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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청소년위원회, 익산시, 익산시청소년수련관이 진행하는 "청소년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토론회에서 발표할 글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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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청소년문화의 주체와 객체
- 청소년들의 대안적 일탈을 꿈꾸며 -
정건희 관장 (군산시청소년문화의집)
1. 현대 청소년문화의 개인적 단상(斷想)
1) 대학 축제의 단편
‘술 팔아 돈 모아서 또 술 마신다.’ 거칠게 표현하면 우리 대학 축제의 핵심이다. 또한 ‘어떤 가수가 올까?’가 대학 축제의 최대 관심사이다. 근래 서울의 모 대학 축제는 인기가수의 콘서트 장을 방불케 했다. 이와 함께 난장이라는 이름으로 술을 많이도 팔고 많이도 마신다. 술을 팔아서 남은 돈은 또다시 평가회 한다는 명목으로 술을 마시러 간다. 대학축제의 음주문화가 사회문제로까지 부각된 가운데 보건소와 공동으로 연계해 절주, 금연 캠페인이 펼쳐졌다고 할 정도이니 상황이 좋지 않음은 분명하다. 그 술 문화에서라도 동아리 발표회 정도 도우며 학생들이 그나마 참여하면 낫다고 한다. 지방대학의 축제기간은 집에서 쉬는 날이라는 인식 때문에 참여자체를 하지 않는 학생들이 많다. 지방의 모 대학 축제는 학교가 아닌 시민들과 함께 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으로 무대를 만들었다. 시민들과 함께 한다는 명분이 있었으나 본래 의도는 따로 있다. 대학생들이 모이지 않으니 궁여지책으로 지역 시민들이라도 모여 진행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만들어진 자리이다.
대학에서의 축제가 서두에 제기한 여러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예인이 참여하더라도 젊은이들의 역동성은 살아있다. 함께 하며 음악과 춤에 열광하며 한순간의 스트레스를 날리기도 한다. 전국 철거민 연합투쟁 기금마련 주점 등 목적성이 있는 주점도 있다. 하지만 소수이다.
술 마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축제 현재 우리 대학생들의 문화이기에 힘겹게 다가온다. 대학 동아리 또한 과거와 같이 열정적인 모습은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의 핵심 세력으로 활동했던 대학의 운동권 동아리들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문화 동아리 또한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은 오래전인 듯싶다. 대학이 상아탑으로서의 구실보다는 직업을 갖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분석도 있으나 더 큰 문제는 청소년기 더욱 억압되고 경쟁적인 입시제도의 이유가 더 커 보인다.
2) 고등학교 축제의 이름으로
“서울 강남의 A고등학교에서 벌어진 교내 가을축제. 운동장에 마련된 무대 위에 요즘 청소년 사이에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댄스 가수가 등장했다. 1,000여명의 학생들은 가수의 격정적인 노래와 현란한 율동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한 손으로 높이 치켜든 야광 막대기는 파도처럼 흔들렸고 운동장은 마치 콘서트 장을 방불케 했다. 이어지는 또 다른 인기 그룹의 노래, 그리고 마지막 순서인 불꽃놀이. 국가기관이나 민간단체의 큰 행사가 있을 때나 볼 수 있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5분여간 밤하늘을 수놓았다.” 2003년 9월 9일 동아일보의 “초호화판 고교 축제”라는 기사 글이다. 연예인들이 고등학교의 축제에 출연한다는 내용이었으며 학생회 측이 주변 학원에서 스폰서와 함께 학생회비로 재정을 충당하고 있고, 연예인이 출연하는 무대의 공연행사를 제외하고는 청소년들이 준비한 전시회라든지 하는 축제의 내용은 소홀히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 순간의 간단한 일회성 행사였으며 돈을 들여 자신들이 즐겨하는 연예인을 출연시켜 그 순간만 즐기는 축제였다.
지역의 모 고교의 축제는 더욱 가관이다. 강당 안에 학생들을 모두 들이민다. 자리에 전교생을 모두 앉게 한 뒤 일이주전부터 교사 몇 명이서 작성한 순서에 의해 강단 위에 발표회를 진행한다. 합창 다음은 시화전을 통해 시 읽기 등 하루가 그렇게 간다. 우리 고교의 또 다른 축제의 단편이다.
주체적인 참여자가 되어 책임을 가지고 자신들이 주도성을 통한 축제가 될 수 없다. 내가 축제의 주체가 되지 않을 바엔 모든 이들이 인정할 정도의 인물(연예인)이 올라가야만 열광할 수 있다. 근래 몇 해 전부터 서울 일부의 고교에서 일어나는 여러 축제의 한 단편이다. 이와 함께 축제 자체가 형식적 발표회쯤으로 일 년의 학교행사에 있기 때문에 끼워 맞추기식의 행사가 되어버렸다.
근래 우리 청소년들을 둘러싼 환경에서 축제의 본래적인 의미를 찾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축제가 추구하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청소년이라며 일반적으로 규정하는 10대의 축제에서 원하는 목적은 다른 기성세대와는 차이가 있다.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청소년들의 축제에 대한 인식은 그들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여 청소년들이 주체가 되며 그 주체적인 추동력으로 목적성을 가지고 움직여져야 한다. 그 목적에 따라 근본적인 추동체는 청소년이 되어 기획하고 실행하며 평가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따라서 동기를 가지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지속적인 상호 소통 과정이 필요하다. 이 부분이 청소년기 문화축제에는 매우 중요함에도 대부분 간과되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축제는 예술적 요소가 포함된 제의를 일컫는다. 축제는 애초 성스러운 종교적 제의에서 출발했으나 유희성을 강하게 지니게 되어 오늘날에는 종교적인 신성성이 거의 퇴색되었다. 오늘날의 축제는 종교성을 상실한 채 유희적이고 놀이적인 모습이 강조되고 있다. 흔히 산업화와 세속주의는 축제의 종교성을 박탈하고 세속화를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축제가 제(祭)가 사라지고 축(祝)만 남은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축제는 분명히 축(祝)과 제(祭)가 포괄된 문화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축제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 성역할 전도, 지위전도(남자와 여자, 왕자와 거지, 주인과 노예 등) 등과 같은 "뒤집혀짐"이다. 이것은 축제를 일상생활의 '단절' 즉 하나의 의례적인 상황으로 간주할 경우에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서 축제는 그 역설의 미학을 실현시키게 된다. 축제적인 상황은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의 단절이라고 볼 수 있고, 이 점에 대해서 리치(E Leach)는 축제에 들어가는 일반인들은 본래의 자신의 세속적인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지위를 상실하고 의례적으로 '죽게 된다'고 이야기 하였다. 이렇게 죽어있는 '신성한 시간' 동안 그는 다른 모든 이들과 진정한 우정과 평등성을 획득하고 일상의 모든 권리와 의무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순간에 시간의 흐름은 멈춰서고 개인은 자유와 평등, 동료애, 동질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곧 다시 현실적인 세상으로 그는 '다시 태어나게'된다. 즉 다시 일상적인 세속적인 삶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의례적인 상황으로 들어가기 전과 거기에 나온 개인의 삶의 양태는 많은 차이를 갖게 된다. 갈등을 극복해서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획득하기도 하고, 기존 사회가 가지고 있던 모순과 문제점의 해결책을 찾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현대 우리 청소년에게 축제는 더 이상 형식적인 끼워 맞추기식 행사로 유도해서는 안 된다. 축제의 신성적 의미는 퇴색했다. 특히 청소년축제에서 그 신성적 의미를 찾기는 불가능하다. 그 모습이 축제라는 이름으로 일컬어 질 때 최소한 기존 사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점과 모순에서 빠져 나와 일탈의 만족을 느끼는 체험이 그 안에 녹아 있어야 한다. 그 체험은 성인들이 만들어 놓은 단순한 의미의 이벤트적 유희가 아닌 그들의 주체적 의지를 가진 긍정적 주도성에서 묻어 나오는 문화적인 표현이 있어야 한다. 학교교사집단이나 이벤트회사 성인들의 프로그램에서 객체가 되어 움직이는 단순한 피상적 집단의 행사는 더 이상 청소년의 축제로서 의미를 찾기는 어렵다. 단순한 청소년의 유희를 주변적 환경에서 제공해 줄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있을 수 없다. 그들의 문화를 발산하며 소통하는 가운데에 청소년이 없다면 또 하나의 대상화된 객체에 불과한 이벤트 행사에 참여자로 남게 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축제에는 축제의 고유한 의미와 함께 청소년시기의 긍정적 목적성에 맞추어 그들이 주체적 의지를 가지고 실행하는 가운데 현재 우리 10대의 여러 모순에서 빠져나와 대안적 일탈의 만족을 느끼는 체험이 녹아 있어야 한다.
3) 소비문화 주체로서의 청소년
청소년은 현대 소비의 주체다. 전체 광고 시장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광고가 70%에 육박한다. 요즘 우리 10대들을 디지털 키드(Digital Kids)라고 일컫기도 한다. 근래 기업에서 10대를 분석하는 열풍이 불고 있다. 제일기획 LG애드 등 광고회사는 물론 삼성전자 KT 신한은행 등 주요 대기업과 금융회사도 앞 다투어 한국의 디지털 키즈(Digital Kids) 분석 작업을 진행했으며 현재도 진행 중이다. 기업들이 ‘10대 연구’에 나선 것은 각 가구가 컴퓨터, 휴대전화, 디지털카메라, 홈시어터, MP3플레이어 등 디지털 제품을 살 때 가족 중 정보기술(IT) 분야에 가장 밝은 10대의 의견이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 청소년은 철저히 소비의 주체이며 대상이다. 새로운 문화의 창조가 자신들이 소비하는 대상의 관점으로 파생되어진다. 기업의 논리적 구조는 간단하다. 많은 물건 팔아서 많은 수익을 내고자 하는 것은 기업의 논리이며 의미이다. 그곳에서 청소년들이 주체적 역할보다는 소비의 대상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소비 환경의 중심에 놓여 있는 청소년들에게 주체적 문화의식 보다는 입에 단 사탕을 끊임없이 물려 주 듯 소비성향을 강요하는 미디어가 폭증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휴대폰의 과도한 사용이다. 현재 휴대폰은 전화의 기능 이상이다. 통신과 온라인이 이미 결합했으며 방송이 통합되어가고 있는 시기이다. 그러한 문화컨텐츠 활용의 중심은 청소년이다. 문화컨텐츠를 팔기 위해 온갖 광고를 해대며 유인하는 것은 기업이다. 기업의 윤리의식에서 청소년의 주체적 문화 활성화에 대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2. 청소년문화는 존재하는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들이 순수하게 창조한 문화는 존재하는가?
청소년들이 주체가 되어 진행하는 문화는 존재하는가?
성인들에게 예속되지 않은 그들만의 순수한 문화는 존재하는가?
다른 세대와 확연한 차이가 존재하는 청소년문화는 존재하는가?
과연 청소년문화가 현재 존재하는가?
청소년들이 행하면 모든 것이 청소년문화인가?
모방문화도 문화라면 문화라는 이름으로 설득이 가능하나 청소년기의 나이에만 행한다고 해서 모든 게 청소년문화인가?
개인적인 내 나름대로의 이러한 청소년문화에 대한 물음은 매우 부정적이다. 성인문화와 확연히 구분되어지는 청소년문화가 따로 형성되어 있다고 주장하나 대다수 성인들의 소비문화에 대한 모방이 대부분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반면 청소년들은 성인들이 접근할 수 없는 그들만의 문화적 공간이 있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과거에 비해 청소년문화에 대한 논의는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지역 축제 등 미디어 문화적 컨텐츠도 과거에 비해 많아졌으나 청소년문화 자체에 대해서는 아직도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이와 함께 청소년문화를 육성 발전시켜야 한다고는 하나, 반면 청소년의 독자적 문화자체에 대한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주장도 강하게 대두된다. 이렇듯 청소년문화의 존재여부에 대해서 다양한 논점의 차이는 문화에 대한 정의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문화의 주체성을 상실하는 환경을 구성하고 객체로 인정하며 그 모든 환경을 지원하고서 청소년들에게 우리 문화의 주체성이 상실되어 가고 있다고 비판한다. 성인들이 구성해 놓은 환경 안에서 성장하여 주체적 의식을 결여시킨 체 주체적 문화가 성립이 안 된다고 하니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문화의 의미는 너무나 다양하다. 문화에 대한 정의가 무려 160개에 이른단다. 이러한 문화에 대한 정의를 종합해 보면 첫째, 문화는 사회의 성원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며, 둘째 역사적으로 전승된 것이며, 셋째 학습된 것이고, 넷째 사회 성원의 행동의 지침이며, 다섯째 그것은 한 통합된 체제 또는 형태이고, 여섯째 사회성원의 경험조직의 표준이라고 개념화 했다. 이러한 문화적 개념의 바탕에서 청소년문화를 해석해 몇 가지 단어로 구분지어 보면 “미숙함, 비행, 하위, 대항, 새로움”등으로 표현되어진다. 미숙함, 비행, 하위, 대항문화는 성인들의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문화적 요소가 강하다. 일방적인 성인들의 시각에서 사회전체 문화의 단편적 요소로서 미숙하고 어딘가 모자라며 규범과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 또한 부분적 문화로서 기성세대에 도전적인 문화로 바라본다. 청소년문화를 성인시각에서는 당연히 통제하고 지시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반드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청소년들을 이용해서 경제적 논리에 의해 성인들이 물신숭배에 가까운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의 문화가 농락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성매매의 주범은 성인이다. 피시방, 오락실, 나이트클럽, 담배, 술, 약물 판매상, 극단적 폭력을 부르는 게임 등 상업적 오락 이 모든 환경은 성인들이 제공하며 만들어 간다. 연예산업의 성장을 통해 물신 숭배적 요소를 극대화 시킨 것도 성인들이다. 이러한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문화의 주류적 환경을 형성하여 청소년들에게 제공한 채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문화를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며 억압하려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이러한 주류의 문화를 형성하는 공간적 배경으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곳이 존재한다. 바로 학교이다.
이러한 학교가 교육기관인가?
우리의 학교는 교육기관이기를 이미 포기했다. 교육은 “인간애(人間愛)”가 가장 최상위의 목적임을 알고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가르쳐 주는 곳인가? 개인적 입시양면을 위한 이기적 도구를 키우기 위한 학습장소인가? 모두가 알고 있다. 후자이다. 입시의 도구일 뿐 그 어디에도 인간애에 대한 진실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더욱 개인적 욕망을 키우라며 강요하고 강압한다. 강남의 초등학교 아이들의 학원 수강률이 평균 일일 6.8개란다. 하루 학교 공부 이후에 7개의 학원을 전전하는 것이다. 중학생이 되어 3학년 2학기가 되면 학교 진도를 나갈 수 없다고 한다. 특수목적고 입학을 위해 고3 교실과 같은 풍경이 되고 만다. 이러한 강팍한 환경의 학교에서 청소년문화를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다. 서두에서도 학교 축제의 실태를 몇 가지 나열했지만 축제는 입시를 위한 매우 미미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지 본래의 의미로 성장하기에는 너무나 부실하고 억압적이며 경쟁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다.
3. 대안적 일탈을 꿈꾸며
한국의 문화가 세계적이라며 현대음악, 현대무용 등에 고전음악을 결합시키는 시도가 행해진다. 개인적 경험으로 7~8년 전 청소년들의 사물놀이 동아리에 기타와 락음악을 혼합하여 몇 달 연습해서 공연한 적이 있었다. 쉽지 않았다. 퓨전음악이라며 시도하지 않은 다양한 장르의 문화적 요소와 내용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시도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으나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시장의 주류음악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매우 드문 경우지만 우리의 고전 문화 그대로를 선보이면서 성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문화의 주류는 미국문화이다. 음악도 정통 팝송이나
힙합을 즐겨 듣는다. 만약 미국에서 성공하고자 한다면 그 문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음악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내용으로 미국의 팝송이나 힙합에 우리 음악을 결합하여 미국시장에 성공하기는 쉽지 않은 것은 오히려 너무나 당연하다. 사물놀이패의 성공은 우리 문화 그대로를 보여 준 것이며 현재 세계 투어를 행하는 비의 음악은 서양음악 그대로이다. 그 분야에서 그 이상을 넘어서는 문화가 그 안에 존재한다.
청소년문화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너무나도 왜곡되어 있다. 청소년의 비행하위적인 문화 환경의 대부분을 성인들이 제공하면서 그러한 문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청소년들을 지속적으로 억압하고 통제하며 지시한다. 성인들의 일반적인 문화행사를 만들어 놓은 채 청소년문화동아리를 찾아 끼워 넣기를 반복한다. 청소년이 휴대폰 장사의 가장 큰 대상이다. 학교교육과정 중 축제가 있기에 하루 이틀 행하지만 동아리 활동이나 모든 문화 활동은 억제한다. 민주주의를 가르치지만 학교의 환경은 도무지 민주적이지 않다. 근검절약해야 한다지만 자본주의의 소비 지향적 환경은 청소년들의 주변을 언제나 둘러싸고 있다. 청소년단체라고 명패는 붙어 있는데 청소년이 없는 청소년단체가 된지는 이미 오래이다. 단체 내 형식적인 청소년회원이라는 이름은 있으나 그들이 주체적인 입장에서 자기 주도성을 가지고 일들을 진행하지는 않는다. 다만 행사의 일원으로서 수직적 하위 구조의 대상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 모든 문화를 송두리째 바꾸기에 너무 힘겨운 환경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숨쉴 틈 없는 힘겨운 환경에서도 소수이기는 하나 우리 청소년들은 꿋꿋이 자기 목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내면적 힘겨움은 더욱 크게 존재하나 그것을 이기에 위해 더 큰 수고와 노력을 쏟아 붓는다. 쉽지 않음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더욱 세계화라는 명패의 경재의 논리에서 화합의 논리로, 자본주의에 대한 소비문화의 중심에서 저항력을 길러야 한다. 그 저항력의 가장 큰 백신은 자기 주체성이다.
청소년도 학생이라는 위치권이 모든 것이 아닌 ‘시민’이라는 자기 주체성
청소년의 이야기를 성인이 아닌 ‘청소년’이 할 수 있는 자기 주체성
청소년이 좋아하는 것을 성인이 아닌 ‘자신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자기 주체성
청소년 문화의 주도권을 기업의 소비환경이 아닌 ‘청소년 자신’이 가지고 움직이려 하는 자기 주체성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할 자기 주체성이 확립되어질 때 현재의 극단적 개인주의에서 벗어 날 수 있다.
청소년의 문화는 그들의 감수성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 순간만이라도 돈의 목적성에서 벗어나 그들 가슴의 최상의 표현으로서 나타나기를 바랄 뿐이다. 이와 더불어 세계화 시대의 일방적 경쟁의 논리에서 벗어나 청소년들이 한 생명으로서 인정되어지며 이 생명 모두가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
청소년문화 안의 축제라는 이름으로 어떠한 일들이 만들어 질 때 최소한 기존 사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점과 모순에서 빠져 나와 일탈의 만족을 느끼는 체험이 그 안에 녹아 있어야 한다.
사람으로서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가 그들에게 대안이라는 이름으로 설명되어지니 서글프나 현실에서 그 모습 그대로의 인정을 “대안적 일탈”이라 칭해본다.
우리 청소년들의 공동체적 의식에서 그들의 문화를 통한 “대안적 일탈”을 꿈꾸어 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