅋ
왕언니님의 그 아름다운 헌신과 사랑은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겁니다. 보는 이가 편안하고 행복하답니다. 어여삐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처님의 자비 충만한 날 되소서.
이글을 읽고 있으니 왠지 행복해지네요.... ^.^
고맙습니다. 그 행복 저도 조금 나누어 가지겠습니다 .좋은날 되십시오.
남점순 선생님 어쩜이렇게 글솜씨가좋으시고 예쁘게 그려놓을수가있을까요 부럽습니다 수고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