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문화》2011. 봄
따스함이 동행하는 길에 대한 보고서
- 서연정, 동행, 이미지북, 2010.
이 송 희
1. ‘발’의 시간
서연정 시인이 네 번째 시집을 냈다. “미로들 가운데서 미로 하나를 들고 지금껏 걸었더니 드디어 오솔길이 되었다”는 시인의 고백은 “색색의 상처”들로 뒤엉킨 미로의 숲에서 그녀가 옹글게 견뎌왔을 시간들을 짐작케 한다. 첫 시집 먼 길(2000)을 내면서, 그녀는 이미 나무마다 쉽게 감는 나이테란 없는 것“이며, ”몇 번을 까무라치며 터지고 찢겨진 후/ 비로소 한 벌 목숨을 더 단단히 키우는 것”(「먼 길」)이라 하지 않았던가. “접히고 구겨진 지도” 한 장을 들고 “방향도 축척도 틀려진 수없는 길 나부랭이”(「상처를 뒤적이면 길이 보인다」)를 따라 겁도 없이 걸었던 시간이 어느새 십 년이 훌쩍 넘었다.
세상은 온통 “문과 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이미 “이해할 수 없는 벽 앞에서 무릎을 끓”(「문과 벽의 시간들」)기도 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문을 덜컥 열기도” 하면서, 여기저기 많이 찢기고 멍이 들었다. 이렇게 상처가 피고 지는 순간들을 견디며 낸 두 번째 시집 문과 벽의 시간들(2001)은 문과 벽을 못 찾고 미궁에 빠져 길을 더듬는 모습을 역력하게 보여준다. 그의 시편들은 생애 내내 자신이 걸어온 길을 소처럼 되새기던 발의 시간에 관한 기록이었다. 시인은 “엄정한 벽을 만나” 자신의 존재의미를 끊임없이 묻고 또 물으며, 꽤 오랜 시간 길을 찾아 헤맸다.
무엇이 들어 있을까(2007)라는 세 번째 시집에 이르러 시인은 자신의 몸 안에서 빠져나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소소한 이야깃거리”를 노래했다. “표층보다 몇 곱절 두려운 그 지층을 들여다보아야 하는”것을 시인으로서의 임무라고 여겨 온 그녀에게 무거운 어둠을 쓰다듬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그 어둠도 자꾸 어루만지다 보면 어느 순간 스스로 환해질 때가 있지 않겠는가. 늘 긍정적인 생각을 품고 사람과 자연이 함께 걸어준 시간이 있었기에 춥고 어두운 길목에서 올곧이 버텨낼 수 있었을 것이다.
네 번째 시집 동행(2010)은 그동안 서연정 시인과 함께한 시간과 자연과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인에게 이정표가 되어준 고마운 인연들, 자연 속에서 만난 자상한 얼굴들, 어머니와 함께 한 기억들, 자본주의의 골목과 소시민을 향한 애환의 감정들이 그녀의 마음에 “옥시글 옥시글” 새끼를 쳤다. 미로들 가운데서 미로를 들고 걸어준 시간과 자연과 사람들에게서 배운 삶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2. 함께 걷는다는 것은
서연정 시인은 시간과 자연과 사람이 함께 걸어준 고마운 길을 내려놓는다. 그녀에게 동행의 대상은 그동안 걸어오면서 울고 웃게 했던 시간들과 그럴 때마다 곁에 있어 준 자연 풍경, 따뜻하게 손잡아 준 사람들이다. 모두 “맑은 별 찾아가는 약도를 그려”(「약도를 그리는 사람」)준 인연들이다. 그들과 함께 걸으면서 시인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를 깨달아 가는 것이다. 삶은 결국 자기 자신과 동행하는 것이다. 자신과 동행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벗이 되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마음의 징역살이를 훌훌 털고 스스로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그때 자신과의 진정한 동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결국 시인은 시간과 자연과 사람들과의 동행 속에서 스스로와 동행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아하게 얽힌 덩굴 향그런 살냄새란 미로랑 딸 미로랑 그 자손의 거주지다 뒤섞인 사람냄새로 길은 본래 시금털털하다
대낮의 숲속에서 일상은 정박이다 바닥에 주저앉아 차오른 숨 고른다 끌고 온 삶의 꼬리를 잘라버린 도마뱀
수많은 길을 삼켜 통통히 살이 올라 꿈틀꿈틀 뭉클뭉클 미로의 흰 배때기 만삭인 옆구리 찢어 피 묻은 땅 받든다
삼동을 난 도토리들 오보록 새순 올려 이정표를 세우듯 푸른 손을 흔든다 발냄새 땀냄새 먹여 길 내기 좋은 그곳
- 「미로의 다른 이름」 전문
미로(迷路)는 출발지점과, 통로, 목표지점이라는 세 개의 주요부분으로 구성된다. 출발지점과 목표지점 사이의 통로에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며, 목표로 통하는 길과 막다른 골목이 있다. 출발선상에 놓인 대상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목표지점에 도달하고, 도달하면 어떤 대가를 얻게 된다. 미로는 크게 실마리가 공간적으로 주어지는 공간미로와 실마리가 오른쪽, 왼쪽으로 꺾어지는 계열에만 의존하는 시간미로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인간용으로는 복도식 미로 외에도 널빤지 위의 골을 따라가는 철필 미로, 실험자가 구두로 선택 판단을 구하면서 나아가는 비공간적인 정신 미로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공간미로는 그 형태에 따라 사각형, 원형, T형, Y형 등이 있다.
서연정 시인이 그려 놓은 「미로의 다른 이름」은 시간미로에 가깝다. ‘미로랑 딸 미로랑 그 자손의 거주지’라는 점에서 시간의 계보를 잇고 있다. 이렇게 이어지는 시간의 계보는 미로(迷路)와 미로(이름) 사이에서 의도적인 혼란을 야기하며 독자로 하여금 미로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을 안겨 준다. 미로 같은 그 길을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계보를 따라 대를 이어가듯 힘겹게 살아왔던 서민들의 삶을 담고 있는 것이다. “꿈틀꿈틀 뭉클뭉클”이라는 의태어의 병치는 생동감 넘치는 미로의 현장을 옮겨 놓은 듯 생생하다. 시인은 이렇게 자손에 자손을 잇는 미로의 생명적 고리를 “만삭인 옆구리 찢어 피 묻은 땅 받든다”는 여성성의 계보로 확장하면서 “삼동을 난 도토리들 오보록 새순 올”리는 희망적 미래를 생성한다. “발냄새 땀냄새 먹여 길 내기 좋은 그곳”은 “뒤섞인 사람냄새”로 만들어진 미로에서 진정 시인이 꿈꾸는 오솔길이 아니겠는가. 미로의 이미지를 살린 행 구분과 언어의 배치 감각이 독자로 하여금 미로의 또 다른 이름을 자꾸만 불러내게 만드는 시다.
따뜻한 손을 잡아 섭섭함을 녹이고
인사동 모퉁이를 천천히 돌아나올 때
뛰어와, 지폐 몇 장을, 우격다짐 건넨다
그 돈으로 차표를 사고 김밥을 사먹고
아무래도 목이 메어 물도 한 병 사마시고
그래도 화수분처럼
줄지 않는 마음씨
고이 품고 와서 고향 하늘에 놓아주니
우거지는 만 그루 그늘을 노래하는 새
보성강 물소리 같은
숨소리가 들린다
- 「여비」 전문
서연정 시인이 그려내는 정겨운 모습은 ‘여(餘)’, 즉 사람의 마음을 여유롭게 만드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서울에 갔다가 다시 광주로 내려와야 했던 화자가 인사동 모퉁이를 돌아 나올 무렵에 서둘러 뛰어와서 차비하라며 몇 만 원을 건네주었던 어느 정 많은 선생님과의 일화를 그려내고 있다. 그 돈으로 시인은 광주 가는 차표도 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김밥도 사먹고 물도 한 병 사 마신다. 줄어드는 액수 속에서도 여전히 줄지 않는 화수분 같은 마음씨를 기억하며 그녀는 넉넉해진 마음으로 버스에 몸을 실었을 것이다.
그 따뜻한 마음을 “고이 품고 와서 하늘에 놓아주”는 순간 “우거지는 만 그루 그늘을 노래하는 새”가 고향하늘에 날아오르는데, 이는 화자가 느꼈던 넓은 마음씨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이러한 따뜻한 은유는 “보성강 물소리 같은/ 숨소리”로 화자의 곁에서 항상 따스하게 흐른다. 이렇듯 시인의 따스함에 대한 정서는 “봄눈 녹은 물로/마른목을 적시”(「과일을 기다리며」)고 “발걸음 닿는 곳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제철 과일을 기다리듯 서로 서로에게 풋풋하고 정갈한 마음을 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서연정 시인의 시는 우리에게 작은 것에서 만나는 행복감이 어떤 것인가를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엉거주춤 남아서 절터를 지키고 있다차마 짐작했으랴홀로 천년 건널 줄이끼 낀 돌부처 손을 가만히 잡아본다노을 젖은 그리움 부슬부슬 내려와뭉개진 이목구비 그 흔적에 스밀 때도슬픔을 참으로 몰라 우직하게 웃을까틈새마다 오밀조밀 시간의 실뿌리들향연처럼 피워올린 작은 풀꽃 속으로순금빛 허허벌판을 눈부시게 숨긴다 - 「돌의 미소」 전문
시인이 응시하는 것은 이끼가 낀 돌부처다. 엉거주춤 남아 절터를 지키는 돌부처의 뭉개진 이목구비는 시인에게 우직하게 웃는 서민적 모습으로 그려진다. 돌은 천 년의 시간 동안 역사의 부침 속에서 인내하며 살아온 우리 민족, 그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우리의 존재는 어느 날 느닷없이 홀로 시작되고 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시간과 공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현재를 살아간다. 얼굴은커녕 이름도 알지 못하는 우리 선조들의 미소를 닮은 ‘돌의 미소’를 느끼는 화자는 현진건의 「불국사 기행」에서처럼 “그는 살아 움직인다. 그의 몸엔 분명히 맥이 뛰고 피가” 흐르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시는 돌부처의 미소를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햇살보다 비바람과/ 더불어 사는 세상”(「돌탑」) 을 스스로 다스리는 돌부처의 미소를 배우게 한다. 시인은 돌의 미소 속에서 숨은 사람을 만난다. 미소는 “순금빛 허허벌판”마저도 눈부시게 숨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홀로 걷는 산길에 구절초 맑은 향기
바람 타고 돌아온 엄마의 숨결이다
든든한 동행이 되어
더불어 걸어주는
몸 없는 당신을 안아드리고 싶어라
허전한 두 팔 모아 이 가슴 으스러지게
남기신 엄마의 생살
나를 꼬옥 안는다
- 「동행」 전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녹아나는 시다. 어머니를 잃은 뒤 시인은 유독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많이 토로했다. 어머니와 함께 걸었던 그 길에서 시인은 “몸 없는 당신”을 애타게 그리워하면서도 슬픔을 다독일 줄 안다. “내 목숨이 있는 동안은 자식의 몸을 대신하기 바라고, 죽은 뒤에는 자식의 몸을 지키기 바란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내 걱정 하지 말고 잘살아야 해/ 뒤돌아보지 말고 조심해서 어여 가”(「말씀」) 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와 “어지러운 희망을”(「투병기」) 밥보다 듬뿍 드시며 병상에 누워 계신 어머니의 아픈 모습이 생생하다. “김 오르는 슬픔”의 시간을 호호 불며 텅 빈 식탁에 앉아 있는 쓸쓸함과 그리움을 시인은 여러 편의 시로 노래한다. 마음으로 함께 하는 길들이 허전한 마음바닥을 채우며 홀로 걷는 발걸음을 재촉할 것이다.
인파의 궤도 밖을 휘청휘청 맴돌다가
골판지 몇 장 끌고 귀가하는 달팽이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집 한 채를 짓는다
- 「지하역」 전문
노숙하는 사내를 은유한 단시조다. 중심에 닿지 못하고 “인파의 궤도 밖”을 맴도는 남자의 걸음걸이는 “휘청휘청”하다. 집 없는 민달팽이로 은유된 남자는 골판지 몇 장으로 지하역에 자리를 편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늘,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자본주의에 휩싸인 현실 속에서 손해보고 속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소시민들의 모습을 그린 시들에서 시인은 최대한 언어를 제거한다. 그녀는 속속들이 자본주의의 내부를 파헤치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방식보다는 여운을 남기면서 오늘의 현실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여지를 제공한다. 영업이 안되서 “오종종이 모여서 상처를 긁고 있”(「공친 날」)는 사람들과 대폭 할인을 외치며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자극하는 ‘홈쇼핑’을 소재로 한 이 시는 오늘의 현실을 가장 사실적으로 반영한 시다. “무료 전화”, “외상 환영”, “연중무휴”라는 “허기를 재생산하”는 홈쇼핑 광고방송을 차용하여 이 시대 소비문화는 물론, 속고 속이는 상업주의의 병폐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예리한 언어감각을 보여주기도 한다.
3. 또 다시, 사는 연습
시인은 “결핍을 다시 시의 격랑으로 삼으며 그 격랑으로 끝없이 나를 끌고 가며 패대기치는 현실을 이겨낼 때까지 시를 쓸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시 쓰는 일은 그녀에게 운명인 것이다. 또한 그녀는 시 쓰기를 “마음 속 양초에 불을 붙이는 일”이라고 말한다. 오늘 다 써버리면 내일 켤 초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밤새도록 태워도 다음에 보면 또 새로운 한 자루 초가 되어 있는 신비한 양초가 시인에겐 있다는 것이다. 서연정 시인은 이렇게 신비한 양초에 불을 붙이며, 밤새도록 그리운 어머니와, 추운 골목에 웅크린 사람들, 자연의 미소, 고마운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낮은 자세로 “사는 연습”을 하면서 말이다. “두 발을 힘차게 딛고/ 다시/ 처음부터”(「사는 연습」) 그녀는 미로 하나를 들고 길을 간다.
이송희 약력
1976 광주 출생, 2003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0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2009 오늘의시조시인상 받음, 2010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받음, 전남대 국문과 문학박사, 시집 환절기의 판화가 있음.
[출처] 따스함이 동행하는 길에 대한 보고서-서연정론|작성자 예쁜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