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의 저장 용량에 대하여 말하던 중 동료가 말했다. “미국에서 엄청난 정보를 담을 수 있는 무한대의 저장장치가 나왔대요!” 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그런 저장장치가 있어요?”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아직 못쓰고 있대요. 지난 수개월 동안 포맷팅하고 있는데, 언제 끝날지 모른대요!” 아뿔싸! 낚였다. 무한의 개념세계와 구현기술의 유한함을 풍자한 유머로 생각된다.
수십년이 지난 예전 일이 생각났다. 이미 판매가 시작된 중형서버를 본사에서 갑자기 영업중지 명령을 내렸다. ‘1’을 ‘3’으로 나누고, 다시 ‘3’을 곱하면 ‘1’이 안 나오고 0.9999999…의 무한소수로 처리하는 오류가 발견되었다는 이유이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계산을 컴퓨터는 원래 이렇게 처리한다. 사람들이 이를 잘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오버 플로우 방지 알고리즘이 작동하여 “1”로 바꿔 주기 때문이다.
원주율도 마찬가지다. 3.14…로 무한하게 이어지는 원주율의 계산은 기원전 3세기 아르키메데스가 시작하여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가장 최근의 계산은 2021년 8월 17일 스위스의 슈퍼컴퓨터로 108일 가량 계산한 결과, 62조 8318억5307만1796자리까지 계산했다고 한다. 의도를 가지고 자릿수를 끊어주지 않는다면 원주율이 들어간 공식의 계산은 영원토록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합리성은 무한의 속성을 유한한 것으로 바꾸어 주는 결정과 통한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께서 88세의 나이로 영면하셨다. 방송 중에 “눈을 뜨고 돌아가셨다”는 아들의 인터뷰를 보았다. 매일 어둠속에서 죽음과 팔뚝 씨름을 하신다는 그분의 시처럼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도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 하신 듯하다. 그분에게 붙이는 ‘시대의 지성’이라는 수식어는 당연하다.
한때 유한한 인간이 무한세계에 대하여 갖는 동경과 관심은 죽음 앞에서는 헛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줄기찬 호기심의 삶을 보내신 이어령 선생님을 추앙하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노인이 되어 섬망으로 눈앞에 북망산이 어른거려도, 머리맡의 사자를 노려보며 죽음까지도 학습하려는 호기로운 선생님의 인생은 숭고함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과연 숨을 멈추는 절명의 순간에 무엇을 깨우치셨는지 궁금하다.
이 선생님은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아내와 자식들을 살갑게 대하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실패한 인생이라 낮추기도 하셨다. 아버지와 남편으로는 실패한 삶일 줄 모르겠으나, 죽는 순간까지 무한소수와 같은 미지의 세계를 알아내려는 지성의 여정을 보내셨다는 생각을 해본다. 일반인들은 감히 흉내를 내기도 벅찬, 탐구하는 ‘시대의 지성’이 가진 뇌는 과연 일반인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뇌과학자 ‘질 볼트 테일러(Jill Bolte Taylor)’ 는 2008년 말에 TED 출연하여 놀라운 경험을 말했다. 그녀는 어느 날 뇌출혈로 좌뇌의 시냅스가 차츰 차츰 기능을 정지하는 경험을 실제로 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일은 좌뇌가 정지하자 사물의 경계가 무너져 내리고, 시간의 순서도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는 우뇌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시간도 사라지고 우주와 나를 분리하는 경계도 사라진 순간, 그녀는 무한한 행복감을 누리는 열반의 감성을 느꼈다는 것이다.
테일러의 책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원서명: My Stroke of Insight, 20009)”에는 뇌출혈 당시의 사건과 이후 8년의 회복 경험을 고스란히 설명하고 있다. 그녀는 칼 융(Carl Jung)의 이론처럼 사람의 뇌에는 네가지 마음이 있다고 설명했다. 합리적 지성을 보여주는 페르소나, 경계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쉐도우, 잘될꺼야 하며 동기를 조장하는 에니머스(남성)/에니마(여성), 그리고 경계를 넘나들며 전우주적 교감을 이루는 진정한 나의 네 가지이다.
테일러에 따르면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에 감정을 얹는 기능은 뇌의 변연계가 담당한다. 변연계는 갓난아기 시절에 감각자극에 반응하면서 시냅스가 연결된다. 그렇지만 변연계는 평생동안 성숙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감정 버튼이 눌려지면 반응하는 능력은 성인이 되어서도 두살 때와 같다는 것이다. 몸은 늙어도 감성은 한창 어린시절과 같다’는 의미이다. 감성이란 두살 때에 만들어진 시냅스로 충분한 것일까?
한창 나이에는 유년기의 이런 감정이 어디에 갔는지 사라져 버린다. 청소년기에 우리는 경계, 구조, 순서, 관계와 같은 합리성의 교육으로 세뇌된다. 어린 시절, 감성은 억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시니어가 되면서 감성은 합리성을 뚫고 슬그머니 모습을 들어낸다. 나이가 들면 쉽게 눈물이 나는 이유 같다.
이선생님은 여섯살에 굴렁쇠를 굴리다가 그늘까지 사라진 정오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린아이가 찰나의 정오에 무엇을 느낀 것인가? 여섯 나이에 우주적 교감을 통하여 죽음의 신비를 깨우친 것일까? 노인이 되어 죽음과 맞짱뜨면서, “생애의 절정이 죽음이고, 죽음이 한낮 정오”라고 말씀하시니 이 또한 무슨 말인가?
이 선생님은 핏방울, 땀방울, 눈물방울의 메타포로 삶의 무게를 표현하신 것을 보았다. 추정하건대 핏방울은 이념적 신념가치를, 땀방울은 주도적 삶을 꾸려나가는 노력, 눈물방울은 인간의 공감능력으로 해석해 보았다. 선생님은 “신념은 위험하다”고 말씀하며 핏방울을 경계했다. 그리고 “떼지어 살지 말고, 외롭더라도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한다. 한 순간을 살아도 자기 무늬를 살게”라며 땀방울의 삶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나 말씀의 끝은 눈물방울이었다. “인간을 이해한다는 건 인간이 흘리는 눈물을 이해한다는 거라네!” 나는 아직도 여섯살짜리 아이가 퇴약볕 아래 굴렁쇠를 굴리다가 그림자도 사라진 한낮 정오에 흘린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어령 선생님처럼 죽음과 매일 팔씨름해야 알게 될까? 적어도 타인의 눈물방울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답을 찾을 수는 없으리라. 공감은 합리성의 경계인 죽음을 허무는 힘이며, 생명을 연결하는 열쇠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이메일 서명에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를 붙인다. 돌아가신 이어령 선생님을 추모하며…@
ZDNET 칼럼 전체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