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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비 없는 석주가 알바의 주범일 줄이야
알베르게 관리인의 집 우편함에 키를 넣고 마을을 떠난 시각은 아침 6시 반쯤.
출발하여 곧 마주친 한국산(현대) 차가 아침 기분을 산뜻하게 해주었다.
마드리드 길에서는 별로 띄지 않았는데 이른 아침 최초의 대면이니까 그리 느껴졌을 것.
알바를 당연한 다반사처럼 반복함으로 인해서 잠시도 마음 놓고 걸을 수 없는 마드리드
길이기 때문에 이같은 하찮은 일마저도 길조(吉兆)라고 믿고 싶은 것인가.
아니다.
프랑스 길 셋째날부터 이 정서는 이미 시작되었다.
라라소아냐(Larrasoana)에서 최초로 한국차를 봄으로서 시작된 국산차 = 길조(good
omen) 정서가 알바가 심한 마드리드 길에서 더욱 간절해지고 있는 것이다.
넓게 차지한 코카성농장(Granja Castillo de Coca)을 지나서 숲속으로 들어간 후 아슬
아슬하게 이어지는 마드리드 길은 장송지대를 거쳐 비닐 하우스 단지로 남동진한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처음 보는 대단위 하우스 농장이다.
한데, 덩치 큰 적송(赤松)들의 아랫도리가 상처투성이가 되어 빨간 살을 드러내고 있다.
화분형 용기를 차고 있는 것이 다를 뿐 일제 강점기 막판의 우리 송림과 여일한 꼴이다.
섬나라 일본은 대륙을 향한 제국주의 야욕을 억제하지 못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으나
심각한 기름난에 봉착했다.
윤활유를 추출한다는 아주까리(蓖麻子)를 생산하기 위해 소학교(초등학교) 운동장까지
파헤쳤는가 하면 송진으로 항공기유를 만든다 해서 온 산의 소나무 몸통을 난도질했다.
송진을 받아오도록 주민들을 닦달하였는가 하면 관솔옹이를 캐어오도록 어린 학생들을
산으로 내몰기 까지 했다.
백두대간과 정맥들, 팔도산의 송림은 일제의 야만적 발악으로 인해 상흔들을 안고 살아
가고 있지만 여기 스페인의 낙락장송들은 왜 그래야 하는가.
태평성대에 다름아닌 시기에 전쟁도,기름 걱정도 없는 너른 땅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잔혹사가 왜 현재진행형일까.
궁금증 리스트에 올렸을 뿐 알 길이 없었는데 귀국 후 단골 한의사로부터 기관지 천식,
폐결핵, 담석, 종기, 타박상, 신경통을 비롯해 치료범위가 광범하다고 들었다.
일제처럼 전쟁하기 위해서 자연의 흡혈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곳 스페인인들은 비록
강제이기는 해도 나무들의 헌혈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가.
입에만 양기가 오른 서구인의 자연보호, 동물애호 외침에 역겹고 메스꺼움을 참는 일이
내게는 고역이며 야고보의 길들에서 그들의 동물애호 실태를 목도할 때마다 분노했다.
애호가 아니라 변태일 뿐이다.
불행하게도 이 변태는 우리나라, 내 집에 까지 침투해 있다.
애완견 사랑이 부모 사랑, 자식 사랑, 동기의 사랑보다 우월하다면 신(god) 사랑이 개
(dog) 사랑으로 전도되었음에 다름 아니다.(god를 뒤집으면 dog이 되는 것 처럼)
자연보호의 갖은 구호 뒤에 전개되는 파괴는 우리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다.
한국산 자동차가 준 고무(鼓舞)는 상처 입은 장송들에 대한 애잔한 마음에 퇴박을 맞고
T자 길 앞에서 망설이게 되었다.
확률면에서는 Y자와 T자가 전혀 다르지 않다.
불행중 다행으로 잘못 가기 얼마 되지 않아서 일하러 나온 트랙터를 만났다.
1차 관문은 운좋게 통과했으나 이번에는 돌기둥이 알바를 이끌었다.
가리비가 새겨있지 않았을 뿐 똑같은 형태의 석주에 속은 것.
이 석주를 믿었다가 마드리드 길 최악의 알바 기록을 세운 것이다.
외딴 가축농장을 찾아갔으나 상대가 될 사람은 없고 짐승들 뿐이었으며, 사도 야고보의
길 안내교육을 받았을 리 없는 그들은 길잃은 내게는 말짱 헛것이었다.
내가 헤매고 있는 동안에는 사람도 어떤 차량도 모두 잠적해버렸다.
트랙터 있는 원점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했다.
링반데룽(ringwanderung/環狀彷徨)에 걸리지 않으려면 그래야 한다.
종래의 알바 원인은 늘 방심이었다.
방심은 금물이라고 다짐두면서도 한 순간의 방심 때문에 고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알바는 방심이라기 보다 석주에 대한 지나친 신뢰가 원인이다.
페레그리노에게 가리비가 없는 석주는 짝퉁이 아니라 난파선(shipwreck) 또는 블랙홀
(black hole)에 다름 아님을 미처 몰랐으니까.
파계를 모면하다
간신히 제 길을 찾았다.
얼마 후 숲을 빠져나온 사도 야고보의 마드리드 길은 SG-P-3432지방도로에 합류하여
철로의 지층 통로를 통과하고 들판의 요업(벽돌)공장을 지난다.
나바 데 라 아순시온 동구까지 가서 SG-342도로에 다시 합쳐 마을로 진입한다.
세고비아 주의 지자체중 하나인 나바 데 라 아순시온(Nava de la Asuncion)은 인구가
3.000명을 상회하므로 큰 마을에 속한다.
돌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성모 몽소승천 교구교회(Iglesia parroquial de Nuestra
Senora de Asuncion)로 달려갈 때 종탑 위의 시계가 10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코카에서 7km라는 이 마을까지 4시간이나 걸린 것이다.
2시간여를 알바하다니.
남쪽 어딘가에 비가 내리고 있는 듯 수상쩍은 날씨였는데 마치 내가 마을에 도착하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퍼붓기 시작한 소나기 때문에 다시 1시간여를 낭비했다.
그러는 동안에 내 몸에서는 분란이 일어났다.
'발'이 고통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눈'을 향해 신랄한 공격의 날을 세웠다.
지금쯤,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니에바에 거의 당도했을 텐데 너 때문에(너의 불찰로)
이처럼 통증에 시달리고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고.
'눈'은 세심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처리한 '판단'에게 책임을 돌렸다.
'판단'인들 변명이 없겠는가.
이 상황에서는 발을 달래는 것이 유일한 수습책이었다.
고백하건대, 곧 출발하는 버스가 있었다면 아마 그 버스에 올랐을 것이다.
버스 터미널까지 갔으니까.
그러나, 천만다행이게도 버스를 타려면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을 대기
해야만 했기 때문에 나는 파계(破戒)를 모면했을 것이다.
세사와 세석으로 되어 있는 숲길보다 발에 자극을 덜 주며 방심과 판단 착오의 염려가
없는 SG-341지방도로를 택하는 것으로 타협하고 몽소승천(Asuncion) 마을을 떠났다.
사도 야고보의 길 초기에는 '성모의 몽소승천(Asuncion) 교회'가 생경한 이름이었으나
자주 보게 됨으로서 익숙해졌지만 교회뿐 아니라 지명까지 몽소승천인 마을을.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과 몽소승천(蒙召昇天)은 가톨릭교회의 교의신앙이다.
최상위 신앙은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를 메시야(Messiah)로 믿는 것이다.
모든 종파를 망라해서 기독교는 하느님이 드라마틱한 방법으로 세상에 보내신 당신의
외아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종교다.
신약성서의 기자들이 이 드라마틱한 과정을 기록할 때 예수의 가족관계까지 대충 언급
했는데 아무래도 사족을 그린 것 같다.
끊임 없는 논쟁거리가 되고 있으니 말이다.
예수의 잉태와 출산은 생물학적 차원이 아닌 불가사의한 기적의 사건임을 믿는다.
다른 말로 하면 예언(구약 이사야 7:14)의 완성일 뿐이며 예수의 어머니의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태어난 것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까지의 42대에 걸친 족보를 훑어보아도 윤리적으로 내세울 만한
집안이 못된다.
그런데도,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평생 동정 및 몽소승천까지 믿어야 하는가.
도대체, 하느님의 구속사에 마리아의 지속적인 역할이 왜 필요한가.
하느님의 역사를 인간의 정서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적 방식으로
흔들어 보겠다는 속셈인가.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니에바
우산을 받아야 할 정도로 오락가락하던 비가 그쳐준 것만도 스틱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수시로 쉬고 붕대를 다시 감아야 하는 내게는 더없이 다행이었다.
토말 길(Finisterre-Muxia)에서 함께 걷던 헝가리 처녀, 지금은 내 양손녀(養孫女)가 된
에디나(Edina)가 불현듯 생각났다.
그때, 그녀는 아킬레스건의 문제로 여정을 힘겹게 소화하고 있었는데 동행하는 나 또한
정신적으로는 편치 않았다.
보조를 맞춰주는 어려움보다 그녀에 대한 배려가 되레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런 점에서는 늘 혼자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나바 데 라 아순시온에서 10km 거리인 니에바 마을 초입에서 숲길과 합류한 후 곧 SG-
341도로를 벗어나 마을로 들어갔다.
인구 340여명인 니에바(Nieva)는 세고비아 도심에서 북서쪽 34km(사도 야고보의길로)
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세고비아 주의 전형적인 평원 지자체란다.
12c말,13c초에 창건한 최초의 순교자 성 스테판 교구교회(Iglesia parroquial de San
Esteban protomartir)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오래된 마을이다.
니에바(해발844m)에서 동남쪽으로 2km를 완만하게 올라(해발907m) 언덕바지의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니에바(Santa Maria la Real de Nieva) 마을에 도착했다.
사도 야고보의 길 자료(마드리드 길 이정표)에 의하면 세고비아 주도(州都) 까지 32km,
마드리드 까지는 133.3km를 남긴 지점의 마을이다.
14개의 작은 마을을 거느리고 있으며 2010년 현재 전체 인구가 1.193명(INS/Instituto
Nacional de Estadistica/국립통계협회?)인 세고비아 주의 지자체다.
작은 마을들은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6세(Alfonso VI) 때 이 지역의 레콘키스타
(Reconquista/스페인의 국토회복운동) 이후 다시 정착이 이뤄졌단다.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니에바는 14개 미니 마을(hamlet)을 제외하면 주민수가 530명
미만의 평범한 마을 같으나 역사적인 마을이란다.
1392년 9월 어느 날, 무슬림의 침공으로 종적이 묘연했던 마리아의 목상이 목동 페드로
아마도르(Pedro Amador)에 의해 발견되고 이 사실이 세고비아의 주교에게 보고된다.
현장을 방문한 주교는 카스티야(Castilla)왕 엔리께3세(Enrique III)의 왕비 카탈리나 데
란카스테르(Catalina de Lancaster)와 의논한다.
왕비는 목상이 발견된 곳에 교회를 짓고 그 지역에 마을 세우기를 왕에게 청한다.
왕은 1395년, 마을의 취락 형성을 위해 세금과 징병을 면제해 주는 특전을 선포한다.
왕비는 발견된 마리아 상을 소테라냐(Soterrana /'지하'라는 스페인 古語)라 칭하고 그
곳에 교회를 짓는다.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니에바(Santa Maria la Real de Nieva) 마을이며 지하의 성모
교구교회-수도원(Iglesia-Monasterio parroquial de Nuestra Senora de la Soterra
na)이다.
당초의 내 계획은 이 곳에서 11km 전방이며 다다음 마을인 아녜까지 가는 것으로 되어
있고 시간도 넉넉한데 포기했다.
3개 마을, 19km를 걸었을 뿐인데도 몸이 이미 그로기(groggy)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도 야고보의 길에서 뿐 아니라 내 일생 초유의 일이다.
알바가 정상 행보보다 대미지가 큰 것은 사실이나 체력의 손실때문이 아니라 발 뒤꿈치
통증을 감당하기 벅찼기 때문이다.
11km가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데다 알바의 날이 끝났다고 단정할 수도 없으니까.
순례의 진수를 체험하려면 마드리드 길을 걸어라
마을 서쪽 끝자락에 있는 알베르게에 도착했으나 잠긴 문에 전화번호 쪽지만 붙어있다.
빤히 쳐다보고 있는 앞 집 노파에게 전화 한 통화를 부탁했으나 문을 닫아버린 후 감감
무소식이고 옆 집 영감에게 도와달라고 했으나 딴전을 피웠다.
지나가는 이는 모바일(mobile)이 없단다.
머피의 날인가 고약한 인심인가.
마드리드 길에서 지금껏 선량한 이웃들의 자발적 도움만 받아온 탓인지 충격적이었다.
사도 야고보의 길에서 그 놈이(휴대폰) 아쉬운 유일한 시간이었다.
통증은 움직이기가 겁나도록 시시각각 거세게 윽박질러댔다.
그럴 수록 빨리 실내에 들어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며 그러려면 우선 사람을 만나야
하므로 어렵사리 큰 길로 나아갔다.
공교롭게도 잠시동안이나마 몰인정한 사람들만 만난 것이지 지역 인심이겠는가.
거의 전지역이 메세타일 뿐 가로막은 산과 바다가 없는데 고착된 지방색이 성립되는가.
국내에서도 이중환의 택리지를 이미 단호히 부정한 터인데 머나먼 남의 나라 인심을 편
가르기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막 차에 오르려는 부부와 어린 딸의 젊은 가족을 만났다.
그들은 지체없이 내가 보여준 번호에 전화를 걸었고 대화의 형식으로 보아 알베르게의
관리인과 교분이 두터운 듯 했다.
곧 달려온 관리인 하비에르 고살로(Javier Gozalo)는 3개의 벙크뿐인 미니 알베르게를
독점하게 된 내게 키를 맡기며 준수사항을 주절주절하다가 돌아갔다.
그의 이미지는 약간 잘난 체 하나 수더분한 사람이다.
샤워마저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매가리가 빠져버린 듯 했으나 약을 바르려면 가까스로
라도 씻어야만 했다.
의사와 간호사가 하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다면 어찌 생명을 다루는 전문직이겠는가.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아도 별 효과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매번 방법을 달리
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또 달리 했다.
진통제 효과인지 통증이 진정되는 듯 해서 마을 중심가로 나갔다.
무엇보다 먹거리 준비가 시급한데 시에스타(siesta)휴업 마트가 17시까지 기다리란다.
그 사이, 국립기념물인 성모 교구교회와 겉모습과 달리 웅장한 회랑을 둘러보았다.
세고비아로 가는 출구도 눈여겨보고 중심가를 거닐다가 빵과 베이컨(bacon), 야채와
맥주를 비롯한 마실 것 등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먹을 것 다 먹고, 마시고 싶은 것도 다 마신 후 무료를 달래느라 방명록을 뒤적거리다가
우리 글을 발견했다.
최초의 한국인의 글과 나 이전의 마지막 한국인의 글을.
2008년 5월 25일과 2011년 5월 15일에 쓴 글을 2011년 6월 7일 밤에 내가 읽은 것이다.
마지막 한국인의 글은 쿠엔카 데 캄포스 이후 거의 매일 읽으며 왔다.
전 세계인에 공개된 글이므로 주인 허락 없이 옮겨도 된다고 판단되어 소개한다.
느낌은 읽는 이의 몫이므로 언급을 삼가고.
이 알베르게 개소이래 한국인 최초의 숙박객이 643번째인데 그로부터 1109일(3년14일)
이 경과한 2011년 6월 7일 내가 1200번째로 투숙자다.
1109일 동안에 557명이 거쳐갔다면 557/1109 = 0.5031,즉 이용자가 이틀에 1명꼴이다.
마드리드 길의 알베르게 위치로 보아 통과자는 극히 적을 것이므로 통과자와 방명록 무
기록자를 2분의 1로 후하게 감안해도 마드리드에서 출발하는 순례자는 1일 1명꼴이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교행한 순례자 수를 헤아려 보면 거의 일치한다.
사도 야고보의 길 12루트중 내가 체험한 길은 5개뿐이므로 단언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래도, 인기도 최상위 3루트와 하위 2루트라는 점에서 가늠은 할 수 있다.
순례길에도 부익부 빈익빈의 편중현상이 극명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두 한국남녀의 '강력한 추천'도 방명록에 갇혀 있으니 밖으로 울려퍼질 리 없다.
연간 천명이 넘는 한국인은 사도 야고보의 길에서 순례의 진수(眞髓/essence)를 가장
진지하게 체험할 수 있는 길을 외면하고 오로지 프랑스 길에만 집착한다.
한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절대다수가 이에 해당한다.
프랑스 길, 포르투 길 등 인기 상위 루트들은 더 이상 순례길이 아니다.
굴뚝 없는 효자산업이라는 관광상품으로 이미 자리매김되었으며 당국자들도 그쪽으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진정 순례자가 되고 싶다면 최하위 루트를 택하라고 감히 권한다.
마드리드 길을.
역방향이면 더욱 은혜로울 것이다.
현대적 시각에서는 애로의 길이지만 상품화 되지 않은 체온이 온존하고 있으니까.
마드리드에 골인하려면 아직도 4밤을 도중에서 보내야 하므로 단언하기는 이르다 하겠
으나 전체의 체험으로는 65분의 4, 즉 6%에 불과하므로 무시해도 무방할 것이다.
알바도 축복이다
끄적거리는 동안에 밤이 깊어갔다.
날짜가 바뀌었는가 하면 시름도 깊어갔다.
한가로이 상념을 즐기고 있을 형편이 되지 못하는데 이 무슨 사치를 부리고 있는가.
어제 중도 하차했기 때문에 세고비아까지 32km 길이 빠듯한데 몸이 말을 들어줄런지.
몸에게 물어봐야 할 일이지만 명쾌히 대답해 주겠는가.
강원도 태백 산속의 예수원(Jesus Abbey)에는 "노동은 기도다"는 표어가 붙어있다.
노동 자체를 특별한 신앙행위로 정의하는 표어다.
사도 야고보의 길에서 외국인들이"시니어가 왜 그렇게도 많이 걷느냐"고 물어올 때마다
나는 "그것이 내 유일한 기호"(嗜好/favorite)라고 대답했지만 실은 기호 이상의 행위다.
걸으면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걷는다.
걸음 속에 기도가 있고 기도 안에 걸음이 있다.
아니다.
"걷는 것이 기도"요 "기도의 행위가 바로 걷는 것"이다.
내가 지팡이 없이 두 다리만으로 다시 걷게 된 이후 걷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분리할 수
없으며 표현이 다를 뿐 하나의 뜻이며 하나의 행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밤에 나는 무뤂을 꿇었다.
당장 걸어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어제 하루가 힘겨웠으며
욥의 인내를 따를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할 만큼 확대되기 전에 차단해야 한다.
여태껏 잘 돌보아 주시던 '그 분'에게 어떤 의도가 있던 간에.
전에도, 야복(Jabok) 나루에서 하느님의 사자와 레슬링(wrestling) 했던 야곱으로부터
힌트(hint) 받아 해결한 적이 있으므로 씨름에 나설 비장한 각오도 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라에 놀란 가슴 소댕보고도 놀라는 격이 아닌가 자문도 해보았다.
프랑스 길 시르가에서 본 동유럽의 초로(初老)여인들이 떠올라 자괴감을 갖기도 했다.
그들은 거북의 등처럼, 오랜 가뭄의 논바닥처럼 갈라진 발로도 흐트러짐 없이 당당하게
걸어갔는데 지금 나는 엄살을 떨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그 분'은 내가 풀지 못할 만큼 어려운 숙제는 내주지 않으시는 분인데도.
그렇다.
터무니 없는 엄살이다.
아무리 망각도 축복이라지만, 잠시일 망정 이렇게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니.
어떤 곤경이 수반되어도 좋으니 두 발로 걷게 해달라고 애절하게 호소하다가 절단하라
절규했던 지난날을 망각하고 수선을 떨고 있다니.
아마도 알바의 후유증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알바를 즐기는 기분으로 기꺼이 수용하면 되지 않는가.
알바가 의도적 선택일리 없으며 잘못된 선택의 결과라 할지라도 순례의 일부로 즐거이
수용한다면 짜증이나 후유증이 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알바는 예상보다 많이 걷는 것일 뿐이며 많이 걷는 일이야 말로 다다익선인데 왜?
게다가 무수히 반복하고 있는 알바를 돌이켜보면 알바 때문에 그르친 일이 없는 반면에
알바 덕에, 알바 없이는 전혀 불가능한 소중한 체험과 관계가 쌓여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알바를 무능과 수치라고 자책하거나 안내 표지를 원망할 이유가 없고 '그 분'
이 권하는 단련의 한 방식으로 이해하면 축복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나의 완벽주의와 이성적이며 비판적인 시각이 지나치다고 판단하신 '그 분' 의
메시지일 수도 있다.
장정이 완결되기 전에 교정하라는.
이 밤에 내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은 옛 야곱이 야복 나루에서 하느님의 사자와 겨룬
레슬링에 다름 아니다.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니에바의 알베르게가 나의 '브니엘'(창세기32:30)이 될 것이다.
비록 환도뼈는 상했을 지라도 끝내 승리한 야곱처럼 나도 남은 날들을 당당히 걸어가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방명록에 표시했다.
'Immanuel!'이라고.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