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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남 유학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군자목(장세완)
예천지역 유교문화에 대한 답사계획
1. 문과 제9강 (답사)학습 계획
일자 : 2014년 5월 17일(토)
강좌명 : 예천지역 유교문화
2. 답사일정
07 : 30 1차 집결지인 - 법원 출발하여 경대 집결
08 : 00 출발점검 및 반별 탑승(대학원동 서편 네거리)
09 : 03 - 10 : 00 윤별동묘
10 : 00 - 10 : 40 도정서원
10 : 40 - 11 : 20 약포기념관
11 : 20 - 12 : 00 옥천서원
12 : 00 - 13 : 00 석송령 및 점심식사(청포묵 정식)
13 : 00 - 13 : 40 예천권씨 종택
13 : 40 - 14 : 20 남악종택
14 : 20 - 15 : 00 금당실 전통마을
15 : 00 - 15 : 30 초간정
15 : 30 - 16 : 00 병암정
16 : 00 - 16 : 30 용궁향교
16 : 30 - 17 : 00 삼강서당
17 : 00 - 17 : 30 삼강주막
19 : 00 - 20 : 00 경북대 도착 및 저녁식사(고기한마당)
20 : 30 법원 앞 하차
3. 참배 및 알묘
알묘 : 도정서원
참배 : 윤별동묘, 옥천서원
4. 참고자료
예천군청 문화관광과 서재영 011-538-3256
김규탁 회원 010-9359-0484
1. 儒敎의 倫理思想
2. 醴泉의 校宮
◘ 예천향교(醴泉鄕校)
◘ 용궁향교(龍宮鄕校)
◘ 금곡서원(金谷書院)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 노봉서원(魯峯書院) 예천군 호명면
◘ 도정서원(道正書院) 예천군 호명면 도정리.
◘ 물계서원(勿溪書院)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
◘ 삼강서원(三江書院)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 소천서원(蘇川書院) 예천군 용궁면 무이리
◘ 신천서원(新川書院) 예천군 예천읍 왕신리
◘ 옥천서원(玉川書院) 예천군 감문면 덕율리
◘ 윤별동묘(尹別洞廟)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
◘ 인산서원(仁山書院) 예천군 용문면 유전리
◘ 정산서원(鼎山書院) 예천군 예천읍
◘ 삼강강당(三江講堂) 문화재 자료
◘ 만의서재(晩義書齋) 예천군 지보면 만화리
◘ 대지재사(大枝齋舍)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 무이서당(武夷書堂) 예천군 용궁면 무이리
3. 醴泉의 人物
◘ 권맹손(權孟孫) 1390(공양왕 2)∼1456(세조 2)
◘ 권문해(權文海)1534(중종 29) ~ 1591(선조 24)
◘ 김복일(金復一) 1541(중종 36)∼1591(선조 24).
◘ 윤상(尹祥) 1373(공민왕 22)∼1455(단종 3)
◘ 이문흥(李文興) 1423~1503
◘ 전이성(全以性) 1578년(선조 11)∼1646년(인조 24).
◘ 정광필(鄭光弼) 1462년(세조 8) ~ 1538년(중종 33)
◘ 정탁(鄭琢)1526(중종 21)∼1605(선조38)
4. 예천의 樓亭
◘ 감로루(感露樓) 예천군 용문면 원류리
◘ 도암대(陶巖臺)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진평리
◘ 병암정(屛巖亭) 및 별묘 예천군 용문면 성현길
◘ 삼수정(三樹亭) 예천군 풍양면 청곡리
◘ 선몽대(仙夢臺)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
◘ 야옹정(野翁亭) 예천군 용문면 제곡리
◘ 용두정(龍頭亭) 예천군 풍양면 와룡리
◘ 청원정(淸遠亭) 예천군 용궁면 무이리
◘ 초간정(草澗亭)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5.예천의 마을과 古宅
◘ 금당실 마을 예천군 용문면
◘ 물체당(勿替堂) 예천군 유천면 율현리
◘ 미산고택(味山故宅) 예천군 용문면 대저리
◘ 반송재고택(伴松齋故宅)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
◘ 연곡고택(延谷古宅) 예천군 용문면 저곡리
◘ 연안이씨별좌공종택(延安李氏別坐公宗宅) 예천군 호명면 송곡리
◘ 예천권씨초간종택(醴泉權氏草澗宗宅) . -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 의성김씨남악종댁(義城金氏南嶽宗宅) 예천군 용문면 구계리
◘ 춘우재고택(春雨齋古宅) 예천군 용문면 저곡리
6. 예천의 명승 유적
◘ 회룡포(回龍浦) - 육지 안에 있는 아름다운 섬마을, ◘ 석송령(石松靈)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에 있는 소나무.
◘ 삼강주막 - 낙동강변에 남은 마지막 주막
◘ 금당실 솔숲 - 최고의 명당
◘ 효공원과 도시복 생가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
7. 예천 관련 참고사항(예천 - 본관 성씨)
감천김씨 감천문씨 예천권씨 예천김씨 예천윤씨 예천임씨 예천장씨
용궁김씨 용궁서씨 용궁이씨 용궁전씨 용궁최씨 .
▣ 위 자료는 가.나.다 순입니다.
1. 유교의 윤리사상
공자는 인(仁)을 비롯해 덕(德)· 예(禮)· 의(義)· 지(知)· 신(信)· 용(勇)· 충(忠)· 서(恕)· 효(孝)· 제(弟)· 경(敬) 등 많은 윤리적 덕목을 말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그의 언행을 통해 모범을 보이고 구체적 사례에 따라 말하였을 뿐 실지의 삶을 떠난 추상적 관념의 체계를 서술하려고 하지 않았다. 공자 설한 가르침(設敎)은 맹자에 의해 더욱 자세하게 밝혀졌다(明敎)
공자의 인은 모든 덕의 총체적 표현이요, 전인성(全人性)을 뜻한다. 인을 추구하는 군자는 인의 극치인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
인 개념은 인자(仁慈)라든가 사랑이라는 뜻으로 지·용과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공자는 “지자(知者)는 의혹하지 않고(不惑) 인자(仁者)는 근심하지 않으며(不憂) 용자(勇者)는 두려워하지 않는다(不懼).”고 하였다.
또한 공자는 제자들이 인에 대해 물었을 때, 안연(顔淵)에게는 ‘극기복례(克己復禮)’라 했고, 자장(子張)에게는‘공(恭)· 관(寬)· 신(信)· 민(敏)· 혜(惠)’라 했으며, 중궁(仲弓)에게는 “문밖에 나설 때는 큰 손님 맞이하듯, 백성을 부릴 때에는 큰 제사 받들 듯 할 것이며,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고 대답하였다.
유교는 효제와 충서를 중요시한다. 전자는 친애 즉 효도와 존경의 원리이고, 후자는 진실 즉 성실과 이해의 원리이다.
효는 만행의 근본으로 경애·자애·우애의 뿌리이다. 종적으로 어버이에 대한 경애로부터 멀리 조상에까지 보본추원하며, 횡적으로 부모와 자녀에 대한 애휼(愛恤)을 확대해 타인의 부모와 자녀에까지 미루어 나가는 방법을 취한다.
유교에서도 보편적인 사랑으로서의 인류애를 말하지만, 방법적으로 자기의 가장 절실한 부모 형제와의 관계를 토대로 궁극적으로 사해동포에까지 추급(推及)하기를 지향하고 있다.
충서는 충실성과 이해심이다. 공자는‘충신을 주로 한다(主忠信)’고 하여 거짓없는 성실과 믿음을 다할 것을 말했고, 남의 처지와 심경을 나의 것으로 헤아리는‘서’의 마음을 중시하였다.
증자(曾子)는 공자의‘모든 것에 통하는 하나의 도(一貫之道)’를“충서일 뿐이다.”고 하였다.
≪대학≫에 의하면, 유교 윤리가 제가·치국·평천하로 연결되어 가정 윤리와 사회 윤리가 관련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가정에서는 효·제·자가 바탕이 되며, 이것을 미루어 효는 임금을 섬기는(事君) 도, 제는 어른을 섬기는(事長) 도, 그리고 자는 백성을 다스리는(使衆) 도가 된다고 보았다.
가정의 윤리는 곧 사회 국가의 윤리로 연결되는 바탕이다. 그 기본 원리를‘서’라 하여 자기의 진실한 소망에 비추어 타인에게 한결 같이 베풀기를 강조하였다.
이것이 곧‘혈구지도(絜矩之道: 자로 헤아리는 방식)’이다. 자기가 진실로 원하는 바는 남도 원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바는 남도 싫어할 것이니, 자기의 본심을 헤아려 남을 대하라는 명제이다.
요순을 좇고, 걸주(傑紂)를 좇지 않는 까닭이 모두 여기에 있다.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함으로써 민중을 얻을 수 있으며 민중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민중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지도자 자신이 이러한 가치정향(價値定向)의 의식적 기반이 얼마나 튼튼히 되어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남는다.
≪중용≫에서는 인간적 가치의 궁극적 근원을 인간의 본성에 두고 있으며, 인성은 천명에서 유래했다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지(知)와 행(行)에 과불급이 없는 이상적 상태를 중용이라고 하였다.
상황에 적절한 도를 추구하는 중용이 성취되기 위해서는‘성(誠)’의 덕목이 요구된다. ‘성’은 존재의 원리이며 존재의 방식으로 자기 완성이자 타인 완성이다.
성은 내외 양면의 통합 원리이며, 인간의 주체적 참여에 의해 객관적 상황을 알맞게 처리함을 말한다. 이러한 내외합일의 원리는 인간 관계를 통해 달성된다.
그래서 ≪중용≫에는‘삼달덕(三達德)’과‘오달도(五達道)’라 하여,‘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형제(昆弟)· 붕우(朋友)’등을 말하고, 그 실현을 위한 내면적 실천덕목으로서 지· 인· 용을 일컫는다.
이상에서 고찰한 것처럼 공자의 윤리사상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었고, 맹자에 이르러 보다 이론화되었다. 맹자의 사덕(四德:仁義禮智)·사단(四端: 惻隱· 羞惡· 辭讓· 是非)은 윤리설의 기반이 되어 후세의 성리학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 醴泉의 校宮
◘ 예천향교 (醴泉鄕校) 한국전쟁 때 기록을 분실하여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 태조 7년(1398) 서본리에 처음 지었고 태종 18년(1418)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운 것으로 보인다. 보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건축 당시의 여러 건물은 불타 없어졌다.
◘ 용궁향교 (龍宮鄕校)
조선 태조 7년(1398)에 지금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100m 지점에 세웠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선조 36년(1603)에 대성전과 명륜당을, 인조 14년(1636)에 세심루를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 금곡서원(金谷書院)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1568년(선조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충좌(朴忠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판를 모셨다.
그 뒤 박눌(朴訥)과 박손경(朴孫慶)을 추배하여 선현제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유림에 의해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노봉서원(魯峯書院) 예천군 호명면 문화재자료
조선 단종(재위 1452∼1468) 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다 순절한 죽림 권산해(?∼1456)의 절의를 본받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권산해는 조선 전기의 의인(義人)으로 세조 원년(1455)에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두 임금 섬기기를 거부하며 낙향했다. 그 뒤 사육신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했다.노봉서원은 정조 18년(1794)에 세웠으나, 고종 3년(1866)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1921년 지방 유림들의 지원으로 다시 세웠다.
◘ 도정서원(道正書院) 예천군 호명면 도정리.
1700년(숙종 2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탁(鄭琢)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판를 모셨다. 1786년(정조 10)에 정윤목(鄭允穆)을 추배하여 선현제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 6)에 훼철된 뒤 복원하였다.
◘ 물계서원(勿溪書院)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
1661년(현종 2)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방경(金方慶)·김구용(金九容)·김양진(金揚震)·김응조(金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판를 모셨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묘우(廟宇)·강당·동·서재·전사청(奠祀廳)··주사(廚舍) 등이 있었으며,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왔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지금까지 복원하지 못하였다
◘ 삼강서원(三江書院)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1643년(인조 21) 유림의 공의로 정몽주(鄭夢周)·이황(李滉)·유성룡(柳成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판를 모셨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봄·가을 초정(初丁)에 향사를 지내왔으며, 별사(別祠)에 이유(李維)를 봉안하였으나 1869년(고종 6)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당시 군수 소진하(蘇鎭夏)가 재사(齋祠)를 서당으로 명칭하여 후학을 교육하고, 묘우 자리에는 단을 모셔 향사를 지내 왔는데, 근래에 와서는 서당도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폐허화되었다.
◘ 소천서원(蘇川書院) 예천군 용궁면 무이리 소천동
1692년(숙종 18)에 유림의 공의로 전원발(全元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정사(精舍)를 설립하여 위패를 모셨다.
1869년(고종 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8년 지방유림들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3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원내에 청원정신도비(淸遠亭神道碑)가 있으며, 약간권의 문헌이 소장되어 있다.
◘ 신천서원 (新川書院) 예천군 예천읍 왕신리 문화재자료
조선 전기 무신인 맹암 김영렬(?∼1404)의 유지를 받들고 후손을 교육시키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정종 2년(1400)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태종 1년(1401) 익대좌명공신 3등에 오른다. 태종 4년(1404) 참판승추부사로 있을 때 왜선 1척을 싸워 빼앗고 왜병을 포로로 잡은 공을 세웠다. 후에 우의정에 증직되었다.신천서원은 1945년에 세운 건물로 왕신평야가 내려다 보이는 솔 숲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당인 경훈사에는 태종의 글씨인 단서(丹書)와 김영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 옥천서원(玉川書院) 예천군 감문면 덕율리
원래는 감문면에 있었으나 서원훼철령에 의하여 철폐되었다가 1985년 복원하면서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임춘(林椿), 반유, 태두남(太斗南), 송복기(宋福基) 등 4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임춘)은 의종 때 문인으로서 강좌칠현 중 1인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가전체 소설인 국수전, 공방전을 지었다. 반유(1374-1437)는 고려 말 조선초기의 효자이며, 태도남(1486-1536)은 조선중기의 문인으로 형조좌랑, 춘추관 편수관을 지냈다. 송복기(1541-1605)는 이황의 문인으로 벼슬에 나아가지 안고 향리에서 평생 후진을 양성하였다.
◘ 윤별동묘(尹別洞廟)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 유형문화재 제293호
조선 전기의 학자 윤상(尹祥, 1373∼1455)을 제향하는 불천위 사당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윤상시집 尹祥詩集≫ 서(序)에서“윤상은 경술과 문장을 겸비한 학자 겸 교육자이며, 당시의 달관(達官)들은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으니 권근(權近) 이후 오직 한 사람 뿐이다.”라고 추존하였다. 사당은 성리학 보급에 공이 컸던 것을 기리기 위해 1456년(세조 2)에 건립되었다.
◘ 인산서원(仁山書院) 예천군 용문면 유전리
1727년(영조 3)에 유림공의로 권맹손(權孟孫)·이문좌(李文佐)·권오기(權五紀)·이광윤(李光胤)·김경언(金慶言)·권용(權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 정산서원(鼎山書院) 예천군 예천읍
1612년(광해군 4)에 유림공의로 이황(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1615년(광해군 7) 조목(趙穆)을 추배하였다.
1677년(숙종 3)에‘정산(鼎山)’이라고 사액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 삼강강당(三江講堂)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청풍자 정윤목(1571∼1629)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정윤목은 서원부원군 정탁의 아들로 초서에 뛰어난 학자이다. 광해군의 실정에 불만을 품고 지방으로 내려와 후진양성에 힘썼다.삼강마을 동쪽 낙동강변에 자리잡은 이 강당은 앞쪽으로 둥근기둥을 세우고 옆면과 뒤쪽으로는 네모기둥을 세워 건물을 지었다.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현판 글씨는 정윤목이 선조 22년(1589)에 부친을 따라 중국에 가서 백이숙제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올 때 베껴온 것이다. 경내에는 자연석 위에 세운 작은 규모의 학당채가 함께 남아 있다.
◘ 만의서재(晩義書齋) 예천군 지보면 만화리
전세삼(全世三)이 만년에 몇 칸의 초가집을 짓고 세속을 등지고 오직 아들 오형제의 교육에만 힘쓰던 곳이다. ≪용궁전씨세보≫에 의하면 전세삼이 지은 정자가 학위당(學偉堂)이었다고 한다.
이 학위당이 발전하여 사학의 요람이 되었고, 그 뒤 개화와 함께 창동의숙(彰東義塾)으로 개칭하고 1880년(고종 17)에 중수하였는데, 이것이 지보초등학교(知保初等學校)의 전신이 되었다. 1972년 용궁전씨 문중에서 중수하여 만산서재(晩山書齋)라고 하다가 다시 만의서재로 개칭하였다.
◘ 대지재사(大枝齋舍)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3호. 조선 세조∼중종때 문신(文臣)이며 청백리로 이름난 김양진(金楊震)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400년전에 세웠다고 전한다.
대지재사는 동향으로 산자락에 자리 잡고 상하의 기단을 구축하여 제법 높게 앉아서 주사 지붕 너머로 내다 볼 수 있는 시야가 열려있고 낮은 담장에 사주문(四柱門)이 자그마하게 시설되었다.
재사는 일곽내에 주사(廚舍)와 함께 조성되어 있어 흥미롭고 주사와 재실의 배치가 원칙적으로 ㅁ자형이나 재실의 좌향을 주사와 달리하고 있어서 ㅁ자형이 변형되어 있다.
이 건물을 조사한 자가 대지재사 대들보 위의 파련대공이 고운사(孤雲寺) 가운루(駕雲樓)와 유사하므로 조선 중기 건물이라고 판단하였다.
◘ 무이서당(武夷書堂) 예천군 용궁면 무이리 유형문화재
1656년에 창건되었으며 창암(滄菴) 이윤수(李潤壽)를 제향하고 있다.
서당은 여주이씨(驪州李氏) 시조(始祖)인 태사공(太師公) 이인덕(李仁德)의 20세손인 이지섬(李之暹)과 21세손인 이식(李湜)이 1710년에 후손들에게 면학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세운 서당이다.
서당 뒤편에는 여주이씨 무이입향조(武夷入鄕祖)이며 승사랑(承仕郞)으로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증직(贈職)된 이윤수를 봉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 있다.
3. 醴泉의 人物
◘ 권맹손(權孟孫) 1390(공양왕 2)∼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효백(孝伯), 호는 송당(松堂). 섬(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보(君保)이고, 아버지는 목사 상(詳)이며, 어머니는 임경종(任敬宗)의 딸이다.
1408년(태종 8) 식년문과에 을과와 1427년(세종 9) 문과중시에 역시 을과로 급제하였다. 검열로 벼슬을 시작하여 헌납, 이어서 병조정랑으로 경차관(敬差官)의 임무를 띠고 제장(諸將)과 선박들의 운용을 감독하였다.
이어 1421년 장령이 되고, 이듬해에 강원도와 평안도에 기근이 들어 굶어죽는 자가 많이 생기자 의정부사인으로서 강원도에 파견되어 그들을 구휼하였다. 1425년 강원도찰방으로 나갔다.
1430년에 우사간, 이듬해 동부대언(同副代言), 1434년 좌승지, 1437년 형조참의, 1441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이듬해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동지중추원사·한성부윤·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특히, 세종 때에는 아악 정리사업에 심혈을 기울여, 음악가 박연(朴堧)의 의견을 따라 세종의 악장사업에 적극 협력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이조판서로서 의창제도의 근본적인 모순과 운영의 불합리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한편, 관리들의 부정·부패·비리를 엄격하게 척결, 추방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뒤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제평(齊平)이다.
◘ 권문해(權文海)1534(중종 29) ~ 1591(선조 24)
조선 중기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호원(灝元), 호는 초간(草澗). 아버지는 지(址)이다. 1560년(명종 1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좌부승지· 관찰사를 지내고 1591년에 사간이 되었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유성룡(柳成龍) · 김성일(金誠一) 등과 친교가 있었다.저서로는 우리 나라의 고금문적(古今文籍)을 널리 참고하여 단군시대로부터 편찬 당시까지의 지리· 역사· 인물· 문학· 식물· 동물 등을 총망라하여 운별(韻別)로 분류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郡玉)》과 문집으로 《초간집》이 있다. 예천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되었다.
◘ 김복일(金復一) 1541(중종 36)∼1591(선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계순(季純), 호는 남악(南嶽)이다.
만근(萬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좌승지 예범(禮範)이고, 아버지는 생원 진(璡)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세경(世卿)의 딸이다. 병마절도사 성일(誠一)의 아우이며.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학유(學諭)· 전적(典籍)을 역임하고, 형조·호조·공조의 낭관을 지냈다. 그 뒤 전라도어사로 나가 탐학한 관리들을 숙청하였다.
1587년 울산군수에 이어 창원부사가 되어 폐단이 심한 그곳을 잘 다스렸다. 이어 경주교수(慶州敎授)가 되어 학생들을 경학으로써 인도하여 도의를 크게 일으켰으며, 성균관의 사예(司藝)· 사성 및 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제향되었다.
◘ 윤상(尹祥) 1373(공민왕 22)∼1455(단종 3)
조선 전기의 학자·문신으로 본관은 예천(醴泉). 초명은 철(哲). 자는 실부(實夫), 호는 별동(別洞 - 출생한 동리가 별동리)이다. 충(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호조참의 신단(臣端)이며, 아버지는 예천군의 향리인 선(善)이다.
향리의 아들로 태어나 과거 시험으로 양반 신분에 올랐다. 향리 역(役)에 종사하면서 퇴식(退食 : 관청에서 물러 나와 집에서 밥을 먹음)을 오가는 사이에 솔기름을 가져다 몰래 숨겨두었다가 밤에 책읽기에 쓸 정도로 끈기있는 노력을 기울였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밝은 조용(趙庸)이 1392년(태조 1) 역성혁명을 반대해 예천에 유배되어오자, 조말생(趙末生)· 배강(裵杠) 등과 함께 수업해 문인이 되었다. 그 해 진사시에 합격한 뒤, 이듬해 생원시에도 합격하였다.
1396년(태조 5) 24세의 나이로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해 선산· 안동· 상주 및 한성 서부 등지의 교수관(敎授官)을 거쳐, 예조정랑 때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성균관사예가 되었다. 가친이 연로하자 외직을 청해 황간· 영천(榮川)· 대구 등지의 군사(郡事)를 맡은 뒤, 사성을 거쳐 대사성에 발탁되었다.
1448년(세종 30) 예문관제학으로서 원손(元孫:단종)의 입학례를 거행할 때 특명으로 박사가 되어 선비들이 이를 영예로 여겼다. 오랫동안 성균관의 교육에 종사해 문하에 과거에 합격해 이름난 사람들이 많았다.
문종 초에 고령으로 고향에 돌아가니, 국왕이 사궤(食饋 :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음식물)를 내렸는데, 고령으로 은퇴하는 재상에게 궤물(饋物)을 내리는 제도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향리에서 자제들을 가르치다가 3년여만에 83세로 일생을 마쳤다.
조용을 통해 정몽주의 학통을 이은 그는 세종대에 성균관 교육에 종사해 왕조 초기의 중앙 학계에 성리학의 기운을 진작, 유지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개별적으로는 김숙자(金叔滋)에게 ≪주역≫을 가르쳐 정몽주 계열의 도통(道統)에 학문적으로 크게 기여하였다. 경학(經學)에 밝았고 문장에도 매우 뛰어났다. 저서로는 ≪별동집 別洞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이문흥(李文興)
이문흥(1423~1503)의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자는 질보(質甫), 호는 나암(羅菴)이다. 경상북도 예천군 개포면(開浦面)에서 태어났다.
1462년(세조 8) 사마시에 입격, 1469년(예종 1) 교수로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72년(성종 3)에《예종실록》을 수찬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1482년 사옹원첨정(司饔院僉正)에서 성균관사성으로 전임되었는데, 여러 관아에서 유생 교육에 최적임자라며 전임을 반대하여 20년간 성균관직을 지냈다.1493년 성균관유생 박광영(朴光榮)의 건의로 품계가 오르고 포상을 받았으며, 관직이 대사성에 이르렀다. 79세 때 고향에 묻히기 위해 조정을 떠났다. 예천군 개포면의 기천서원(箕川書院)에 배향되었다.
◘ 전이성(全以性) 1578년(선조 11)∼1646년(인조 24).
본관은 용궁(龍宮). 자는 성지(性之), 호는 운계(雲溪). 처사 전위(全緯)의 아들이다.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는 부친의 성명이 전행(全緈)으로 되어 있다.1606년(선조 39) 병오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9위로 문과에 등제하여 제조랑을 지냈다. 두 번이나 번막(蕃幕)을 보좌하였으며, 다섯 번 군현에 나아가 읍장이 되었다.그의 시문집『운계집(雲溪集)』은 1907년경 9대손 전학영 (全學永)이 편집, 간행하였다. 시는 시대적인 영향을 받아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염려하는, 우국충정이 담긴 작품이 많다. 또, 경치와 정서를 읊은 것도 있는데,「차이창석장분매운(次李蒼石丈盆梅韻)」에서는 살벌하고 건조한 생활 속에서도 꽃의 아름다운 향기로 세사(世事)를 잊으려는 심정을 묘사하였다. 서(書) 중 「상정선생경세(上鄭先生經世)」는 정경세에게 보낸 것으로, 조정의 형편을 묻고 민심의 동향을 조사하여 보고한 내용이다.
「해휴록(解携錄)」은 1630년부터 10년 동안 용성(龍城)에 유배되어 있을 때의 기록이다. 북관 지방의 민심과 생활상, 풍속 등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심화록(尋話錄)」은 부안에 이배되어 있을 때 찾아온 친지나 그 지방 선비와 학문‧시사‧정치‧예절 등에 관하여 논한 내용과, 서로 창화한 시부(詩賦)를 모아놓은 것이다.
◘ 정광필(鄭光弼) 1462년(세조 8) ~ 1538년(중종 33)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사훈(士勛), 호는 수부(守夫). 구령(龜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주목사 사(賜)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난종(蘭宗)이며, 어머니는 장사랑 이지지(李知止)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에 오르고, 그 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그 뒤 성균관 학유의정부사록·봉상시직장을 역임하였다. 성균관학정 때 좌의정 이극균(李克均)의 발탁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임금의 사냥이 너무 잦다고 간했다가 아산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부제학에 오른 뒤 이조참판·예조판서· 대제학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하고 병조판서에 올랐다. 1512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기민 구제에 공헌하였다.
이듬해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527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15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고 중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이 자기의 소생을 끼고 왕비의 자리에 오르려 하자, 홍문관 동료들을 이끌고 경전(經傳)을 인용, 극간해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이게 하였다.
1519년 중종이 사정전(思政殿)에 들러 천재(天災)의 원인이 될만한 정치의 잘못을 물었을 때 한충(韓忠)이 비루한 재상이라고 탄핵하자, 신용개(申用漑)가 선비가 대신을 면대해 배척하는 풍토는 근절해야 한다며 한충의 논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젊은 사람들이 바른말하는 풍조를 꺾어 억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재상의 넓은 도량을 보이기도 하였다. 1531년 70세에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1533년 견파(譴罷)되어 영상에서 물러나 회덕에 있을 때, 후임 영상 김안로(金安老)로부터 장경왕후 국장 때 총호사(摠護使)를 맡아 능지(陵地)를 불길한 땅에 잡았다는 무고를 받아 김해로 유배되었다.
이것은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해 부마가 되어 호곶목장(壺串牧場)을 받아 밭을 일구고자 하므로, 이를 저지한 일로 김안로의 원한을 샀기 때문이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곧 풀려나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정문익공유고 鄭文翼公遺稿≫가 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회덕서원,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 정탁(鄭琢)1526(중종 21)∼1605(선조38)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정탁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백곡(栢谷)이다. 현감 원로(元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교(僑)이고, 아버지는 이충(以忠)이며, 어머니는 한종결(韓從傑)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성균생원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 정언을 거쳐 예조정랑· 헌납 등을 지냈다. 1568년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고,『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선조 5) 이조좌랑이 되고, 이어 도승지· 대사성·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81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장령 정인홍(鄭仁弘), 지평 박광옥(朴光玉)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간원의 계청(啓請)으로 이조참판에 전임되었다. 158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다시 대사헌에 재임되었다.
그 뒤 예조·형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시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 지리· 상수(象數)· 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1594년에는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 중에 공을 세우게 했으며,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72세의 노령으로 스스로 전장에 나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려고 했으나, 왕이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였다. 특히, 이 해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李舜臣)을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하였다.
1599년 병으로 잠시 귀향했다가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3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약포집』.『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4. 예천의 樓亭
◘ 감로루(感露樓) 예천군 용문면 원류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2호이며 함양박씨 재사건축에 딸린 누문형식의 건물로, 1700년대 초에 박종린(朴從鱗)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생전에 후학들에게 강론하던 곳에 현손인 정시(廷蓍)·정설(廷薛)형제가 건립하였다.
야산의 완만한 경사지에 남향하여 누각이 전면에 서 있고, 그 뒤쪽에 마당을 건너서 재사 안채가 평행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두 건물 양단의 동쪽에는 중문채가, 서쪽에는 외양간채가 놓여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누상에는 사면에 쪽마루를 돌출시키고 헌함(軒檻 : 대청 기둥 밖으로 돌아가며 깐 좁은 마루)을 돌렸으며, 잡석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원주를 세웠다. 건물의 배치 및 평면 등은 조선시대 재실건축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 도암대(陶巖臺)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진평리
감천면사무소에서 서북쪽으로 약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 풍기군수를 지낼 때 고향인 예안(안동)을 오가면서 진평리에 있는 도암대라는 바위에서 쉬어가곤 했다 한다.
1934년 지역 유림들이 이 일을 기리기 위해 이황이 쉬어가던 곳에 정자를 세우고 정자 이름을 도암대(陶巖臺)라 하였으며 그 후 1958년 중건하고 1989년 다시 중건하였다.숲이 우거진 야산 중턱, 바위 위에 세워진 도암대는 정면 2칸·측면 1.5칸의 목조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은 마루, 후면은 온돌방으로 꾸몄으며 하부에 짧은 하층주(下層柱)를 세워 낮은 누마루를 설치하였다.
◘ 병암정(屛巖亭) 및 별묘 예천군 용문면 성현리
19세기 후반의 건물양식을 보여주는 정자와 사당이다. 일제강점기에 예천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권원하(權元河)와 관련이 있는 건물로 1898년에 건립되었으며, 정자 건축의 기능에 적합한 입지 조건은 물론 바위, 연못, 석가산 등의 전통 조경 요소를 제대로 갖추고 있어 조경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건물의 구조를 살펴보면 앞면 4칸·옆면 2칸 반의 규모이며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별묘(別廟)는 1920년에 건립되어 1946년에 옮겨 세워졌다. 앞면 3칸·옆면 1칸 반의 규모이며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갖추고 있다.
◘ 삼수정(三樹亭) 예천군 풍양면 청곡리 문화재자료
1420년대에 처음으로 건립되었다가 1636년에 없앴다가 다시 중건하였으며 1829년에는 경상감사 정기선(鄭基善)이 다시 지었다. 자리도 3번 옮겼지만 1909년 원래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도 건립 당시의 형태를 잘 보존되어 있고 마루방을 중심에 배치한 구조의 특이성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2005년 6월 20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86호로 지정되었다.
◘ 선몽대(仙夢臺)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
내성천(乃城川) 남쪽 암산에 있는 정자이다. 1563년(명종 18)에 이열도(李閱道)가 창건한 것으로, 대에 오르면 선경에 비길 만큼 경치가 아름답다.
동서로 흐르는 내성천의 모래밭이 한눈에 들어오고, 대 아래에는 가늘고 긴 냇물이 굽이쳐 흐르고 뒷산에는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산중턱에 약수터가 있다. 정자 주변에는 노송이 울창하다.
이열도의 유고와 유물을 장서각에 보관하였으나 1924년 화재로 소실되고, 당시의 명인들이 기록한 제영록(題詠錄)·심유록(尋遊錄)만이 보관되어 있다.
◘ 야옹정(野翁亭) 예천군 용문면 제곡리
용문 입향조로 만년에 후진양성과 사회교화에 힘썼던 권의(權檥)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아들 심언(番言)이 1566년(명종 21)에 창건하였다.
문틀 중앙에는 가운데 설주가 서 있는데 설주 상하에 원산(遠山:홈대의 중간에 대는 쇠)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돌쩌귀에 울거미(창문 가 둘레에 댄 뼈대) 널문을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연석을 높이 쌓은 축대 위에 건물을 세웠는데, 마루방 전면에는 반칸 앞쪽에 누하주를 세우고 마루를 돌출시켜 난간을 돌려 누마루처럼 꾸몄으며, 후면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 용두정(龍頭亭) 예천군 풍양면 와룡리
1590년(선조 23)에 손흥지(孫興智)가 창건하였다. 정자의 위치는 뒷산인 와룡산(臥龍山)의 머리부분인데, 퇴강나루터를 바라보고 있는 이 언덕이 웅크린 용과 같이 생겼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손흥지가 이 곳에 정자를 짓기 위하여 와룡산 기슭을 파자, 갑자기 붉은 피가 솟아나와 놀라서 산세를 다시 살펴보니 용의 머리부분을 찍었으므로, 애석히 여겨 그 자리에 정성껏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한호(韓濩)가 제액(題額)하고, 홍만적(洪萬績)이 기(記)를 쓰고, 구봉령(具鳳齡)이 시를 지었다. 정자 주변은 일제강점기에 백사장을 개간하여 과수원을 만들고, 둘레에 바람막이로 나무를 심었다.
◘ 청원정(淸遠亭) 예천군 용궁면 무이리 문화재자료
축산부원군으로 호가 국파인 전원발 선생은 고려 충숙왕 때인 1315년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고 또 원나라에서 고려의 인재를 선발하는데에 발탁되어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병부상서 겸 집현전태학사에 이르렀다.
원나라 순제에게 상주한 혜택으로 원나라에 바치던 조공을 삭감하게 되었다. 청원정은 그가 만년에 건립하여 유유자적하던 곳인데 1918년 향의에 따라 다시 세웠다.
정내에는 퇴계선생시가 있고 정자 곁에 있는 석벽에는 그의 벗인 척약재 김구용 공이 전서로 쓴 청원정이 새겨져 있다. 향토문화관 국파 전원발 선생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 초간정(草澗亭)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3호로 1582년(선조 15)에 권문해(權文海)가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초가집으로 초간정사(草澗精舍)라고 하였는데, 임진왜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어 터만 남겨졌다가 1612년(광해군 4)에 후손이 권문해를 추모하기 위하여 재건하였다.
그러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다시 불타서 권문해의 현손이 다시 세웠다. 이 때 박손경(朴遜慶)이 중수기를 썼으며, 석조헌(夕釣軒)· 화수헌(花樹軒)· 백승각(白乘閣) 등의 건물이 있었다.
그 뒤 점차 도괴되어 1870년(고종 7)에 권문해의 유고를 보관하기 위하여 현 위치에 와가 한 채만을 세우고 초간정이라 하였다. 건물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에 점점이 놓인 기암괴석과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맑은 물이 절경을 이룬다.
5.예천의 마을과 古宅
◘ 금당실 마을 예천군 용문면
금당고 혹은 금곡으로도 불리는 금당실 마을은 600여년 전 감천 문씨가 개척을 시작해 그의 사위인 함양박씨 박종인과 원주변씨 변응영이 정착하였다.
지형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옆으로는 작은 개천이 흐르는 연화정수형으로 연못 속에 핀 연꽃과 같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마을의 돌담들은 일부 허물어지기도 했지만 초록의 이끼가 끼어 더욱 멋스럽고 각종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장소로도 애용되고 있다. 서울 나들이가 잦고 맛질 권경하의 집에 놀러갈 때에도 그 행렬이 한양 왕가의 것과 같았다 해서‘금당맛질 반서울’이라는 전설을 남겼던 세도가 이유인이 살았던 99칸 저택은 모두 없어졌지만 그 터와 돌담만은 남아 있을 정도로 금당실마을의 자랑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돌담이다.예천 권씨 고택을 비롯해 반송재 고택, 사괴당 고택 등의 고가옥과 금곡서원 등의 전통 건축물도 만날 수 있다.
보물 제8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동운부군옥》은 초간 권문해가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인근에는 유적인 초간 종택과 맑은 계곡 옆의 바위에 지어져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 느껴지는 초간정, 보물 제879호인 《초간일기》 등 문화유적과 사료 등이 남아 있다.
전통의 모습을 잘 간직한 금당실 마을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어 소달구지 타기, 각종 농사체험, 전통 먹거리 체험, 서예 교실 등에 참여할 수 있고 주말농장도 운영하고 있다.
◘ 물체당(勿替堂) 예천군 유천면 율현리
중요민속자료 제174호. 이 집은 현소유자 임재원(林在原)에 따르면 그의 8대조가 매입한 건물로 그 이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하며, 7대조 노운(魯運)의 호가 물체당(勿替堂)이라고 한다.
수목이 우거진 낮은 언덕을 배경으로 하여 전면의 높은 잡석 축대 위에 건물을 남향으로 배치하였다. 전방에는 비교적 넓은 논이 펼쳐져 있어 시야가 적절히 열려져 있다.
◘ 미산고택(味山故宅) 예천군 용문면 대저리 문화재자료
원래 함양 박씨 정랑공의 후손 박세주가 조선 효종 원년(1650) 금당골에서 이 마을로 옮기면서 지은 집이다. 지금 있는 자리로는 5대손 미산 박득영이 순조 25년(1825)에 옮겨 세운 것으로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가 튼 ㅁ자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안채는 2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 상방· 부엌· 상방부엌을 배치하였는데 ㄷ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사랑채 마루 위의 ‘미산재(味山齋)’라고 쓴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방문했을 때 박득영의 호를 따서 써준 것이라 한다.
◘ 반송재고택(伴松齋故宅)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 문화재자료
갈천 김빈이 살던 가옥이며 김빈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 도승지, 예조참판 등을 지낸 문신으로 벼슬을 그만둔 후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살았다.이 집은 김빈의 아우 김정이 세운 것으로 후에 자손들의 가세가 기울자 팔았다가 구한말 이유인이 사들여 광무 3년(1899)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웠다.담장 안에 있는 안채와 사랑채는 남향으로 배치하였고 곳간채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사랑채 앞에 담장과 연결된 대문채가 있는데 영남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 배치를 보여 준다.
◘ 연곡고택(延谷古宅) 예천군 용문면 저곡리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3호로 마을 뒷산을 배산하고 내성천(乃城川) 건너편 학가산(鶴駕山)을 안산 삼았다. 문전에 넓은 옥답이 있다. 연곡고택이 제일 깊은 위치에 있고 앞쪽에 민속자료 제402호인 춘우재(春雨齋) 고택이 있다.
『연곡유집(延谷遺集)』 1권에 실린 상량문에 의하면 저곡(渚谷)마을 입향조인 야옹(野翁) 권의(權檥)의 8세손인 연곡 권성익(權聖翊)이 정조 13년(1795)에 창건하였다.
연곡은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 문인(門人)으로 간동사람이며 학문이 해박하고 행의가 밝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학자이다. 후에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증직되었다.
◘ 연안이씨별좌공종택 (延安李氏別坐公宗宅) 예천군 호명면 송곡리 문화재자료
호명면 사고막골의 야산을 배경으로 정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건물이다. 비탈진 대지 위에 정침이 있고, 동쪽 담장 밖에 흙담장을 쌓고 사당을 별도로 세웠다.이곳은 소유자의 17대조인 이덕창(1569∼1616)의 집으로 조선 선조 때 지은 것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내자시정이 된 학자이다. 조상의 옛 터에 집을 세우고 안채 대청에‘사고구려’라는 현판을 걸었다.약간 변하긴 했으나 이 지역 사대부의 주거 모습을 볼 수 있는 건물이며, 조선 중기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 예천권씨초간종택(醴泉權氏草澗宗宅) 중요민속자료 .보물 제457호인 종가별당과 연결되어 평면 구성된 옛날 가옥으로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의 조부 권오상(權五常)이 선조 22년(1598)에 세운 것이다. 동쪽으로 뒷산이 반달모양으로 싸안고 좌측으로 백마산(白馬山)이 청룡을 이루고, 우측으로는 아미산(娥眉山)이 백호를 이루어 풍수지리상 명당자리로도 유명하다.
전체 건물은 낮은 뒷동산을 배경으로 다소 경사진 대지 위에 동남향으로 배치하였다. 사랑채는 전면에 돌출되어 있으며, 안채는 뒷쪽으로 ㄱ자형을 이루고 있다. 본래는 대문간채와 사랑채 왼쪽에 연접한 부속채가 있었으나 철거하였다.
보물로 지정된 사랑채는 평지 위에 막돌허튼층쌓기로 높게 축대를 쌓은 위에 세우고 난간을 돌려서 다락집 모양으로 꾸민 별당식 건물이다. 평면 구성은 건물을 향해서 왼쪽에 1칸의 온돌방을 꾸미고, 오른쪽 3칸에 넓은 대청을 들였다.
온돌은 내부를 다시 두 방으로 구분하고, 대청 앞면은 문짝 없이 그대로 개방하였으며, 옆과 뒷면은 판벽(板壁)을 쳤는데 그 중앙에 두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뒷면에는 어간에만 외짝문의 출입구를 만들고, 그 밖으로 쪽마루를 깔았다.
안채는 2단으로 높이 쌓은 축대 위에 세우고, 중문 앞에 계단을 설치하여 전체적으로 높고 웅장해 보인다. 정면 3칸 중 왼쪽 1칸이 안방이고, 나머지 2칸은 우물마루를 깐 대청으로 전면이 개방되었다. 왼쪽에 도장방을 단칸으로 설치하여 안방과 부엌에서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3칸의 부엌은 도장방 앞으로 안방과 연접하여 길게 뽑았다.
사당은 안채 오른쪽 후방에 배치하였다. 정면의 어간에는 양 여닫이문을, 협간에는 외여닫이 궁판 세살문을 달았다. 어간 중앙에 수직으로 중간설주가 있는데, 이것이 문받이를 겸하고 있으며, 위쪽으로 밀어올려서 떼어낼 수 있도록 하였다.
별당 뒤 야산 밑에 서고(書庫)에는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大東韻部群玉)》 판목(版木) 677매와 14대째 전해지는 옥피리,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전질 120권이 보존되어 있다. 보존 상태가 우수한 조선 중기 건물로 조선 건축의 구조와 양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별당채는 잡석으로 높이 쌓은 축대위에 세우고, 중간 앞에 여러단의 축석을 쌓아 건물 전체가 매우 높고 웅장하며 고졸한 멋을 풍긴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권문해(權文海)가 편찬한 백과사전이다.
총 20권 20책으로 원나라 음시부(陰時夫)가 지은 《운부군옥》의 체제를 본떠 만들었다. '운부군옥'이란 여러 가지 항목을 한자음의 높낮이에 따라 분류했다는 뜻으로, 우리 나라와 중국의 문헌 약 190종 가운데 우리 나라에 관련된 주요 내용들을 단군부터 선조 때까지를 다룬 내용들을 가려 뽑았다.
선조 22년(1589년)에 완성되었지만 임진왜란으로 펴내지 못하고, 후손 권진락(權進洛)이 순조 12년(1812년)에야 간행하기 시작해 헌종 2년(1836년)에야 완간했다.
지금은 소실되고 없는 임진왜란 이전의 책들을 망라하여 사료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16세기 한글의 모습을 알 수 있어 국어학에서도 중요하게 쓰인다. 최근 남명학연구소 경상한문학연구회 주도로 2007년에 총 20권으로 완간되었다.
◘ 의성김씨남악종댁(義城金氏南嶽宗宅) 예천군 용문면 구계리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7호로 조선 중기 건축의 정침과 문간채가 지정되었다. 남악공의 종질이며 병자호란 때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신(斥和臣)으로 이름난 불구당(不求堂) 김주(金迬)과 인연있는 집이다.
불구당의 증조부가 안동에서 예천으로 옮겨 금당실[金堂谷]에 칩거하였다. 아버지 도사공(都事公 克, 1576∼1621) 시절에 구계에 옮겨와 살기 시작했고 김왕은 여기에서 출생했다.
창건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정황으로 보아 1600년대에 창건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종택은 이후 후손들이 누대로부터 거주하다 전주 이씨에게 매도되었으나 다시 후손이 매입해서 남악 종택으로 삼고 있다.
◘ 춘우재고택(春雨齋古宅) 예천군 용문면 저곡리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2호. 안동권씨 복사공파조(僕射公派祖)의 10대손이며 저곡리 입향조인 야옹(野翁) 권의(權檥) 손자인 참봉 춘우재 진(晉)이 창건한 집이다.
전하는 기록에는 1625년에 불탄 것을 1800년대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변형이 있어 원형을 다 보기 어렵고 편의에 따라 대청 앞쪽에 유리창을 다는 등 옛스러움이 퇴색하였지만 집 지은 대목이 기법(技法)에 학술적인 가치가 있는 부분이 잔존해 있어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6. 예천의 명승 유적
◘ 금당실 솔숲 - 최고의 명당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금당실 마을은 조선 중기 <정감록>이 난세에도 전쟁이나 흉년의 피해가 없는 길지로 꼽은 십승지(十勝地)의 하나이다. 이곳을 최고의 명당으로 만든 지형은 소백산 줄기의 높은 산자락이 포근하게 둘러싼 넓은 들과 마을을 굽이치는 금곡천이다. 한 가지 헛점이 있었으니, 마을 앞쪽에 터진 부분이다. 1500년대에 이런 풍수적 결함을 보완하는 솔숲을 조성했다.
오미봉에서 금곡천을 따라 정자산까지 2㎞ 길이의 솔숲은 금당실 마을을 완전히 감싸 안는 형태였지만 현재는 600m가량만 남아 있다. 마을사람들이‘솔 둥지’라고 부르는 마을숲에는 수령 250~300년 된 소나무 거목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마을을 둥지처럼 보듬은 솔숲과 산세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원래의 형태로 복원한다면 한옥 체험마을과 함께 이 지역의 명물이 될 것이다.
◘ 삼강주막 - 낙동강변에 남은 마지막 주막
경북 예천의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이 만나는 곳을 삼강(三江)이라 부르는데, 삼강나루터가 있는 강변엔 영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갈 때 문경새재를 넘기 전 한숨 돌리고 갈 수 있는 주막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삼강주막이다. 낙동강을 거점으로 장사를 하던 보부상과 배들로 활기 넘쳤던 주막은 시대가 변하면서 설 자리가 좁아지다가 낙동강 위로 삼강교가 놓이면서 1,300리 낙동강 물길에서 마지막 남은 주막이라 하여 관광지로서의 역할만 하게 되었다. 190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삼강주막은 방 2칸, 부엌 1칸으로 뒤편 대청마루에 앉으면 200년 수령의 회나무가 있는 마당으로 낙동강이 보였으나 강둑을 높이면서 낙동강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부엌 안쪽과 바깥쪽 벽에는 주모의 외상 장부가 칼금으로 그어져 남아 있는데 마지막 주모는 2006년 세상을 떠났고 허물어져가던 주막을 예천시에서 복원해 삼강리 부녀회에서 운영하고 있다. 장작 지피는 아궁이와 연기 빠지는 구멍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주막에서는 직접 빚은 막걸리에 배추전, 두부, 묵 등을 안주 삼아 옛 주막의 정취를 맛볼 수 있다.
◘ 석송령(石松靈)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에 있는 소나무.
천연기념물 제294호. 수령은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0m, 가슴높이둘레 1.9m로서 수관(樹冠)의 길이가 30m에 이르고 있다. 밑에서 갈라진 가지가 원줄기처럼 자라서 원줄기와 가지의 구별이 없고, 수관(樹冠)은 펼쳐진 우산과 같이 반원형을 이루고 있다.
이 소나무는 인격이 부여된 특이한 존재로 세계적으로 유래를 볼 수 없는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소나무는 약 600년 전 풍기지방에서 시작된 홍수에 떠내려 오는 것을 지나가던 사람이 건져내어 심은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 마을의 주민이었던 이수목이라는 사람이 이 나무에 영감을 느끼게 되어 석송령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자신이 소유한 6,600㎡의 토지를 상속시켜 문서 등기를 마쳤다고 한다.
나무가 토지와 같은 부동산을 소유하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다. 해마다 농지를 경작하는 사람으로부터 돈을 받아 은행에 저축하고 있으며, 제반 세금은 물론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지급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새벽에 동제를 지내는데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가 동리를 수호해 주고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이 나무를 베려고 하다 피해를 입고 중지하였다는 말도 전하여지고 있으며, 마을 노인들은 이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송계를 만들고 있다.
◘ 회룡포 (回龍浦) - 육지 안에 있는 아름다운 섬마을,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태극무늬 모양으로 휘감아 돌아 모래사장을 만들고 거기에 마을이 들어서 있는 곳이 이 곳 회룡포이다. 유유히 흐르던 강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둥글게 원을 그리고 상류로 거슬러 흘러가는 기이한 풍경이 이곳 회룡포마을의 내성천에서 볼 수 있다.이 기이한 풍경을 제대로 보려면, 인접한 향석리의 장안사로 올라가 굽어보아야 한다. 절이 있는 산이 비룡산인데, 그 산 능선에 1998년 회룡대라는 정자를 건립하였으며 여기서 정면을 보면, 물도리 모양으로 굽어진 내성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보면 우선 강으로 둘러싸인 땅의 모양이 항아리 같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맑은 강물과 넓은 백사장이 보인다. 백사장 가에는 나무가 둥근 곡선을 따라 심어져 있고, 논밭이 반듯반듯 정리되어 있다. 그 중앙에 회룡포마을이 있고 오른편 곳곳에는 숲이 울창하다. 이 비룡산에는 장안사와 원산성 등의 유적지가 있는데 정상 바로 밑의 장안사는 통일신라때 의상대사의 제자인 운명선사가 세운 고찰이라고 한다. 최근에 중수를 한 관계로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지만 찾는 이가 드물어 한적한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회룡포마을에는 7, 8년 전만 해도 20여 남짓 가구가 살았으나, 모두 도회지로 떠나고 지금은 9가구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마을은 논밭까지 합쳐 5만평 정도이다. 한바퀴 도는데 1시간도 채 안 걸린다.
◘ 효공원과 도시복 생가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
용두리 효공원 내에 있다. 조선 후기의 효자로 이름난 도시복(都始復, 1817~1891)의 생가로 원래 재래식 'ㅡ'자형 초가였으나, 1882년 어사 이도재의 정려 표창 상신이 있은 뒤 'ㅁ'자형 초가로 증축하였다가. 유교문화 개발사업의 하나로 2005년에 복원하였다. 도시복은 조선 철종 때 사람으로 본관은 성주이며, 호는 야계(也溪)이다. 용두리 야목마을에 살았는데, 마음가짐이 어질고 효심이 극진하였다. 장날이면 나무를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어느 장날 늦게 어머니상에 올릴 생선을 사서 돌아오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솔개가 생선을 채가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생선으로 어머니의 저녁상을 차리고 있어 솔개가 끼니 때에 늦지 않게 가져다 준 것임을 알게 되었다.한여름에 어머니가 병이 들어 홍시가 먹고 싶다고 하자, 시복은 홍시를 찾아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날이 저물자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서 시복을 등에 태우고 산속을 달려 강릉의 어느 외딴 집에 내려놓았다. 마침 그 날은 그 집의 제삿날이어서 젯상에 홍시가 놓여 있었다. 시복은 자초지종을 말한 뒤 홍시를 구해 호랑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병으로 쇠약해진 어머니가 한겨울에 수박이 먹고 싶다고 하자, 들판을 뒤지며 수박을 찾아 헤메다가 안동의 어느 원두막에서 싱싱한 수박을 발견하여 어머니에게 드렸으며, 아버지가 엄동설한에 잉어를 찾자 꽁꽁 언 실개천을 헤매다 얼음구멍에서 튀어나온 잉어를 잡아 아버지의 저녁상에 올렸다고 한다. 양친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며 애통해하였는데, 호랑이도 그의 효심에 감동하여 곁에서 함께 지켰다고 한다.
忠孝의 고장 예천踏査에 참여하여 주신 회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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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남 유학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군자목(장세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