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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에 지는 사람 2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함이 오면 사실대로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다음에 함께 걱정할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정휴 일행은 타버린 <홍연진결>에 대한 걱정으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송도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황진이가
홀연히 산방에 찾아왔다.
"저어, 박지화 선비님을 찾아왔습니다."
박지화가 놀란 얼굴로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천하의 황진이가 그를 찾아왔다는 것이
믿겨지지않는다는 듯
황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지함 선비께서 지금 임꺽정이라는 산적에게
잡혀있습니다.
산적들은 저를 먼저 풀어주는 대신에
이선비를 잡아놓았습니다.
곧 계책을 써서뒤따라오시겠다고 했지만
걱정이 되어서 왔습니다."
황진이는 초췌한 행색이었다.
옷은 해지고, 얼굴은창백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오히려
그의 아름다움을 더 해주는 것 같았다.
전에 보았을 때는
양반가 후원에 피어 있는 화사한 모란 같더니,
지금은들에 피어 있는 한 떨기 들꽃마냥
청초해 보였다.
"이지함을 만났소?"
"예. 한동안 같이 다녔습니다."
"그래요?"
"그러다가 구월산에서 저 먼저 내려오는 길입니다.
이 선비는 여드레까지 산방에 오지 않으면
박지화선비께 말을 전해도 된다고 했는데,
제가 마음이 급해미리 왔습니다."
"내 당장 놈들을 요절내야지."
박지화가 흥분하여 분기를 돋구자
황진이가 손을저어 말렸다.
"고정하십시오.
이 선비께서 여드레가 되기전까지는
걱정 말라고 하셨습니다."
"걱정을 말라니요,
어떤 고초를 겪고 있을지모르는데..
당장 가서 구해야 합니다."
"며칠만 더 기다려 보시옵소서.
소녀,물러가옵니다."
이야기를 마친 황진이는 다시 산방을 떠나갔다.
박지화는 지함이 걱정되어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쩌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릴 수밖에없었다.
박지화가 좌불안석이 되어 초조하게 기다리는 동안
어느새 여드레가 되었다.
화담 계곡에는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이미 춘분이 열흘여 지난 뒤라
봄빛이푸룻푸릇해졌다.
하늘에는 종달새가 높이 날고 나비가
나풀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 가자 박지화는 오기는 다 틀렸다며
더욱 불안해 했다.
난 선생님 묘에나 다녀오겠소."
지함이 돌아오지 않으면 날이 밝는 대로
당장구월산으로 달려갈 기세로 박지화가 말했다.
드디어 화담이 말한 유시(酉時)가 되었다.
"저길 보게. 선생님 말씀이 틀림없잖은가!"
계곡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는 사람은 틀림없는
지함이었다.
처음에는 아지랑이가 아른거려서
얼굴이잘 보이지 않았지만
정휴는 곧 그가 바로 지함이라는것을 알아차렸다.
"형님!"
정휴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 지함을 맞았다.
"자네가 여기 웬일인가?"
지함이 환히 웃으며 정휴의 손을 잡았다.
"작년, 형님이 길을 떠나신 직후에 금강산을 떠나
여기에 도착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예 있었단 말인가?"
"화담 선생님을 뵙고는 다시 공주 용화사로
갔습니다."
지함은 화담이 보이지 않는 것에
그다지 놀라는기색이 아니었다.
전우치와 남궁두를 가리키면서
누군지를 물을 뿐이었다.
"예, 계룡산에서 수도하던 도인들인데
산방 소식을듣고는 저를 따라왔습니다."
"화담 선생님은 이미 선화하셨는데, 늦으셨구려."
"아닙니다. 이지함 선생님의 고명을 듣고왔습니다."
"내게도 고명이라고 할 만한 이름이 있소?"
"형님, 전우치는 병법에 남달리 관심이 많은데
지리, 천문을 더 배우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남궁두,이 사람은 역학을 오래도록 연구하여
제법 앞길을 볼줄 안답니다."
"볼 줄만 알아서는 술(術)에 머물게 되오.
그런술을 잘못 쓰면 안 배우니만 못하다오."
"그래서 감히 가르침을 청하러 왔습니다."
두 사람이 지함에게 큰절을 하면서
제자로서 예를올렸다.
"병법에 관심이 있는 것은 그럴 듯합니다만..."
지함이 전우치를 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지함은 지리산 산천재에서 만난 다른 두 사람을생각했다.
정개청, 서치무. 그리고 정휴를 따라 나타난 두 사람,
전우치와 남궁두. 이들 모두가
화담이 불러모으는 인연임에 틀림없었다.
지함은 두 사람을 산방에 입실토록 했다.
그때 박지화가 화담의 묘소에서 돌아왔다.
"지함, 용케 돌아왔군. 반갑네, 반가워.
그래, 몸은무사한 거고?"
"잘 다녀왔습니다. 형님, 건강은 어떠십니까?"
"많이 좋아졌네. 그건 그렇고, 그래 어떤
도적떼에게 잡혀 있었나?"
박지화는 지함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며칠째 굳어있던 얼굴을 폈다.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도적의 무리라고해야
헐벗고 굶주린 유랑민들이 대부분이어서
포악하기는 하나 기운이 약하지 않습니까?"
"자초지종을 말하게. 답답하이."
"구월산 근처 안악을 지날 때 마침 날이 어두워
어느 양반가에 잠시 몸을 의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날 밤에 도적들이 몰려와
그 집 재산을다 털어갔습니다.
이 도적들이 객방을 들여다보더니
황진이를 보고는 얼굴이 반반하다고 생각했는지
산채로 끌고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이튿날 제가 산채로 달려갔습니다."
"제발로 도둑의 소굴로 들어갔다고?"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개마산에서부터 쭉함께 다닌 여잔데
목적지까지 무사히 데려다주어야지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박지화, 정휴, 남궁두, 전우치는 귀를 바짝 세우고
지함의 무용담을 들었다.
지함은 도적들이 숨어 있다는 구월산으로
단신잠입했다
그러나 산채에 들어가기도 전에
도적들에게 붙잡혔다.
도적들은 사냥에서노획한 산짐승 다루듯
지함을 산채 마당에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지함을 새끼줄로 꽁꽁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들리더니
도적 한떼가 산채 마당으로 들이닥쳤다.
지함이 쓰러져 있는 쪽으로 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인두(人頭) 세 개가 툭 떨어졌다.
"하하하하."
벽력 같은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도적떼의우두머리가 말등에 올라탄 채
손에 묻은 피를바지춤에 썩썩 문지르며
껄껄 웃고 있었다.
그는몸집도 거한인데다 눈알이 부리부리하여
과연 도적의수장다운 면모가 있었다.
"네놈들은 무얼 털어왔느냐?"
"예, 안악의 양반집을 털어 쌀 닷섬하고
금 한 관을빼앗았습니다.
그리고 두목이 좋아하는 물건도가져왔습니다."
"그게 뭐냐?"
그러자 졸개들이 나무를 엮어 짠 창고로 들어가더니
한 여인을 끌고나왔다.
황진이였다.
황진이와 지함의 눈이 마주쳤다.
황진이는 지함이그곳에 묶여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곧이어 황진이는 얼른 시선을 거두어갔다.
아는 체를하면 지함에게 해라도 끼치게 될까봐서였다.
"핫핫핫. 물건 하나 제대로 골라왔구나.
어디보자."
두목이 말에서 내리더니
황진이의 저고리 고름을 꽉움켜쥐고 단숨에 잡아뜯었다.
그러자 하얀 젖무덤이봉긋 튀어나왔다.
"그 여자한테 손대지 마랏!"
지함이 소리를 질렀다.
"뭐얏! 이 녀석이 어느 안전에서 발악이야. 죽고싶어?"
졸개 하나가 지함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욱!"
"더러운 양반 새끼! 백성들에게 들러붙어 피땀이나
빨아 쳐먹고 사는 거머리!"
졸개 몇이 더 달려들어 지함을 마구 짓이겼다.
"왜 이리 소란한가?"
그때 산채 쪽에서 노인 하나가 걸어나오면서물었다.
몸집이 작고 깡마른 사람이었다.
그러자 두목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사부님, 돌아왔습니다."
"수고했네.
그런데 이자들은 왜 여기까지끌고왔는가?"
"저년을 잡아왔다는데 이놈이 제발로기어왔습니다."
"당장 죽이지 않고?"
"조금 더 있다가 두 연놈을
한꺼번에 죽여 없애겠습니다."
두목이 졸개를 불렀다.
"얘들아, 이놈은 나무기둥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저년은 찬물에 헹궈서 방에 던져넣어라."
"예."
졸개들이 두 패로 나뉘어
지함과 황진이에게 우르르달려들었다.
곧 지함은 나무기둥에 거꾸로 매달리고,
황진이는 계곡 쪽으로 끌려갔다.
졸개들이 황진이를끌고
왁자지껄 떠들면서 사라지자
사부란 자가두목에게 말했다.
"화담 소식은 알아봤는가?"
"예. 벌써 작년 봄에 죽었답니다."
"죽었다고?"
"예. 틀림없습니다.
송도 사람들은 다 알고있던데요"
"할 수 없군."
화담이라는 소리에 지함의 귀가 번쩍 열렸다.
"화담 선생을 말하는 자, 나 좀 보시오."
돌아서서 산채쪽으로 걸어가던 사부란 자가
우뚝멈추어 섰다.
"화담 서경덕이라면 내 스승인데,
그대는 누구시오?"
"화담의 제자라고?"
"그렇소.
작년에 화담 선생님을 모시고 팔도를주유했소."
"뭐라고?"
"지난해에 화담 선생과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경상도까지 함께 다니다가
선생님은 경주에서 송도로돌아가시고,
난 계속 주유를 했소."
"핫핫핫.
저놈이 모가지가 아까워 말을꾸며대는구나
이보게, 임꺽정.
화담은 틀림없이 작년봄에 죽었겠다?"
"옛. 화담 선생은 작년 사월에 죽었답니다."
"그런데 팔도를 주유했다고?
"이놈이 거짓말을 하고있는 것이렷다!
지체말고 저놈의 목을 치게."
"바쁠 것 없습니다."
그때 계곡으로 끌려갔던 황진이가
졸개들의 어깨에들려 올라왔다
물에 흠뻑 젖어 덜덜 떨고 있었다.
"그년을 방에다 집어던져 이불로 덮어놓거라."
졸개들이 황진이를 들고 산채로 들어가자
사부란자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가더니
못마땅한 목소리로말했다.
"저 년도 목을 잘라야 하네."
"아무렴요."
임꺽정이라는 두목은 허리춤을 풀면서
산채로뛰어들어갔다.
한낮이 되어서야 두목이 방에서 나왔다.
사부란자는 그때까지 마당에서 조바심을 내며
서성거리고있다가 두목을 채근했다.
"자, 빨리 연놈들을 처형하고 풍천, 율은 쪽으로가세."
"사부님. 급하실 것 없습니다.
이놈은 며칠 더여기다 잡아놓았다가 쓸 데가 있습니다.
그리고저년은 본시 기생이라니 살려보내야겠습니다."
"살려둔다고?"
"예. 기생까지는 죽이지 않겠습니다.
양반놈들모가지만 자르기로 맹세했잖습니까?"
"끄응."
사부란 자가 불편한 심기를 참지 못하고 신음을냈다.
곧 황진이가 방에서 나왔다.
그러자 황진이를 본두목이
졸개를 시켜 지함의 결박을 풀라고 했다.
"이 선비님. 저를 구하시겠다고 여기까지
오셨더랬나요?"
"그렇소."
"제가 선비님을 두목에게 잘 말해 놓았으니
일단염려 놓으십시오.
저는 양반이 아니라고풀어준답니다."
"알았소.
내가 여드레까지는 송도로 돌아갈 수 있을것이오.
그렇지 않거든 박지화 형님께 전갈을하시오."
"명심하겠습니다."
두목은 졸개 하나를 붙여주며
황진이를 산아래마을까지 내려다 주고 오라고 명령했다.
황진이가 산채를 내려가자 두목이 지함을 불렀다.
산채로 들어가 마주 앉은 두목은
지함에게 정중하게용서를 구했다.
"몰라 뵈서 미안하오.
그러나 화담 선생은 분명작년 봄에 돌아가셨다니
그 이야기는 하지 마소.
그여자 방중 솜씨에 반해 내가 그대를 살려주기는했소만
우리 사부에게 밉보이면 큰일나오. 알겠소?"
"사부란 사람이 누구요?"
"정해량(鄭海良)이라는 도사요.
김종직의문인이었는데
무오사화 때 유배갔다가 도망쳐
그뒤로쭉 도가 수련을 하신 분이오.
화담 선생하고는 잘아는 사이라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도적의 소굴에 있느냐 이거지요? 핫핫핫.
그건 내 사부에게 물어보시오.
나같이 무식한 산도적이 무얼 알겠소?"
두목이 껄껄 웃더니 밖으로 나갔다.
곧 사부란 자가들어왔다.
"자네, 바른 대로 대게. 누군가?"
"난 화담 산방의 학인이오.
알아보고 나서 사실이아니면 죽여도 좋소."
"흐음."
"그런데 노사께서는 왜 그렇게 사람 죽이는 것을
좋아하시오?"
"..."
"무오사화 때 당한 것을 양반들한테 분풀이하시는겁니까?
힘이 없으니까 무지몽매한 도적떼를 꼬드겨서
양민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는 것이오?"
"함부로 말하지 말게.
자네 목숨은 내 손에 달려있다는 걸 모르나?"
정해량은 위압적으로 칼을 뽑았다.
"그만두시오. 노사께서 무얼 바라는지 알고 있소.
도적떼를 길러서 장차 역성 혁명을 꾀하려는 것일터!"
"뭣이?"
정해량이 칼끝을 지함의 목에 대었다.
"백성들이 잘 살 수 있게 된다면
역성 혁명인들마다하겠는가?
이 나라가 지금 백성이 살 수 있는나라던가?
조선 천지가 굶어 죽는 백성 투성인데
양반이란 자들은 얼굴에 개기름이 줄줄 흐르고,
배가튀어나와서 잘 걷지도 못하는 형편 아닌가."
"그러면 양반만 죽이면 나라가 잘 된다는 말이오?
노사의 꿈은 무엇이오?
역성 혁명이 아니라면 한낱 산도적일 터!"
"그만하게. 내 나이 이제 오십이 넘었으니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 이제서 무엇을 도모하겠나?"
"분풀이라면 잘못 하고 있는 것이오.
하려거든정말로 백성 편이 되어 하시오.
도적이 아니라 군대를기르시오."
"무엇이? 자네가 내게 역성 혁명을 가르치려는가?"
"저 두목의 사주를 대주시오."
지함이 워낙 단호하게 말하자 정해량은
두목인임꺽정의 사주를 대었다.
"군사를 일으킬 만한 재목이오.
장차 기미년에군사를 일으키면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경기도
일대를 모두 장악하게 될 것이오."
"그것 참 반가운 말씀이오."
"그의 운수는 그렇게 시작해서 삼 년은 갈 터이니
그것을 잘 쓰시오."
"너무 짧소이다
하기야 삼 년씩이나 끌 일이 아닐터..."
"노사께서 사사로운 원한만 청산한다면
정말로 좋은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오이다.
이대로 두면 앞으로도 저자는 사람만 죽이고
재물이나 빼앗는 도적의 무리로남을 것이나,
노사께서 가르침을 주신다면 의적이되거나
백성들이 기다리던 군주가 될 수도 있을것이오."
그러자 정해량은 칼을 거두어 칼집에 도로 넣고는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장차 기미년이 되어 노사의 뜻이 바로 선다면
내가임꺽정을 도울 군사(軍師)를 한 명 보내든가
내가오든가 하겠소."
고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