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 작자는 웅장한 필력으로 조위(曹魏)·유촉(劉蜀)·손오(孫吳) 등 삼대 집단을 일으켰던 창업자들의 형상을 심혈을 기울여 그려냈다. 그 중에서 강동(江東)에 기반을 두고 창업한 「소패왕(小 王)」 손책(孫策)은, 비록 일찍 죽기는 하였지만 영특하고 용맹스러우며 기개가 충만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고 있다. 역사상 손책(175∼200)은 애초부터 전기적(傳奇的)인 색채가 풍부한 인물이었다. 흥평(興平) 2년(195), 나이 겨우 21세였던 그는 원술(袁術)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장강을 건너 남하한 뒤, 아주 짧은 기간인 3∼4년 사이에 단양(丹陽)·회계(會稽)·오군(吳郡)·예장(豫章)·여릉(廬陵) 등의 여러 군(郡)을 탈취하였고, 마침내 강동 땅의 대부분을 점령함으로써 손오(孫吳)가 나라를 세우는 기초를 다졌다. 《삼국지·오서(吳書)·손토역전(孫討逆傳)》에는 그의 기세(氣勢)와 풍도(風度)를 다음과 같이 개괄하고 있다. 『손책은…… 장강을 건너 지속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가는 곳마다 모두 격파했으며, 감히 그의 예봉을 당해낼 자가 없었다. 거기다 군령이 정연하고 엄숙하여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손책은 사람됨이 용모가 수려하고 우스갯소리를 좋아하며 성격은 활달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잘 들었으며 용인술에 뛰어났다. 그 때문에 선비들과 백성들은 그를 만나기만 하면 마음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기꺼이 그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았다.』 진수(陳壽)는 《삼국지·오서·손토역전(孫討逆傳)》의 말미에 있는 평(評) 가운데서 손책의 역사적인 공적을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손책은 기개가 호방하고 실행력이 뛰어났으며, 용맹함과 예리함은 세상에 으뜸이었고, 뛰어난 인물들을 살펴 취했으며, 뜻은 천하를 통일하는데 두었다. ……강동에서 할거하게 된 것은 모두 손책이 그 기초를 만들었다.』 나관중은 사적(史籍)을 기초로 삼아 용맹스럽고 생기발랄한 한 소년 영웅의 형상을 그려냈다. 《삼국지연의》제15회에서는 부친인 손견(孫堅)이 전사하고 잠시 원술에게 의탁하고 있던 손책이 남의 밑에 오래 머물러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서 손견은 곧 외삼촌을 구원하고 친족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를 명분으로 하여 우연히 얻게된 전국옥새(傳國玉璽)를 저당물로 삼아 원술로부터 3천여 명의 병사들과 5백 필의 말을 빌려 강동으로 진격함으로서, 스스로 창업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강동을 탈취하기 위하여 격파해야할 가장 주요한 상대는 바로 양주자사(揚州刺史) 유요(劉繇)였다. 그래서 작자는 제15회의 내용 대부분을 다섯 부분의 단계로 나누어 손책이 유요를 격파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첫 단계: 유요의 부장(部將) 장영(張英)을 격파하고 군사적으로 주요한 나루터인 우저(牛渚)를 점령하여 많은 양식과 군수품을 노획함으로써 자신의 군사력을 강화시킨다. 두 번째 단계: 유요와 신정(神亭)에서 전쟁을 하여 큰 승리를 거둔다. 세 번째 단계: 군사를 우저로 돌려 다시 유요를 격파한다. 네 번째 단계: 말릉( 陵)을 공격하여 취한다. 다섯 번째 단계: 태사자(太史慈)를 사로잡아 의로써 항복시키고, 아울러 유요의 나머지 부하들에게 항복을 권한다. 이리하여 손책은 매우 짧은 기간 안에 유요의 집단을 궤멸시키고 단양군(丹陽郡)을 점령한 다음 발길을 잠시 멈추었다. 뒤이어 손책은 승기(勝機)를 타고 전진하여 스스로 동오덕왕(東吳德王)이라 칭하던 엄백호(嚴白虎)를 격파하고 오군(吳郡)을 탈취하였다. 그는 다시 회계태수(會稽太守) 왕랑(王朗)을 격파하고 회계군(會稽郡)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다시 그의 깃발은 남쪽으로 전진하니, 강동의 대부분 지역이 모조리 신속하게 그의 관할 아래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이 스무 살 남짓한 청년장군은 경이적인 속도로 일어나 삽시간에 손씨 정권의 기반을 다지게 된 것이다. 손책이 창업하는 과정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노라면, 질풍노도와도 같은 교향악을 감상하는 것 같아서 그의 용감하게 매진하는 영웅적 기개는 사람들을 탄복시키고도 남을 지경이다. 그는 당시의 몇몇 큰 군사집단 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세력이 발전한 집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위·촉·오 삼국의 창업자 가운데서도 가장 젊은 사람이었다. 초평(初平) 3년(192), 조조가 연주목( 州牧)이 되어 일생 동안의 기반을 잡았을 당시에 그의 나이는 이미 38세였다. 그리고 유비가 적벽대전 후에 형주의 강남(江南) 사군(四郡)을 탈취함으로써 그럴 듯한 기반을 잡았을 당시의 나이는 이미 48세에 달했다. 하지만 손책이 강동을 점거했을 때의 나이는 겨우 24세일 따름이었다. 그는 무예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담력과 지략까지 출중했다. 태사자(太史慈)와 싸워 그를 사로잡았고, 우미(于 )를 옆구리에 끼운 채 숨이 끊어지도록 했으며, 벽력같은 소리로 번능(樊能)을 죽였고, 비검을 날려 엄여(嚴輿)의 목을 꿰뚫는 등, 신비스러울 정도로 보기 드문 위세를 떨쳤다. 그는 웅대한 뜻을 품은 사나이였고, 그 장한 뜻은 하늘마저 찌를 듯하였다. 유요가 우저(牛渚)를 탈취하기 위하여 돌아오려고 하였을 때, 그는 크게 꾸짖으며 질책했다. 「내가 지금 이곳에 이르렀는데, 네까짓 놈이 어찌 항복을 하지 않는가?」 또 엄백호가 강동을 똑같이 반으로 나누기를 기도하자, 그는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생쥐 같은 놈이 어찌 나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려느냐!」 이와 같이 그는 모든 적수들을 향해 서슴없이 기세를 압도하는 말을 내뱉었다. 그는 또 한편 천재적인 지휘관이기도 했으므로 특히 용병술에 뛰어났다. 싸울 때마다 승리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공격할 때마다 함락하지 못한 적이 없었으며, 종횡무진 내달리며 가는 곳마다 적을 초개같이 무찔렀다. 그는 온 천하가 전쟁으로 소란스러웠던 한 시대를 거침없이 내달린 한 마리 늠름한 사자였으며, 강동 천지를 위세로 떨게 한 「소패왕(小 王)」이 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소패왕」에 대하여 말하면, 독자들은 저절로 자칭 「초패왕(楚 王)」이라 자처하던 항우(項羽)를 연상하게 될 것이다. 항우는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세상을 뒤덮는(力拔山兮氣蓋世)」데다 용맹무적(勇猛無敵)하여 포학한 진(秦)왕조를 전복시키는데 중요한 공헌을 한 사람이었다. 손책은 그 천하를 깔보는 기개가 흡사 항우와 비슷하였다. 그러나 손책은 절대로 초패왕(楚 王)의 복제품(複製品)이 아니었다. 항우와 비교해 보면, 그는 다음과 같은 특출한 장점을 구비하고 있었다. 첫째, 그는 용기도 있고 지모도 있었다. 항우는 비록 만 사람을 대적할 용맹은 있었었지만, 용기는 있으되 지모가 없어서 오로지 강경하게 목숨을 걸고 밀어붙일 줄만 알았다. 그러다가 결국 유방(劉邦)의 수하에게 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손책은 결코 헛되이 필부의 용기만을 내세우며 뽐내지 않았고, 상황에 따라 모략과 계책을 함께 시행하였다. 신정(神亭)에서의 전투에서는 습적복심지계(襲敵腹心之計)를 써서 유요를 대파시켰고, 말릉( 陵)을 공격할 때는 사사지계(詐死之計)를 써서 설례(薛禮)를 격멸(擊滅)하였으며, 회계(會稽)를 취할 때에는 피실격허지계(避實擊虛之計)를 써서 왕랑(王朗)을 격파하였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그 성공적인 예이다. 그가 수 천 명의 군사만으로 강적들을 신속하게 격파하고 자신을 강대하게 키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용맹과 지모를 겸비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번째, 뛰어난 용인술(用人術)을 지니고 있었다. 항우는 마음이 편협하고 현명함과 어리석음도 구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부하에게 임무를 부여하는 데에도 일정한 방침이 없었다. 오직 범증(范增) 한 사람만 기용했을 뿐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는 바람에 한신(韓信)·진평(陳平) 등의 뛰어난 인재들이 잇달아 초(楚)를 배신하고 한(漢)에 투항했으며, 영포(英布)·팽월(彭越) 등의 대장(大將)들도 그의 적수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그가 패망한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손책은 도량이 넓어 어진 이를 구함에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하였고, 적재적소에 사람을 쓰는 기술이 뛰어났다. 창업 초기에 그는 장소(張昭)·장굉(張紘) 등을 찾아가 자신을 보좌해 줄 것을 공손하게 청하고 스승의 예로써 대하였다. 게다가 치열한 격투 끝에 포로로 잡은 태사자에게 친히 다가가서 포승을 풀고 자신의 비단 두루마기를 입혀주었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태사자를 유요의 진영으로 되돌려 보내며 나머지 군사들을 잘 타일러 항복을 권하게 함으로써 이 용장(勇將)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회계를 탈취한 뒤, 그는 다시 장소(張昭)와 동습(董襲)에게 함께 가서 우번(虞 )을 초빙해 오도록 하라는 영을 내렸다. 이러한 행동은 바로 그가 진실로 인재를 아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자, 장흠(蔣欽)·주태(周泰)·진무(陳武)·능조(凌操)·동습(董襲) 등의 영웅호걸들이 비로소 적극적으로 몸을 의탁하러 몰려들었다. 이 때부터 손씨 집단에는 인재가 넘쳐나기 시작했는데, 문신(文臣)은 모두가 양신(良臣)들이었고, 무관(武官)은 모두가 맹장(猛將)들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정족삼분(鼎足三分)을 위하여 필요한 준비를 하게 착착 진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 번째, 인심(人心)을 휘어잡는데 뛰어났다. 항우는 천하의 대세에 밝지 못했고, 살육을 함부로 자행하여 크게 인심을 잃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무리들이 배반을 하고 친족들마저 떨어져 나가, 마침내 오강(烏江)에서 스스로 자결하는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손책은 인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도리를 깊이 인식하고 군사들의 규율을 엄격하게 통제하여 백성들을 안심시켰으며 무리들을 긍휼히 대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손책의 군사가 이르자, 한 사람도 노략질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닭과 개도 놀라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두 기뻐하며 술과 고기를 영채로 보내어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이에 손책이 금과 비단으로 답례를 하니 기뻐하는 소리가 들에 가득하였다. 유요의 군사가 투항하여 오자, 군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따르게 하고 군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은 상을 내린 뒤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였다. 이리하여 강남의 백성들은 그를 우러러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 내용에는 물론 과장된 부분도 있겠지만, 대체로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쉴 새 없는 전쟁으로 천하가 어수선하던 당시의 백성들은 지긋지긋한 고통의 세월이 지나고 평화로운 시대가 어서 빨리 도래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손책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자연히 인심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남들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뛰어난 그의 장점이었으며, 아울러 그가 강동에서 할거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하였다. 나관중은 인물묘사의 변증법에 능숙하였다. 그는 손책의 씩씩하고 영웅적인 자태를 두드러지게 표현함과 동시에 손책의 뚜렷한 결점을 묘사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바로 그가 젊은 나머지 성미가 급하고 충동적이기 쉬우며, 용맹스러움이 넘쳐서 신중함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만약 좀 더 많은 세월 동안의 훈련을 거쳤더라면, 그는 점차 성숙해져서 한 사람의 노련한 정치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애석하게도 천수가 길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러한 결점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은 그 끔찍하고 처참한 결말을 맞이하고 만 것이다. 한 번은 사냥을 나갔다가 수행원들을 뿌리치고 혼자서 사슴 한 마리를 추격한 적이 있었는데, 숲 속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습격을 받고 결국 상처가 깊어 죽었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26세였다. 손책의 인생 여정은 너무도 짧았기 때문에 그 성격이 조조나 유비만큼 그렇게 풍부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나관중의 천재적인 필치로 인하여 그의 인물 형상은 여전히 독특한 품격을 구비하고 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를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그러게요.손책이 장수로서는 최고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 같아요.무력만 놓고 봐도 오나라에서 태사자 말고는 상대가 없는 것 같던데...............
손책!!! 정말 아깝죠... 주유, 곽가까지 해서 단명해서 아까운 3인인듯 싶네요...
갠적으로 순욱 곽가 손견 손책 이렇게 4명이 삼국지에서 가장 안타까운 인물들인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