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길영아 코치가 말하는 올림픽 비하인드 스토리

[민턴맨]

국내]  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길영아 코치가 말하는 올림픽 비하인드 스토리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배드민턴 혼합복식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온 국민에 감동과 기쁨을 안겨줬던 김동문·길영아 조가 사실은 1회전 탈락을 목표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올림픽 출전과 금메달이 운동선수들의 가장 큰 꿈인데, 올림픽 1회전 탈락을 목표로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올림픽을 앞두고 우리나라는 여자복식 길영아·장혜옥 조와 혼합복식 박주봉·라경민 조의 금메달을 예상했고, 김동문·길영아 조는 메달권 예상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길영아 삼성전기 코치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황제의 복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을 1년여 남겨두고 올림픽을 준비하던 배드민턴 대표팀에 큰 사건이 터졌다. ‘황제의 복귀’, 바로 각종 국제대회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우승을 거둬 기네스북에도 이름을 올렸던 ‘배드민턴의 황제’ 박주봉이 올림픽 출전을 위해 복귀를 선언한 것이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남자복식 금메달을 획득하고 대표팀에서 은퇴했던 박주봉은 배드민턴 선수로는 고령인 31살의 나이에 혼합복식 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코트에 다시 돌아왔다.

복귀 후 박주봉은 심은정, 길영아, 라경민 등 파트너를 바꿔가며 국제대회에 출전했고, 곧 제자인 라경민을 자신의 파트너로 선택했다. 파트너가 결정된 이상 올림픽 출전권 획득을 위해 올림픽 포인트를 얻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선수로써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역시 황제는 황제였다. 박주봉·라경민 조는 불과 몇 개월이 지나지도 않아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하더니 올림픽 출전 직전까지 세계 정상권을 유지하며 국내외 1인자로 우뚝 서게 된다. 심지어 혼합복식 금메달을 노리던 덴마크 선수는 박주봉의 복귀 사실을 알고 남자복식으로 전향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혹여 국제대회에서 박주봉·라경민 조를 만나는 우리나라 다른 조들은 일부러 게임을 져주는 일도 생겼다. 길영아 삼성전기 코치는 “95년 홍콩오픈 16강전에서 박주봉 선배님 조와 우리(김동문·길영아)가 붙었는데, 감독님께서 우리에게 지라고 말씀하셨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올림픽 금메달이 가장 유력했던 박주봉·라경민 조가 올림픽 포인트를 최대한 많이 쌓아 좋은 시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감독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그런 결정을 해야만 했다.

박주봉이 복귀하면서 변함없이 좋은 성적을 보이자 더욱 박주봉·라경민 혼합복식조의 금메달이 확실시 됐고, 국내 여론도 황제의 복귀와 부활에 초점이 맞춰졌다. 당시 국제대회에서 기복을 보였던 김동문·길영아 조보다는 황제라는 명성과 복귀 후 여전히 좋은 성적을 보인 박주봉·라경민 조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올림픽을 준비하던 다른 혼합복식조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박주봉이 컴백하기 전까지 5살 후배 김동문과 함께 혼합복식 세계 정상권을 유지하던 길영아는 장혜옥과 출전하는 여자복식에 올인한다는 것이 코칭스태프의 판단이었다.

“나는 여자복식이 있어서 괜찮았지만, 선배님의 복귀로 혼합복식에서 금메달을 노리던 동문이가 크게 좌절하고 상실감이 컸다. 처음 복귀했을 때만해도 제대로 붙으면 이길 수 있었는데 나중에는 못 이길 정도로 무서운 기량을 보여줘, 그렇게 짧은 기간에 다시 일어나는 걸 보고 역시 박주봉이라고 감탄했다.”

코칭스태프의 계획대로 여자복식 길영아·장혜옥 조와 혼합복식 박주봉·라경민 조를 위주로 훈련은 진행됐고, 김동문·길영아 조는 함께 제대로 된 훈련조차 받지 못하고 올림픽에 나가게 됐다.



“딱 1게임만 뛸게요”

김동문·길영아 조의 혼합복식 1라운드 32강전이 시작되기 사나흘 전 한성귀 감독은 길영아를 불러 ‘두 종목을 뛰기에는 체력소모가 많으니 여자복식에 전념하고, 혼합복식은 1라운드에서 포기하라’는 얘기를 꺼냈다.

길영아 코치는 당시에 대해 “그 말을 듣고 감독님에게 엄청 섭섭했다. 나도 파트너 문제로 고생한 경험이 있어서 동문이가 그 말을 들으면 얼마나 마음 아파할지 예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길 코치는 “동문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말도 못하고 혼자 3일 동안 가슴앓이를 했는데, 1회전 상대였던 홍콩팀이 워낙 약체여서 감독님에게 몸 푸는 차원에서 딱 한게임만 뛰겠다”고 말해 한성귀 감독의 허락을 얻었다.

그리고 게임에 들어가기 전날 김동문에게 사실을 전하며 “난 네트 앞에서 기본적인 동작만 할 테니까 대신 네가 끝낼 수 있는 건 다 끝내라”고 주문했다. 김동문은 사실을 알고 잠깐 좌절했지만 다시 전의를 불태웠고, 1라운드에서 강스매시를 상대 코트에 내리 꽂으며 보란 듯이 2회전에 진출했다.

약속된 1회전을 통과했으니까 2회전에서는 탈락을 해야 했다. 하지만 길 코치는 다시 한성귀 감독에게 16강 상대인 영국팀이 약하니까 컨디션 유지 차원에서 정말 딱 한게임만 더 뛰겠다는 약속을 하고 한 감독의 허락을 다시 받았다. 16강에서도 김동문의 강스매시가 작렬하며 상대를 이기고 8강에 올랐다.

이제는 정말 탈락해야만 하는 8강전이 다가왔다. 상대 인도네시아 트리쿠스 헤르얀토·미나르티 티무르 조는 상대전적에서도 김·길 조에게 앞서고 있었다. ‘이제 정말 떨어지겠구나!’라고 생각한 순간 길영아는 한성귀 감독에게 뜻하지 않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TV중계가 잡혔다는 사실이다. 이 말을 전해주던 한 감독은 “열심히 뛰라”고 길영아, 김동문을 처음으로 독려했다.

한 감독의 응원을 받아서인지 8강전에서는 1세트부터 김동문·길영아 조의 압도적인 경기가 펼쳐졌다. 길영아는 그날 김동문의 플레이에 대해 “내가 여태 동문이와 함께 한 게임 중에 가장 훌륭한 게임이었다. 게임에만 완전히 몰입해 실수가 없었고, 스매시 역시 최고였다”고 말했다. 운도 따라줬다. 8강전에 들어가기 전 인도네시아 선수들이 여느 때와 다르게 바짝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역시나 게임 중에서도 실수를 쏟아내며 김·길 조의 승리를 도왔다.

그렇게 준결승전에 진출하니 이제 한성귀 감독도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준결승전에서 만난 중국 첸 싱동·펭 싱용 조와는 상대 전적에서 백중세를 이뤘는데, 그날따라 상대 실수가 많아 2-0으로 쉽게 승리를 거뒀다. 준결승전 승리로 김동문은 군대를 면제 받았고, 게임이 끝나고 “제대 축하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김동문·길영아 조가 보이지 않는 위기를 극복하며 어렵게 결승전에 진출한 반면 혼합복식 금메달 1순위 박주봉·라경민 조는 1라운드부터 준결승전까지 상대를 모두 2-0으로 이기고 결승전에 진출했다.



“애써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혼합복식 결승전 전날 있었던 여자복식 결승전에서 길영아·장혜옥 조는 중국의 게 페이·구 준 조에게 0-2(5-15, 5-15) 어이없는 완패를 당했다. 너무 긴장을 해서 전날 한숨도 못잔 게 패인이었다.

길영아는 자신의 선수인생 최종 목표였던 여자복식에서 허탈하게 은메달에 머물면서 ‘올림픽 은메달 2개면 잘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혼합복식 결승전이 남아있었지만, 박주봉·라경민 조를 이길 거라는 기대를 크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편한 마음으로 혼합복식 결승전 전날 숙면을 취하고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에 일어나 식당에서 박주봉을 봤는데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고, 체육관으로 이동하던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혼합복식 결승전에 앞서 여자단식 결승전이 있었는데 후배 방수현이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멍하니 수현이 게임을 보고 있는데, 김문수 코치가 몸 풀지 않고 뭐하냐고 해서 그때부터 몸 풀기 시작했다. 선배님은 1시간 전부터 몸 풀고 있더라. 우리가 후배니까 선배 입장에서는 이겨야 본전이라 아마 부담이 컸을 거다.”

몸을 풀고 게임에 들어가기 전 김동문이 찾아와 “트럼프(카드)가 있어서 펼쳐놓고 아무거나 한 장 뽑았는데 숫자 ‘7’이 나왔다”며 “느낌이 좋다”고 말했고, 길영아도 웃으며 “긴장하지 말고 마음껏 하자”고 마음을 다잡았으면서 결승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결승전. 익히 아는 대로 1세트를 내준 김동문·길영아 조가 2세트를 쉽게 이기고, 3세트에서도 패색이 짙던 게임을 뒤집어 역전승을 거두게 된다.

금메달이 확정되고 길영아와 김동문은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1회전 탈락이 목표였던 자신들을 생각하니 더욱 서로에게 고맙고, 미안했을지도 모르겠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온 천하를 다 얻은 기분이었다. 시상대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애써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 출처 : 월간배드민턴 7월호
글_박민성 기자 / 사진_백승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