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8월 9일 나운규가 세상을 떠났다. 나운규는 1919년 기미독립운동 참여 후 간도로 망명, 독립 무장 결사 도판부圖判部에 입단해 무산령 터널 폭파 지령을 하달받기도 했다. 그 일로 나운규는 피체되어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했다.
1923년 출소한 나운규는 1925년 〈운영전〉에 단역 배우로 출연했고, 급기야 1926년 〈아리랑〉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고 배우로 출연도 했다. 당시 조선인들은 〈아리랑〉을 민족주의 정신이 담긴 새로운 기법으로 영화로 인식하여 환호했다.
나운규의 몰락은 1931년 일본인 도전장島田章 감독 영화 〈금강한金剛恨〉에 출연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조선인들은 이 영화의 대본을 각색하고 배우로 출연도 한 나운규에게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금강한〉은 줄거리가 처참하다. 아내가 있는 부잣집 아들 색마가 시골마을의 순진한 처녀를 유린해 임신시킨다. 처녀는 자살하고 색마는 다시 아내에게 살해당한다. 〈아리랑〉의 나운규가 이런 저질의 영화에서 중요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에 당대 조선인들은 민족적 모욕감을 느꼈던 것이다.
8월 9일은 헤르만 헤세의 기일이기도 하다. 1962년 헤세는 스위스 몬타뇰라에서 타계했다. 고향이 남부독일 뷔르템베르크 칼프인 헤세가 어째서 스위스에서 세상을 떠났고, 사전에 남겨둔 유언에 따라 그곳에 묘소까지 마련하였던 것일까?
칼프 사람들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헤세를 자랑스럽게 여겨 기념 조형물을 만드는 등 정성을 보였다. 하지만 헤세는 54세이던 1931년 출향 이래 85세로 별세할 때까지 3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칼프를 찾지 않았다. 1919년 시작된 독일노동자당(나치당 전신)을 너무나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고향사람들의 행태를 도저히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8월 9일은 닉슨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직을 중도에 그만둔 날이기도 하다. 닉슨은 상대 정당 행사를 도청한 ‘워터게이트 사건’에 휘말려 임기 종료 전에 백악관을 떠났다. 그는 도청에 자신은 전혀 연루되지 않았다고 줄곧 거짓말을 하다가 들통났고, 분노한 미국인들은 그를 끌어내렸다.
소련 해체 이후 고르바초프는 “냉전을 종식시켜 지구상에서 핵무기 사용 위험을 없앤 업적”을 쌓았다고 자평했다. 닉슨 또한 1969년 “아시아 각국은 강대국의 핵 위협 외에는 내란과 외침에 스스로 대비해야 한다”는 기조의 ‘닉슨 독트린’을 통해 세계평화 구축에 큰 역할을 한 정치인이다. 그러나 거짓말로 만사도로아미타불을 만들고 말았다.
“나무아미타불”은 극락세계를 관리하는 아미타불에게 나의 미래를 맡기겠다는 축원이다. 예술가이든 정치인이든 일반대중이든 사익을 위해 변신을 거듭하는 인간의 최후는 별로 긍정적이지 못하다. 먹다 남은 사과에 맞은 〈변신〉의 그레고르는 그 사과가 몸속에서 썩어가면서 마침내 숨을 거둔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했다 한들 속이 썩어 극락세계마저 오염시킬 자를 어찌 아미타불이 받아주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