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소시집|이병일
표독스러운 아름다움이 나는 좋다 외 4편
오후 세시, 봉구*가 시작됐다 벌떼는 날개로 중력을 꿰맸지만
모서리를 잃었고 등나무 안쪽으로 등 돌리고 섰다,
아니 불온한 그것처럼 무신경하게 빌붙는다
엉켰는데 번지르르한 저 벌떼 울음
등나무의 성대가 된 걸까
속수무책 캄캄해지는 궁리같이
불곰이 뱉는 잔기침 같기도 하다
저 잘게 쪼개져 나오는 벌떼가 절벽인 것을
물을 사람이 없다
알레르기도 종교의 일부라고 했는데
물을 사람이 없다
벌떼가 죽으면 종말이 코앞이라는데
물을 사람이 없다
꽃그늘 뒤집어쓴 것들이 대낮보다 더 까맣다
꽃빛이 문드러지듯 벌떼 울음은 더 밝아진다
등나무, 등나무 양쪽 귀가 멍들어간다
저 표독스러운 아름다움이 나는 좋다
단절된 꽃 이름 다 들춰낼 것 같은 벌집
구름처럼 삼 일을 굶고 산맥으로 줄행랑칠까
저 분봉의 고리는 뾰쪽한데 어두웠다
무심한 듯한데 악랄한 아가리 같았다
구멍 뚫린 바람도 어긋나 있어 치렁하다
그때 통유리에 나붙은 벌집을 채기 위해
벌매가 날아와 쿵, 하고 불시착했다
저 고유한 색채감은 깨지지 않았다
다만 죽음만이 통유리 안쪽으로 핏물로 섰다
*벌들이 둥그렇게 모이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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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식
목단나무 한 주를 마당에 심었다
비와 구름은 악쓰며 지나가고
산제비나비는 번번이 머물고
제 얼굴 보지 못해 푸르러진 쐐기같이
나는 목단나무 그림자가 상하지 않도록
붕대로 친친 감아두었다
꽃송이 피는 방향으로 목단나무는
뿌리를 내린다는데
목단 그늘, 벌어지고 오므라들고
다시 제 피를 오므리듯
중력보다 더 느리게 더 아름답게
한나절 땅강아지같이 죽은 척한다
저 큰일도 없이 이식된 땅 속에서
뿌리가 가져온 흙빛도 물과 가까이 있을
지렁이와 함께 회복 중일까
먼 산 파문波紋이 다음 꽃까지
파문破門을 찾듯
목단나무는 여름 속으로 달아났다
붕대 틈으로 죽지 않는 잎사귀가 자란다
물과 빛이 넘치듯 내 심장도 멀쩡했는데
어느 날부터 나약한 것과 무력한 것이
나를 파먹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삶이 개의치 않게 몸을 입고 섰다
강이 강을 찾아가듯 목마름도 옮겨진다
저 크고 불길한 꽃송이들, 무리 지어
교회 종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밀고 나온다
천사에게 달아준 꽃잎 날개를 위해
대낮에도 몇 번씩 계절풍을 부른다
소만이 밟아온 물웅덩이 안쪽
곤궁하게 이식된 목숨이 까맣게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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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이마에 흐르는 강에 물새가 산다
잠시나마 강에 뛰어들 용기마저 사라지면
물빛으로 빚어진 사람
제 마지막 집이 강이라고, 미간에 힘주며
오래도록 물새를 치어다본다
정작 말하고 싶은 것들은 강에 있지 않고
물소리로 흘러가 버린지도 모른다
그 강엔 맑게 갠 표정이 아닌
무지개 폭포 뒤에 알을 숨겨놓았을 물새
아직 떠나지 못했다
물새는 강의 날씨와 작은 존재와 지도를
제 울음소리에 숨겨두고, 모든 것을 잊는다
물새로 위장한 저승사자
무덤덤 눈 붙이면, 강은
행간에 붙어사는 맨살과 숨을 지운다
관자놀이 십자가, 겨우 남은 힘으로
쇄골이 짓이겨놓은 물새 한 마리를 깨운다
물새는 가장 어두운 눈으로
귓속 강으로 날아간다
머리통을 수면에 밀어 넣으며 눈을 씻는다
죽은 사람 앞에서 밤새 안부를 묻듯
강은 이름을 부르지 않고
물새는 발에 쥔 것을 잘게 놓으며
역광으로 죽는다 속이 흰, 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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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의 그림책
나는 엘리사의 그림책을 모른다
축복도 저주도
질병과 가난도
인중에서 시작된다고 믿는 사람이니까
반성과 기도는 왜 끝이 없을까
약속은 믿음을 쥐었다 폈다하는데
나의 아버지는
깨지는 믿음을 위해
손가락은 접시를 돌린다고 말하네
접시가 손가락을 뚫는다고 말하네
나는 어제도 그제도 아버지를 죽였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십자가 속에서 불탄다
불빛에 타고 있는데도 걷다가 쉬고
침도 내뱉고
두 팔을 잘라 은하수에 던져두고서
둥근 어깨를 감싸주는
달의 언덕이 웃자란 천국을 바라본다네
강이 강을 거슬러 오를 때
풀빛이 풀빛을 옮길 때
멀미가 멀미를 앓을 때
아버지를 여러 번 죽이는 일
어린 양에게 있을 법한 일이라네
이마를 짚어보면
눈썹과 눈썹 사잇길이 주름져 있다네
천만번 불에 타도 없어지지 않을
재로 된 그림책,
용서와 죄를 감추는 노래로 가득하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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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으로
새 떼를 만나러 간다
공중을 봐야지
여기는 금강하구
등 돌리는 가창오리 點點畵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그냥 검은빛인데
다들 그것을 군무라 부른다
이윽고 향고래였다가
나무였다가 코끼리였다가
저 작은 것들이
흩어지고 모이고 무너지고 깨진다
그런데 부딪쳐 죽은 것이 하나 없다
믿기지 않는 것을 믿는
저녁은 왜 침묵을 잇지 못하는 걸까
온데간데없이
휑하게도 아름다운 것들은
왜 아름답지 않은 몸을 가졌을까
여기는 금강하구, 배후가 좋은 날
나도 아무 데나 흩어지고 싶어
부고 보낼 명부名簿를 잠깐 생각했다
* 김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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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시론-숨통의 시
아카시아꽃 핀다. 흙냄새 맡고 싶다. 논물 속에서 맨발로 돌아다니고 싶다. 아니 나는 맨발로 논물에 들어왔다. 진흙을 밟고 왜가리처럼 서 있으니까 맑은 것은 저 산에 있고 미적지근한 것은 논에 고여있다고 생각한다. 왜 눈에 담고 싶지 않아도 절로 눈에 담기는 것이 생길까. 진흙이 잘게 풀어지고, 되게 뭉치고, 서늘하게 번지고, 또 노을처럼 사그라들다 다시 타오르는 것을 보고 있으면 곧잘 거머리에게 종아리를 뜯겼는데, 오늘은 거머리가 없다. 바람이 분다. 물결이 물결로 옮겨붙는다. 어지러울 만큼 물결이 물결을 떠민다. 저만치 물이 꺼끌꺼끌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소금쟁이 떼가 물 깊은 곳보다 가장자리로 몰려가 있다. 검불 같은데 꿈틀거린다. 시들하게 엎드려 있는데 광택이 난다. 등껍질에 묻은 빛들, 어디서 가져왔을까. 저 작고 아름다운 몸들이 죽은 물고기와 물뱀을 먹어치운다. 퍽, 기특하다. 악의도 미움도 없는 오월은 혼미한 것과 투명한 것이 많다. 유연한 것은 차고 단단해지고, 물과 가까이 있는 것들은 물 없는 곳으로 올라가고, 선한 것은 꽃대 매달아 무참하게 독을 머금는다. 숨이 붙어있거나 숨이 볼록 드러나 있는 쥐똥나무에 코 박고 있는 침묵과 소란도 있다. 원하지 않아도 제 삶에 흠집을 내는 짐승들. 물빛은 탁해도 세상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숨에서 몸으로 변하는 일, 저물녘 어둠을 밝히는 달이 매번 왜 무릎을 낮추는지 그 이유를 알겠다. 몸에 해로운 것만 줄곧 먹어왔는데 오늘은 몸에 좋은 나물만 잔뜩 먹었다. 나도 모르게 발뒤꿈치가 들린다. 반짝, 빛을 내본다는 것이 그만 울음을 꺼내놓는 청개구리, 살짝 곤두서 있는 그 느낌이 좋다. 나는 오래도록 저런 것들을 쳐다보게 된다. 나는 철판도 없으면서 철의 얼굴로 웃고 떠드는 세계를 잘 안다. 일부러 말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약게 살지 못한 아름다움에게 내 숨통을 내어주고 싶다. 기이한 통찰력과 뚱딴지같은 질문이 내가 가진 힘이다. 그 힘으로 나는 세상 모든 것에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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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일
-1981년 전북 진안 출생.
-2007년 《문학수첩》으로 등단.
-시집 옆구리의 발견, 아흔아홉 개의 빛을 가진, 나무는 나무를 등.
-현재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