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수부대가 학원 안에 들어와서 짓밟아
증언자 : 정방남(남)
생년월일 : 1961.(당시 나이 19세)
직 업 : 고시학원생(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8. 12
개 요
5월 19일 학원으로 들이닥친 공수들이 무작위로 휘둘러댄 곤봉에 소뇌를 다쳐, 현재까지 언어, 행동, 의식장애를 겪고 있는 정방남 씨. 그는 198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공무원 시험준비중이었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언어 기능장애가 심한 정씨가 토해내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은 무척 느리고 알아듣기 조차 힘들었다. 처음에는 조리있게 자신의 심정과 당시의 일을 이야기했으나 5분이 채 못 되어 전혀 알아들을 수 없게 되자 그의 형수 이씨가 대신 설명해 주었다.
이 글은 8년 세월을 시동생의 손발이 되어 밥까지 떠 먹여 주며 극진히 간병하고 있는 형수 이소남 씨와 정방남 씨의 증언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수업 도중 들이닥친 공수들의 구타
조사자 : 부상당한 경위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정방남 : 1980년 당시 나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공무원이 되기 위해 구 YWCA 건너편 건물 4층에 있는 고시학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19일 오후 4시 30분경, 국사수업을 받고 있을 때였어요. 느닷없이 들이닥친 공수들이 곤봉을 휘두르고 다니면서 빨리 밖으로 나가라고 고래고래 소리쳤습니다. 아우성치는 소리와 책상 넘어지는 소리가 뒤섞여 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나는 빨리 빠져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뒤처져 있었더니 공수들이 '이 새끼들, 빨리 못 나가'라고 욕을 퍼부으며 개머리판과 곤봉으로 후려치기 시작했습니다. 도망가려고 애를 썼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어요.
4층에서 막 계단을 내려가는데 뒤에 있던 공수가 군화발로 나를 차버려 3층으로 굴러떨어졌습니다. 3층 계단에 쓰러져 있는 나를 향해 놈들이 비수처럼 달려 들었습니다. 그들은 온몸을 짓이기더니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마치 장난감을 갖고 놀듯 저항력이 없는 나를 발로 밟고 때리는 것이었어요. 일어서면서 유리창 밖을 보니 YWCA 건물 앞 도로에 1백여 명이 넘는 학생, 시민들이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고 있었습니다. 공수들이 그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어요. 창밖을 보고 있는 나를 향해 공수가 '이 새끼야! 반항하는 거야. 뭐하는 거야' 하면서 심하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2층, 1층으로 내려갈 때마다 등 뒤에서 곤봉과 개머리판에 얻어터지며 1층 사무실로 끌려갔습니다. 그곳도 유리창은 모두 박살난 채 책상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어요. 또 한 차례 때리더니 밖으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조금 열린 셔터문 밑으로 개구멍을 빠져나가듯 기어나갔습니다.
학원 앞 도로에는 굉장히 많은 시민, 학생들이 있었고 우리 학원 선생님도 붙잡혀 있었습니다. 거기 그대로 있으면 맞아 죽을 것 같아 도망가려고 기회를 엿봤지만 공수들이 10여 명씩 무리지어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도해 보지도 못 하고 닭장차에 태워졌습니다. 나는 차에 태워지자마자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조사자 : 정신을 차린 곳은 어디였습니까? 그리고 어디로 잡혀가셨어요.
정방남 : 차에 실린 채 어디를 돌아다녔는지는 모르겠고 '대한극장' 부근에서 깨어났어요. 내가 여러 사람과 함께 잡혀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때부터 살려달라고 공수를 붙들고 애원했습니다. 계속 통사정을 했더니 '지금 보내주면 꼼짝 말고 집에만 있어!'라고 엄포를 놓고는 쓰레기 버리듯 나를 차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서부경찰서 조금 못미처 '청명약국' 앞 도로가에 던져진 나는 팔꿈치와 무릎이 완전히 벗겨져버렸어요. 닭장차는 나만 내려주고 차에 꽉찬 사람들을 싣고 돌고개를 넘어서 가버렸어요. 길가에 있으면 공수들이 또 잡아갈 것 같아 청명약국 골목으로 기어갔어요. 담에 기대앉아 조금 쉬었더니 의식이 회복되는 것 같아 월산동에 있는 형님집으로 걸어서 갔지요.
소뇌변상 및 척추변상
조사자 : 형님댁에서 같이 사셨습니까?
정방남 : 학원에 다니려고 광주로 와서 둘째형님과 같이 살았어요.
조사자 : 그러면 형수님께서 봤을 때 그날 정방남 씨의 모습이 어떻던가요?
이소남 : 그날 어둑어둑해서야 삼촌이 왔는데 눈은 희멀겋게 변해 있고 얼굴은 겁에 질려 송장처럼 창백해진 형상이었어요. 몸 군데군데 멍이 들고 상처가 나 있었지만 심한 외상은 없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요. 머리가 멍하고 뒷골이 아프다고 해서 진통제만 사다 먹였어요. 그때 상황이 어찌나 살벌했던지 혹시 다친 사실이 알려져 후환을 당할까봐 약국에 가서도 아무 말 못 하고 약만 사왔어요.
조사자 : 그 후 언제부터 건강이 이렇게 악화되었는지요. 그리고 지금까지의 치료과정에 관해 말씀해 주세요.
이소남 : 이렇게까지 악화될 줄 알았으면 다친 뒤 바로 병원에 갔을 텐데......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니까 처음엔 병원에도 안 갔어요. 자꾸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약만 먹였는데 날이 갈수록 야위어가는 것이 뭔가 이상하다 싶어 병원으로 데려갔어요. 진찰받을 때도 행여 어찌 될까 두려워 다친 경위에 대해 말도 못 하고 벙어리 냉가슴만 앓았지요. 가슴 조이면서 살아온 지난날을 말해 뭣 하겠어요.
지금 생각하면 피해자는 바로 우리들인데 우리 삼촌을 병신 만든 사람이 왜 그렇게 두려웠는지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이렇게 말도 못 하고 몸도 못 가누게 될 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았을 텐데......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아요. 악몽에 시달리면서 고통받는 모습을 옆에서 보기도 정말 민망하고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점차 눈에 초점도 없어지고 혼자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어요.
1982년부터 눈에 띄게 마르더니 말을 할 때도 심하게 더듬고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알아들을 수 없게 되더군요. 차츰 증세가 심해지면서 크다는 병원은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어요. 전남대병원, 조대병원 심지어는 정신병원까지 각지를 돌면서 거의 안 가본 곳 없이 다녔지만 왜 그런 증세가 나타나는지 속시원히 병명도 듣지 못했어요.
서울대병원에 갔을 때 마침 미국에서 초빙해 온 정신신경과 의사가 있어 종합진찰을 받은 결과 병명이 '소뇌변상 및 척추변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현대 의학으로 소뇌의 수술은 불가능하며 더 이상의 악화를 방지하는 것만이 최선의 치료책이라고 하더군요. 척추에서 주사바늘을 사용하여 우유빛 액체를 뽑아 정밀 검사를 하더니 척추이상이 심한데 다행히 머리회전은 빠르다고 하대요. 처음으로 확실한 병명이라도 듣게 되니 후련했어요.
그 후 요한병원에서 보름에 한 번씩 약을 받아와요. 잘 걷지도 못하는 삼촌과 함께 병원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타려면 기사들이 빨리 타지 않는다고 성화가 대단했어요. 오죽하면 삼촌을 위해 자가용을 사기로 결심했겠습니까? 처음에는 의료 보험카드도 없이 계속 병원에 다니려니 돈이 이만저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도 지금은 의료보험카드라도 있으니 훨씬 나아요.
요즘이야 5·18 부상자에 대한 인식도 많이 달라지고 또 사람들의 의식도 변화해서 더 나아졌지만 전에는 의료보험카드를 사용하는 환자는 받아주지도 않았으니까요. 지금은 저 혼자 병원에 가서 약만 타오면 되지만 '젊은 사람이 오죽 돌아다니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세상 구경도 하고 바람도 쐴 겸 해서 같이 가요.
보건소에서 특수약품이라며 생색을 잔뜩 내고 약을 주길래 자세히 봤더니, 세상에 우리 삼촌의 병을 장난으로 아는지 위장약에다 영양제 몇 알을 얹어준 것이 아니겠어요? 이것만 봐도 부상자 치료대책이 얼마나 형식적인지 알 수 있어요.
조사자 :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약물복용을 해야 하나요.
이소남 : 아마 의학이 고도로 발달하여 다른 치료방법이 있으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어요. 한번은 의사와 합의하여 3일간 약을 안 먹은 적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전혀 힘도 못 쓰고 정신도 없어지면서 완전히 식물인간처럼 되어버리더군요.
정방남 : 저녁에 어쩌다 실수로 약을 안 먹고 자게 되면 다음날 아침에 몸 상태가 확연히 이상함을 느낍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힘들고 정신도 흐려져요.
조사자 : 신체장애가 심하신데 일상생활은 어떻게 하십니까?
정방남 : 화장실 다니는 것만 겨우 혼자서 하고, 나머지 모든 일을 형수님께 의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3척 동자도 먹을 수 있는 밥을 나는 수족마비증세가 심해 형수님이 먹여줍니다. 우리 어머님도 살아 계시지만 형수님께서 나를 위해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으십니다. 형수님 면전에서 이런 말하기 민망하지만 나는 우리 형수님을 제2의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동생 위로하는 의미에서 부상자회 활동 대신
조사자 : 그동안 치료비도 많이 들었을 텐데 혹시 보상금이라도 받으셨나요.
이소남 : 요즘 정부에서 보상문제로 떠들어대니까 모르는 사람들은 다 보상금을 받은 줄 알지만 실제로는 한푼도 받은 일 없어요.
조사자 : 부상자회 활동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이소남 : 1982년 삼촌과 함께 병원에 갔다 오는 길에 우연히 학원강사를 만나게 되어 삼촌의 사정을 말했더니 5·18 부상자회를 소개해 줘서 나중에 가입하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삼촌과 내가 같이 부상자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삼촌 건강이 나빠져서 저 혼자 다니고 있지요.
조사자 : 부상자회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이소남 : 삼촌 인생을 생각하면 하도 불쌍해서 삼촌의 넋을 위로한다는 생각으로 아무리 바빠도 월례회와 시내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참석하고 있어요. 주로 부상자들 중 건강이 악화돼서 고생하는 분을 찾아가 위로도 하고 5·18 광주민중 항쟁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이런 일을 하다 보니 옛날에는 정치와 무관하게 생활했는데 지금은 사회의식도 생겼고, 덕분에 저도 투사가 다 되었어요.
내가 하도 기가 막힌 일을 당했는데 이 말은 꼭 해야 되겠어요. 1987년 대통령 선거기간에 유가족과 부상자들이 시청에 모여 5·18 진상규명과 보상 등을 요구하며 데모를 했어요. 유족들은 항상 우리보다 앞장 서서 열심히 싸워요. 그때도 유족들이 '시장'을 대놓고 '내 자식도 죽이고 사는 사람인데 니 따위를 무서워할 줄 아느냐'면서 큰소리를 쳤어요. 그런데 시장이라는 사람이 절대 공권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해놓고는 밤 12시가 '땡!' 하고 지나자 사복경찰들이 무더기로 들어와서 우리를 끌고 차에 태웠어요. 그러더니 시외로 돌면서 2, 3명씩 아무 데나 내려두고 가버리는 거예요. 세상에 얼마나 파렴치한 놈들인 지....... 우리가 항의하자 12시가 지났으니 약속은 무효라는 거예요. 이렇게 눈 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온갖 거짓말로 우리를 기만하면서도 말로는 보상, 진상규명을 떠들어대고 용서와 화해를 운운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지금은 세상이 변해 5·18에 대해 말이라도 할 수 있고, 유족이나 부상자들이 힘을 합쳐 대항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어요. 우리 삼촌은 거의 산송장이나 다름 없지만 그래도 당시의 사건들이 점차 밝혀지는 것을 직접 보기라도 하니 훨씬 괜찮지요. 그때 사망하신 분들은 너무 안됐어요. 유가족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생사람 병신 만들어놓고 보상이라니...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다쳐서 고생하는 사람만이 부상자가 아니고 옆에서 지켜보는 부모, 형제들도 부상자요, 피해자라구요. 넓게 말하면 광주 시민 전체가 피해자지요. 우리 모두의 가슴에 못을 박고 홧병들게 했던 것이 피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조사자 : 5·18에 대한 진상규명과 보상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두 분 다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소남 : 왜 죄없는 광주 시민을 그토록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죽였는지 그 이유가 꼭 밝혀져야만 합니다. 우리 삼촌에게 보상이라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의 완쾌가 제일이겠지만, 그들이 병신을 만들기는 했지만 무슨 재주로 옛날처럼 되돌릴 수 있겠어요. 그래서 내 생각에는 일시적인 보상은 전혀 의미가 없고 보훈대상자로 인정하여 삼촌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식대까지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식을 낳아도 기를 만한 신체적, 정신적 조건이 되지 못하니까 자식 이 성장하고, 대학교육을 마쳐 취직을 할 때까지는 지속적인 책임을 져야지만 몸은 비록 성하지 못해도 원만히 가정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우리 시어머님은 시골에 사시는데 막둥이 아들(정방남) 때문에 가끔 오셔요. 그 나이 되었으면 자식들 다 키우고 편히 여생을 보내실 때인데 자식 걱정 때문에 평생 낙이 없고 그야말로 암흑세계를 살고 계셔요. 그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요. 그런데 이런 정신적인 피해보상을 도대체 무엇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정방남 : 10·26 이후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서고 다시 현정권으로 이행되면서 1980년 5·18 당시의 애국 시민의 사망, 부상에 대해 강 건너 불보듯이 했던 것에 무엇보다도 큰 증오심을 갖고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공무원이 되기 위해 학원에서 수업받고 있던 사람을 잡아다 병신을 만들어놓고도 국민과 역사 앞에 양심을 버린 채 사건을 은폐, 조작하는 것을 보면 정말 가증스럽기만 합니다. 28세의 청년을 3세짜리 어린아이보다도 더 못한 상태로 만들어놓고 보상을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내 청춘을 되돌려놓겠습니까, 건강을 되찾아주겠습니까!
5·18 광주민중항쟁의 진상규명은 확실히 되어야만 합니다. 광주 시민과 전남도민의 명예회복을 위해 현 군사독재 정권은 사죄를 하고 육체적, 정신적 고난을 받고 있는 유가족 및 부상자에 대한 보상이 실시되어야 하며 구속자에 대한 석방이 있어야만 합니다. 민주화의 기로에 서서 내가 링컨의 말을 빌려 하고 싶은 말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지만 이 땅에 진정한 민주화가 이룩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양심을 내팽개치고 모든 사실을 은폐, 조작하는 5공화국의 위정자들이 존재하는 한 민주화는 요원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재야 인사, 야당 정치인은 각성하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이야기하는 중간중간 입 안이 말라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시동생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우유를 먹여주는 이소남 씨를 보며 '우리 며느리는 하늘에서 내린 천사라오' 하시던 시어머니의 말이 적절한 표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시동생에게 쏟는 형수의 헌신적인 사랑이 감동스러워 코끝이 찡해 왔다.
스물여덟의 청년이 갖추어야 할 신체적, 정신적 조건이 모두 망가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37킬로그램밖에 나가지 않는 이 육신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조사정리 양난희)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