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혼자 서울로 올라갔다. 노모를 집에 혼자 남겨두고 두 사람이 모두 집을 떠나오는 게 그리 마음 편한 일은 아니다. 어머니의 전화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는 것은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다. 아내는 집으로 가고 나는 5구간 목적지인 부산까지 끝내기로 했다. 혼자서 다시 걸으려니 무언가 허전하다. 처믐부터 혼자할 때는 그런 줄 모르겠더니 같이 다니다가 혼자 걸으려니 외롭고 쓸쓸하다. 그래서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지 않던가?
오늘은 날씨가 쌀쌀한데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털 스웨타을 입고 목도리로 완전무장을 했다. 울산시내의 지리를 일려고 거의 한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씨름을 했는데도 자꾸만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 개운삼거리를 지나 개운포성지에 이르렀다. 어디가 성지인지 분간이 안 된다. 울산시 지정기념물 6호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관리상태가 엉망이다. 허물어진 집더미와 뒤엉키고 흙더미에 묻혀서 간판만 요란한 꼴이다. 외황강의 개운교를 지날 때 어찌나 바람이 매섭게 차가운지 턱이 덜덜 떨린다. 장갑을 끼고 싶지만 배낭에서 꺼낼 엄두가 나질 않는다. 200미터를 되어보이는 개운교가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혼이 났다.
'어딘고?' -심재구. 또 시작이다.
'울산을 벗어나 남진 중.'
'술도 못 마시는 이은수 박사 빼고 우리끼리 점심 어때요? 1시경 토기회 사무실 '생태찌게'에서... ' 이건 짐짓 골주회의 다른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넣는 척 하면서 날 약 올리려는 트릭이다.
'이거 나 약 오르라고 하는 거지? 의도적인 거 다 알아.'
'앗. 실수로 거기까지 들어갔네. ㅎㅎ 좌우간 재미가 덜한 코스로 접어든 것 같군. 추운데 점심 따뜻하게 드시게. 근데 29일 용궁에서 하는 '자반공학회 대의원 밥먹기'엔 참석하시려나?'
'그 날이 김수일 교수 정년퇴임기념식이 있어서 거기 가야해.'
울산 시가지를 벗어났나 했더니 공장지대로 이어진다. 가도가도 끝 없는 공장이다. 주위에 주택이나 쉬어갈 만한 상점도 없다. 오직 공장 뿐이다. 심재구의 말 처럼 참 재미없는 코스다. 더구나 수자원공사 온산정수장 앞을 지날 때는 어찌나 냄새가 심하던지 코를 막아야 했다. 그래도 친구들이 심심찮게 연락을 주어서 고맙다.
'오늘 서울 날씨가 꽤나 춥네. 거기는 어때?' -최병은.
'여기도 춥지만 견딜만 해.'
'동행도 없고 날씨마저 추우니 오늘은 일찍 쉬게나.'
'그래야 겠어. 좀 피곤해.'
'오늘도 걷고 있나요? 많이 춥네요?' -백보람
'울산에서 부산 쪽으로 가고 있음.'
'어쨌던 대단하십니다. 건강하게 쉬엄 쉬엄.'
'말 시키지 마. 콧물 나와.'
12시가 되니 시장하다. 한국석유공사 가스전관리사무소 앞의 양지바른 조경석에 걸터앉아 떡을 꺼내 우물우물 씹는다. 따뜻한 물을 마시니 한결 났다. 잠시 후 경비원이 다가오며 누굴 기다리냔다. 웬 늙은이인가 싶은 모양이다. 아니라고, 그냥 쉬는거라고, 여기서 쉬면 안 되느냐고 되물으니 경비원이 오히려 당황하는 기색이다. 어디서부터 오시는 길이냐, 왜 차를 차고 타고다니지 않느냐는 등 상투적인 질문에 나도 늘 하던대로 대답한다. 또 대단하다는 칭찬에 우쭐한다. 사실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면 이 짓도 좀 싱겁지 핞겠나?
1시, 대덕삼거리. 드디어 훼미리마트도 있고 상점도 몇 개 보인다. 옳지. 중국집(금용각)이 있구나. 따끈한 짬뽕 한 그릇을 먹고 따뜻한 실내에 앉아 있으려니 노곤하고 졸음이 온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찍 쉬어야 할까보다. 금용각에서 보온병에 더운 물을 채우고 다시 걷는다. 또 공장지대가 계속된다. 이번엔 온산산업단지다. 참, 울산은 대단한 공장지대구나. 지나는 길에 식당이라곤 보이질 않으니 금용각에서 점심을 먹지 않았더라면 배가 등에 붙을 뻔 했다. 2시 30분, 네 시간 반이나 걸어서 간신히 공장지대를 벗어났다. 31번 국도는 서생교를 지나 서생삼거리에서 산업도로와 갈라지니 조용하고 한적한 해안도로로 바뀐다. 아, 이제 숨통이 좀 트일 것 같다.
4시가 채 못되어 진하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진하해수욕장은 예상보다 훨씬 크고 화려하다. 세상에 이렇게 모텔이 많다니... 도대체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다. 좀더 걸을까 했지만 오늘은 일찍 쉬고 싶다. 소주는 안 되지만 맥주나 한 잔 하고 일찍 쉬자. 최병은이가 일찍 쉬라면 쉬어야지.
※테마모텔/울주군 서생면 진하해수욕장/052-238-8355
오늘 걸은 길 : 울산고속버스터미널-여천오거리-변전소사거리-부곡사거리-개운삼거리-개운포성지(개운교)-온산산업단지-서생교-진하해수욕장. 24.7킬로미터.
첫댓글 이글이 카페에 올라온 시간이 17시 07분 내가 글을 읽은시간이 17시35분. 도대체 오늘은 의무구간 다 걸은겨? 와이프 핑계로 업무태만한겨?
지금 막 끝냈는데 다 읽었다니 신통력이 대단해.
토요일과 일요일 낮에 물따라 구름따라 열심히 살펴 보아도 기행문이 없기에 바쁜일이 생기셔서 아직 시작 못하셨나 했죠! 혹시나 하고 이제 보니 조금 늦게 글을 올리셨습니다. 이곳 대전에는 기온이 많이 떨어져서 추운데 거기도 마찬가지 겠죠? 감기 안 걸리시게 조심 하세요. 요즘 감기가 대단 하더라구요. 근데 좋아 하시는 쏘주 한잔은 왜 못하시는 거죠? 한잔 하시고 주무시면 피로가 확 풀리실텐데!! 혹시 사모님 때문은 아니시겠지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