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薯童)의 고향을 찾아서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 제2 무왕에 대한 위의 자료를 보면, 백제의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라 하였다. 고본(古本)에는 무왕을 무강왕(武康王)이라 하였으나 이는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고본의 기록이 틀렸다는 것. 과연 그럴까. 서동요의 배경설화를 분석한 결과, 서동요의 지은이가 무왕 혹은 무령왕, 혹은 동성왕, 혹은 원효라는 설이 분분하다. 서동요는 4구체 향찰로 적힌 향가로서 그 내용은 의도성의 참요(讖謠)로 알고 있다. 백제의 무왕이 어린 시절 마를 캐서 먹고 살았다. 그래서 서동(薯童)이라 불렸다. 그는 서라벌에 들어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를 아내로 삼고자 이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였다는 것이다(삼국유사).
선화공주님은 남모르게 얼어 두고
서동의 방을 밤마다 안으려고 간다네.
아침을 먹고 난 일행은 잠시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을 둘러보았다. 금동제사리호이며 금동제 사리봉안기, 사리장엄구 등을 보았다. 사리봉안기의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자 무왕의 왕비가 제청하여 미륵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올라 있다. 전시관 안에 가면 편히 앉아서 쉬어도 될 만한 공간이 있다. 12명이 모여 앉아 쉬면서 선화공주의 정체성에 대하여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포의 준곤 이 선생이 문득 내게 물었다.
“갑내형, 서동요의 작자인 서동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많고 가늠하기 어렵네요. 형은 어떻게 보나요?”
“주인공 서동을 고유명사로 보들 말고 초립동, 초동, 무동이라 할 때처럼 그냥 마를 캐는 일을 하는 아이 정도로 보자는 의견도 있다. 역사가 흐르면서 무왕에 대한 기록은 무강왕과 무왕을 혼동한 듯하다. 우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경우를 들어보자. 이 자료는 일종의 지리서로 흔히 인용되는 자료이다. 전라도(全羅道) 익산군(益山郡) 조에 그러한 기록이 미륵사(彌勒寺) 부분의 풀이를 보면 다소 감이 잡힐 법도 한데... .”
사찰 연기설화를 전공한 목포 이 선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한 설명에 한 술 더 뜬다.
“미륵사는 용화산(龍華山)에 자리한다고 했잖아요. 기록에 전하기를 무강왕(武康王)이 민심을 얻어 마한국을 세웠다고. 하루는 선화부인(善花夫人)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고자 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세 미륵불이 못 속에서 나왔다. 선화부인이 무강왕께 청을 하여 이곳에 미륵사 절을 지었다는 거잖아요? 뒤에 이야기 나누겠지만,
마한 곧 금마국 시절에 무강왕 홍성 일원의 사로국의 선화공주왕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것이라 볼 때 마한의 무강왕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삼국유사에는 무강왕은 고본에 있으나 잘못된 틀린 것이라 하였거늘 후대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무강이라 하였다. 뿐만이 아니다. 같은 자료 고적 부분의 쌍릉(雙陵)에 대한 기술이 더욱 믿음을 더 하게 한다. 이어지는 이 선생의 설명이었다.
“쌍릉은 오금사(五金寺) 봉우리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오늘날에도 자리하지요. 고려사(高麗史)에는 후조선(後朝鮮) 무강왕과 그 왕비의 능이라고 했어요. 흔히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라 한다. 달리는 백제 무왕의 어린 시절 이름이 서동(薯童)이니, 여기 말통(末通)이란 곧 서동(薯童)이 다른 표기라고 하였지요.”
우선 후조선의 무강왕과 왕비의 쌍릉(雙陵)이 지금도 금마에 있다. 무강왕이 살아생전 선화부인과 함께 용화산 아래 연못가를 지나다 세 미륵불이 나옴을 보고서 임금에게 청원을 넣어 세운 절이 미륵사라는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서 삼국유사에서는 무강왕과 무왕은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같은 책 왕력 편에서는 어떤가. 백제 제30대 무왕은 달리 무강(武康) 혹은 헌병(獻丙)이라 적고 있다. 어릴 때 이름은 일기사덕(一耆篩德)이라 하며 경신년(庚申, 600)에 즉위, 4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오락가락 한 마디로 종잡을 수가 없다. 이렇게 작자에 대하여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을 갑내에게 던진다.
“이런 경우, 갑내 형은 어떻게 풀어야 그 흐름의 물꼬를 튼다고 생각해요?”
“설화 곧 전설이란 일반적으로 적층문화(積層文化)의 특성을 갖고 있지요. 처음의 어떤 이야기가 시대와 지역을 달리하면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더해 갑니다. 그 전승의 형태가 기록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구전(口傳)이 되기에 더욱 그렇지요. 말하자면 구전문학(口傳文學, littérature orale)이라는 겁니다. 적층성을 고려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서로 앙숙인 백제와 신라 두나라 사이에서 서동과 선화공주의 결혼이란 현실적으로 맺어질 수 없지요. 말하자면 상극이지요. 그러면 선화공주라는 설화상의 주인공을 신라와 같은 나라 이름을 쓰는 사로국(駟盧國, 홍성 일원)의 선화일 가능성이 있다. 홍성에는 지금도 금마면(金馬面)이 있기는 해요. 신라는 달리 사로국(斯盧國)으로 그 발음이 거의 같지요. 마한 54국 가운데 금마국과 사로국이 교류함에는 아무런 장벽이 없다고 봅니다. 더욱 관심이 가는 것은 중국의 사료인 전한서(前漢書)의 마한세계(馬韓世系)를 보면 무강왕(武康王)이 나오지요. 무강왕이 금마국을 세웠다고 볼 수 있는 대목기지요.
이를 동아리 하면, 마한 시절 곧 금마국 시절에 무강왕과 사로국의 선화공주 사이에 있던 설화소(說話素)가 뒤로 오면서 익산미륵사연기전설(益山彌勒寺緣起傳說)로 변용이 된 겁니다. 설화의 민담적 주인공은 서동(薯童)이라는 주인공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설화들이 일연(一然) 선사에 의하여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리면서 점차 현실성이 없는 설화로 변질되어 고착화된 것이 아닌가 해요. 마침내 이름도 비슷한 백제의 제30대 무왕으로 덧칠 한 셈이 된 것이지요.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서동이 용상에 오릅니다. 미담의 형태로 구전되어 이런저런 기록에 올라 오늘에 이르게 되었지요. 내가 보기로는 마한 시절 곧 금마국 시절의 서동이 홍성(洪城)에 자리하였던 사로국(駟盧國)의 선화 공주를 맞이하여 마침내 사로국왕의 도움을 얻어 백제의 임금으로 등극하는 설화소가 기본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불교가 들어오고 무왕 때 미륵사를 창건, 당대 최대의 석탑을 쌓으면서 승려 혹은 불교 친화적인 문인들에 의하여 신라불교와 쌍벽을 이루는 도량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라고 상정합니다.”
어리둥절한 모습들이다. 이쯤 해 두고 옆에 자리한 절터와 더불어 용내미 못을 돌아보고 점심을 하러 가자는 것이다. 월산이 앞을 섰다. 언제 이야기를 해두었는지 문화해설사가 와서 사지와 새로 복원한 동탑에 대하여 친절하고 막힘없는 솜씨로 설명을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