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수사 1번지 미국에서도 살인자로 기소돼 10여 년 넘게 옥살이를 하던 죄수가 무죄로 풀려나 인권국가라는 자존심에 먹칠하는 사례가 빈번히 일고 있다. 강요된 자백이나 목격자의 거짓증언이 지금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현장수사에서부터 과학수사(forensic science)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범인 검거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DNA지문 감정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수사 기술이다. 또 억울하게 기소된 혐의자를 풀어주는 기술이기도 하다. 사이언스타임즈는 생명과학의 열쇠라고 할 수 있는 DNA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과학수사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의미에서 ‘DNA와 과학수사’ 시리즈를 마련했다. 재미있게 읽었으면 한다. 또 과학수사 관련 종사자들에게 참고 자료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註]
“판단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
▲ 오제이 심슨 사건은 과학수사를 위해서 현장자료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일깨워 주었다. ⓒ
과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과학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과학을 사실이라고 믿는 이유도 그렇다. 만약 어떤 과학이 사실적인 증거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그 과학에는 ‘과학’이라는 위대한 단어를 부여할 수가 없다.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이란 사실이고 진실이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진실이 도용(盜用)되는 경우가 있다. 사람에 의해서다. 사람이 과학적 진실을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면 진실이 왜곡될 수 있다. 과학은 거짓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거짓을 숨기기 위해 진실인 과학을 나쁘게 이용할 뿐이다. 오제이 심슨 사건이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과학수사는 과학적으로 수사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용의자를 범죄인으로 단정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증거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면 무죄’라는 원칙이다. 아무리 심증이 간다 해도 설득력 있는 과학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면 혐의를 씌울 수 없다는 내용이다.
과학적인 증거는 상황과 연결돼야 한다. 범죄가 일어났던 당시의 환경과 연결돼야 한다. 미국의 유명한 법의학자로 오제이 심슨 사건에서 변호인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헨리 리(Henry C. Lee) 교수의 이야길 들어 보자. 대만에서 태어나 경찰서 서장을 지냈다. 1965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현재 미국 애리조나 주 게이트웨이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과학수사 강좌를 가르치고 있다. 40년 동안 6천여 사건에 관여했다.
“과학적인 증거는 상황에 맞아야 인정될 수 있어”
“과학수사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강간 사건의 경우, 또는 강간 살인사건의 경우, 여성의 질 속에서 발견된 남성의 정액이 DNA지문 감정 결과 용의자의 것과 일치한다고 해서 그 용의자를 범인으로 단정한다는 건 섣부른 판단이다. 그와 같은 판단은 오히려 과학수사의 정확성을 흐리게 한다.
DNA 과학은 절대적이다. DNA지문은 과학수사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의 질 속의 DNA지문이 피해자나 수사기관이 지목한 용의자의 DNA지문과 일치한다고 해서 용의자를 범인으로 몰아 부친다면 상당한 오류를 범할 수가 있다. 상황도 일치해야 한다.
▲ 미국의 인종갈등은 여전하다. 한 포스터를 통해 흑인들의 울분을 나타내고 있다. ⓒ
수사를 진행하고 거기에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사람이지 DNA지문이 아니다. DNA지문은 여성의 질 속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설명해 준다. 그러나 남녀 간의 성적 접촉이 합의에 의한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지, 합의가 아니라 강제적인 ‘폭행’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에 대해 설명을 하고 판단하는 것은 DNA가 아니라 사람이다”
“현장에서 심슨의 DNA지문이 나타나”
그는 또 과학수사에 의문점을 던지기도 한다. 특히 사망시간을 추정하는 데 있어서 사체가 처한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사망시간은 유동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과학이 절대적이지만 그 과학을 통해 판단하는 수사요원이나 검찰의 노력이 좀 더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다. 의문에 대한 충분한 해답이 있어야 한다.
심슨을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했을 때 그는 왼쪽 손가락에 상처가 있었다. 그 이유에 대해 심슨은 분명한 이유를 대지 못했다. 수 차례 번복했다. 수사기관은 그 상처는 심슨이 그의 전처와 그녀의 남자친구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상처라고 굳게 믿었다.
또 심슨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 이유가 있다. 범죄현장에서 발견된 몇몇 혈흔들을 조사한 결과 일부 혈흔들이 심슨의 것으로 판명됐다. 혈흔을 통한 DNA지문은 심슨의 DNA지문과 일치했다. 심슨을 용의자에서 혐의자로 단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수사기관은 이 정도면 충분히 그를 기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살인현장에서 심슨을 봤다는 목격자도 나타났다. (나중에 이 목격자는 상업성을 노린 언론사가 돈을 주어 거짓 진술을 한 것으로 판명됐다.) 당시 미국의 최고 영웅심슨이 살인용의자로 지목됐을 때만 해도 국민의 70%는 심슨이 살인자가 아닐 것이라고 믿었다.
타블로이드 TV, 거액을 주고 거짓 증언자를 만들어
그러나 한 타블로이드 TV쇼에 목격자라고 주장한 클라크라는 여성이 나타나 범죄현장에서 차를 타고 사라지는 심슨을 보았다는 충격적인 진술을 하자 여론은 크게 바뀌었다. 다시 70% 국민이 심슨을 살인자로 믿은 것이다. 그러나 목격자라고 한 이 젊은 여성은 방송사로부터 7천600 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거짓 진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 과학수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현장 자료를 완벽하게 보존하는 일이다. ⓒ
또 심지어 범죄현장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 칼 가게 주인은 선정적인 신문사로부터 1만2천 달러나 받아 심슨이 칼을 사갔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칼은 발견되지 않았다) 오제이 심슨 사건이 미국 언론 역사상 추악한 사건으로 비난 받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금품이 오고 가면서 거짓 증언을 만들어 낸다. 사실 미국 언론사들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면 한몫 챙기기 위해 증인들을 돈으로 유혹하기로 유명하다.
결국 과학수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DNA지문을 놓고 검찰과 변호인단의 뜨거운 공방이 오고 갔다. 현장에서 여러 가지 증거물이 수집됐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장갑에 묻은 피에 대해서다. 그 혈흔은 DNA지문 감식 결과 심슨의 지문과 일치했다. 그런데 더 이상의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유가 있다.
“현장의 혈흔은 조작됐을 가능성 많아”
헨리 리 박사를 축으로 한 변호인단은 검찰이 제시한 DNA지문 증거에 반박을 가했다. 무죄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뉴펠트 변호사를 비롯해 미국 최고의 변호사들로 이루어진 이 팀을 언론은 ‘드림 팀’이라고 불렀다. 드림 팀은 올림픽에 참가하는 미국 농구팀을 지칭한다. 인기 스포츠 미국농구의 최고 선수들로 구성돼 있다.
변호인단은 우선 증거가 되는 혈흔의 보존상태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문제의 장갑이 다른 곳에서 옮겨 왔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만약 그 장갑이 살인자의 장갑이 아니라 누군가의 피를 묻히고 그 장갑을 현장에 갖다 놓았다면? 더구나 유력한 용의자의 피를 묻힌 장갑을 그 자리에 갖다 놓았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선 증거가 되는 문제의 장갑은 심슨의 손에 맞는 장갑이 아니었다. 덩치 큰 심슨의 손에 비해 턱없이 작았다. 그 장갑을 낀 채 칼을 들고 두 사람을 죽였다는 데는 의문이 많다는 것이다. 심슨이 현장에 있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증거는 그렇게 많지 않다. 장갑이 중요했다. 범인이 그 장갑을 현장에 버리고 갔을까? 그 장갑은 마치 증거를 일부러 남기려고 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현장의 장갑에 심슨의 혈흔 발견돼, 그러나 손에 맞지 않아
두 구의 시체가 발견된 장소로 가려면 2m가 넘는 철조망 벽을 넘어야 한다. 심슨은 풋볼을 위한 과도한 운동으로 무릎에 통증을 호소할 정도로 관절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철조망 벽에는 어떠한 침입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헨리 리 박사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문제의 장갑은 수사관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없었다. 문제가 불거진 이후에 나왔다는 것이다. 중요한 자료며 결정적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그 장갑은 최초의 범죄현장에 없었고 다른 곳으로부터 왔을 거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 대만 출신의 헨리 박사는 미국의 과학수사를 이끌고 있다. 오제이 심슨이 풀려 나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장갑이 최초 현장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수사기관 요원들이 수집을 못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다른 곳에서 온 것인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수사기록과 현장의 자료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장갑은 포함돼 있지 않았다. 수사기관의 결정적인 실수와 태만인지, 조작인지가 분명치 않다.
변호인단의 의문제기에 “장갑이 현장에 있었는데 실수로 자료에 포함시키지 못했다”는 변명은 통하지가 않는다. 헨리 리 박사는 심슨의 DNA지문을 감정하기 위해 수집한 혈액 가운데 10분의1에 해당하는 극히 소량의 피만 사용됐고 나머지 혈액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에 검찰 측은 대답을 못했다.
과학수사를 위해서는 ‘완벽한 자료보존’이 필수
그 중요한 심슨의 혈액을 어디에 썼느냐다. “나머지는 버렸다”는 말은 통할 수가 없다. 범죄현장의 자료를 함부로 취급했다면 수사기관의 주장 역시 신뢰가 없고 설득력도 없다. 만약 그 혈액을 누군가 범죄현장에 고의적으로 묻히지 않았다고 누구 장담할 것인가?
과학수사의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증거물 수집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로 수사기관이 엄청난 곤혹을 치른 사건이다. 수사기관은 아주 훌륭한 증거를 갖고 있다 해도 범죄현장을 재현해 낼 수 없다면 그것 또한 문제다. 상황논리가 맞아야 한다. 변호인단이 제기하는 의문에 대해 충분한 근거를 댈 수 있어야만 한다.
결국 변호인단의 변론은 배심원들의 마음을 돌려 놓았다. 심슨이 무죄판결을 받은 것이다. 이 사건은 법정에 제출되는 증거물은 현장에서부터 이동과정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준 사건이다. 즉 조작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어야 하며 과정이 완벽해야 한다.
미국의 고질적인 인종갈등을 야기시켜 미국을 흑과 백 두 편으로 갈라서게 했던 이 사건은 지금도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다. ‘유전 무죄’로 돈이 많은 심슨이 수백만 달러를 들여 최고의 변호사들을 기용해 살인혐의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꺼림칙하고 개운치 못한 사건으로 계속 남아 있다.
셜록 홈즈, “충분한 증거 없이는 속단하지 말라”
미해결 사건으로 남아 있는 ‘오제이 심슨 사건’은 과학수사기법이 더욱 발전한다 해도 해결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해결책은 진짜 범인이 스스로 나타나 모든 것을 털어 놓는 일이다. 그 가능성은 심슨에게도 있다. 피해자 신원이 확실하고 어떤 방식으로 살인이 자행됐는지를 알면서도 과학수사를 자랑하는 미국이 결국 해결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과학수사가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이야기다.
▲ 셜록 홈즈는 섣부른 자료로 앞질러 판단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고 경고한다. ⓒ
헨리 리 박사가 지적한 이야기다. “최초의 사건현장에서 니콜의 등에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 피만 확인됐다면 범인이 심슨이든, 다른 사람이든 간에 사건은 잡음 없이 신속하게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혈액은 지워졌고, 심지어 니콜의 시체는 깨끗이 씻긴 채 보관돼 있었다. 니콜의 시체를 씻는다는 것은 증거를 씻어 없애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The cardinal rule of criminal detection was carved in stone more than a century ago. It is a capital mistake to theorize before you have all the evidence,… It biases the judgment.”
“범죄수사의 중요한 원칙이 백 년 전 돌에 새겨져 있네. ‘충분한 증거도 확보하지 못한 채 속단해서 이론을 세우는 것은 커다란 실수’라는 걸세.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걸세.” 수사기관은 처음부터 심슨을 아예 범인으로 지목하고 수사를 시작한 것은 아닐까? 범인은 아주 엉뚱한 곳에서 나타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과학수사의 개척자 셜록 홈즈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