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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변화 4 / “예수님을 믿으면 달라져야 합니다!”
+ 본 문 : 누가복음 15장 11절 - 24절 (신약성경 121쪽)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서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아멘!
탕자가 돌아왔습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온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배가 고팠기 때문입니다.
탕자는 매우 현실적이고,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시간은 하나님의 편입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주저하고, 재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이라는 현실 때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그리고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살면서 지은 죄를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를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쟁터에는 무신론자가 있을 수 없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마음속의 허전함 때문입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받고, 많이 누리면 만족할 줄 알았는데, 많이 배우고, 많이 받고, 아무리
많이 누려도 우리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습니다.
전도서 1장 1절 말씀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것은 솔로몬 왕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솔로몬 왕의 영광을 가리켜 말씀하실 때 「들의 백합화를 보라 솔로몬 왕의 영광으로도
이같이 입지 못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솔로몬의 영광이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솔로몬이 고백하기를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염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가게 되면 그 심령의 빈공간을
물질로도 쾌락으로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는 빈 공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배가 고파서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먹을 것을 주실 것이지만, 먹을 것을 주시기 전에 먼저 하시는
일들이 있습니다. 먼저 거쳐야 되는 절차가 있습니다.
우리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도 이와 같이 거쳐야 되는 절차가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세상 연락을 즐기고, 그 흉악한 죄에 빠져서 그 은혜를 잊었네.’
오랫동안 떠나갔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에 어찌 그가 거쳐야 될 절차가 없겠습니까?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 라는 최자실 목사님이 지으신 자서전격인 책을 읽어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그 책에 보면, 최자실 목사님의 남편이 오래 전에 집을 나가서 딴 살림을 차립니다.
그게 계기가 되어서 최자실 목사님이 중년의 나이에 신학교를 가게 되고, 목사가 된 것입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어느 날 퇴근해서 집에 와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자식들이 다 모여 있고, 분위기가 이상하더랍니다. 그리고는 어머님을 안방으로 모시더랍니다.
아차하고 보니 안방에 남편이 와서 앉아 있었어요. 집에 돌아온 것입니다.
이제 대화를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닌데.
마침 안방에 손주가 앉아 있더랍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직접 말을 걸지는 못하고 손주에게 말을 거는
형식으로 대화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왜 집에 돌아왔느냐?’
그러자 남편이 ‘쓸쓸하고 외로워서 돌아왔지, 과거에 한 일을 후회하고 돌아왔지.’ 하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나중에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고, 그리고 나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스토리에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함축된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첫째는 회개라는 요소이고
둘째는 용서라는 요소입니다. 회개와 용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회개와 용서만 있다면 그 어떤
문제라도 풀 수 있지만, 회개와 용서가 없다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문제도 안 풀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도 안 풀리고, 남편과 아내 사이의 문제도 안 풀립니다.
여러분의 삶에 안 풀리는 문제가 있습니까? 회개와 용서가 필요합니다.
영국의 찰스 황태자와 카멜라 파커의 결혼 축하 예배 실황이 전 세계에 생중계 되었습니다.
이미 그들이 비종교적으로 혼례를 올리고, 그리고 예배당에 모여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를 구하는
그런 예배인데, 여러분! 그 예배의 첫 순서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회개 기도였습니다.
저는 결혼식 예배에서 회개 기도로 시작하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랑, 신부 둘 다 결혼에 실패한 경험이 있고, 그 결혼이
두 번째 결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결혼에 복을 주시기를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회개부터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탕자가 배가 고프고, 쓸쓸해서 돌아온 것을 아버지가 알지만, 먼저 해결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회복입니다. 아버지가 남이 아니고 내 아버지이고, 아들이 남이 아니고
내 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자식이라면 배가 고프다고 하면 툇마루에 앉혀서 밥을 줘서
보내면 되지만, 자기의 자식이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남이 아니고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남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집 나갔던 자식이 돌아올 때에는 밥만 주는 것이 아니고, 회복해야 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면, 마리아라는 여성이 수녀원에서 본 트랩 가정의 교사로 들어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음악을 가르칩니다. 그러다가 아이들의 아버지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자신이 낄 수 없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수녀원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용기를 얻어서
본 트랩 가문으로 돌아오는데, 이제 이 여성과 그 아이들의 아버지가 단 둘이 대화를 나누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때 그 아버지가 마리아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 두 개를 합니다.
‘Why did you leave? - 왜 떠나셨소? - and Why did you come back? - 그리고 왜 돌아오셨소?'
아주 근본적이고 중요한 질문이에요. 이 남자도 마리아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확인하기 전에, 마리아의 입에서부터 그 이유를 말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버지가 밥을 먹일 때에는 그냥 평범하게 먹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잡아요? 살진 송아지,
송아지는 살이 쪄야 송아지입니다. 살찌지 않은 송아지는 쓸모가 없습니다.
벼도 벼 곡식이 풍성하게 나야 그것이 벼입니다.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가 무성히 열려야 그것이 포도나무입니다.
인간에게도 풍성하게 열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러므로 하나님이 먹이실 때에는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여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본문으로 읽지는 않았지만, 25절을 보면 맏아들이 밭에서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무엇을 들었습니까?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들었어요.
여러분! 사람은 놀기를 좋아하는 존재입니다.
유치원 아동들에게는 노는 것이 공부하는 것이고, 공부하는 것이 노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온다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얼굴’
유치원 아이들은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아질수록 일과 놀이가 서로 분리되기 시작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놀고,
놀이가 점점 도피적이 되고, 스트레스 해소가 되고, 쾌락 위주로 바뀝니다.
그래서 놀이하면 이상한 게 돼버려요. 춤추고 노래하는 곳은 퇴폐적인 곳이라고 인식합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가 열어준 잔치를 예수님은 풍류와 춤추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천국의 기쁨입니다.
사람은 가장 기쁠 때 무엇을 하느냐? 춤을 춥니다.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이 춤을 춥니다.
아들이, 딸이 대학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가 춤춥니다.
어떤 아이들은 내일은 학교가 쉰다더라 하면 춤을 춥니다.
히딩크 감독이 우리 팀이 골을 넣을 때마다 팔을 휘두르며 춤을 추지 않습니까.
축구 선수들이 골을 넣은 다음에 골 세리머니가 춤을 추는 것입니다.
사람은 기쁠 때 춤을 춥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예배당에서 춤을 추자는 얘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기쁨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허구한 날 다니면서 늘 얼굴이 어둡고 기쁨을 모르고 감격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입니다.
차라리 탕자가 되었더라도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아는 것이
한 번도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지만, 기쁨도 없고, 감격도 없고,
성령의 충만함을 모르는 것보다, 차라리 나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창기와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의 하나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세 개의 비유가 나오는데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동전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
이 세 비유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잃어버렸다는 것이고, 잃어버린 것을 찾았다는 것이고,
그리고 찾은 것을 기뻐하더라는 것입니다.
동전을 찾은 주인이 기뻐하고, 양을 찾은 주인이 기뻐하고,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기뻐합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애초부터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될 게 아니냐?
동전이든, 양이든, 아들이든 안 잃어버렸으면 이 모든 소란이 없었지 않았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현실은 잃어버린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바 되었어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알든 모르든. 영국의 유명한 시인 바이런이 말하기를 "아침에 깨어나 보니까
유명해 져 있더라 - I awoke up to find myself famous" 유명한 말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는 순간에 나는 잃어버린바 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야 되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과학도 알겠고, 경제학도 알겠고, 많은 것을 아는데,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이것은 인간은 잃어버린바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바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찾은바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동전이 주인을 찾을 수 없고 주인이 동전을 찾아 주어야 되고
양이 주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주인이 양을 찾아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찾은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의 말 그대로 『이 아들은 내가 잃었다 다시 얻었노라』 할렐루야!
그러므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찾은바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게 붙들려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의라는 제일 좋은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되었음을 보증해 주시는 성령이라는 가락지를 끼워 주셨습니다.
너는 종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존귀한 내 자녀라는 확증으로 발에 신을 신기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답게, 성령의 가락지를
끼고, 발에 존귀케 되는 은혜의 신을 신은 그리스도인답게, 그 무엇보다도 달라지고 변화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이 되시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누리는 스이의 권세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