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자서전과 동양평화론 등 집필 2008/07/07 08:00 김삼웅
안중근은 공판 개시 2개월 전인 1909년 12월 13일부터 옥중 자서전 <안응칠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자신의 떳떳한 일생 행적을 밝히는 저술이었다. 자서전을 탈고한 것은 1910년 3월 15일이다. 3개월 여 동안 차디찬 여순감옥에서 혹심한 신문과 재판을 받은 틈틈이 자서전을 썼다. 이 무렵의 여순은 영하 30도가 오르내리는 혹한의 지역이다. 안중근은 난로 하나 없는 감방에서 역사에 남는 옥중 자서전을 쓴 것이다.
<안응칠역사>는 한문으로 씌였다. 자서전은 "1879년 기묘년 7월 16일, 대한국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나서 성은 안(安)이요, 이름은 중근(重根, 성질이 가볍고 급한 편이기에 지은 이름), 자는 응칠(應七, 배와 가슴에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어 지은 이름이라 했다."라고 시작되었다. 안중근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출생과 성장 과정, 이토를 처단하게 된 이유 등을 진솔하게 적었다.
안중근은 자서전 말미에서 빌렘신부와 작별하게 된 과정까지 적었다.
다음 날 오후 2시 쯤 홍신부가 다시 나에게 와 말했다.
"나는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서 작별하러 왔다."
홍신부와 나는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내 홍신부는 헤어지기 위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인자하신 천주님께서는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너를 거두어 주실 것이니 안심하여라."
그리고 손을 들어 나에게 강복을 해 주고 떠나니, 이 때가 1910년 경술년 2월 초하루 오후 4시 경이었다.
이상이 안중근의 32년간 역사의 줄거리이다.(주석 2)
완성된 원고는 안중근 순국 즉시 일제에 압수되어 한민족은 물론 유족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극비 속에 일제의 한국통치 자료로만 이용되었다. 여순감옥에서 이 원고를 본 일제 고위 관헌들은 그 내용에 크게 감동을 받고 서로 이것을 베껴 가졌다고 한다.
안중근의 순국 60년이 지난 1969년 한국학연구원장 최서면이 도쿄 고서점에서 <안중근자서전>일역본을 발견하였고,(주석 3)) 그 뒤 10년이 지난 1979년 재일교포 김정명 교수가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칠조청미(七條淸美 : 히치죠 기요미)>문서중에서 <안중근전기급 논설(安重根傳記及論說)>이란 표제를 붙인 책자에서 <안응칠역사>의 등사본이 미완의 <동양평화론>등사본과 함께 합철 편책된 것을 발견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주석 4)
그러나 지금까지도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원본의 행방이 오리무중 상태이다. 일본 정부기관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지만 일본은 여전히 함구하고 있다.
<안응칠역사>는 1990년 3월 26일 안중근 순국 80주년에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 국역본을 간행하여 많은 국민에게 안중근의 의거와 사상에 대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자서전' 자체도 "진실한 자기 심정을 표백해 놓은 글이라, 저절로 고상한 문학서가 되고 또 한말의 풍운속에서 활약한 자기 사실을 숨김없이 적어놓은 글이라 바로 그대로 중요한 사료가 되어진 것"(주석 5)이다.
안중근은 <안응칠역사>를 쓰면서 생존 동지들의 신변을 염려하여 세심한 배려를 한 흔적이 역력하다. 함께 의병활동에 이어 이번 의거를 함께한 우덕순이나 단지동맹에 참여한 동지들에 대해 언급을 회피한 것도 '동지들의 신변보호'를 위해서였다.
안의사는 <안응칠역사>서술에서 생존 동지들의 신변을 위하여 가능한 한 관련 인물들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거나 아예 생략한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하얼빈의거 동지인 우덕순에 대해서는 1981년 여름 국내 6진지역 진공 의병활동 대목에서 언급을 피하였고, 1909년 2월 연추 카리에서 행한 단지동맹 부분에서는 그 때 동맹으로 성립한 동의단지회에 대하여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주석 6)
안중근은 옥중 자서전에서 <동양평화론>을 쓰게 된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 후에 간수 쿠라하라씨의 특별 소개로 고등법원장 히라이시(平石)씨를 만나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사형 판결에 대해 불복하는 이유를 대강 설명한 다음에, 동양 대세의 흐름과 평화정책에 관한 의견을 말했다.
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그는 감격스러워 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대를 깊이 동정하지만 정부 기관이 하는 일을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대가 말한 의견을 정부에 상신해 보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고맙게 여겼다.
"그런 공정하고 바른 말이 내 귀에 우뢰처럼 들린다는 것은 일생에 두 번 있기도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당신 앞에서는 목석도 감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요청했다.
"허가할 수 있다면 <동양평화론>이란 책을 한 권 저술하고 싶으니 사형 집행날짜를 한 달 정도만 연기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찌 한 달 뿐이겠습니까?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하도록 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돌아와 공소권을 포기했다. 다시 공소를 한다해도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일이었고, 또 고등법원장의 말이 진담이라면 굳이 더 생각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기 시작했다.(주석 7)
주석
2 - <안응칠역사>, 99~100쪽.
3 - <한국일보>, 1970년 2월 26~3월 21일 연재.
4 - 윤병석, <안중근전기전집>, 34쪽.
5 - <안중근의사자서전>, 서문, 안중근의사숭모회편, 1990.
6 - 윤병석, 앞의 책, 37쪽.
7 - <안응칠역사>, 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