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陽城)은 경기도 안성시(安城市) 일원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 때 사복홀(沙伏忽) 또는 사파을(沙巴乙)이라 불렸다. 신라 757년(경덕왕 16)에 적성현(赤城縣)으로 이름을 바꾸고 백성군(白城郡: 安城) 관할에 두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양성으로 개칭했고, 1018년(현종 9)에는 수주(水州: 水原)에 병합되었다가 1175년(명종 5)에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현감을 두고,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공주부 안성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기도 안성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양성군과 죽산군이 폐지되어 안성에 병합되어 안성군이 되었다. 1937년에는 안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63년에 용인군 고삼면이 안성군에 편입되고, 1992년에 이죽면이 죽산면으로 개칭되었다. 1998년 안성시로 승격되었다.
성씨의 역사
양성이씨(陽城李氏)의 시조 이수광(李秀匡)은 송(宋)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와서 문종 조에 벼슬길에 올라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이르렀고, 양성군(陽城君)에 봉해졌다. 《갑자보(甲子譜)》 세록(世錄)편을 보면, 능란한 외교술로 거란(契丹)과의 외교를 성공시켜 정난공신(定難功臣)으로 책훈되었고 그에 대해 양성(陽城)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관향을 양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기해보(己亥譜)》 부변의(附辨疑)편에는 고려 말의 하빈(河濱) 이거(李琚)를 시조로 삼고 고려 중엽의 양성(陽城) 이수광(李秀匡)을 그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파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이를 보면 시조를 하빈이씨와 연결시키는 또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이수광은 고려 중기의 인물로서 고려 말의 인물인 이거의 후손이 될 수 없다는 시간상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따라서 양성이씨와 하빈이씨는 동관이 아니라 하였다. 즉 양성(陽城)을 본관으로 삼은 것은 이수광(李秀匡)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그 이전의 선계가 어느 시대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어, 주국공(柱國公) 이수광을 비조(鼻祖)로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