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 봉수대를 가다
2018. 4. 2.
벚꽃이 만개하여 천지를 흰색으로 물들이는 봄날 오후, 우리 실버기자단은 울산의 역사 흔적을 찾아 주전 봉수대로 향했다.
주전 봉수대는 동구 주전동에 위치한 봉대산(봉수대가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짐작된다) 해발 192m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직경 5m 높이 6m의 원통형 석축으로 되어있다.
이 주전 봉수대는 조선 세조때에 세워진 것으로 그 이전 세종때까지의 봉수대는 사각형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특이하게 원통형으로 되어있다.
봉수대는 잘 알다시피 과거 우리 역사에서는 중요한 군사용 통신시설이다. 국경과 해안의 적침이나 비상사태를 중앙에 신속하게 알리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봉수제도의 시작은 1149년 고려 의종때에 성립되어 조선 세종때에 이르러 그 체제가 완전히 정비되어 운영되어 오다가 조선 말기 1894년 고종31년에 근대적 전신통신 수단이 개통되므로 인하여 그 효용가치가 없어져 폐지하게 되고 각처의 봉대는 폐기되고 봉수군은 더 이상 산에 주둔하지 않게 되었다. 이 때에 이곳 주전봉수대의 봉군이었던 한 분이 내려오지 않고 그대로 봉대사(舍)에서 살게 되었고 그 분의 후손들이 계속하여 잘 보존하여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는 후손들이 살지 않으며 봉대사 자리는 봉호사(寺)라는 작은 절로 변신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봉수대의 구성은 경봉수, 내지봉수, 연변봉수로 구분되며 경봉수는 한양에, 내지봉수는 변방 각지의 연변봉수에서 전해오는 신호를 경봉수로 중계하는 역할을 담당하여 내륙의 산봉우리에 산재하였다. 연변봉수는 바다와 육지의 국경 최일선에 배치되어 외침에 대비한 오늘날의 국경감시초소에 해당하는 시설로서 국가안위의 초병 역할을 수행하였다. 대체로 봉수대의 인원조직으로는 책임자인 오장과 몇 몇의 봉군으로 구성되었으며 주거시설로는 봉대사(烽臺舍)가 있었다.
주전 봉수대와 연결되는 이웃 봉수대와의 거리는 남쪽 화정동 천내 봉수대와는 6.54Km, 서울로 중계되는 북쪽의 당사동 우가산의 유포 봉수대와는 5.1 Km, 그리고 유포봉수대가 폐지되고 난 후로는 16Km나 떨어진 경주 하서지로 이어져 안동의 봉지산 직봉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조선조 문헌인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전국 봉수는 주요 간선이 5개의 직봉으로 이루어졌는데 제2거인 동래 – 서울 선은 직봉 44개와 간봉 110개로 구성되었으며 이 주전 봉수는 남동 해안의 중요한 봉수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 울산 관내에는 이곳 말고도 이 라인에 속하는 천내, 유포를 비롯하여 여덟곳이나 있지만 주전봉수대만큼 원형이 잘 보전된 곳은 없다고 한다.
안내판에 의하면 통신 방법으로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써 신호를 보냈으며 위급 정도에 따라 정해진 갯수의 홰를 올렸다고 하는데, 실제 현장에는 봉화대가 하나 밖에 없는데 어떤 방법으로 홰의 갯수를 실연시킬 수 있었는지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우리 고장의 중요 역사자료인 봉수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울산시 기념물 제3 호로 지정되어 우리 후손들에게 두고 두고 조상들의 국방이야기를 들려주기를 바라면서, 동해의 상쾌한 바닷바람을 가슴 깊이 들여 마시면서 주위에 활짝 핀 동백과 진달래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 자료 출처 : 인터넷과 안내판 - 실버기자 김길평




첫댓글 역사공부 잘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사의 사실을 잘 표현 하였습니다
자세한 설명과 함께~좋은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