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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삐 뚫을 구멍 없는 소’ 뜻 물음에 활연 대오
경허 스님 수행 일화 ① - 시체 즐비한 마을서 발심
나하나 살고 죽는 문제도 수습할 줄 모르면서 중생을 인도 하겠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것 날카로운 송곳 턱밑에 놓고 수마 쫓으며 참선 정진 백천법문 문득 재가 되니 한국 근대선의 서막 올라
경허(鏡虛; 1849~1912) 스님은 한국불교 중흥조이다. 스님은 1849년 전주에서 출생해 9세 때, 경기도 과천 청계산 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했다.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경허 스님은 억불숭유로 바람 앞 촛불과 같던 때 선맥을 되살린 선지식이다.
큰 깨달음을 얻어 대자유인의 경지에 오른 스님의 도리가 얼마나 깊고 높은지는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히 가늠할 수가 없다. 경허 스님의 행적은 어떤 때는 심산유곡에 깃들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시끄러운 저자 한복판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스님은 ‘고삐 뚫을 구멍 없는 소’를 확연히 안 뒤 6년 동안의 보임(保任)을 마치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경허 스님 열반 100주년을 맞아 만행보살 경허 스님의 일화 연재를 통해 선지식의 진면목을 들여다본다.
경허 스님은 20대에 동학사(東鶴寺)에서 대강사로 이름을 떨친 대강백이었다. 스님은 경(經)은 물론이고 〈장자〉(莊子) 곧 〈남화경〉(南華經)까지 숙독(熟讀)해 내ㆍ외전을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대강백이 머문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동학사 강원은 사방에서 구름같이 몰려드는 학인들로 초만원을 이뤘다.1879년 여름, 강사 8년으로 30대에 접어든 경허 스님이 옛 은사 계허(桂虛) 스님을 뵈려고 경기 안양 근교 청계사(淸溪寺)로 향했다.
길을 가던 중 천안 근처에서 였다. 경허 스님은 갑작스런 뇌성 벽력과 함께 억수같이 퍼붓는 소낙비를 만나 어느 초가 처마 밑에 있어야 했다. 얼마 후 집 주인이 나타났다.
“송장 치우기에 진력이 났는데 누가 또 와 있담. 죽더라도 내 집에선 나가 죽으시오, 어서!”
혀를 차며 다짜고짜 스님의 등을 밀어내 그 집 멀리로 내 쫓았다. 경허 스님은 하는 수 없이 다른 집으로 가 비를 피하려 했지만 이집도 마찬가지로 밖으로 내 모는 게 아닌가.
“괴질로 사람이 다 죽어가는 판인데 뭐 하러 여기 왔소? 여기까지 왔으니 스님도 살아가긴 어렵겠구려, 제발 이 집만은 떠나 주시오.”
집집마다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쓰러진 주검들이 즐비했다. 당시 콜레라는 전국적으로 불치의 전염병이었다. 세찬 비바람 속에 그 촌락을 벗어난 경허 스님은 심한 현기증으로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웠다.‘나 또한 전염병에 걸리면 죽지 않을 수 없다.
저 송장들과 다를 바 없는 나 역시 생사(生死)의 낭떠러지에 와 있지 않은가. 나 하나 살고 죽는 문제도 수습할 줄 모르면서 남을 가르치며 철없이 중 노릇을 하다니, 교리문자(敎理文字)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 자신도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부처님의 길로 중생을 인도한다 함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이제라도 스스로가 생사를 영단(永斷)하는 길이 있다면 오직 참선(參禪)하는 길 밖에 더 있겠는가!’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스님은 한시가 소중했다.
경허 스님은 은사스님을 뵈러 청계사로 향하던 발걸음을 동학사로 되돌렸다. 돌아오는 동안에도 스님은 어서 생사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분심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아무리 1700공안의 화두를 헤아려 보았으나 의심의 구름은 좀처럼 걷힐 줄 몰라 캄캄 절벽이었다.
갑자기 한 화두가 스님을 사로잡았다. 나귀의 일 아직 안했는데 [驢事未去]말의 일이 닥쳐 왔음이여 [馬事到來] 스님의 화두에 대한 의심은 더 큰 의심의 구름을 일으킬 뿐이었다. 한 생각에 젖어 든 경허 스님은 동학사에 돌아오자마자 강원의 학인들을 다 흩어 버리고 조실 방문을 굳게 닫아 걸었다.
그리고는 단정히 앉아 용맹정진에 들어갔다.경허 스님은 영운(靈雲) 선사의 화두 ‘나귀의 일, 말의 일’을 참구했다. 좌선 삼매 중 졸음이 몰려왔다. 조는 시간도 아까웠다. 스님은 수마를 쫓기 위해 물리치고자 날카로운 송곳을 턱 밑에 세워놓고 참선을 했다. 스님이 정진하다 깜빡 깜빡 졸 때마다 스님의 이마에는 선혈이 흘렀다. 살이 찔린 자리에는 피가 엉겨 붙었다. 얼굴은 흡사 두꺼비 등껍질과 같았다.
마침내! 경허 스님은 수마(睡魔)의 조복을 받으며 화두에 대한 의심이 샘물 솟듯 하여 한 생각이 영원에 이르는 경지에 다달았다. 스님의 화두를 향한 일념은 은산철벽도 꿰뚫을 기세였다. 경허 스님은 용맹정진을 이어갔다.참선 석 달만의 어느 날이었다.
동짓달 보름께 동학사 학명도일(學明道一) 스님이 아래 마을에 출타했다가 이 진사(李 進士)라는 처사를 만났다.
“스님, 요새 중노릇을 어떻게 하십니까?” “경 읽고 염불하며 주력(呪力)하고 가람수호하는 일과의 연속입니다.” “그래요, 그렇게 중 노릇을 잘못하시면 소가 되고 맙니다.” “아이고, 그럼 어떻게 해야 소가 안 됩니까?” 산승의 물음에 이 진사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소가 돼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고 해야죠.” “고삐 뚫을 구멍이 없는 소?”
진사의 말에 학명 스님은 무슨 뜻인지 몰라 얼떨떨하기만 했다. 그 옆에 있던 사미승 동은(東隱)도 마찬가지였다.동은 사미는 이 진사의 아들 이원규로 동학사에서 행자 수업 중이었다. 학명 스님과 동은 사미승은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절에 올라오자마자 여러 대중들 앞에서 물었다.
“대중들은 중 노릇 잘못하면 소가 되는 이치를 아십니까?” “소가 돼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 말을 들은 대중 가운데 어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다들 궁금하기만 할 뿐이었다. 아는 대중이 아무도 없자 학명 스님은 ‘정진 중인 조실 스님께 여쭤야겠다’고 생각했다. 학명 스님이 경허 스님 방을 두드렸다.
“스님께서는 ‘고삐 뚫을 구멍이 없는 소’의 깊은 뜻을 아십니까?”
바로 그 순간이었다.경허 스님은 ‘고삐 뚫을 구멍이 없는 소’의 도리를 묻는 물음에 활연 대오(豁然 大悟)했다.때는 1879년 11월 보름 무렵이었다. 경허 스님의 대오각성은 한 수좌의 한 소식을 뛰어넘을 한국 근대선의 서막이 오름을 알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 순간, 천하대지가 송두리째 빠져나가고 물아(物我)가 함께 공(空)해 백천법문(百千法門)과 무량한 묘의(妙意)가 한 생각에 문득 재가 됐다.
구멍없는 피리 불고 줄없는 거문고 탄 도인
경허 스님 수행 일화 ② 한번 앉아서 일을 마치다
천장암서 누더기 입고 1년 장좌불와 숨쉬는 등신불 같던 용맹정진 끝에 심신 습기 조복받아 생사자재행함 없고 한가로운 오도가 불러
동학사 법회서 강주 스님이 “곧은 나무라야 쓸모 있다” 하자 경허 스님 법석 올라 말하기를 “삐뚠 것은 삐뚠 대로 곧은 것”
계룡산 동학사에서 젊고 유능한 강사로 명망이 높은 경허 스님에게 수학하려고 밀려드는 학인들의 수는 나날이 많아져 갔다.하지만 발심한 경허 스님은 강사를 그만두고 조용한 수도처를 찾았다. 이는 생사의 무상함을 깊이 느껴 장부의 대사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동학사에서 주장자와 발우를 거둔 뒤 스님이 찾은 수행처는 홍주 내포였다. 오늘날 충남 서산군 연암산에 있는 천장암(天藏庵)이다.바랑을 풀고, 경허 스님은 마음껏 용맹 정진했다. 천장암은 학인·신도 등 누구도 찾지 않는 조용한 암자로 정진하기에는 다시 없는 곳이었다.
경허 스님의 수행은 철저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스님은 일반인이 상상조차 할 수 없이 치열하게 수행했다. 스님은 솜을 덧대어 지은 누더기 한 벌을 입고 꼬박 1년 동안 장좌불와를 했다. 공양을 하거나 대소변을 보는 일 이외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좌선한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세수나 양치, 목욕하는 일까지 돌보지 않고 언제나 오직 앉아 있을 뿐이었다. 잠을 자기 위해 눕거나 벽에 기대는 일도 전혀 없었다. 숨쉬는 등신불과 같아 때로는 사람들이 절에 와 소란을 피워도 경계에 마음쏠림이 없었다. 스님이 1년간 면벽하는 동안 몸도 씻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아 땀에 찌든 누더기 옷과 머리에는 싸락눈이 내린 것처럼 이가 들끓었다.
이가 너무나 많아 마치 두부를 짠 비지를 온몸에 문질러 놓은 것처럼 허옇게 될 정도였다.보다 못해 사람들이 새 옷을 수행방 밖에 가져다 놓고 ‘스님, 제발 옷 좀 갈아입으세요’라고 통사정을 했지만 스님은 일체 용납하지 않았다. 경허 스님은 철저한 용맹 정진 속에서 안으로 일어나는 번뇌의 습성과 밖에서 오는 유혹의 경계에 동요되지 않는 마음과 몸의 습기(習機)를 조복 받았다.
스님은 생사에 자재 할 수 있는 경계에서 수행을 계속했다.이와 같은 정진을 계속해 1년을 채운 날 경허 스님은 주장자를 문 밖에 내 던지고 입었던 옷을 활짝 벗어 던지며 쾌활한 노래를 불렀다.
다음은 경허 스님의 오도가다.
忽聞人語無鼻孔(홀문인어무비공) 頓覺三千是我家(돈각삼천시아가) 六月燕巖山下路(유월연암산하로) 野人無事太平歌(야인무사태평가)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 없다는 말 듣고 삼천 대천 세계가 이 내 집임을 몰록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 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확철대오한 경허 스님은 천장암에서 유유자적하며 낮에는 맑은 바람과 사귀고 밤에는 밝은 달과 벗하였다.
스님은 때로는 구멍 없는 피리를 불고 때로는 줄 없는 거문고를 타면서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든 일 없는 사람이었다. 또 행함이 없는 참사람이며 한가로운 도인이었다. 깨우친 경허 스님에 대한 일화다. 어느날 밤 만공 스님이 큰 방에 볼 일이 있어 호롱불을 들고 들어가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큰 뱀 한 마리가 경허 스님의 배 위에서 놀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공 스님이 “스님 배 위에 뱀이 걸쳐 있습니다”고 말하자 경허 스님은 놀라지도 않고 그대로 누운 채 “가만히 내버려 두어라, 실컷 나와 놀다 가도록 내버려두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머슴살며 여인희롱 매맞아 피투성이 되어…
경허 스님 수행 일화 ④⑤
④ 지장암 토굴에서
“경전을 뜯어 도배해도 됩니까” “자네들도 이 경지 이르면 해 보게” “살려 줄테니 속히 떠나시오”
경허 스님 말없이 개심사로 “어디에서 이런 고초를 겪으셨어요” “갯가에 구경 나갔다가 해풍에…”
경허 스님이 지장암 토굴에 있을 때의 일이다. 천장암(天藏庵)에서 조금 떨어진 산모퉁이 골짜기에 작은 초가 암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암자가 바로 지장암이었다. 스님은 그 곳 토굴에서 한 겨울을 혼자 정진했다. 지장암은 수리를 하지 않아 벽 사이에 틈이 나고, 문창이 뒤틀린 고옥이었다.
그런 토굴에서 한 겨울을 지내게 된 스님은 불장에 보관된 〈화엄경〉을 뜯어서 문도 바르고 벽도 발라 추위와 바람을 막았다.스님을 뵙기 위해 찾아간 제자들이 이 광경을 둘러보고 깜짝 놀라 여쭈었다.
“스님, 경전을 이렇게 도배하는데 사용해도 됩니까?” 스님은 태연히 “자네들도 이러한 경계에 이르면 이렇게 해 보게나”하고 평온히 대답했다.찾아간 제자들은 스님의 깊은 경지에 자신들이 감히 미치지 못함을 못내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 암자를 나왔다.
⑤ 어촌 만행
경허 스님이 충청남도 서산 개심사(開心寺)에 주석할 무렵의 일이다. 경허 스님이 아무 말도 없이 혼자 출타해 여러 날을 들어오지 않자 이를 걱정한 대중이 사방으로 찾아 나섰다.한 달가량 아무리 찾아도 스님의 종적은 묘연했다.
경허 스님이 간 곳은 서산 태안반도의 해변 어촌이었다. 생선 도매상을 하는 집에 우연히 들어가 주인에게 인사를 청하며 하는 말이 “이 곳을 지나는 중인데 배도 고프고 올 데 갈 데 없는 불쌍한 신세라오, 이 댁에 무료로 일이나 거들어 줄 테니 나를 좀 여기 머무르도록 써 줄 수 없겠소?”하고 머물러 있기를 청했다. 도매상 주인이 경허 스님을 보니 체격이 장대하고 힘깨나 쓰게 생긴 것이 아닌가. 주인은 품삯 안 주고 일 꾼 하나 잘 생겼다고 생각해 즉석에서 흔쾌히 승낙했다. 경허 스님은 그 날부터 일꾼들이 자는 머슴방에서 같이 자고 새벽부터 물을 길고, 산에서 나무를 하는 등 궂은일을 도맡아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주인이 하라는 대로 모두다 군말 없이 할뿐더러 일도 척척 잘해 주인은 날로 경허 스님을 좋아하게 됐다.어느 날이었다. 스님은 드디어 가풍을 드러냈다. 주인집 부인이 부엌에 나와 밥을 짓고 있는데 아궁이에 불을 때던 스님은 난데없이 그 부인의 궁둥이를 넙죽한 손바닥으로 툭툭 치면서 “참 잘도 생겼다”하고 나갔다. 주인집 부인은 분함을 이기지 못해 울면서 남편에게 무도한 머슴을 따끔히 혼내 줄 것을 호소했다.
부인의 말을 듣고 분기탱천한 도매상 주인은 “이 중놈이 오갈 데 없어 불쌍하기에 동정했더니 아주 나쁜 놈이군”하고 독한 생각을 품었다. 도매상 주인은 동네 무뢰배들에게 술을 사며 청했다.
“저 중놈이 못된 짓을 했으니, 아주 죽도록 패서 일어나 걸어가지도 못하도록 하게. 힘이 장사니 아주 처음부터 반신불수가 되도록 해야 하네”하고 신신당부까지 했다.
십여 명의 장정들이 술기운에 다짜고짜 스님을 발길로 차고 몽둥이로 때렸다. 경허 스님은 조금도 피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스님은 있는 그대로 온 몸뚱이를 내 맡겨 버렸다.
동네 무뢰배들은 스님이 숨이 떨어지면 갖다 묻기로 하고 동네 생선 창고에 가두었다.그리고 15일 정도가 지났다. 다른 상인이 생선을 사려고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자신의 물건을 들쳐가며 고르고 있는데 어디서 거칠게 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 상인은 숨소리를 따라 고기 상자를 들쳐보았다. 거적을 들추자 전신에 피가 시커멓게 엉겨 붙은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눈이 휘둥그레진 그 상인은 소스라쳐 놀라며 눈을 씻고 다시 보았다. 분명 아직 죽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부랴부랴 끄집어 내놓고 거적을 풀어보니 동네 도매상에서 예전에 일하던 일꾼이 아닌가. 상인은 더욱 놀라며 연유를 물었지만 스님은 일체 말이 없었다.상인은 도매상 주인에게 물었다.도매상 주인은 “그 중놈이 워낙 나쁜 짓을 했기에 저렇게 된 모양이오”라고 답했다.
그 상인은 도매상 주인을 보고 크게 나무라며 “그 사람이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법에 의해 처리해야지, 어찌 사람을 이처럼 잔인하게 하였단 말인가. 내가 관가(官家)에 고발해 이런 무도한 행패를 막겠소.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할 테니 그리 아시오”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제야 주인은 상인을 붙잡고 “제발 고발만은 말아주시오. 우리가 잘못했소. 저 사람을 죽이지 않고 잘 치료해 자기 본처로 보내겠소”하고 통사정 했다.도매상 주인의 다짐을 받은 상인은 자기 물건을 싣고 길을 떠났다.
그 뒤 도매상 주인은 경허 스님에게 “살려주는 것만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속히 당신 갈 곳으로 가시오”하며 떠나기를 재촉했다. 스님은 아무 말 없이 그 집에서 나와 개심사를 향해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서 경허 스님은 큰 스님을 찾아 나온 만공 스님과 혜월 스님을 만났다.
경허 스님의 모습은 옷이 다 찢어지고 얼굴이 전부 깨진 상처투성이가 돼 차마 몰라볼 만큼 초라했다. 만공 스님이 경허 스님에게 “스님 어디에 가셔서 이런 고초를 겪으셨습니까?”라고 묻자, 스님은 “갯가에 구경나갔다가 해풍이 심해 자연 이렇게 됐다”며 크게 웃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긴 시간이 지난 뒤 그때 스님을 구했던상인이 우연히 개심사를 방문했다. 그 상인은 당시 머슴이 경허 스님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다른 스님들에게 알렸다. 그제야 대중들은 깜짝 놀랐다. 경허 스님 일화 편집자는 말미에 ‘스스로 마군과 부처를 동시에 작했고, 생사 없는 곳에서 생사 있는 곳까지 등한히 체험하셨다’는 평구를 덧붙였다.
온 세상 혼탁하나 나홀로 깨었어라
경허 스님 수행 일화 ⑥⑦
제산 스님 남몰래 안주 올리고 남전 스님은 그 소식에 한소식 만공 스님 몸바쳐 스승공양 다짐 격외도리에 ‘법따르기’이어져 경허 스님 수행 일화
⑥제자들의 격외법담
경허 스님의 법을 신봉한 직지사 제산(齊山) 스님은 청정한 지계행과 높은 덕행을 겸비해 제방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제산 스님은 경허 스님이 합천 해인사 조실로 있을 때 시봉을 도맡다 시피했다. 당시 400~500명의 대중이 상주하는 대사찰에서 경허 스님의 뜻을 받들어 모시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경허 스님을 위해 대중 모르게 곡차를 마련하고 안주감이 될 만한 것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제산 스님은 입소문을 막기 위해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깊은 밤이면 몰래 절 밖으로 나가 안주를 만들어 경허 스님에게 올렸다. 꼬리가 길면 잡히게 마련, 제산 스님의 행각은 대중 사이에 알려지고 말았다. 산중은 변고가 난 것처럼 야단이었다. 납자 몇 몇이 모이기만 하면 모두들 경허 스님과 제산 스님을 성토하기 바빴다.
당시 주지 남전 스님이 이 소문을 듣고 제산 스님을 찾아 소문의 진위를 물었다.제산 스님은 태연히 “제가 경허 스님을 위해 한 일입니다”라고 답했다. 남전 스님으로서는 제산 스님을 만나기 전 낭설이겠거니 하며 물었는데 제산 스님의 당당한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 남전 스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밖으로 나갔다. 남전 스님은 믿기지 않았다. 평소 법력이 높아 추앙받는 선지식 경허 스님, 또 학덕과 율행을 겸비한 것으로 알려진 제산 스님이 아닌가.
남전 스님은 며칠을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스님의 고민은 경허 스님의 법력에 대한 의구심에까지 이르렀다. 남전 스님은 경허 스님의 법문을 찬찬히 들었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깊은 감명이 우러나는 것이 아닌가. 남전 스님은 곧바로 선방에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용맹정진을 시작했다. 신심이 발한 남전 스님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남전 스님이 하루는 대중공양을 하는데 발우를 펴며 제산 스님에게 “스님, 이 발우가 안보입니다”하는 격외 법담을 걸었다.
스님의 높은 경지에 모든 좌중은 크게 놀랐다. 그 후 남전 스님 역시 제산 스님 이상으로 경허 스님을 신봉하게 돼 경허 스님에 대한 소문들을 진정시키는데 앞장섰다. 해인사에서는 어느 날 만공ㆍ제산ㆍ남전 스님이 함께 자리해 경허 스님의 법따르기를 견주는 기회가 있었다.
제산 스님은 “누가 뭐라해도 경허 스님께 계속 곡차와 닭고기를 바치리다”하자 남전 스님이 말을 받아 “경허 스님과 같은 어른을 위해서라면 닭이 아니라 소도 잡아 올리기를 조금도 거리낄게 없소”라고 대꾸했다.이에 만공 스님은 “나는 전쟁이 나 깊은 산중에 모시고 살다가 양식이 떨어져 공양 올릴 것이 없게 된다면 나의 살점을 오려서라도 스님의 생명을 유지케 해 스님이 중생제도 하시게끔 해 드릴 자신이 있소”라고 말했다.
“이 막대기로 나를 때려봐라 제대로 때리면 과자를 주마” 아이들은 주장자로 후려쳤으나 스님 “너희들은 나를 때리지 못했다”
⑦ 마정령의 목동들
경허 스님이 마정령이란 고개를 넘을 때의 일이다. 산에서 나뭇짐을 지고 내려오던 초동들이 스님을 보고 “저 중봐라, 이상하다”며 웃었다. 그때 스님의 행색은 머리는 깎았으되 수염은 길렀으며 맨발에 한손에는 담뱃대를 잡고, 다른 손에는 떡과 과자가 든 자루를 둘러메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에 스님이 되물었다.
“아이들아, 나를 알겠느냐?” 아이들이 “저희들은 스님을 알지 못합니다”고 답하자 스님은 “그러면 나를 보느냐”고 물었다. “예, 지금 스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놈들아 나를 알지 못한다하면서 나를 어찌 본다고 하느냐?”
스님은 차고 있던 주장자를 내어주며 이르길 “얘들아, 누구든지 이 막대기로 나를 한번 때려봐라, 만약 너희들이 나를 제대로 때리기만 한다면 수고한 대가로 이 자루에 든 과자와 돈을 다 주마”라고 말했다.그 가운데 한 영리한 아이가 나와 “스님, 그게 정말입니까?”하며 스님이 내주는 주장자를 받아 쥐고 힘껏 후려쳤다.하지만 스님은 계속 아이들을 보고 “때려봐라, 때려봐라”고 말했다.
스님은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때리지 못했느니라. 만약 때렸다면 부처도 때리고, 또 조사도 때리고, 또 세세 제불과 역대 조사 내지 천하 노화상을 한 방망이로 때려 갈길 것이니라”고 말했다. 이에 초동들은 “스님을 아무리 때려도 때리지 못했다고 하니 과자와 금전을 준다고 하는 것은 모두 거짓 아닙니까?”라며 항의했다.
스님은 껄껄 웃으며 “여기 있다. 그럼 가져가거라”하며 돈과 과자를 내주고 마정령을 넘어가며 노래를 한 곡조 읊었다.
온 세상 혼탁하나 나 홀로 깨었어라. 우거진 수풀 아래 남은 해를 보내리
무엇이 너를 무겁게 하였느냐
경허 스님 수행 일화 ⑧⑨
빨리 가게 해 준다며 도망치게 해 목숨 위협 받자 고통 잊는 도리 보여 타심통 부리던 만공 스님에게는 “술법 부리면 믿지 못할 사람” 꾸중
⑧ 길을 빨리 걷게 한 희롱
만공 스님이 경허 스님을 모시고 길을 가는데 날은 저물어가고 다리는 아파왔다.
만공 스님이 시주자루를 메고 무겁다고 끙끙대며 투덜거렸다. 만공 스님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자 경허 스님이 말했다. “내 빨리 가는 방법을 한번 써 볼 터이니 자네 빨리 따라와 보게나.”
얼마 후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은 한 촌락에 이르렀다. 동네 사람들이 정자나무 밑에서 다들 쉬고 있었다. 한 처녀가 우물에서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이 경허 스님의 눈에 띄었다. 경허 스님은 느닷없이 쫓아가 어린 개구쟁이 같이 처녀의 양쪽 귀를 잡고 입을 맞추었다.
이 광경을 본 동네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저 중놈 잡아라”하고 외치며 쫓아왔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경허 스님은 동네를 가로질러 뛰었다. 만공 스님은 해괴한 짓을 저지르고 바람같이 도망치는 경허 스님의 뒤를 따라, 한참동안 정신없이 뛸 수밖에 없었다.
두 스님은 ‘걸음아 날 살려라’하면서 산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 동네 사람 누구도 따라잡지 못하고 점차 멀어져 갔다. 한참을 뛰다보니 뒤에 따라오는 청년들이 보이지 않았다. 쫓아오는 사람이 보이지 않자 경허 스님은 뛰던 걸음을 멈추고 나무 아래에 걸터앉았다. 경허 스님이 숨을 돌리며 만공 스님에게 물었다. “어떠냐? 지금도 무겁느냐?” 그러자 만공 스님이 대답했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무거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경허 스님이 말했다. “옳거니, 네 말이 맞다. 무겁다는 생각이 없으니 무엇이 너를 무겁게 하겠느냐”
⑨ 도인이라도 술법을 행하면 믿지 말라
경허 스님이 천장암(天藏庵)에 주석할 때의 일이다. 만공 스님이 공부를 하다가 식(識)이 맑아지고, 타심통(他心通)이 열려 사람의 마음과 세상일을 보지 않고도 손바닥에 놓고 보듯 환하게 아는 경계에 이르렀다.
만공 스님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순조로이 풀어주고 심지어는 죽게 되는 경지에서도 살 수 있는 지혜를 일러주었다.
경허 스님이 이러한 것을 못하게 엄금했지만 급히 달려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공 스님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들에게 방법을 일러주고는 했다.
어느 날이었다. 경허 스님을 시봉하던 경환이라는 아이가 스님께 꾸지람을 듣고 밤중에 별안간 없어졌다. 경허 스님이 아무리 애타게 그 아이를 불러도 종적이 없었다. 경허 스님이 너무나 답답해 만공 스님에게 물었다. “여보게 자네가 그렇게 잘 안다니 경환이란 놈이 어디로 갔는지 한번 알아보게나”하고 물었다.
만공 스님은 “지금 경환이가 있는 곳은 나무 꼭대기입니다. 거기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 염려치 않아도 곧 들어올 것입니다”고 답했다.
경허 스님은 믿지 않았다. 스님은 “이 사람아, 이 밤중에 또 폭풍으로 바람까지 부는데 하필이면 왜 나무꼭대기에 있단 말인가? 그 참 괴이한 일이로다”고 의아해 했다.
그런데 밤이 지난 아침, 지대방 안에서 경환이가 자고 나오는 게 아닌가.경허 스님은 경환이를 불러 “어제 저녁에 어디를 갔었느냐”고 물었다.이에 시봉하던 아이는 “어제 저녁에 저는 스님을 약올리기 위해 마당 끝에 있는 괴목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모두들 저를 찾느라 야단이었습니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경허 스님은 “그러느냐, 만공이 무엇을 알기는 잘 아는가보다”하고 생각했다.
스님은 만공 스님을 불러놓고는 “이 사람아, 서산 대사의 말씀인 즉 ‘도인에게 아무리 훌륭한 도가 있다 할지라도 술법(術法)을 행한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믿지 말라’하지 않았는가?”고 말했다.
이어 스님은 “설사 자네가 살고 남도 살려줄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해도 그러한 일은 하지 말게”하고 엄히 타일렀다.이에 만공 스님은 그 후로는 절대로 타심통으로 아는 말을 하지 않았다. 또 스님 스스로 어려운 곤경에 빠져도 자신의 신통으로 해결하겠다는 생각조차 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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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