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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4일 화요일
오늘은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와 형제들의 삶을 살펴 보겠습니다.
김범우는 한양 명례방의 유명한 중인 역관 집안의 8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나 22세에 역과 증광시에 합격해 종6품인 한학우어별주부로 평소 친분이있던 이벽의 권면으로 천주교에 입교해 1784년 가을 토마스로 세례를받고 주위에 열심히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해 겨울부터 자신의 집을 집회장소로 제공해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여 한국에 구원의 빛을 펼 수 있게 디딤돌을 놓은것입니다.
척사위정의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 신봉을 위해 자기 집을 모임 장소로 제공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분 믿음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명례방에서 정기적인 집회를 하던중 이듬해 봄 형리에게 발각되어 형조판서 김하진은 양반들은 훈방하고 중인인 집주인 김범우 (토마스)만 투옥시켜 형벌을 가하며 배교를 강요했으나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며 배교를 거부해 많은 매를맞고 밀양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을사추조적발사건"이며 유배된 토마스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경상도 지방에 복음의 씨앗을 뿌립니다. 일년 후 매맞은 상처가 악화돼 선종하여 한국교회 첫 순교자가 됩니다.
한편 김범우(토마스) 서제인 김이우와 김현우는 천주교 창설초기에 김범우 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바르나바와
마태오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을사추조적발 사건으로 맏형 김범우 토마스는 유배를가고 훈방된
양반들은 가문의 박해로 교회는 어려운 처지였지만 어려운 역경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일구어가던 중 교회창설 10년만인 1794년 말 주문모신부 입국으로 큰 힘을 얻은 형제는 교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평신도 단체인
명도 회원이되어 활동했고 신부님이 박해의 위험으로 피신하게 되자 자기집에 신부님을 모시기도 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들 형제도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 되었는데 체포될 때 김현우 마태오 앞에
찬란하고 커다란 십자가가 나타났는데 김현우 마태오는 옥을가르키는 십자가만 응시하였습니다.
이들 형제는 김범우의 아우이며 그들집이 집회 장소였고 게다가 신부를 숨겨준 사실까지 알려져 더욱 가혹한 형벌을 받았고 모진 고문을 신앙으로 감수 인내하였습니다.
김이우 바르나바는 8월16일 포도청에서 장하 치명하셨고 김현우 마태오는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셨습니다.
두 분은 2014년 시복되어 복자품에 오르셨고 김범우 토마스는 하느님의 종으로 우리 교회에서 시복시성을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 멘.
9월5일 수요일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오늘은 하느님의종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가족들의 순교사를 잠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3인중 한사람으로 1784년 이벽의 권유로 즉시 천주교에 입교하여 전교에 혼신의 힘을 바치겠다는 결심으로 동방전교의사도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자기 세례명으로 하면서 세례를 받고
특히 충청도의사도 이존창과 전라도의 사도 유항검을 입교시켜 삼남지방으로 복음이 전파되게 공헌했습니다.
또한 교회발전책으로 모방성직제도시 신부로 임명되어 성사를 집전하기도 했고1791년 진산사건로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천주교 교주로 고발되어 체포되자"이 세상의 그 무엇을 준다하여도 주님을 배반할수 없고 주님께 대한 제 의무를 궐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당하겠습니다."고신앙을고백하며 심한고문에도 배교하지않자
사형집행을 상소했어나 정조임금은 아끼는 학자인지라 유배를 명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매를 맞아 1792년 유배도중 귀양길 첫날밤 장독으로객사하셨습니다.
그의형 당대의 석학 권철신 암브로시오보다 9년먼저 순교했어며 형제의 유해는 1981년 천진암성지 이벽 창립성조 묘
우측에 나란히 안장되어 있습니다.
아들 권상문세바스티아노 복자는 1785년 명례방김범우 집에서 종교집회를 가졌을때 부친과 함께 참석했으며 박해를
피해 주문모신부가 피신생활을 하자 자신의 집에 유숙시키면서 용감하고 담대히 신앙생활 잘 하다 신유대박해시
양근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을때 형조에서는 ''생부 권일신이 사망한 뒤에도천주교에 깊이 빠졌으며
요사한 말과 글을 오로지 대중을 매혹시키는데 이용하였다 .''라는 죄목으로 양근 고향주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위해
양근형장에서 1802년 1월30일 33세 나이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딸 권천례데레사는 냉담교우 조숙베드로와 혼인하고 첫날밤 동정부부로 살 것을 글로써 권했을때 이상하게도 조숙의
신앙심이 굳건히 되살아나 15년을 오누이처럼 동정부부로 지내면서 정하상성인이 조선교회 재건을 위해 성직자 영입운동으로 북경을 왕래할때 모든 뒷바라지를 하다 체포되어 문초를 받는 동안 어느누구도 밀고하지 않았으며
"천주는 모든이의 아버지이시고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데 어떻게 그분을 배반하겠습니까?"라는
주장에 관장은 이들의 신앙심을 꺽을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다.
1818년8월10일 권데레사의 나이 36세때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동정부부의 시신은 한달이 지나서야 거둘수 있었는데 이때 권데레사의 머리채를 바구니에 담아 남이관(세바스티아노)성인의 집에 두었는데'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여러교우들이 증언하였습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님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9월 6일 목요일 윤유일 바오로
오늘은 한국천주교 밀사 복자 윤유일 바오로와 그분의 가족들의 삶을 살펴 보겠습니다.
복자 윤유일은 경기도 여주 파평윤씨 양반 집안에 태어나 이웃 고을 양근 지방으로 이주하여 권철신의 문하생이 되어 서적을통해 천주신앙을 알게되어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가족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1789년 초기교회 지도층 신자들은 북경 주교께 그동안의 상항을 보고하고 앞날을 논의하는 편지를 써 보낼 밀사로
윤유일이 선발된다. 아직 예비신자지만 성품이 온순하고 심지가 굳고 학식과 교리에도 밝았다.
윤유일은 북경을 오가는 상인으로 변장하고 옷속에 편지를 숨긴채 북경에 도착해하여 주교를 만나서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데 필요한 준비에 대하여 듣고' 귀국하자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 영입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다시 2차 파견되어 북경 주교로부터 성직자 파견 약속과 미사도구, 전례에 사용할 포도주 제조법을 배우고
포도나무도 가져왔으며 윤유일은 바오로로 세례와 견진성사도 받았다.
복자 윤유일이 밀사의 막중한 임무를 성공함으로 조선교회는 외국에 알려지게 되며 구베아 주교는 로마 교황청에 조선교회에 대해 상세히 보고 하였고 유럽교회는 감격하였다.
사제 영입을 위한 꾸준한 노력으로 교회 창설 10년 만인 1794년 주문모 신부를 잠입 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신부님 입국후 복자 윤유일이 북경교회와 연락하는 일을 담당했으나 6개월만에 한영익의 밀고로 신부입국 사실이 알려
졌으나 신자들의 재빠른 행동으로 신부님은 피신했으나 집주인 최인길 마티아는 신부님을 보호하고 시간을 벌기위해
중국인 신부로 변장하고 체포되고 신부 영입에 헌신했던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사바도 그날 체포돼 혹독한 형벌로 신부행방을 알아내려 했으나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고 " 참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 보다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신앙을 고백하자 박해자들도 어쩌지 못함을 알고 사정없이 때려 그날로 숨지게한 뒤
비밀리에 시신을 강물에 버렸다.
세분의 시신은 찾지못하여 복자 윤유일 바오로 선산인 어농성지에 의묘로 조성돼 있으며 1795년에 일어난 을묘박해이다.
동생 윤유오 야고보는 "형이 가르쳐준 십계명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천해야 할 도리로 알고 있으며 배교할 마음은 진실로 조금도없다"고 신앙을 고백 하였고 사촌 윤점혜와 윤운혜는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워 아가타와 루치아 세례를 받았다.
윤점혜 아가타는 동정녀 공동체 회장으로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최초 수도자 회장답게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순교 당시 목에서 흐르는 피가 우유빛 이었다고 합니다.
이 가족들은 신앙으로 똘똘 뭉쳐 하느님을 증거하며 이웃에 천주 신앙을 전하는데 노력했으며 부친과 삼촌 세분이 모두 유배와 참수 됐으며 윤씨 가족들은 천주 신앙을 한국땅에 심고 성직자를 모셔오기 위해 집안과 자신을 민족 복음화를 위해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
이분들은 모두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님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 멘.
2018년 9월7일 최인길 마티아
오늘은 역관 집안 출신으로 교회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삶을 바치신
복자 최인길 마티아, 복자 최인철 이냐시오 형제와 그의 조카 복자 최창현 요한,
성 최창흡 베드로 가족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최인길과 최창현은 교회 창설 직 후 이벽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고 그들은 입교 초기부터 열렬한 신심으로
복음 전파에 앞장섰습니다.
최인길은 (그 당시 잘 모르고 행했던) 평신도 사제로도 활약했으며, 아우 인철에게 교리를 가르쳐 흔들림 없는 신앙인으로 자신과 함께 교회에 헌신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최인길보다 손 위인 조카 최창현은 그 당시 한문으로 된 교회서적을 번역하여 한문을 모르는 많은 신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품과 덕망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아 총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했습니다.
북경 교회에서 제사 금지령을 내렸을 때와 진산에서 윤지충의 폐제 분주 사건으로 신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많은 양반들이 교회를 떠나가고 심지어 지도층 신자들까지도 교회를 멀리하여 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최인길, 최인철, 최창현은 남은
신자들을 보살피고 신앙을 북돋우며 떠난 신자들에게 관심을 갖는 등 교회 일에 열성을 다하였고 무엇보다
동료들과 논의하여 어려움 가운데서도 사제 영입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는데 앞장서서 활동하여, 드디어
창설 10년만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이 입국 하시었고 미리 장만해 둔 최인길의 집에 거처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 후 배교자의 밀고로 신부님의 체포령이 내렸다는 다급한 전갈을 받은 최인길은, 급히 피신시킨 신부님의 안전을 위해 신부님처럼 중국 옷을 입고 변장을 하고 있다가 포청으로 압송되었고, 함께 잡혀 온 윤유일, 지황과 함께 신부님의 행방을 알리라는 혹독한 고문과 매질에도 끝내 함구하고 생명을 바쳐 신부님을 지켜냈습니다.
그 후 주문모 신부님은 최창현 요한을 총회장으로 임명하여 명도회장 정약종과 여회장 강완숙과 함께 교회의 기틀을 잡고 놀랍게 교회를 발전시켰지만, 1801년 대 박해로 신부님을 비롯한 열심한 교회의 일꾼들과 신자들이 장렬히 순교하니,
이것이 제 1차 신유 대박해 입니다.
이 때 나이 어렸던 최창현 회장의 동생 최창흡은 굳은 신앙을 이어받아, 그로부터 30년 후에 정하상, 유진길과
함께 서양 선교사를 모셔들이는데 큰 공헌을 한 조신철 가롤로를 사위로 맞았고, 세분 서양선교사를
다 잃게 되는 두번 째 대박해인 기해박해에 일가족 모두가 장렬히 순교하여 함께 성인의 반열에 오르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순교자님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2018년 9월11일 화요일
오늘은 순교자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삶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자께서는 진주목사 정재원의 아들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4형재중 3째아들로 1760년
경기도 광주 마재 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일찍이 성호 이익 선생에게 사사 하셨고 어려서부터 진리를 찾기 위한
열망으로 가득하셨으며, 삶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해 과거 공부도 뒷전으로 하고 철학과 도덕, 도교 등에도
심취하셨다고 합니다. .
그렇기에 1786년 천주교 교리를 접하면서 교리를 깊이 연구하셨고 그 안에 담긴 참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셨습니다.
1791년 진산 사건때 윤지충(바오로)가 순교한 후 형제들과 친한 친구들은 천주교를 멀리하고 배교를 하였지만 , 복자께서는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경기도 양근 지역에 머물며 교리를 전하고 연구하며 신앙을 굳건히 지켜나갔습니다..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복자께서는 한양을 찾아 주문모 신부를 도와 교회의 일을 맡기 시작하셨습니다.
평신도들의 교리연구 및 전교조직인 ‘명도회’의 첫 회장직을 맡았을 뿐 아니라,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그동안 연구한 교리를 바탕으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상, 하 두 권을
저술하시어 천주교 전교에 지대한 공을 쌓으셨습니다.
이 책은 우리말로 된 최초의 교리서로, 주문모 신부님께서도 이 책이 중국 교리서인 ‘성세추요’ 보다 낫다고 칭찬하시고 이를 널리 권장하셨다고 합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교회 활동에 앞장서던 복자의 이름은 가장 먼저 체포명단에 올랐습니다..
복자께서는 신앙을 부정하는 말도, 교회나 신자들에게 해가 되는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고, 결국 체포된 지
겨우 15일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복자께서는 사형집행을 위해 서소문 밖으로 끌려가면서도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의 울음은 진정한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고, 당신들의 즐거운 웃음은
진정한 고통으로 변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다” 고 하시면서 1801년 4월 8일 41세에
하늘을 바라본 채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셨고 2014년 8월 16일 하느님의 종 124위 순교자 복자품에 오르셨습니다.
가족으로는 같은 해 5월 순교하신 큰아들 정철상 가롤로 복자, 1839년 기해 박해 때 함께 잡혀 순교하신
부인 유조이 체칠리아 성녀, 둘째아들 정하상 바오로 성인, 딸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 가 계십니다.
온 가족이 순교하셨고 모두 성인 복자품에 오르셨습니다.
신자들이 목숨을 걸고 수습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복자의 시신은 그가 태어나 자란 고향의 친척들에게조차 외면당하여 가족묘에 묻히지도 못하고 인근 검단산 기슭에 묻혔다가 1981년 천진암 성지로 이장되어
천진암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성조 제위 묘역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한국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2018년 9월 12일 수요일
오늘은 호남의 사도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가족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2018년9월14일 금요일 오늘은 복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일가의 순교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홍교만은 고종사촌 권일신의 집을 왕래하다가 천주교신앙을 접했으나 처음에는 받아들잊 않았지만 아들 홍인 레오가 먼저 천주교에 입교하여 아들의 권면으로 부자가 함께 교리를 연구하고 참 진리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들 부자는 1794년 주문모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교리연구에 몰두했어며 ,사람들을 모아놓고 글과 교리를 가르치고 냉담자 회두등 포천지방의 복음화에 힘썼습니다. 정약종의 아들 정철상 가를로를 사위로 맞이하였으며,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사돈 정약종의 책상자를 대신 보관하다가 발각되어 아들 레오와 함께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위협과 배교를 강요당라면서도 '천주님은 천지만물의 대부이십니다 사람이 어찌 대부를 섬기지 않을수 있겠습니까?천주교는 대부를 섬기는 종교이니 천주교를 사교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말입니다.이것은 천하가 다 알고있는 진리입니다'라며 천주교가 참된 진리입니다.' 라며 천주교가 참된 진리임을 설명했습니다. 그는1801년 순교하였고 ,아들 홍인 레오는 아버지가 순교한후 10달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포청과 형조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1802년 1월 순교하였습니다.
복자 홍익만 안토니오는 홍교만의 사촌으로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서적을 접하고 ,스스로 입교를 결심하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강완숙의 아들 홍필주를 사위로 맞이하였으며 자신의 집을 명도회 모임인 6회의 장소로 제공했습니다. 신유박해때 체포되어 모진고문을 당하면서도 '나는 천주교에 깊이 빠져서 마음을 바꿀생각이 없습니다.'라고 증언하고 순교하였습니다. 홍익만의 사위 이현 안토니오는 김순건의 집을 드나들면서 천주교를 접하게 되고 ,천주교가 참 진리라고 생각되어 세례를 받고 기도모임에도 열심히 참여하며 교리를 실천했습니다. 신유박해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인해 배교했다가 다시 회심하여 '내가 형벌을 받아서 죽을지라도 다시는 마음을 바꾸지 않겠습니다.'하고 순교하였습니다. 홍익만의 사위 홍필주 필립보는 1790년경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그보다 먼저 신앙을 받아들인 계모 강완숙의 덕행을 모범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신해박해를 겪은 뒤 게모 강완숙이 내쫓김을 당할때 그는 계모를 따라 할머니와 함께 상경하여 한양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1795년 강완숙이 주문모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키자 이때부터 신부의 복사가 되어 미사와 지방순회등 여러가지 일을 도왔습니다. 그의 집은 신부의 주된 거처요 성당이며,과부와 동정녀들의 공동체로 이용되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안전을 위해 자주 집을 옮겨다녔습니다. 그는 신유박해때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며 마음이 약해졌을 때는 함께 조사받던 어머니의 권면으로 마음을 다잡아 굳게 신앙을 증거하고 1801년 10월 순교하였습니다. 강완숙 골롬바는 포청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주문모 신부를 6년간이나 자기집에 숨겨주고 사목활동을 할 있게 한 용감하고 지헤로운 여인입니다. 최초 여성회장으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했어며 특히 왕족인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를 포함한 궁중의 여인들과 여종들에게도 전교하였습니다. 동정녀들과 과부들을 입교시켜공동체 생활을 함으로써 한국최초 수도원의 원형이 되었습니다.황사영은 백서에서 '한국교회를 위해 노력한 사람 중 남녀를 통틀어 강완숙을 당할 사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1801년 7월 순교하였습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2018년 9월 18일 화요일 오늘은 성녀 허계임 막달레나와 그의 딸 이정희 바르바나, 이영희 막달레나에 대해서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허계임 막달레나는 경기도 용인의 한 이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봉천리에 있는 이교도 이씨 집안으로 시집 와서 중년에 시누이 이매임 데레사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 하였다. 비록 완고했던 남편을 입교 시키지는 못했지만 굳건히 신앙을 지킨 어머니로서 두 딸을 입교시켜, 헌신적인 사랑과 기도에 힘입어 훗날 순교하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1839년 3월에 그녀는 성사를 받으러 한양으로 올라와 시누이 이매임 데레사의 집에 머물려 두 딸과 시누이와 함께 주님에 대한 충성을 지키고, 박해를 당하게 될 때는 함구하자고 서로 격려하였다. 그러던 중 교우 남명혁 다미아노와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의 용감한 순교 소식을 계기로두 딸과 시누이, 동료 김성임 마르타 그리고 김 루치아 등과 함께 자수를 결심하고, 1839년 4월 11일에 자수하였다. 허계임의 옥중 생활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데 그녀는 격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용기와 인내로 온갖 고통을 견뎌냈다는 것이 그것에 대해 알려진 대부분이다. 그리하여 허계임 막달레나는 1839년 9월 26일에 서소문 밖에서 여덟 명의 교우와 함께 67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큰 딸인 이정희 바르바나는 외교인이며 천주교 신자를 몹시 싫어하는 아버지 때문에 기도와 수계를 몰래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녀는 집안의 귀찮은 일을 수없이 당해야 했다.
시집 갈 나이가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외교인 청년과 약혼을 시켰으나 크나큰 신앙 정신과 의지력으로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고 3년 동안이나 다리를 못쓰는 체 하며 함구적으로 버티다가 사건의 내용을 훤히 알고 있던 직산의 한 교우에게 시집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결혼 후 2년만에 남편을 여의고 친정과 동생 집으로 가서 의지하며 지내다가 어머니와 함께 자수하기에 이르렀다. 순교에 앞서 옥중에서 올케에게 보낸 편지에서 5명의 순교자를 낸 자기 가문의 영광을 자랑하면서 "우리 집안은 의심 없이 동양에서 첫째가 될 터이니 열심히 수계하다가 이후 천국에서 만납시다." 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형조에서 다 같은 날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고모(이매임)과 동생(이영희)이 먼저 순교하였고, 어머니보다 23일 앞서 1839년 9월 3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하니 그의 나이 41세였다. 완고한 아버지의 결혼 권유를 거부하고 몰래 신앙생활을 철저히 하며 동정녀로 살기를 원하여 가출을 결심하였다. 찾아온 아버지께도 결혼 강요를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고 한양에 머무는 것을 허락 받았다. 독실한 교우들과 함께 자수했던 이영희 또한 극심한 형벌과 고문에도 배교치 않았으므로 사형을 선고받고 1839년 7월 20일에 서소문 밖에서 일곱 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그녀에게 순교의 영관이 씌워졌을 때 31세의 나이였다. 2018년 9월 19일 수요일 오늘은 성 현석문 가롤로 와 복자 현계흠,현경련 베네딕다성녀가족의 순교사를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 가롤로는 샤스탕신부의 복사로 항상 수행중 기해박해로 아내김데레사와 아들과누이가순교하자 자수를결심했으나 특별히 앵베르주교로 부터 꼭 살아남아 목자없는 조선의 양때를 잘돌볼것을 부탁받았습니다. 또한 앵베르주교가 수집했던 순교자행적을 다른 동료들과 함께 보완하여 3년에 걸쳐 전기 기해일기를 완성한것은 가장 중요한 성인의 업적으로 기해일기에 기록된 순교자78명중 69명과 병오박해 순교자 9명이 함께 1925년 시복식때 기해일기가 자료가 되었습니다 .
포졸들의 수색을 피해 신자들을 인도하고 얻어온 음식으로 애긍실천으로 성인의 생애는 한마디로 선교사와 교우들을 위한 삶 이었습니다.
소식에 신부가 머물던 집의성물과 전교자금을 다른집으로 옮길때두,세명의 신자들을 새집으로 안내하고 성인을 도와준 짐꾼들의 고발로 곧 체포되어 중대한 반역죄인으로 군문효수를 선고받아 김대건신부 순교 사흘뒤인 1846,9,19일 새남터에서 49세의 나이로 순교하셨습니다.
평신도 단체 명도회의하부조직인 육회의 하나로 선정되어 비밀집회장소였다.또한 주문모신부가 박해로 피신생활을 해야했을때 피신처로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신해박해때 교우들이 체포되자 비신하였으나 일가친척들이 시달림을 받는다는 소식에 포도청에 자수하여 문초와 형벌에도교회에 해가되는 일과 밀고는 입밖에 내지 않았습니다.황사영의 문초과정에서 현계흠복자의 이름이 나오게 되자 의금부로 이송되어 1801,12,10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38세 나이에 순교하셨다.
자녀없이 남편을 여이고 홀로계신 친정모친 집에 돌아와 삯바느질로 곤궁한 처지인데도 자기성화를 위해 힘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무지한사람을 가르키고 여회장으로 선교신부들의 순회시기가 되면 자신의 집에 신자들을 모이게 하여 성사받을 준비를 시키는등 타인의 성화를 위해서도 노력했습니다.
체포되었습니다. 고문에도 성녀는 굳고 참을성 있는 결심으로 그들의 탐욕에서 나온 횡포는 허사가 되었다. 성녀는 사형선고에 조금도 동요함 없이 형장을 향하여 잔치에 나가듯 기쁜 마음으로 나가 순교의 칼을 받았다 9월 20일 목요일 오늘은 한국 천주교 신앙의 명문가 성김대건 신부 증조부 복자 김진후 비오 가문을 알아보겠습니다. 얼마 안되어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권유로 교리를 배워 신앙을 형제들에게 전파하였다. 지방 관직에있던 복자 김진후는 입교를 강하게 거부했으나 자식들의 계속된 권면으로 50세에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후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신앙을 고백했으나 풀려났고 박해 때마다 모진시련을 겪으며 체포와 형벌 석방을 번갈아 당하다가 10년간 옥고를 치른끝에 1814년 해미옥에서 치명하셨다. 여러번의 박해에도 집안의 신앙은 더 굳건해 졌으며 언제든 시련을 이겨낼 덕행을 갖춘 가문이 되었다. 세째 아들 복자 김종한 안드레아는 수덕적 삶에 그치지 않고 박해를 피해 경북 일월산 우련전 신자촌에서 삶은 익힌조와 소금이 전부였고 그마저 부족해 산나물과 나무뿌리로 허기를 채우며 고생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을해박해로 체포돼 두형에게 옥중 편지로 "저는 순교로가는 중입니다. 육신이 나약할 때 영혼은 강해집니다. 그러나 영혼이 나약하면 육신이 영혼을 먹습니다. 순교의 결실을 맺도록 온 마음을 다해서 날마다 기도해 주십시요." 복자 김종한은 옥고를 치르면서 형들과 친척들에게 편지를 보내 신앙을 권면하고 순교 의지를 다졌으며 체포돼 안동으로 끌려가다 우연히 배교하고 집으로 가던 김윤덕 아가타막달레나를 만나 짧은 시간에 적극 신앙을 권면해 그녀는 배교를 취소하고 목숨을 바쳐 신앙를 증거 했으니 평소의 삶이 어떠 하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1816년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 치명하셨다.
두차례 대제를 지키는등 신앙생활에 전념하다 유방제신부와 엥베르 주교의 살림을 보살피던 중 기해박해로 체포되어 주교의 은신처를 알아내려고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며 6개월간 옥살이에 태형 280대를 맞고 교수형을 선고 받았으나 1839년 서울 포청에서 옥사로 치명하셨다.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산중을 택하였는데 프랑스 신부 입국으로 정하상 집에 머무는 모방 신부를 찾아가 이냐시오로 세례와 견진을 받고 회장직을 맡게된다. 1836년 남쪽지방으로 가던 모방신부가 은이 공소에 들렀는데 아들 대건을보고 제자 삼기를 원하자 기꺼이 승락하고 마카오로 유학을 보냅니다. 1839년 김순성의 밀고로 기해박해가 일어나 체포된 이냐시오 성인은 형관앞에서 "양인을 데려온 것과 자식을 외국에 보낸것은 모두 천주를 공경하고 받들려는 까닭이었고 일심으로 심혹 했으나 만사무석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44세에 서소문밖에서 참수 치명하셨다.
김대건 신부는 성 김재준과 고우슬라의 아들로 15세인 1836년 모방 신부에게 발탁되어 국내에서 조선인 성직자 양성 1845년 8월 17일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한국 첫 신부가 되어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이듬해 주교의 명을받고 선교사들의 새로운 입국로를 알려주는 편지와 해도를 전달하기 위해 순위도에 갔다 .체포되어 병인박해가 일어납니다. 신부님은 당당히 신자임을 밝히고 1846년 9월16일 새남터에서 . 군무 효수형으로 참수 치명하셨다. 복자 김진후 직계 후손으로 확실하게 밝혀진 순교자가 11명이고 밝혀지지 않는 택현 희현 선식을 포함하면 14명이며 그 밖에 다수 추측되는 순교자와 신부님 모친 고우슬라등 많은 증거자가 있습니다.
9월21일 금요일 1836년 모방 신부님의 조선인 사제 양성 계획에 의하여 이 땅에서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출되셨습니다. 이후 최방제, 김대건 소년과 함께 마카오 에서 교육을 받은 후 1849년 4월 15일 28세에 상해에서 마레스카 주교에게 한국인으로 2번째로 사제서품을 받으셨습니다.
1년에 2800Km 7000리 길을 낮에는 걷고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다시 날이 새기 전 새벽에 다음 공소를 찾아 다니며 한달에 불과 나흘 정도 수면을 취하시던 신부님께서는 극도로 쇠약해지신 끝에 1861년 6월 15일 경북 문경 인근에서 과로와 장티푸스로 쓰러지시고 보름 후 선종하셨습니다. 신부님의 유해는 인근에 가매장 되었다가 훗날 배론 성지로 이장되어 안치되어 있습니다 . 1839년 7월 기해박해 때 포졸에게 잡혀 포도청으로 끌려간 후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낸 최경환은 1839년 9월 12일 39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순교하셨고 1984년 시성위에 오르셨습니다.
따라 서울로 이주 후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자식들에게 신앙의 씨앗을 심어주고 잘 자랄 수 있도록 키워나갔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된 후 2살 젖먹이인 막내아들 때문에 잠시 흔들리기도 하였지만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신앙을 지켜나가다가 1840년 1월 31일 당고개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 9월27일 목요일 오늘은 순교자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일가의 삶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영광과 쾌락을 제쳐두고 오로지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유진길은 10년 이상이나 불교와 도교를하여 인간과 세상의 기원 및 종말을 깨우치려고 노력하였으나 진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중 우연히 자기 집 장롱에 바른 헌 종이에 영혼, 각혼, 생혼이란 글자가 적혀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그것을 떼어 앞뒤를 맞추어 보니그것이 곧 “천주실의”라는 책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진길은 수소문 끝에 서을에 사는 홍 암브로시오를 찾아가 교리를 배우고 이때부터 천주교의 모든 계명을 충실히 지켜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조선에 선교신부를 보내달라고 간절히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자 이듬해인 1825년에는 정하상, 이여진 등과 함께 로마 교황께 청원서를 올려 조선교회의 딱한 사정을 알리고 하루 빨리 신부를 보내주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 이 편지 덕분에 1831년 9월 9일자로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고, 이어서 선교사들도 입국하게 되었는데 1833년에 중국인 유방제 신부, 1836년에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그리고 앵베르 주교가 각각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체포하려고 혈안이 된 관헌들에게 주리형과 줄톱질형 등의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함구하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이후 서양 신부님들이 체포되자 함께 의금부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참수형 사형선고를 받고 정하상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1839년 9월 22일 49세의 나이에 순교하셨고 1984년 5월 성인품에 오르셨습니다. . 항상 기쁜 마음으로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배교 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어머니 말씀을 따라야 하나 어머니 보다는 아버지 말씀, 아버지 보다는 할아버지 말씀, 할아버지 보다는 하느님의 말씀부터 따라야 합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노끈으로 교살하여 순교하셨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우리나라 최연소 성인 그리고 주일학교 주보성인으로 성인 위에 오르셨습니다. 9월28일 금요일 오늘은 성 남종삼 요한과 그 일가의 천주 신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앙 생활을 위해 관직을 버리고 묘재 땅에서 조용히 생활하던 부친 남상교 아우구스티노로 부터 큰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해박한 유학자로서 '한문 서학서'를 읽고 연구하여 받아들인 신앙으로 철저히 신앙 실천을 위해 노력했고신앙 전파에 힘 쓴 참 신앙인이었습니다. 성인은 나이 어린 고종이 등극하여 대원군이 섭정을 하던 그 당시 정치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고 종교적으로 교회와 신앙의 자유를 위한 역사적 결단으로, 나라를 개방하고 외국과 통교를 맺어 외세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이이제이'의 방아책을 대원군에게 건의 하였고,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던 대원군이 반대 세력의 정치적 압력과 청나라의 천주교 박해 정보에 태도가 돌변하여 베르뇌 주교 체포를 시작으로 박해의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던 병인년 초에 성인도 곧바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 때문에 너의 목숨은 이미 결정지어졌다. 뒷 날 너에게 사형 선고문에 수결을 놓으라 할 때 교회에 욕되지 않게 각별히 조심하여라."고 조용히 이르셨습니다. 털 끝만치도 없다. 나는 죽을 때까지의 어떤 심한 고통도 내세의 영복을 위해 즐겨참아 받으리라"고 외쳐 주위를 숙연케 했습니다. 애끓는 배교 간청에도 조금의 동요없이 공주 옥으로 끌려가 84세로 옥중에서 숨져 순교하였고, 큰 아들 명희는 전주 옥으로 끌려가 감사의 권면과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천지의 대 군주이시고 대부모이신데 어찌 배교 할 수 있겠사옵니까?" 라고 하며 기다리다 15살 성년이 되자 전주천 초록바위에서 목졸려 순교하니 세번 째 순교자였으며, 네번 째 순교자는 성인의 부인 이조이 필로메나로서 어린 3남매를 데리고 귀양간 경상도 창녕 땅에서 종살이 9년 후에 끝내 옥리에게 목 졸려 삶을 봉헌했습니다. 노비로 귀양 가 있던 세 자녀도 비로소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구학과 신학을 두루 익히고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를 통신으로 마쳤다고 함) 교회의 거목으로 우뚝 섰으니 그가 한 중요한 몇 가지 만을 간추립니다.
천주 가사를 지어 널리 알렸습니다. 이어오고 있습니다. 천진암 터 구입을 위해 '한국 천주교 요람지 확보 관리 위원회'를 결성하신 후 1978년 87세를 일기로 선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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