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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짜리 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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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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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석/ 생명공동체마을 기획일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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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마을로 이사 왔습니다. 지리산 자락이 채 끊어지지 않은 동쪽 끝 마지막 봉우리 아랫마을입니다. 그동안 지리산 남쪽의 많은 마을을 돌아다녔으나 살 만한 빈집은 드물었습니다. 빈집은 많았으나, 빈집이라면 대개 무너지고 부서져 들어가 살 만하지 않았습니다. 체험으로 기대치를 낮추면서 비로소 겨우 살 만한 집을 고른 것입니다. 마을은 대략 30호 정도 모여 사는 크지도 적지도 않은 마을입니다. 빈집을 찾아 쭈뼛쭈뼛 들어선 마을 어귀에서 만난 마을 사람들마다 표정이 밝고 따뜻해 살아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농사가 적은 집은 1억, 많은 집은 5억씩 빚을 안고 산다고 토로하는데 그 낙관의 표정들이 수상할 정도입니다. 될 대로 되라 하는 체념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웃음까지 잃지는 않아 천만다행입니다. 살 집은 도시에서 늘 소망하던 ‘오래 되고 초라하나 소박하고 정갈한 농가’에 가깝습니다. 이 집의 효용은 10억 원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우선 ‘지리산 자락에 산다’는 사실이 1억 원어치입니다. 지리산 자락에 산다는 사실만으로 그 정도 기분이 납니다. 도시 야산 아래에선 가질 수 없는 그런 기분이 듭니다. 지리산은 사람이 살아가는 힘을 뿜어냅니다. 내가 아는 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인간적인 강, 섬진강의 한줄기를 뜯어놓은 듯한 경호강이 마을 앞을 흐른다는 점 때문에 1억 원은 따로 더 받아야 합니다. 시멘트를 직선으로 덕지덕지 발라놓은 하수도 같은 강이 아니라, 제 멋대로 휘어지고 뒤틀려 차라리 냇물같이 안심되는 자연 하천입니다. 지은 지 200년이 됐다는 시골 한옥집이지만, 조악하게 개조한 시멘트 벽에 황토를 퍼다 발라 황토집으로 위장해 놓으니 시가 2억 원짜리는 돼 보입니다. 툇마루는 딱 5천만 원만 치겠습니다. 벽으로 막힌 방바닥이 아닌 탁 트인 툇마루에 앉아 밥을 먹거나 툇마루에 누워 책을 보거나 툇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는 맛의 가격을 제대로 셈하는 건 사실 어려운 일입니다. 100평이 넘는 흙 마당도 1억 원은 족히 넘습니다. 맨발로 흙을 밟고 섰노라면 몸이 살아있음을, 나도 생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텃밭도 1억짜립니다. 옥수수, 당근, 치커리, 들깨, 호박, 당귀, 오이, 고추, 콩, 상추 같은 채소들이 수확의 기쁨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뿌리 깊은 나무’들도 합쳐서 1억5천만 원으로 매기겠습니다. 저마다 마당의 무게 중심을 이루고 서 있는 감나무, 앵두나무, 석류나무, 대추나무가 모두 1억 원, 거기에다 병풍처럼 뒷마당을 휘감은 대나무 숲은 따로 5천만 원은 받아야겠습니다. 온돌방도 1억 원입니다. 초겨울로 접어들면 등을 지질 수 있는 방구들 아랫목하며, 감자, 고구마, 옥수수, 밤 같은 것들을 구워 먹을 수 있는 아궁이까지 두 배 이상의 값어치로 폭등하게 될 겁니다. 지하수도 1억 원입니다. 맑고 시원한 물이 1년 내내 콸콸 솟아날 기세입니다. 집 속으로 계곡물이 파고드는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 합쳐 보니 얼추 10억 원 상당입니다. 그렇다고 사고파는 상품으로서 부동산 가격은 아닙니다. 단지 사람이 살아가는 집으로서 값어치일 뿐입니다. 부동산 시세는 보증금 없이 월세 5만 원입니다. 난생 처음 수지맞았습니다. 이제 점점 생업이자 전업을, ‘농업을 중심에 둔 마을에서 하는 여러 가지 일’로 옮겨 가고자 합니다. 군민으로, 면민으로, 마을 주민으로, 어엿한 이곳 지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책임과 의무와 관련된 일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부디 잔머리 굴리거나 서로 경쟁할 필요 없는, 모두를 이기게 하는 단순 노동 또는 순수한 노동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령 생태 마을을 만들고 가꾸는 일이 그런 일일성 싶습니다. 늘 염두에 두고 있는 일입니다. 말이나 생각으로 생태마을을 ‘그리는’ 게 아니라, 몸과 생활로 생태마을은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합니다. ‘생태마을을 해 보겠다는 욕심’을 줄이는 기술이 관건이라는 건 명심하고 삽니다. 막상 남쪽 마을에 내려왔지만 여기가 전부이자 끝은 아닐 것입니다. 앞날도, 끝은 없고 주로 시작만 있을 겁니다. 지난날도 늘 그랬습니다. 수도권에서 멀리 벗어났다고, 마을에 비로소 들어왔다고, 살아가는 문제 거의가 해결될 것으로 낙관하지도 않습니다. 마을에서도‘생활’은 계속됩니다. 지난날 살아가는 힘이 되어 준 힘찬 노래의 그 마지막 한마디처럼 호랑이의 눈으로, 무소의 뿔처럼, 황소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끝이 보일수록 처음처럼!’ | |
첫댓글 마음이 부자인지라, 그 마음은 20억도 넘겠구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