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9월 9일(둘째 일요일)
*동구청7시>대우APT10분>북부 갤럭시 웨딩20분>두류역1번출구7시30분>성서홈플 지나서 굴다리밑7시40분
*회비:30,000원
*버스: 무궁화 관광1621(황금색) 김상현 기사님:010-3388-3403
*총 무:정미연010-3002-6758.산대장:박상영010-3011-9147
지리산에는 수많은 명소 계곡들 중 어느 계곡으로 들어서도 산객들의 무더위를 해결해준다.
지리산 계곡하면 뱀사골 피아골 대성골 칠선 마야 한신 계곡을 떠올리기 쉽지만 전북 남원에 자리 잡은 구룡봉 산자락 구룡계곡은 수려한 산세와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으로 이어지는 때묻지 않은 청정계곡이라 지리산의 또다른 비경을 만나게 해주는 기회가 될 것이다,
여운제에서 수정봉-구룡계곡에 이르면 구룡폭포와 그 아래 용소가 있는 구룡계곡은 용호구곡이라고도 하며 지리산의 숨은 천혜의 계곡명소이다. 이처럼 이름을 달리하는 것은 옛날 음력사월 초팔일이면 아홉마리의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홉 폭포에서 한 마리씩 자리잡아 노닐다가 승천했다는 전설 때문에 얻은 이름 값하는 명소다.
구룡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비경은 끝없이 펄쳐진다, 학선대, 구시소, 조대암(학서암)아름다운 소와 담이 즐비하다, 울창한 숲길은 원시림을 걷는 듯한 착각속에 빠지게 하고 거대한 암반위로 계곡물이 넓게 흐르기 때문에 가족, 연인끼리 탁족이나 알탕, 물놀이를 즐길수 있는 곳으로 더위탈출 계곡 테마 산행지로 최적의 코스다.
이 계곡은 지리산 국립공원 북부지소가 있는 주천면 호경리에서부터 구룡폭포가 있는 주천면 덕치리까지 펼쳐지는 심산유곡이다. 수려한 산세와 깍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으로 이어지는 이 계곡은 길이가 약 3㎞이다. 정상에 오르면 구곡경의 구룡폭포가 있다.
남원 8경 중 제1경인 구룡폭포 아래에는 용소라 불리는 소가 형성되어 있는데, 옛날에 이곳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지리산 관광도로가 개설되어 구룡계곡의 스카이웨이는 한층 편리하게 이곳 경치를 구경할 수 있게 해준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정령치간 도로는 뱀사골(반선)과 노고단으로 이어져 지리산의 진수를 맛보게 해준다.
*합천 영상 테마파크*
2004년도에 건립한 합천영상테마파크는 1920년대에서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국내 최고의 특화된 시대물 오픈세트장으로 드라마 각시탈,빛과 그림자,서울1945,에덴의 동쪽,경성스캔들,영화 써니,태극기휘날리며, 뮤직비디오 등 67편의 영화, 드라마가 촬영된 전국 최고의 촬영세트장이다.
*사문진 나루터*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 마을은 조선 인조 때 개척되었는데, 낙동강 범람으로 인해 늪이 여기저기 많이 생겨 ‘늪마을’이라 하다가 120여 년 전 이씨라는 선비가 들어와 마을 앞 큰 호수를 보고 ‘호촌’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또한 낙동강이 범람할 때 이곳 흙을 많이 훑어갔다고 ‘훑촌’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1906년(고종 43) 고령군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사천동, 사동, 사문(沙門), 사문(寺門)이라 하였다. 사문(沙門)은 낙동강 홍수로 인해 마을이 형성되어 호촌2리에서 모래를 거쳐 배를 탄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그리고 큰 절로 가는 관문이기 때문에 사문(寺門)이라고도 불려졌다.
사문진나루터는 조선 전기 낙동강과 금호강을 연결하는 하천 교통의 요지이자 대구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수행하는 나루였다. 낙동강은 일본 무역상들은 물론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상인들의 대표적 물품 수송로이기도 하였는데,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성산1리와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2리를 잇는 사문진나루터가 가장 번창해 1486년(성종 17)까지 대일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문진나루터는 낙동강 상류와 하류를 연결하는 하천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왜에서 이입된 물품을 보관하는 화원창(花園倉), 왜물고(倭物庫)를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사무역의 발달로 15세기 후반에 폐쇄되었다. 하지만 사문진나루터는 해방 이후까지 부산의 구포와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오르내리는 낙동강 뱃길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해 왔다. 조선시대 대소비지 대구를 대상으로 하는 남해안의 돛단배나 범선의 입출항이 잦았는데, 주요 운송 해산물로는 소금, 미역, 김, 어물 등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대구에 처음으로 피아노가 들어왔던 곳이 바로 사문진나루터였다. 1901년 5월 이른 아침 피아노 1대가 어설프게 포장되어 인부 30여 명에 의하여 소달구지에 옮겨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나무토막 안에 죽은 귀신이 들어 있어 괴상한 소리를 낸다며 신기해 하였다. 사문진나루터를 통해 대구로 운반된 피아노의 주인은 동산병원(현 계명의료원)을 세운 존슨(Johnson)의 아내 에디드 파커(Edith Parker)였다.
1940년 초까지 사문진나루터를 통하여 전국의 물자들이 대구로 운반되었는데, 당시 대구에 집산된 물자는 쌀 20만 석, 콩 10만 석, 우피 40만 근과 그 밖의 잡곡, 양재, 잡화 등과 소금 10만 석, 석유 3만 5,000상자, 성냥 6,000상자, 옥양목 6만 단, 무명 10만 단, 방적사 1,000가마와 그 밖의 견, 면직물류, 약재, 잡화 등이다. 이것들의 약 5분의 2가 대구 시장을 통해 분산 소비되었고, 나머지 5분의 3 정도는 대구를 중계지로 하여 대부분 낙동강을 통해 부산 및 상류 각지로 수송되었다.
이 밖에 고령군 다산면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사문진나루터를 통해 대구 지역 재래시장에 판매되었는데, 이를 위해 2척의 배가 하루 70회 정도 오갔었다는 기록이 있어 많은 이들이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선 운영권은 주로 입찰로 정해졌고 승객 대부분은 서쪽 고령군 다산면 주민들이었다. 도선은 처음 장대를 이용해 사람의 힘으로 저어 다니는 목선이었으며, 이후 자동차 엔진을 갖다 붙였고, 나중에는 엔진이 달린 철선으로 바뀌었다.
1985년 6월 1일 도입된 철선의 규모도 10t급으로 한 번에 60명의 승객과 차량 6대를 운반할 수 있었다. 특히 승객이 몰리는 출퇴근 시간에는 1시간에 3~4회, 낮 시간대는 시간당 1회 정도 고령과 달성을 오갔다. 당시 하루 평균 100여 대의 차량과 1,000여 명의 승객을 실어 날랐다. 운임은 마을 사람이면 1년에 벼 1말 5되 정도를 선주에게 지불하고, 일반인은 1인당 500원, 중학생 이하는 무료였다.
도선이 운항될 때만 해도 여름철이면 대구 시민들이 고령 쪽 낙동강 모래사장을 찾았다. 다산면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1978년 8월에는 모래찜질이나 목욕을 하기 위해 사문진나루터를 이용한 사람이 8,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덕분에 화원유원지도 유명해졌다.
철도 개통 후 사문진나루터는 대구 이출입 화물을 철도편에 빼앗겨 예전과 같은 대구와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고, 1993년 7월 1일 사문진교가 개통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아울러 사문진교 준공과 동시에 한여름 나루터 근처 모래사장을 찾던 피서객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2010년 현재 사문진나루터는 대구광역시 정수장으로 바뀌어 있다. 사문진나루터가 있던 곳 위로는 2009년 총사업비 400억 원을 들여 교량 780m, 연결 도로 670m를 2차선에서 4차선으로 확장 개통한 사문진교가 설치되어 있다.
☞참고사항:산행시 발생한 개인의 어떠한 사고도 본 산악회에서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꼭 안전산행에 유의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