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려상 - 수필>
어머니의 조각보
이영애
갑사, 문사, 항라, 숙고사.... 세모꼴 헝겊들이 한 쌍씩 배를 맞대 정사각형을 이루고, 알록달록한 사각의 둘레에는 크림색 띠를 둘렀다.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모든 색깔이 어우러져 은은한 하모니를 이룬다. 오래 들여다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고 새록새록 정이 들기 조차하는, 이것은 어머니가 만든 단 하나의 조각보다.
원래 어머니는 조각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멀쩡한 헝겊을 저렇게 쏙닥질을 해서, 왜 다시 꿰매느라고 궁상을 떠느냐?’며 흉을 보기도 했다. 큰살림을 혼자 몸으로 감당해 내던 어머니는 ‘기운이 장사에다, 일 할 때는 손이 안보일 정도로 빠르다.’고 이웃에 소문이 났었다. 여덟 남매를 낳아 키우기에도 바빴을 어머니에게 조각보보다는 양말을 깁거나 버선볼을 대는 일이 더 급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지 어머니에게 변화가 생겼다. 전과 달리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우리 열 식구의 크고 작은 일을 세세히 단속하던 어머니가 손을 놓아 버렸다. 한동안 말없이 먼산바라기를 하더니, 그동안 모아놓았던 한복감 자투리들을 꺼내 쏙닥질을 시작했다. 아끼던 잠자리 표 가위를 꺼내 옷감을 잘라 방바닥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이리저리 색깔을 고르며 대보는 것이었다. 갑사나 문사의 문양이 다문다문 보기 좋게 배치되도록 바꿔 놓기도 했다. 좀스러운 일에는 취미 없다든 어머니가, 그 누구보다도 꼼꼼하고 솜씨도 좋았다. 가느다란 바늘에 명주실을 끼워서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 했다. 조각보를 만들 때는 다른 어떤 일도 그를 방해하지 못했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밥을 찾으면 ‘너는 손이 없냐?’며 꿈쩍도 않고 바느질만 계속했다. 내가 소반에 총각김치나 몇 쪽 얹어다 꾸역꾸역 밥을 먹어도 곁눈이나 흘낏 던질 뿐이었다. 바느질에 흠뻑 빠져있는 어머니의 옆모습은 무척이나 고와서 낯설었다. ‘여장부라던 우리엄마도 여자긴 여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많은 식솔을 어머니에게 떠맡기고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우리 아버지는 저런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할까? 저렇게 다소곳한 아내의 모습을 본 적이나 있을까?
어머니는 삼각형 헝겊의 배를 맞대 꿰매고 시접을 엄지손톱으로 갈라 눌렀다. 그리고 화로에 꽂아 놓았던 인두를 꺼내 젖은 수건에 닦은 뒤 입으로 호 하고 불었다. 그렇게 인두의 온도를 살핀 다음에야 다림질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사각형을 만들어 채곡하게 모아놓은 어머니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행복한 미소였다. 열 식구의 힘겨운 치다꺼리가 그의 행복과 그것을 느낄 여유까지도 빼앗았는지 모른다. 저런 소녀 같은 미소가 그 안에 감춰져 있었다니....
서울 낙원동에서 양조장을 경영하고 있던 아버지가 집에 내려 올 때면 그 손에는 언제나 고려당 양과자가 들려 있었다. 이름 모를 색색의 양과자는 맛있고, 꼬릿한 버터 냄새가 났다. 아버지가 오는 날이면 우리 형제들은 각기 과자 배급을 받아 두었다가 다음날 학교에 가지고 가서 친구들과 나눠 먹으며 놀았다. 그런데 양과자 생각이 간절해지도록 오래 동안 아버지가 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온통 조각보에 매달리던 그 즈음이었다. 집안 청소도 대충하고, 밥 차리는 일과 설거지는 셋째언니와 내가 도맡았다. 개 밥 주기, 닭 모이 주기, 그런 일도 형제들이 나눠서 했다. 어머니는 조각보에만 붙어 있었고, 그런 동안은 얼굴이 평화로웠다. 때로 장맛비 사이로 얼핏 드러나는 햇살 같은 미소도 스쳤다. 이리 저리 들여다보다가 다시 뜯고 붙이고.... 그러다 보니 작업이 좀체 끝나지 않았다. 예전의 어머니 같았으면 재봉틀로 들들 박아서 반나절 꺼리도 안 되었을 터인데 말이다.
어느 날 저물녘에 등기소집 아주머니가 와서 목소리를 낮춰 어머니를 찾았다.
-아우님! 이렇게 헝겊 쪼가리나 만지고 있을 때가.... 우리 소장님이 파고다 공원엘 갔다가.... 이게 글쎄, 무슨....
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아주머니의 굳은 표정이며 분위기로 보아서 뭔가 좋지 않은 일 같았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등기소집 딸 재숙이가 나를 크로바 밭으로 살짝 불러내더니 귓속말을 했다.
-니네 아버지 바람났대. 우리 엄마랑 아버지 얘기하는 거 몰래 들었는데, 진짜다.
-설마.... 그렇다면 우리 엄마가 저렇게 태평하게 조각보나 만지구 있겠냐? 쫓아가두 벌써 쫓아갔겠지.
웃으면서 말은 했지만 나는 금세 풀이 죽었다. 조각보 마무리 작업을 하던 어머니는 내말에 내심 놀라는 기색이었다. 나는 창피해서 학교에 못 다니겠다는 둥, 나라도 서울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봐야 되겠다는 둥, 마구 떠들어 댔다.
-그 따위 소리들이나 지껄이면서 무슨 공부를 하니? 어른들 일에 애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면 안 된다.
어머니는 조용히 나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흔들림 없이 바느질에 몰두하며 깊은 눈살을 모아 바늘에 새 실을 끼우고 있었다.
조각보 뒤에 숨어 끝내 침묵하는 어머니.... 저 휴화산의 고요함은 참으로 불안하고 괴괴한 것이었다. 속으로 소용돌이치며 흐르고 있을 시뻘건 용암을 내비치지 않고, 누르고, 꿰매고, 다듬으며, 조각보를 만들고 있는 어머니의 힘이 섬뜩하기까지 했다. 드디어 조각보의 앞면이 완성 되었다. 아스름하게 비치는 헝겊으로만 이어 만든 조각보는 그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냈다. 이제 크림색으로 뒤판을 대면 끝이었다. 귀퉁이에 달 장식도 명주실을 묶어서 만들어 놓았고, 이젠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어머니는 돌연 작업을 멈추었다. 밤새워 바느질을 하던 그 얼굴에 결심의 빛이 떠올랐다. 만들다 만 조각보를 척척 개켜놓고 어머니는 새벽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 다음 이야기는 나나 셋째 언니 같은 덜 자란 것들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어떤 모양새로든 억눌렸던 용암이 거대한 분출을 했을 것은 분명했다. 우린 그것이 어머니가 그답게 환원하는, 바람직한 귀결이라고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 아버지는 다시 인물 좋은 얼굴에 활활 웃음을 띠고 고려당 케이크를 사들고 왔다. 어머니도 예전의 ‘치마만 둘렀지 여자가 아닌’ 그 활달한 여장부의 모습으로 돌아 왔다. 얼마 후엔 서울에 있던 양조장을 오산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섭섭하게도 고려당 양과자는 더 이상 맛볼 수 없었다.
그 이후 나는 어머니의 조각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울로의 진학과 졸업, 그리고 결혼.... 꽤 세월이 흐른 후,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야 나는 우연히 그것을 찾았다. 찾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완성이 안 된 채로 장롱 속 깊숙이 잠들어 있다가 불쑥 나타난 것이다. 태우자커니, 버리자커니, 의견이 분분했지만 나는 슬그머니 조각보를 챙겨 가지고 올라 왔다. 그리고 나서도 더 시간이 지나, 남편이 외국에 나가 근무할 때에서야 나는 뒤판을 대어 그것을 완성했다.
물론 어머니가 조각보를 만들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다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때 어머니가 매달렸던 것은 조각보가 아니라 , 자신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어떤 대상이었으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외로움과 소외감에서 빠져 나오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 같은 것....
어머니의 조각보는 한때 내 방 작은 창에 걸려 있었다. 밖에 보이는 너저분한 것들을 가리며 내 어머니를 추억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마찬가지의 흐름으로 삶을 사는 동안 나도, 조각보도 평탄치 못한 물살을 헤쳐 지나야 했다. 지금은 색깔도 바랬고, 어떤 부분은 낡아서 파삭하고 부서질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로운 나그네처럼 변함없이 나를 지켜 준다. 내 마음속에 자라난 미움의 불길을 꺼 주기도 하고 사랑을 위한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한다. 나는 어머니의 조각보를 곱게 접어 상자에 담아 놓았다. 감당하기 힘들도록 화가 날 때나 치 떨리는 배반에 직면했을 때, 용서할 수 없으리만큼 나 자신이 미울 때, 가만히 그것을 꺼내 본다. 적어도 조각보 하나를 만들 정도의 시간을 가지고 마음을 다스리라는, 그 말을 어머니는 내게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조각보를 만들던 어머니의 그 당시 나이를 훨씬 지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