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경(蘇 慶)
577년(진지왕2)~686년(신문왕6)
공은 소백손의 29세손이고, 신라 고허촌장 소벌공의 25세손이며, 포명은 소알천이다.
636년(선덕여왕 5) 백제가 독산성을 침입할 때 장병을 이끌고 나가 이를 물리치고 637년에 대장군이 되었으며, 683년에 칠중성(七重城;적성)에서 고구려 군을 격퇴하고 이찬겸 각간이 되었다.
647년(진덕여왕 1) 2월에는 상대등(신라 6대 귀족회의 의장)이 되었다. 654년(태종무열왕 1) 진덕여왕이 서거하자 여러 신하들이 공에게 섭정(왕으로 추대)을 간청하였으나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신은 이미 늙었으며 또한 덕행이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나 춘추(春秋)는 덕망이 숭중하고 실로 제세의 영걸이라 아니할 수 없다"하고 김춘추를 왕(태종무열왕)으로 추대하였다. 656년 태종무열왕이 경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공의 조상 소벌을 문열왕으로 봉하였다.
진주소씨의 시조인 소경(蘇慶)은 진공의 29세손으로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경신년 봄 3월 2일에 진주의 도사곡(塗斯谷)으로 옮겼고, 상대등공의 15세손인 게령이 고려조에서 크게 현달하여 형부원외랑 신호위 상장군 이부상서 등을 지내고, 그 따님이 헌종(獻宗)의 비가 되어 회순왕후(懷純王后)에 책봉됨으로써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우리나라 소씨가 진주를 관향으로 삼은 것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진주소씨 세덕록을 참고 하십시오)
소복서(蘇福瑞)
661년(문무왕 1)~742년(경덕왕 1)
시조인 각간 경(慶)의 손자이며, 아명은 치자이다.
공은 677년(문무왕 17)에 일직이 화랑이 되었는데, 679년 2월 탐라(지금의 제주도)정벌 때 큰 공을 세웠다. 벼슬은 696년(효소왕 5) 청주 총관을 지냈으며, 707년(성덕왕 6)에 굶주린 백성에게 구휼을 베풀었다.
소억자(蘇億滋)
679년(문무왕 19)~739년(효성왕 3)
청주총관 복서(福瑞)의 아들이다.
711년(성덕왕 10) 한주 총관을 지내고, 725년(성덕왕 24) 4월 발해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소후로(蘇後老)
한주총관 억자(億滋)의 아들이다.
공은 각간 소경, 시중 소희영, 소화, 소사와 함께 5정승 중의 하나이다.
소후준(蘇後俊)
710년(성덕왕 9)~800년(애장왕 1)
한주총관 억자의 아들이며, 후로의 아우이다.
737년(효성왕 1) 상주 총관을 지냈다.
소검백(蘇劍白)
742년(경덕왕 1)~830년(홍덕왕 5)
상주총관 후준의 장자이다.
775년(혜공왕 11) 이찬 김은거의 난을 평정하고, 790년(원성왕 6) 웅주 도독을 지냈으며, 779년(혜공왕 15) 8월에 이찬 염림, 시중 정문의 난을 평정하였다.
소상영(蘇尙榮)
775년(헤공왕 11)~845년(문성왕 7)
웅주도독 검백의 아들이다.
820년(헌덕왕 12)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821년 청주 도독이 되었다.
825년(헌덕왕 17) 소촌에 은거하였다.
소희영(蘇希榮)
웅주도독 검백의 아들이며, 상영의 아우이다.
신라시대에 시중을 지냈다.
소 목 (蘇 穆)
800년(애장왕 1)~870년(경문왕 10)
청주도독 상영의 장자에며, 시호는 희경(僖景)이다.
838년(민애왕 1) 김양의 난을 평정하였고, 후에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유소국사> <풍류사> 등의 많은 저서를 남겼다.
청주도독을 지냈다.
소 화(蘇 和)
청주도독 상영의 아들이다.
신라시대에 시중을 지냈다.
소 사(蘇 思)
청주도독 상영의 손자이며 목의 아들이다.
시호는 위정(威靜)이며, 신라 때 시중을 지냈다.
소 은(蘇 恩)
청주도독 목의 아들이며, 시호는 효정9孝定)이다.
850년(문성왕 12)에 웅주도독을 지내고, 860년 (헌앙왕 4) 당나라에 유학하여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소 송
웅주도독 은의 아들이다.
885년 강주도독을 지내고, 887년(진성여왕 1) 도적 개훤의 난을 평정하였다.
소 문 (蘇 汶)
웅주도독 은의 아들이며, 강주 도독 송의 아우이다.
소목, 소은과 함께 당시 소씨의 삼대문장이라고 칭송을 받았다.
공은 도한 947년9고려 정종 2) 진주 소씨 최초의 대동보인 <동근보)를 발행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로 전해지며, 지금은 그 서문만 남아 있다.
소격달(蘇格達)
891(진성영왕 5)~983(성종 2)
자는 유달(有達), 호는 모은(募隱), 시호는 강평(康平)이다.
시조 경의 11세손이며, 강주도독 송의 아들이다.
914년 화랑이 되고, 916년(신덕왕 5) 하동에 증산산성을 쌓아 후백제를 방어한 공으로 하동태수가 되었다.
당시 후삼국의 난세로 925년 왕봉규가 권지강주사가 되어 독립국 행세를 히게 되고, 강주 고을의 향방이 난처해지자 공은 고려에 귀부할 것을 결심하고, 926년(태조 9) 군사 1턴을 거느리고 고려에 들어가 대장군이 되어 태조 왕건의 삼한통합을 도왔다.
927년에 태조가 강주(진주)를 공략할 때 이에 참전하여 왕봉규를 멸하고, 934년(태조 17) 태조가 운주를 공략할 때 큰 공을 세웠다.
1054년(문종 8) 12월에 삼한벽상공신 태부에 증직되었다.
아들은 진흠(振欽)이며, 5세손 계령의 딸은 헌종비 희순왕후가 되었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고려사 실록이나 진주소씨 세덕록을 참고 하십시오)
소 현(蘇 顯)
시조 경의 14세손이다.
지방관으로 연주 방어부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으며, 양대춘의 주달로 이부상서에 올랐다.
소계령
975(광종 26)~983(성종 2)
자는 활령, 호는 순곡, 시호는 문간이며, 시조 경의 15세손이고, 태부 격달의 현손이고, 현의 아들이다.
1070년(문종 24) 형부 원외랑,신호위 상장군을 거쳐 이부상서를 지내고, 1094년(선종 11) 헌종이 즉위하자 헌종의 국부가 되어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딸은 희순왕후이다.
소광보(蘇光輔)
진산부원군 계령의 아들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냈다.
소경보(蘇景輔)
진산부원군 계령의 아들이고, 문하시중 광보의 아우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냈다.
소세기(蘇世麒)
문하시중 경보의 아들이며,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고려 때 이부상서를 지냈다.
소세린(蘇世麟)
문하시중 경보의 아들이고, 이부상서 세기의 아우이며, 시호는 문정9文貞)이다.
1147년(의종 1)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냈고, 인종에게 선무팔조(先務八條) 충신효제에의염치(忠信孝悌禮儀廉恥)를 백성에게 가르칠 것을 건의하였다.
소이관(蘇以寬)
1109년(에종 4)~1215년(고종 2)
시조 경의 18세손이며, 문하시중평장사 세린의 아들로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무신의 난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한때 관직을 떠났다가 1171년(명종 1) 평장사를 거쳐 문하시중이 되었고, 1173년 수문전 대학사를 지냈다.
소신관(蘇信寬)
문하시중평장사 세린의 아들이며, 수문전 대학사 이관의 아우이다.
고려 때 상서령(尙書令)을 지냈다.
소경손(蘇慶遜)
1132년(인종 10)~1196년(명종 26)
수문전 대학사 이관의 아들이며, 시호는 장렬(莊烈)이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집권 후 사정의 난을 일으키자 이 난을 평정하고 그 공으로 상장군겸 개성순무사에 올랐다.
그 후 추밀원사가 되었으나 무신정치로 조정이 어지럽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소한공(蘇漢公)
추밀원사 경손의 아들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고려 때 평장사에 이르렀다.
소한경(蘇漢卿)
추밀원사 경손의 아들이며, 평장사 한공의 아우이고 시호는 문각(文慤)이다.
고려 때 학자로 향민의 칭송을 받았다.
소무종(蘇茂宗)
평장사 한공의 아들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려 때 평장사를 지냈다.
소무숭(蘇茂崇)
1183(명종 13)~1240년(고종 27)
자는 숭곤(崇坤), 호는 중봉(重峰)이며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평장사 한공의 아들이며, 무종의 아우이다.
고려 때 성균관 생원으로 동지추밀원사가 되었다.
소 함(蘇 涵)
호는 월호(月湖)이며, 시조 경의 22세손이고, 무종의 아들이다.
고려 때 산원동정을 거쳐 좌우위 상장군에 이르렀으며, 1254년(고종 41) 몽고의 침입 때 2천명의 보졸(步卒)을 거느리고 아모간의 1만 군사와 싸우다 진위에서 순절하였다.
소희철(蘇希哲)
자는 군철(君哲)이며, 좌우위상장군 함의 아들이다.
일찍이 문과에 올랐으며, 몽고의 침입 때 대군을 맞아 싸우다 아버지 함이 순절하자 이에 격분하여 수많은 적을 죽였다.
후에 정의대부,금오위상장군을 거쳐 상장군이 되었다.
시호는 문공(文恭)이다.
소문철(蘇文哲)
자는 군지(君之)이며, 좌우위상장군 함의 아들이고, 상장군 희철의 아우이다.
고려 때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진주소씨 세덕록을 참고 하십시오)
소 정 (蘇 靖)
자는 성원(聖元)이고 호는 추동이며, 상장군 희철의 아들이다.
1270년(원종 11) 문과에 올라 1292년(충렬왕 18)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소약우(蘇若雨)
1276년(충렬왕 2)~1345년(충목왕 1)
정당문학 정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한 후 봉익대부에 오르고, 판도판서를 역임하였다.
소약운(蘇若雲)
1278(충렬왕 4)~ ?
정당문학 정의 아들이고, 판도판서 약우의 아우이다.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가 부사를 역임하고, 1344년(충혜왕 복위 5) 경원적을 토벌하고 염주병마사를 지냈다.
소을경(蘇乙卿)
1325년(충숙왕 12)~1385년(우왕 1)
판도판서 약우의 아들이다.
1350년(충정왕 2)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가 1365년(공민왕 14) 광정대부에 오르고 개성윤이 되었으며, 청백리로 유명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판도판서를 지냈으나, 잦은 정변과 외침으로 나라가 어지럽자 1374년 진위로 낙향하였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진주소씨 세덕록을 참고 하십시오)
소 천(蘇 遷)
1352년(공민왕 1)~1396년(태조 5)
판도판서 을경의 아들이다.
포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1369년(공민왕 18) 문과에 장원하고, 사재감 소윤에 이르렀다.
1392년(공양왕 4)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포은선생이 변을 당하자 전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진주소씨 세덕록을 참고 하십시오)
소 율(蘇栗)
판도판서 약우의 손자이며, 을신의 아들이다.
고려 때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소 희(蘇禧)
판도판서 을경의 손자이며, 사재감 소윤 천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부위로 중군사정을 지냈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진주소씨 세덕록을 참고 하십시오)
소희민(蘇希閔)
판도판서 약우의 증손이고, 습의 아들이다.
고려 때 벼슬이 우간의대부에 이르렀다.
소호인(蘇好仁)
조선 때 승지를 지냈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진주소씨 세덕록을 참고 하십시오)
소효식
중군사정 희의 아들이다.
조선조에 한성부 판관을 지냈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진주소씨 세덕록을 참고 하십시오)
소효철
자는 자유(子由)이며, 판관공 효식의 아우로 1440년(세종 22)에 태어났다.
관직은 능성현령에 이르렀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진주소씨 세덕록을 참고 하십시오)
소현손(蘇玄孫)
1431년(세종 13)~1492년(성종 23)
자는 경직(景稷), 호는 기암(畸庵)이며, 판도판서 을경의 증손이고 우의 아들이다.
1453년9단종 1)에 진사에 오른 후 이어 문과에 급제하고, 1471년 호조도사, 1474년(성종 5) 병조 참지, 1480년(성종 11) 이조참판의 벼슬을 지냈다. 이어 1483년 정헌대부,호조판서에 올랐고, 1487년(성종 18) 홍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소경부(蘇敬夫)
호는 정헌(靜軒)이며, 우간의대부 희민의 아들이다.
1390년9공양왕 2) 문과에 급제하였고, 조선조에 경주부윤,영남순찰사와 예조참판겸 집현전 대제학에 올랐다.
그 후 하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제국공신의 조회(朝會)에 참석하였을 때 천자가 시제를 내자 제일 먼저 시를 지어 장원하였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진주소씨 세덕록을 참고 하십시오)
소우석(蘇禹錫)
자는 구범(九範)이다.
1456년 생원이 되고, 1459년(세조 5)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거쳐 승문원 판교를 역임하였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진주소씨 세덕록을 참고 하십시오)
소 영(蘇 榮)
판도판서 을경의 현손이며, 신의 아들이다.
조선 때 부사를 지냈고, 함경병사에 이르렀다.
소자파(蘇自坡)
자는 미수이며, 중군사정 희의 손자이고, 한성부 판관 효식의 아들이다.
조선 때 사직서령과 의빈부도사를 거쳐 구례현감을 지냈다.
세온, 세량, 세공, 세검, 세양, 세득, 세신 등 공의 아들 일곱이 모두 벼슬길에 나아가 현달하는 명예를 얻기도 하였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진주소씨 세덕록을 참고 하십시오)
소기파(蘇起坡)
한성부판관 효식의 아들이고, 자파의 아우이다.
세종 때 일본에 대한 회유책으로 부산포(富山浦:동래)와 염포(鹽浦:울산),제포(薺浦:웅천)등 세 포구를 열어 각각 왜관을 설치하고 일본인과의 교류, 교역, 교통의 처소로 삼은 이래, 일본 거류민들이 날이 갈수록 느르어나며 우리나라 사람들과의 충돌 사건이 자주 일어나므로 이에 통제를 가하자, 1510년(중종 5) 4월 대마도주 휘하 군사의 지원을 얻은 일본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제포, 부산포를 함락시키고 염포에 침입하였는데, 이것이 삼포왜란이다.
공이 무과에 급제하여 1510년(중종 5) 웅천 부사로 재임하던 중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조카인 첨사 세공과 함께 왜적을 맞아 전력을 다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웅천성이 함락되어 비분에 잠겨 있었다.
그 때 구원을 나온 전라좌도방어사 황형(黃衡)과 경성우도방어사 유담년(柳聃年)을 맞아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왜적과 일대 격전을 벌여 그들을 섬멸하고 난을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이듬해인 1511년(중종 6) 전라좌술사가 되고,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공이 누차 임지에서 일본인을 다스릴 때 위엄과 기절이 늠름하여 명장의 기풍이 있었다고 한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진주소씨 세덕록을 참고 하십시오)
소계파(蘇繼坡)
공은 판서공 효식의 셋째 아들이며, 찬성공 자파의 둘때 동생이다.
1460년(세조 6)에 태어나고,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선전관청도사와 오주만호를 역임하였다.안타깝게도 일찍이 별세하여 웅성진첨절제사에 오르는데 말았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진주소씨 세덕록을 참고 하십시오)
소숙렴(蘇叔濂)
우간의대부 희민의 손자이고, 집현전 대제학 경부의 아들이다.
황간군수로 부임하여 청백리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워 공덕을 기렸다.
통훈대부, 영광군수에 이르렀다.
소 후(蘇 後)
호는 청암이며, 정의 7세손이다.
제주목사와 전국 칠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생육신및 사육신과 교유하였고, 세조가 등극하자 낙향하였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진주소씨 세덕록을 참고 하십시오)
소사식(蘇斯軾)
자는 경파(景坡)이며, 정당문학 문철의 8세손이다.
1472년(성종 3) 진사가 되고, 1474년(성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예조좌랑을 거쳐 온성 판관을 역임하였다.
1477년(성종 8) 성종으로부터 녹피(鹿皮)를 하사받았고, 1483년(성종 14) 경기도 도사, 공조좌랑, 교리, 경기도 부사 등을 거쳐 삼사 한림부사에 이르렀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진주소씨 세덕록을 참고 하십시오)
소세온(蘇世溫)
자는 화중(和仲)이며, 찬성공 자파의 장남이다.
무예가 뛰어났으며, 음보로 벼슬길에 나아가 임치진첨절제사가 되었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진주소씨 세덕록을 참고 하십시오)
소세량(蘇世良)
1476년(성종 7)~1528년(주우종 23)
자는 원우(元佑), 호는 곤암, 병암이며 의빈부 도사 자파의 아들이고 좌찬성 세양의 형이다.
1496년9연산군 2) 생원시를 거쳐
1507년(중종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에 기용된 후 대간, 시종을 거쳐 1516년(중종 11) 용담 현령으로 부임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이도(吏道)를 쇄신하여 칭송을 받았다.
수찬, 지평, 장령, 응교, 사간 등을 거쳐 1524년(중종 19) 대사간에 승진되었다가 부모의 봉양을 위해 남원부사로 자원하여 내려가서 졸하였다.
익산의 화암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병암집(屛巖輯)>이 있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진주소씨 세덕록을 참고 하십시오)
소세공(蘇世恭)
자는 경지(敬之), 호는 노포정9老圃亭)이며, 찬성공 자파의 3남이다.
어려서부터 중형 곤암공을 따라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과거에 낙방한 후 곤암공의 권유로 무예를 익히니 주위에서 공을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성취하였으나 시험에는 실패하여 주위를 안타깝게 하였다.
그러던 중 1510년(중종 5)에 숙부인 병사공을 따라 왜적을 정벌하여 공을 세워 마량진수군첨절제사에 올랐다.
1559년(명종 14)에 노직으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노년에 전원에서 손수 농사짓는 것으로 낙을 삼고 유유자적하며 학문에 열중하니 세상에서 은자(隱者)라 칭했다.
소세검(蘇世儉)
1486년(성종 17)~1573년(선조 6)
자는 약이, 호는 쌍봉이며, 의빈부 도사 자파의 3남으로 좌찬성 세양의 형이다.
소세양(蘇世讓)
1486년(성종 17)~1562년(명종 17)
자는 언겸, 호는 양곡,퇴재,퇴휴당이며 의빈부 도사 자파의 아들이다.
1504년(연산군 10) 진사가 되고,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주서, 부수찬, 정언을 역임하였다. 이어 수찬이 되어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복위를 거론하여 현릉에 이장케 했다.
1514년(중종 9)에 대제학 신용개(申用漑)의 천거로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를 했고, 이조정랑,장악원 첨정, 장령, 사인, 교리, 직제학을 지냈으며, 사성이 되어 1521년(중종 16) 영접사 이행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 당고를 맞아 시문으로 응답하여 문명을 떨쳤다.
1545년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인 윤임(尹任) 일파의 탄핵을 받아 사직했으나, 이 해 명종이 즉위하여 을사사화로 윤임등이 몰락한 후 다시 기용되어 좌찬성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익산에 은거하였다.
소세득(蘇世得)
자는 군직(君直)이며, 찬성공 자파의 6남이다.
1515년(중종 10)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조봉대부 홍양현감에 임명되었다.
현에 부임하여 선치하니 현민들이 공의 높은 덕을 기려 선정비를 세웠다.
소세신(蘇世臣)
찬성공 자파의 일곱째 아들이다.
천성이 공손하고, 자품이 근신하였으며, 벼슬은 첨추를 지냈다.
소세영(蘇世榮)
1486년(성종 17)~1553년9명종 8)
자는 화정(和政), 호는 계전(桂田)이며, 홍문관 대제학 현손의 손자이고, 자언의 아들이다.
1540년(중종 35) 조산대부,상원군수로 부임하여 문무를 권장하고 군민을 사랑하여 농업과 산업을 권장, 군민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니, 이를 기리는 선정비가 세워졌다.
1699년(숙종 25) 상원 대덕서원에 제향되었다.
소 흡
무과에 급제하여 1564년(명종 19) 삭주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고, 이어 평안도 병마우후가 되어 이듬해 호족9豪族)이 침입하자 이를 토벌하였다.
1556년(명종 22)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고, 1566년(선조 2)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소 연(蘇 沿)
1390년(공양왕 2)~1441년(세종 23)
호는 행정(杏亭)이다.
효행과 덕행으로 천거되어 정릉 참봉이 되었고, 직장을 거쳐 노성현감에 이르렀다.
남원의 호암서원, 정읍의 남고서원에 제향되었다.
소 순(蘇 巡)
자는 경부(警夫), 호는 보진당이다.
숙부 세양을 모시고 연경에 갔을 때 중국인들이 공의 필법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소 봉(蘇 逢)
자는 숙경(叔卿), 호는 화강산인(花江散人)이다.
문과에 장원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부제학에 이르렀으며, 학자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소 달(蘇 達)
자는 언명(彦明)이며, 동지중추부사 기파의 손자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1555년(명종 10) 삼포왜란 이후 일본에 대한 세견선의 감소에 곤란을 겪던 왜인들이 60여척의 배를 이끌고 전라도 달량진에 쳐들어와 약탈을 자행하며 영암까지 쳐들어오며 서울로 진격한다고 큰소리를 쳤으니, 이것이 을묘왜변이다.
조정은 이에 당황하여 이준경9李俊慶)을 전라도 도순찰사, 김경석(金景錫), 남치근(南致勤)을 좌우방우사로 삼고, 그는 전부장(前部將)이 되어, 영암의 수성장으로 내려온 이윤경(李潤慶)과 전라, 충청도의 중으로 조직된 승군(僧軍)과 합세하여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또 의병 3백명을 모아 적진에 돌진하여 적의 두목을 베고 승승장구 마구 쳐들어가다가 영암에서 그가 탄 말이 실족하여 고꾸라지는 바람에 안타깝게 전사하고 말았다.
그의 손자 률도 조부가 순절하였음을 통분히 여기고 분기하여 장검을 쳐들고 적의 목을 수없이 베다가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뒤에 가선대부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추증되었다.
소상진(蘇尙眞)
1548년(명종 3)~1592년(선조 25)
조선의 의병으로 보성 출신이며, 자는 실보(實甫), 호는 서암(書庵)이다.
신라 각간 경의 33세손이며, 옥연포 만호 규의 장남이다.
19세때 현령 남평인 문준(文準)의 딸과 결혼하였고, 다년간 병서를 읽고 무예를 연마하여 담약과 용력을 겸전하여 통훈대부 사재감 주부에 제수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달천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연히 일어나, 근왕하기 위해 필마단창으로 상경하던 도중 전주에서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을 만나 의병을 모집한 후 그와 같이 영남으로 내려갔다.
진보군수 임계영이 의병을 일으켜 분전한다는 말을 듣고 그와 합세하여 임게영이 우의장, 장윤이 부장, 그가 별장이 되었다. 그는 항상 홍의를 입고 선두에서 돌격하여 연전연승하니, 왜적이 옹의만 보면 홍의장군이 나타났다고 하며 겁에 질려 그의 예봉을 피해 달아났다.
부장 장윤이 그의 용맹을 보고 아끼면서 "나라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의병 뿐이요, 의병이 믿는 것은 장군 밖에 없으니, 자중하여 목숨을 보전하기 바라오."하자 "장부가 전지에서 어찌 죽음을 두려워 하리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나의 듯이오."라고 대답하였다.
그 해 12월 13일 성주 싸움에서 불과 의병 백여명으로 천여명의 적을 상대하여 분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당하지 못하고 장병이 후퇴하려 하자 "적을 보고 피하는 자 어찌 의병이라 하랴."고 외치며 혼자 적진에 뛰어 들어가 좌충우돌 무수한 적을 베니, 아군의 사기가 충천하여 승세를 굳혔으나 패주하는 적장 모리휘원을 추격하다가 적탄을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조정에서 공의 숭고한 정충보국의 정신을 가상히 여겨 통정대부 예조참의에 증직하였고, 나주의 정렬사에 배향하였다.
1978년 여러 후손들이 발의하여 국가의 보조와 문중의 협조로 이를 중수하고, 군수가 사적비를 세웠다.
소성흠(蘇性欽)
자는 성경(性敬), 호는 모헌(慕軒)이다.
부모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지극하였고, 지조와 품행이 독실하였다.
소인혜
자는 경망9景望)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진위에서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하였다.
난이 끝난 후에는 용인 덕성동에서 문명을 떨쳤다.
소논동(蘇論東)
자는 사원(士元), 호는 모재(募齋)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우고 수문장이 되었다.
소덕복(蘇德福)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공이 수문장으로 호종하여 호성공신에 올랐다.
소 황(蘇 滉)
1550년(명종 5)~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도암(島巖)이며 아버지는 인세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제와 함께 창의하여 군량 수백석을 모아 군량이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안찰사가 그 공을 조정에 알려 통훈대부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 후에도 누차 전공을 세웠고, 아우인 주부 제는 왜적을 쫒아 진주에 가서 성을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소 제(蘇 濟)
1551년 ~1593년(선조 26)
조선의 의병이고 자는 경즙(景楫), 호는 적은(迪隱)이며, 직장 연의 6대손이고 인세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용력이 비범해서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좋아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아버지가 병으로 위중하자 약을 구하러 3백리 길을 하루 사이에 다녀 와 달여 드려서 수개월을 연명시키기도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로 피난한 가운데 동복현감 황진(黃進)이 병졸을 이끌고 남원을 지날 때 백의로 왕진의 군문에 들어가니 황진이 기꺼이 맞아들여 병마 한 부대를 주었다. 그는 군중 앞에서 칼을 어루만지며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을 다짐하자 장졸이 모두 울었다 한다.
황진과 함게 진안 방면에 들어 온 적을 무찌르고, 7월에 전주에 침입한 적을 맞아 싸워서 대승하였다.
금산에 있는 적이 쳐들어올 기미가 보이자 공시억, 위대기, 황박 등과 함께 진산 이현에서 주야로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대파하여 물리쳤다. 그 때 공은 많은 상처를 입어 온 몸이 피로 물들었으나 30여 적을 베었다 한다.
이듬해 봄에 김천일, 최경희, 이종인, 황진과 함께 진주에 가서 성을 수비하다가 6월 19일 적이 단성, 곤양, 사천 등지를 차단하고 진주를 향해 쳐들어오니 아군은 고립되고 적세는 산과 들을 메웠다. 매일같이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비오는 듯한 적탄에 맞아 기절하여 땅바닥에 쓰러진 적도 많았다.
28일 왜적이 땅 밑으로 굴을 파고 쳐들어오니 힘을 다해 싸워도 사태는 불리하였다. 그는 탈출 못 할 것을 직감하고 일기장 끝머리에 "死"자를 써서 짚신과 함께 말에 실려 내몰았다. 그 이튿날 성은 함락되고 황진, 김천일, 최경희, 고종후 등이 차례로 죽고 공도 적탄에 맞아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7월 2일 말이 호초일기와 짚신 한짝을 싣고 돌아왔으므로 초혼장이 거행되었다.
한성부 주부에 추증되었으며, 1788년9정조 12) 정문의 은전이 내려졌고, 금성 장렬사, 금산의 대첩단에 제향되었으며, 금산 금곡에 비가 세워졌다.
소운핵
자는 중거(仲擧)이며, 조선 때 학자로 유명하였다.
소흥우(蘇興宇)
자는 도장(道長)이다.
조선 현종 때의 학자로 시, 서, 화에 능하였다.
소영복(蘇永福)
1555년(명종 10)~1615년(광해군 7)
자는 수중(綬重), 호는 사은(四隱)이며, 대사간 세량의 증손이고 부제학 봉의 손자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여러 차례 성혼(成渾)으로부터 출사를 권유 받았으나 학문이 미진하다며 사양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난후 국정에 관한 시무책을 조정에 올려 가납되었다.
1601년(선조 34) 학행으로 천거되어 희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진 교육에 전력하였다.
1605년(선조 38) 김장생(金長生)이 익산군수로 있을 때 여러 번 그의 방문을 받아 자문에 응하였으며, 자신이 소장하던 경전, 사서 등 귀중한 전적들을 기증하여 궁중의 비서각에 비치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향리 일대가 한해(旱害)로 매년 흉년을 당하자 40여리에 달하는 수로 건설을 건의하여 이루도록 했다.
경학(經學) 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약, 경사, 병법 등에 정통하였고, 성혼에게 종유하는 한편 조헌, 정경세, 한백겸, 황신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익산의 와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소산복(蘇山福)
1556년(명종 11)~1620년(광해군 12)
자는 경응(景膺), 호는 매헌(梅軒)이다.
1591년(선조 24) 진사를 지내고, 학자로서 이름을 떨쳤다.
소 부(蘇簿)
자는 여흡(汝洽), 호는 절제(節齊)이다.
좌부장으로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난을 평정하다 순절하였다.
소진국(蘇震國)
자는 보경(輔卿), 호는 둔헌(遯軒)이다.
조선 때 부호군을 역임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향민의 칭송을 받았다.
소억령(蘇億齡)
1560년(명종 15)~1593년(선조 26)
자는 우광(祐光), 호는 여산(汝山)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상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593년(선조 26) 평양 탈환 때 순절하여 후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었다.
벼슬은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소사원(蘇泗源)
1563년(명종 18)~1615년(광해군 7)
자는 도연이다.
조선 때 문과를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 강진 현감 등을 지냈다.
학자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소행진(蘇行震)
참봉 종선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로 피난길을 떠나고, 왜적의 파죽지세에 여러 고을이 함락되자, 호남에서도 중봉 조헌, 제봉 고경명 등 여러 선비들이 앞 다투어 봉기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금산에서 순절하였다.
순찰사와 방어사도 방어책이 없어 머뭇거리고 있을 때, 공은 선무랑으로 재직하면서 아버지의 복을 입고 있었으나 박차고 일어나 검은 상복으로 갈아 입고 이보와 함께 4백여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달려가려 하였다.
그러자 친척과 친구들이 만류하면서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주는 격이며 더욱이 상중이니, 다음에 나아감이 옳다."고 하자, "임금이 피난하고 나라가 위급한 이때야말로 충신열사가 목숨을 바칠 때이며, 임금과 어버이가 같거늘 임금을 위하여 의리를 따르지 않고 삶을 구하겠느냐."하면서 진산 이현으로 진군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치열하게 싸웠다. 적군과 아군이 다 피해가 심하고 화살은 떨어지고 군졸은 흩어져 사태가 매우 위급했으나 공은 물러서려 하지 않으므로 부하들이 "잠시 물러났다가 뒤에 다시 의병을 규합해서 싸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고 권하였으나 듣지 않고 싸우다 이보와 함께 부둥켜 안고 순절하였다. 그 때 순찰사와 의병장 사이에 불화가 있어 공의 행적이 조정에 알려지지 않다가 1605년(선조 38) 군내 유림들이 글을 지어 군에 호소하고, 군에서 감영으로, 감영에서 조정에 알려 공의 아들 동과 이보의 아들 시달에게 조세와 부역을 면제시키고, 금산의 유림들이 종용사에 배향했다.
1780년(정조 4) 유림의 의론이 다시 일어나 감영의 장계로 1783년 호조좌랑에 증직되고 정려의 은전이 내렸으며, 1843년 익산의 은천사에 이보와 함께 제향되었다.
공의 아들 동 또한 공이 있어 첨지에 제수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종군하다 순절하였고, 손자 계영은 조정의 은전으로 첨사에 임명되었으나 일찍 죽어 후손이 없다.
소광진(蘇光震)
1566년(명종 21)~1611년(광해군 3)
자는 자실(子實), 호는 후천(后泉)이며, 대제학 세양의 증손ㅇ;고, 찬성 성선의 아들이다.
1589년(선조 22) 진사, 1597년(선조 30) 문과에 급제하여 1599년(선조 32) 승정원가주서가 되었다.
1601년(선조 34) 주소, 예문관 검열, 봉교를 차례로 역임하고, 이듬해 형조좌랑을 거쳐 1603년(선조 36) 정언, 사서에 이어 병조정랑이 되어 지제교, 춘추관기주관을 겸했다.
이듬해 평안도 도사, 성균관 전적을 거쳐 황해도 도사가 되었으며, 1607년(선조 40) 예조정랑이 되었다.
1609년(광해 1)에는 시강원 문학이 되고, 이듬해 장령, 필선을 거쳐 1611년(광해 3)에 홍문관 교리, 헌납을역임하였다.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익산의 화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소동헌(蘇東獻)
자는 자현(子賢), 호는 옥봉(玉峰)이다.
조선 때 효자로 향민의 칭송을 받았다.
소억민(蘇億民)
1572년(선조 5)~1644년(인조 22)
자는 우조(祐朝), 호는 낙정(樂亭), 시호는 장민(莊敏)이다.
1589년 무과에 급제하여 1590년 훈련원 주부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종형 소억령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박헌무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고, 연안에서 이정암 장군 휘하에서 전공을 세웠다. 또한 1593년(선조 26) 평양 탈환 때 대승을 거둔 공으로 병조참지를 거쳐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고, 1624년(인조 2)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소동명(蘇東鳴)
1590년(선조 23)~1673년(현종 14)
자는 문원(聞遠), 호는 태수재이다.
효행과 문학이 뛰어났으며, 1671년(현종 12)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소동도(蘇東道)
1592년(선조 25)~1671년(현종 12)
자는 자유(子由), 호는 면와(眠窩)이며, 첨사 세공의 증손이고, 만선의 아들이다.
1617년(광해군 9) 사마시를 거쳐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에 보직된 뒤 1646년(인조 24) 사헌부 지평, 이듬해 은산 부사를 지내고, 이어 정주 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이어 청북어사를 거쳐 1650년(효종 1) 의주 부윤이 되고, 경주 부윤에 이어 1659년(효종 10)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익산의 화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소영무(蘇榮武)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평북 용천의 용골성에서 라우 소경무, 소응무와 함게 청나라의 대군을 맞아 싸우다가 공을 세우고 순절하였다.
소경무(蘇慶武)
조선조에서 판관을 역임하였다.
소응무(蘇應武)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 아미타수 등 10여만 기(驥)가 의주를 야습할 때 용골성에서 대전하다 순절하였다.
소집중(蘇執中)
1615년(광해 7)~ ?
자는 윤경(允卿), 호는 성산(惺山)이며, 동지중추부사 기파의 5세손이고, 부호군 몽려의 아들이다.
신라 때 9세9장군을 배출한 명문답게 선조가 내리 무관으로 나라에 충성을 다해오더니, 충신 집안에서 효자난다는 말과 같이 독실한 효자였다.
일찍이 신독재 김집9金集)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고, 경사에 전념하고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평생 부모를 가까이 모시고 효성을 다하여 사림(士林)의 추중을 받았다.
소국민(蘇國民)
자는 경열(景悅), 호는 석회(石晦)이다.
1747년(영조 23) 문과에 장원하여 응교를 거쳐 에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소 시강(蘇時綱)
자는 윤협(允協), 호는 송암(松菴)이다.
조선조에 효자로 향민의 칭송을 받았다.
소응록(蘇應祿)
자는 시백(時白), 호는 청호(靑湖)이다.
동생 소응희, 조카 소이간과 함게 1636년 (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고 모두 순절하였다.
소응희(蘇應禧)
자는 시보(時寶), 호는 고옥(古玉)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형 응록과 큰 아들 이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안현에서 대승하고 중현에서 적장과 싸우다 모두 순절하였다.
소이문(蘇以文)
자는 공빈(公斌)이다.
아우 이무, 이빈과 함께 효성이 지극하였다.
조선조에서 부호군을 역임하였다.
소이무(蘇以武)
자는 충경(忠卿_, 호는 낙헌(樂軒)이다.
조선조에서 효자로 향민의 칭송을 받았다.
소이빈
자는 패빈, 호는 묵헌이며, 조선조에서 주부를 지냈다.
소명륜(蘇明倫)
자는 륜지(倫之), 호는 동천(東川)이다.
조선조에서 효자로 이름이 높아 향민의 칭송을 받았다.
소이간(蘇以幹)
1611년(광해군 3)~1693년(인조 14)
자는 군직(君直), 호는 백암(白巖)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중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순절하였다.
소두산(蘇斗山)
1627년(인조 5)~1693년(숙종 19)
자는 망여(望如), 호는 월주(月洲)이며 동지중추부사 동명의 아들이다.
송시열의 문인으로 1652년(효종 3) 진사가 되고, 1660년(현종 1) 식년문과레 장원 급제하여 전적을 거쳐 1663년(현종 4) 정언, 지평을 지냈다.
직언을 서슴치 않아 권신의 비위에 거슬려 외직으로 전전하다가 1681년(숙종 7)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어 동래부사, 공홍도 관찰사, 공홍도 수군절도사 등을 거쳐 1688년(숙종 14)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듬해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배척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울분 끝에 병사하였다.
저서에 <월주집(月洲集)>이 있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진주소씨 세덕록을 보시기 바랍니다)
소원태(蘇元泰)
1698년(숙종 24)~1750년(영조 26)
자는 춘보(春甫), 호는 회;생재(晦生齋)이다.
조선 영조 때에 학자로 제자백가를 통독하였고, 천문,지리,으약에 정통했으며, 문장이 뛰어나 이름을 떨쳤다.
소시만(蘇始萬)
1734년(영조 10)~1761년(영조 37)
자는 원보(元甫), 호는 국헌(菊軒)이며 성집의 아들이다.
제자백가에 통달하였고 천문,지리,의약,복서,성력,병술,음률에 이르기까지 능했으며, 뒤에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저서에 <국헌집(菊軒集)>이 있다.
소 권(蘇 權)
자는 정평(正平), 호는 주봉재(住蓬齋)이다.
동생 정의 잘못으로 고성에 유배되었으나, 아들 덕효와 같이 단을 쌓고 5년 동안 효충치성하여 영조가 정려를 명하였다.
소덕효(蘇德孝)
자는 달부(達夫), 호는 침호정(枕湖亭)이다.
조선 때 영조의 국상을 당하여 소의소식(素衣素食)을 하고 3년상을 지내어 정려가 명해졌다.
소희규(蘇熙奎)
1851년(철종 2)~1907년(순종 1)
천품이 순후하고 용모가 단아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돈독하였다.
12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는 애통해 함이 도에 넘쳤고, 거상9居喪)범절이 성인 못지 않아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그 후 계모 슬하에서도 친모 이상으로 효도를 다하였다.
26세 때 부친이 갑작스런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써도 차도가 없자 손가락을 끊어 흐르는 피를 입에 넣어 드렸는데 이같은 정성에도 부친은 운명하고 말았다. 이에 모친상 때보다 더욱 정성껏 상장 제절을 엄수하고 3년 거상에 피눈물을 흘렸다.
생계가 넉넉지 못함에도 계모를 봉양하며 이복동생들을 친동생처럼 사랑하며 거두어 기르니 보는 이들이 감동하였다. 또한 친척 중의 가난한 사람과 이웃의 궁핍함을 모른 척 하지 않고 구휼하였다.
소수구
1870년(고종 7)~1948년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당하였다.
1977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소휘태(蘇輝泰)
1870년(고종 7)에 태어났으며,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민과 양성면민 수천명이 동원되어 독립만세 우누동을 거행하다가 일경의 발포로 4명은 현장에서 숨지고 133명이 피체되어 그 중에서 7명은 고문 치사되었으며, 선생은 1920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의 죄명으로 징역 2년형을 받았다.
1977년 3.1운동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소천술(蘇千述)
1880년(고종 17)~1964년
자는 형신(亨信)이다.
기질과 용력이 뛰어났다.
1907년 일본이 정미조약과 동시에 조선군대를 해산하자 1908년~1909년 사이에 안담산의 의병에 가담하여 무수한 일본군을 섬멸하여 공훈을 세웠다.
소홍규(蘇洪奎)
1882년(고종 9)~1952년
시조 경의 42대손 휘백의 장자이다.
1919년 3.1운동 때 항일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3000여 명을 규합하고 선두에서 지휘하여 대전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왜경에 체포되어 공주형무소에 투옥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며 옥고를 치르고 2년 만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옥고의 여독으로 거의 반신 불수가 되어 누워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이한 후 1952년 타게하였다.
1986년 3.1운동에 대한 공적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소진형(蘇鎭亨)
1886년(고종 23)~1945년
자는 덕장9德章), 개명은 진승(鎭昇)이다.
이민식 등 11명의 동지와 1910년 한일합방 후 국권회복을 모의하다가 1919년 3월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 소식을 듣고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고, 동 6월에 독립수비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어 충청도 등지에서 통문을 보내어 모금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으로 보내며 독립운동에 맹활약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었다.
공의 부친 소성규는 아들의 독립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수많은 가산을 조국에 바쳤고, 아들이 7년 옥고 중에 냉방에서 단식하며 아드르과 그 아픔을 같이 했다.
소진형의 아들 소철영은 기지로써 아버지 소진형을 옥중에서 출감시켰다.
1982년 건국공로 포장을 추서하였다.
소후옥(蘇厚玉)
1887년(고종 24)~1961년
자는 선옥(先玉)이며, 각간 경의 41대손이고 원술의 장자이다.
1919년 3.1 우누동 때 이유석, 이근수, 홍창섭, 최은식 등과 제휴하여 민족의 거사에 참여하여 양성우편소의 전선을 절단하고 파괴하여 7년의 옥고를 치뤘다.
1977년 건국 포장을 받았다.
소병원(蘇秉元)
1890년(고종 27)~1966년
자는 중열(仲悅), 호는 삼은(三隱)이며, 각간 경의 45세손이고, 기영의 아들이다.
1910년 나라가 일본에 통째로 넘어간 경술국치 후에 백범 김구, 신익희 양 선생과 함께 웅지를 품고 중국에 망명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수립 후 10여년을 대륙을 왕래하며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약하였으며,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교육에 몸을 담기도 하다가 건강 상의 이유로 귀국하였다.
광복 후에는 조국 분단과 정국의 혼란 속에서 당시 김성수, 신익희 등과 제휴하여 한민당(韓民黨)을 창당하여 민주헌정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여생을 바쳤다.
소진석(蘇鎭碩)
1897년(광무 1)~1923년
형규의 아들로 익산 출신이다.
1910년 왜적과 친일 거두의 협작으로 합방이 이루어져 나라가 없어지고 이천만 민족이 노예처럼 천대받게 됨을 통탄하며 몽매간에도 조국 독립을 그리던 차에 1919년 3.1 독립운동이 밀물처럼 일어나 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그러나 이 중에도 산간 벽지인 익산 금마면은 별천지처럼 조용했는데, 공은 평소에 뜻을 같이 하던 송태숙과 상의하여 3월 7일 금마 장날을 기해 독립 만세를 외칠 계획을 세우고 태극기를 그려 암암리에 각 부락을 돌아 다니며 거사 계획을 설명하고 군중을 동원하였다.
드디어 3월 7일 장터로 나가 지정된 장소에 군중을 모이게 하고 품에 품었던 태극기를 꺼내 들고 독립 만세를 힘차게 외쳤다. 이에 감격한 수천 군중이 일제히 만세를 연발하고 시위를 하려 하자 급히 출동한 일본 헌병들에 의해 저지되고 공은 주동자로 체포되어 6년형을 언도받고 전주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3년 27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이슬처럼 사라졌다.
소선규(蘇宣奎)
1903년(고종 40)~1968년
호는 계산(桂山)이다.
전북 익산에서 출생하여 족형 열재문에서 수학하고 간재 건우선생문에서 수업하였으며, 서울에서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일하여 일본 복도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946년 미군정 하의 서울특별시 부시장을 역임하였다.
1950년 야당인 민주국민당으로 익산에서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1956년 제3대 민주당 국회의원, 1960년 4.19혁명 후의 초대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전라북도에서 최고 득표로 당선되어 초대 참의원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5.16 군사 정변 후인 1963년 선거에서는 자유민주당 전국구 후보로 당선되는 등 줄곧 야당의 길을 걸으며 4선 의원을 지냈다.
소창규(蘇昌奎)
1904년(고종 41)~1968년
아버지 휘병과 어머니 의령남씨 사이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선비였던 아버지와 가정을 돌보지 않은 맏형으로 인하여 살림이 파산하게 되어 형들이 고용살이로 집을 떠나고 어머니가 남아 가족을 근근이 부양하며 살았다.
6세 때에 어머니가 중풍으로 눕게 되어 형들이 좋다는 약을 백방으로 구해 썼으나 효험이 없었고, 고용된 형들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나니 어린 공과 병든 어머니만 남게 되었다.
공은 어린 나이에도 불철주야 어머니를 돌보며 대소변을 받아내고 몸을 씻겨 정결하게 해 드렸으며, 옷이 없어서 앞만 가리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밥을 얻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막내야!"하며 배고픔을 호소하면 찬밥을 덥힐 새도 없이 입으로 불어 따뜻하게 하여 어머니 입에 넣어 드리며, 간혹 입가에서 떨어지는 밥알을 주워 먹었다. 어머니가 함게 먹자고 하면 "마을에서 많이 먹었습니다"하고 안심시켜 드렸다. 그러고는 자신은 주린 배를 냉수로 채워 가면서 7년이란 긴 세월을 하루같이 병간호하였으나 어머니가 천명을 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칭송받았다.
소휘득(蘇輝得)
어려서부터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며, 부모의 뜻에 따라 보양함이 극진하더니 17세에 김해김씨를 아내로 맞아 부부가 합심하여 부모를 공경하였다. 부친이 우연히 병석에 눕게 되어 백방으로 명의와 양약을 구하여 지성으로 구완했으나 차도가 없으므로 공은 대변의 맛을 보아 병세를 헤아리며 최선을 다하였으나 별 차도가 없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주혈을 하자 2~3일간 소생하였다가 마침내 별세하였다. 몸부림치며 슬퍼 울었고, 식음을 전폐하여 실신 상태였으나 치상 범절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려 정중히 상장을 치른 다음 3년 동안을 시묘하였는데, 그 효성에 감동하여 때때로 호랑이가 호위하였다 하여 묘소가 있는 골짜기를 사람들이 '범골'이라고 불렀다.
부인 김씨 역시 지극한 효부였으니, 어려서부터 과묵하고 정숙하여 얌전한 규수라는 칭찬을 받았다. 18세 때에 시집온 후에 가세가 넉넉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극히 효성을 하였다. 남편은 품팔이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 부인은 밤낮없이 부지런히 길쌈하여 부부 합심하여 돈을 벌어 시부모가 즐기는 음식과 의복을 해 드리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인이 38세 때 남편이 우연히 병을 얻어 점점 위급해지며 백약이 별 효험이 없었다. 부인은 약값이 차츰 궁해지자 출가할 때 가지고 온 옷을 저당 잡히고 삼단같이 곱고 긴 머리털을 잘라 팔아서 귀한 약재를 샀고, 추운 겨울날에 뱀을 구하여 먼저 자기가 맛을 보고 남편에게 먹이니 좀 차도가 있었으나 얼마 후에 남편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자결할 결심도 강보에 싸인 어린 것 때문에 거두고 남편의 후사를 훌륭히 이을 것만을 명심하며 다른 사람과 웃어본 일이 없고 외출해서는 얼굴을 들지 않고 다니며 오직 뼈가 으스러지도록 열심히 일을 하였고, 일가친척 간에 친목이 투터웠다.
연약한 여자로서 고생과 눈물로 점철된 일생을 사는 동안 다만 효와 열만을 몸소 행하던 부인의 덕을 높이 찬양하여 면내 유림에서 천거하여 1968년 순천 향교에서 표창장이 내렸다.
소재옥(蘇在鈺)
천품이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를 지성껏 섬기는 것을 본분으로 삼고 살았다. 집안이 넉넉지 못하여 가난하게 살면서도 부모로 하여금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서늘하도록 극진히 모시고 음식도 구미에 맞추어 지성으로 봉양하여 효자로 널리 알려졌다. 그리하여 부친의 회갑잔치 때는 원극 각처에서 축하시가 5백여 수나 답지하였다.
일찍이 모친을 여의고 맞이한 계모도 생모 못지 않게 받드르고 이복형제들과고 우애가 두터웠으며, 또한 숙부에게도 매일같이 문안을 드리면서 공경하였다. 부친이 병들고 오랫동안 고생하자 대변을 맛보아 가면서 증상을 헤아렸고, 백약이 무효하여 세상을 떠나자 상장 범절에 예를 다하고 산소 옆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기거하면서 부친의 명복을 빌었다. 또한 계모 최씨의 부모가 자식이 없으므로 공이 봉양하다가 세상을 떠나니 선산에 유해를 안장하고 지성으로 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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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 희생 여중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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