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이란 단어는 도시에서는 이제 사라져 갈 어휘가 될 것 같다. 도시에서는 ‘성냥’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라이터가 없던 시절에는 ‘성냥’은 집안의 필수품이었다. 그래서 집들이하는 집에 갈 때 가루비누나 휴지를 가지고 가지 않고 성냥이나 양초를 들고 가던 시대가 있었다. 집에 불이 붙듯 번성하라는 뜻도 있었지만, ‘성냥’은 전기가 없던 시절에 초나 등잔에 불을 댕길 때, 그리고 불을 지필 때 반드시 필요했던 도구였기 때문이었다.
‘성냥’을 고유어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성냥’은 한자어로부터 온 단어다. 음의 변화로 오늘날 고유어인 것처럼 보이나 원래는 한자어 ‘석류황’(石硫黃)에서 비롯된 단어다. ‘셕류황 > 셕뉴황 > 셕뉴왕 > 셕냥 > 셩냥 > 성냥’과 같은 음운변화 단계를 거쳐 오늘날의 ‘성냥’이 된 것이다.
‘셕류황’이 처음 문헌에 등장하는 시기는 17세기다.
음욕앤내며 겨집의 월슈내며 술 내며 마 파 머근 더러운 내며 셕류황 모긔 업시 잡약내며 튼 비린내 누린내 머리터럭 내 갓가이 미티디 말라<두창집요언해(1608년)하,43a>
셕류황(石硫黃) <1613동의보감(1613년)3,47a>
아기 나며 외신이 조라 들거든 셕류황과 오슈유를 티 라 마즙에 라 기슭에 고 <태산집요언해(1608년),75b>
셕류황 (硫黃) <제중신편(1799년),14b>
셕류황 (硫黃)<규합총서(1869년)목록,1a>
셕류황 石硫磺 <한불자전(1880년),397>
‘석류황’은 초기에는 약으로만 사용된 것 같다. 그래서 17세기에 ‘셕류황’이 등장하는 문헌은 모두 ‘의서’(醫書)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이것이 오늘날의 ‘성냥’과 같이 불을 붙이는 재료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1715년에 간행된 ‘역어유해보’에 ‘믓친 셕류황’이 ‘취등’(取燈)의 뜻풀이로 나타난다.
믓친 셕류황(取燈) <역어유해보(1715년),44a, 방언유석(1778년),해부방언,10a>
비위불은 겁지 아니 음식 삭히기에 쟝작불에셔 더고 셕류황은 손으로 지매 덥지 아니 다 불에 다히면 급히 니러나니라 <주교요지(1897년),38b>
이 ‘취등’(取燈)은 한청문감에 ‘불 켜는 석유황’이란 뜻풀이가 있어서, ‘셕류황’이 오늘날의 성냥과 유사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取燈 블 혀 셕뉴황<한청문감(1779년)10, 49b>
이 ‘셕류황’이 음운변화를 일으켜 ‘셕뉴황’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기는 ‘셕류황’이 등장하는 시기와 동일한 17세기이다.
초상 냥 셕뉴황 유향 각 두 돈 <태산집요언해(1608년),50a>
화예셕 넉 냥 셕뉴황 냥 라 도간의 녀혀 <태산해요언해(1608년),51b>
셕뉴황(硫黃) <동문유해(1748년)하,23b>
셕뉴황(硫黃) <몽어유해(1768년)하,19a>
셕뉴황(石硫黃) <광재물보(19세기),鹵石,002b>
갈과 셥흘 시러 어유를 흘니고 그 우희 셕뉴황과 염쵸 등을 펴고 <삼국지(19세기)일,31b>
‘셕류황’으로 쓰든, ‘셕뉴황’으로 쓰든, 그것이 ‘석유황’(石硫黃)과 연관됨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셕뉴황’에서 어중의 ‘ㅎ’이 탈락하여 ‘셕뉴왕’으로 발음되고, 이것이 축약되어 ‘셕냥’이 되면서 ‘석유황’과의 유연성을 잃게 되었다. 우연히도 ‘셕뉴왕’이라고 표기된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이의 축약형인 ‘셕냥’은 19세기에 등장한다. 20세기 초에는 담뱃불을 ‘셕냥’으로 붙이는 장면을 기술한 글도 볼 수 있다.
셕냥(引光奴) <광재물보(19세기)金,001a>
마당 가온에 싸아 노코 셕냥 가지를 드윽 그어 불을 질너 와 버리고 <구마검(1908년),75>
방바닥을 더듬더듬 더듬니 셕냥을 차저 불을 켜고 고두쇠의 얼골을 러지도록 보다가 긋 우스며 <치악산(1908년)상,063>
로파가 두숀으로 더듬어 셕냥을 찻더니 람푸에 불을 켜놋터라 <두견성(1912년)上,3>
불이 켜놋코 밤을 우리라 고 들창문 지방을 더듬더듬며 셕냥을 차지니 셕냥은 업고 다 부러진 칼이 틈에 여잇지라 <츄월(1912년),40>
담를 집어 마루에다 탁탁 털어 담를 담아 들고 셕냥을 거셔 불을 막- 붓치 터이고 <안의성(1914년),65>
그는 불을 켜려고, 바람ㅅ벽에서 나서, 셕냥을 차지려 도라갓다. 셕냥은 늘 잇던 자리에 잇지 아낫다. <배따라기(1920년),11>
‘셕냥’은 ‘석냥’으로도 표기되었다. 20세기 초부터 1940년대까지 이러한 표기가 보인다.
담를 툭툭 털어 담 를 담아 석냥을 드윽 그어 피여 물더니 <빈상설(1908년),40>
그러는 사이에 그림자는 인가의 울타리ㅅ뒤에 산가티 싸하 노흔 보리ㅅ집ㅅ뎀이에 가서 석냥을 긋더니 뒤ㅅ산으로 울리 달른다.<홍염(1927년),91>
담배가가 주인은 발서 마코 한갑우에다 석냥을 밧처 내어민다 <레미메이드인생(1931년),528>
그는 머리맡에 둔 석냥갑을 더듬어서 담배 한 대를 피어 물었다. <고향(1933년),029>
仇甫는 새로이 담배를 피어 물었다. 그러나 卓子 우에 석냥匣은 두 匣이 모다 비어 있었다. 조고만 계집아이가 카운터로 달려가 석냥을 가져왔다. 그 女給은 거의 계집아이였다. <소설가 구보씨의 1일(1934년),293>
그것두 두 뭉치씩이나 집어다 그대로 아궁지에다 처넣고는 석냥을 드윽 긋는 것을,<천변풍경(1947년),360>
‘셕냥’이 비음화되어 ‘셩냥’으로 표기된 것은 20세기 초였다.
아씨 그 발판 아 셩냥이 잇스니 죰 주시오 얏나 봅데다 <두견성(1912년)하,87>
좌우간 셩냥을 어여 발판에다 그어들고 그 불빗으로 인력거ㅅ군의 얼골을 본즉 <두견성(1912년)하,87>
엇던 샹뎜에 셩냥과 셕유샹가 노혓다. 형식은 아직도 그러케 만흔 셩냥을 보지 못엿섯다. <무정(1918년),277>
그러고 담배를 내어들고 족기에서 셩냥을 차즈려 제 <무정(1918년),291>
이 ‘셩냥’은 곧 오늘날의 표기와 같은 ‘성냥’으로 표기되어 나타난다. 이 시기는 1920년대였다. 그러니까 ‘성냥’은 1920년대에 표기되어 나타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담배 태시지요.” 하고 권하며 성냥갑을 들어 붙여주려 한다. <환희(1922년),93>
성냥을 그어가지고 보니깐, 그것은 웬 늙은이의 송장이었습니다. <광염소나타(1929년),143>
그는 부싯돌로 성냥을 켜 가지고 촛불을 켠 뒤에, 이부자리를 펴고 켜다랗게 몸을 내던졌다. <젊은그들(1930년),15>
성냥을 픽 그어서 담배를 피워문다. <흙(1932년),50>
유황 성냥을 황급히 화로에 긋는 사람도 있었다. <운현궁의봄(1933년),142>
윤수는 담배를 붙이랴고 바람을 막어서 돌아앉으며 성냥을 그어댄다. 두루마기 자락이 펄넉이는 바람에 처음 거댄 성냥불은 꺼지고 두 번채 놈으로 간신히 불을 붙었다. <신개지(1938년),117>
매담은 무표정한 얼굴로 성냥갑을 들어 레지에게 주었다. 칙 - 하고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인 학구는 그대로 돌아가는 레지의 등 뒤에 한 마디 부쳤다. <테로리스트(1956년),336>
‘성냥’이 ‘석류황’에서 온 것은 틀림없지만, ‘석류황’이 과연 오늘날의 ‘성냥’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어휘였을까? 오늘날의 ‘성냥’은 “나뭇개비 끝에 붉은 인이나 염소산칼륨 등의 발화연소제를 발라서 붙이고 성냥갑의 마찰면에 유리가루나 규조토 등의 마찰제를 발라서, 이 두 가지를 서로 마찰시켜서 불을 일으키는 발화용구”를 뜻하는 것인데, ‘석류황’도 그렇게 마찰을 시켜서 불을 붙였던 것일까? ‘셕류황(셕뉴황)은 그러한 의미로 쓰이지는 않았다. 다음 글에는 부싯돌로 불을 붙여서 그 불씨를 유황 성냥으로 옮기고 그것으로 담뱃대의 대통에 대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자기의 부싯돌로 쑥에 불을 일으켰다. 쑥에 붙었던 불은 유황 성냥으로 옮아갔다. 그 불을 최장의는 양손으로 읍하고 길다란 병기의 담뱃대 끝에 달린 대통에 대었다. <1933운현궁의봄(1933년),307>
그러니까 초기의 발화도구로서는 부싯돌을 사용하였고, 이것을 옮겨서 그 불씨를 유지하는 데 ‘셕류황’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933년에 쓴 글이기에 이것을 ‘성냥’으로 표현했지만, 이 소설의 배경은 19세기 말이기 때문에 ‘셕류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석류황’, 즉 ‘성냥’은 ‘나뭇가지에 유황을 발라 마찰시켜서 불을 일으키는 발화도구’를 지칭하였던 것이 아니라, 단지 나뭇가지 끝에 바른 화학약품으로서의 ‘유황’만을 지칭했던 것이다. 이렇게 부분을 지칭하던 ‘석류황’(성냥)이 오늘날과 같은 규격화된 발화도구로 ‘성냥’이 쓰인 것은 19세기 말에 와서의 일로 보인다. 『독립신문』의 1898년 6월 25일의 외국통신란에 “서양에서는 성냥을 만들 때, 나무를 쓰지 않고 종이로 만드는데 매우 가볍고 나무보다 더 편리하다더라”란 기록으로 보아서, 이 시기에 나뭇가지에 유황을 붙여 만든 성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외국 통신
셔양셔 셕냥을 드 나무를 쓰지 안코 죠희로 드 오 가베압고 나무보다 더 편리다더라 <독립신문(1898년) 6월 25일 토요일 제3권 제73호>
‘성냥’은 1827년 영국의 J.워커가 염소산칼륨과 황화안티몬을 발화연소제로 쓴 마찰성냥을 고안한 것이 최초라고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에는 1880년 개화승(開化僧)인 이동인(李東仁)이 일본에 갔다가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과 동행 귀국할 때 처음으로 성냥을 가지고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어서 19세기 말에 성냥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이광수의 『무정』(1918년)에도 주인공인 ‘형식’이 평양에서 일본상점에 ‘성냥’이 많은 것을 보고 놀라는 장면이 기술되어 있다.
그 에 형식은 대동문 거리에서 처음 일본 샹뎜을 보앗다. 그리고 그 류리창이 큰 것과 그 사들의 옷이 이샹 것을 보고 미잇다 엿다. 형식은 갑신년에 들어오던 일본 병뎡을 보고 일본 사들은 다 저러케 검은 옷을 닙고 밝안을 두른 모를 쓰고 칼을 찻거니 엿섯다. 그래서 대동문 거리로 오르나리며 기웃기웃 일본 샹뎜을 보앗다. 엇던 샹뎜에 셩냥과 셕유샹가 노혓다. 형식은 아직도 그러케 만흔 셩냥을 보지 못엿섯다. 그래서 “올치 셩냥은 다 여긔서 만드구나” 고 고개를 엿다. <무정(1918년),277>
‘성냥’이 일반에게 생활용품으로 대중화한 것은 1910년대에 일본 사람들이 인천에 조선성냥[朝鮮燐寸]을 설립한 것을 비롯하여 군산·수원·영등포·마산·부산에 공장을 설립하여 생산 판매함으로써 가정용으로 보급되었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한국 시장을 독점하고서는 성냥 1통에 쌀 1되라는 비싼 값으로 판매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성냥’은 매우 귀한 것이어서 윷놀이의 내기 물건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어린애들의 당성냥 내기 윳노는 소리가 산직이 조첨지 집에서 목 갈닌 게우 우름처럼 들닐 뿐이엿다. <鼠火(1937년),126>
이처럼 ‘석류황’이 ‘성냥’으로 변화하였지만, ‘재료로서의 성냥’과 발화도구인 ‘성냥’을 구별하기 위해서, 발화도구인 ‘성냥’의 이름을 ‘중국에서 온 성냥’이란 뜻으로 ‘당(唐)성냥’이란 어휘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인졀미 몃 와 당셕냥 몃 갑을 사가지고 혼자 치악산으로 드러가셔 향방 업시 쏘다가 <치악산(1908년)상,171>
당(唐)성냥으로 불을 켜서 보려고 하였으나 손이 떨려서 두 번이나 꺼지고 세 번째는 당성냥 여남은 개비를 한꺼번에 그어서 비쳐 보니 그것은 확실한 창순이었다. <흑풍(1935년),305>
그 학생은 들어간 지 한 시간 가량이나 있다가 누그러진 걸음으로 나오는데, 당성냥 개비를 거꾸로 잡아서 이빨을 쑤시면서 게트림을 하고 나온다. <흑풍(1935년),59>
이 ‘당성냥’이란 단어와 ‘중국에서 온 유황’이란 뜻으로 ‘당황’(唐黃)이란 단어도 동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사용예를 발견하기 힘들다. 단지 방언형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석류황’이나 ‘석뉴황’으로 표기되어 그것이 ‘석유황’과 어원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생각될 때에는 오늘날의 ‘성냥’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 것으로 알아, 단지 ‘석유황’으로만 인식하였다.
셕유황 유(硫) <한문훈몽(1923년),16a>
그러나 ‘석류황’(셕뉴황)이 ‘셕냥, 석냥, 셩냥, 성냥’ 등으로 음운변화를 일으켰을 때에는 ‘석유황’과는 관계 없이, 오늘날의 ‘성냥’에 연관시켜서 발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성냥개비, 성냥갑, 성냥통, 성냥곽, 성냥불’ 등은 있어도 ‘석류황(석뉴황)개비, 석뉴황갑’ 등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로 현대국어에서도 ‘석유황’과 ‘성냥’은 전혀 다른 단어가 되었다. ‘성냥’이 등장하면서 ‘성냥’과 연관된 많은 어휘가 발생하게 된다. ‘성냥갑, 성냥불, 성냥통, 성냥개비, 성냥곽, 딱성냥’ 등이 그러한 어휘다.
마찰시키되 아무데나 그어도 되는 성냥도 일찌감치 등장하였다. 그것을 ‘딱성냥’이라고 하였다.
츄형 슈십를 모아 석냥을 박박거어셔 네 곤 불를 질으니 <철세계(1908년),59>
놈이 셕냥을 득 그어 아 위를 훌터보고 <치악산(1911년)하,62>
그는 머리맡에 둔 석냥갑을 더듬어서 담배 한 대를 피어 물었다. <고향(1933년),29>
석냥불을 그어 본즉 새로 붙였던 박춘서의 문패는 간곳 없고 <이심(1941년),512>
화약 타는 흉내를 내고서는 저도 피운다는 듯이 염으지게 석냥알 하낯을 쑥 고내 물고서 아버지 곁에 바짝 들어 앉는다. <낙일홍(1940년),232>
억쇠는 화로에 재를 헤치고, 석냥개비로 불을 댕겨서 이를 등잔에 부친 뒤 <황토기(1939년),83>
주인의 아들 준이가 담배 한 갑과, 석냥개피를 디민다. <고향(1933년),21>
불붙은 성냥가지를 입에다 <환희(1922년),118>
영철은 멋적게 빙그레 웃으면서 “그럴 리가 있나. 그런 사람이나 그렇지.” 하며 담배를 집어 물었다. 얘 넌 또 웬 성냥장난이가! 하는 것만은 <별(1940년),27>
이 ‘성냥’의 방언형으로서 아직도 ‘당성냥’이 남아 있고, ‘당황’으로도 남아 있다. ‘당황’은 ‘당유황’이란 뜻이다. 그리고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는 ‘비시깨, 비지깨’ 등이 있으며 한자로서 ‘화갑’(火匣)이란 단어도 보인다.
비시깨 : 중국[돈화, 입신] 충남, 충북
비지깨 : 함남, 함북, 중국[화룡시 용문향, 화룡, 훈춘, 연길, 아동, 밀강, 삼합, 월청, 회룡봉]
화곽 : <제주>[전역]
‘성냥’은 한자어 ‘셕류황’에서부터 온 말이다. 17세기부터 문헌에 등장하는 ‘셕류황’은 ‘셕뉴황’과 함께 쓰이다가 19세기에 ‘셕냥’으로 변화하고 20세기에 ‘셕냥 > 셩냥 > 성냥’으로 변화하였는데, 이러한 변화로 ‘석유황’과 ‘성냥’은 각각 다른 어휘로 분화하였다. 현대의 ‘성냥’이란 물건은 19세기 말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지만, 이제 곧 사용되지 않아서 ‘라이터’에 밀리고 다시 전자 자동점화장치에 눌리어 사라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부싯돌’에서 ‘성냥’으로, 다시 라이터로, 그리고 이제는 전자 자동점화장치로 인간의 문명이 변화하면서 어휘도 이에 따라 사라지고 또 생겨나곤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