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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론의 장미(IMMA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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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좌 스크랩 53강 이사야서 (2) 우상숭배,교만,사치의 죄악이 만연한 시대
최재구 추천 0 조회 8 11.08.09 08: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사야는 ‘예사야후’, 그 이름 속에 그의 선교의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야훼는 구원이시다.’ 예사야후. 우리가 보통 히브리인들의 이름 중에 끝이 ‘야’짜로 끝나는 이름이 있죠? 이사야, 예레미야, 오바디야. 끝이 야로 끝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시야도 있고, 야라는 말은 야훼를 점미형 처음으로, 단어의 미형으로 올 때는 야후라고 그래요. 엘리야가 아니고, 엘리야후, 이사야가 아니고, 예사야후, 오바댜가 아니고, 오바디야후 인데, 그걸 할아버지들이 힘드니까, 야 까지만 해도 힘드는데, 후까지 하면 더 힘드니까, 그걸 떼버리고, 이사야 하는 거에요. 원래는 예사야후, 예레미야후, 엘리야후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호와는 구원하신다 그런 이름인데.

 

그래서 이 이사야의 예언에 보면, 그 시대가 신실하던 성읍인데, 1장 21절‘신실한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 이사야 시대를 두고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 그러니까 정치하는 사람들은 자유를 무제한 제공하게 되면, 금방 능력과 실력차이 때문에 금방 불평등이 일어납니다. 자유를, 자유시장 경제를 도입하면, 곧바로 나오는 게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금방 나와요. 그때 그 정치인은 능력 있는 자로부터 조금 더 많은 세금을 걷어서 상대적으로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의 부족한 점을 채워서 과부하고 고아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정치가 이걸 해야 돼요. 그리고 이제 악하고 강한 횡포가 난무하지 못하게 치안을 유지하는 거, 이게 정치란 거에요. 국민소득을 다 끌어올려 높여주는 그걸 몇 년동안에 대통령이 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기업인들이 할 일이고, 정치가가 하는 것은 공과 의를 행하고, 그 다음에 재판이 바로 되는가를 감시해가지고, 이 사회에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해야 되요, 그 정치철학을 기본으로 하면 이 사회에서 억울한 일이 없게 만들어야 되요. 그러면 억울하고 비통하고 이런 일이 생기면, 아무도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는 현실적으로 우리가 당한 일은 억울하지만, 그것이 법을 통해서 언젠가는 바로 잡힌다, 사필귀정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 보여야 사람이 선을 행하는 거죠. 그런데 정치가 잘못 되어 버리면, 우리 사회처럼 유전무죄가 되어 버리고, 무전유죄가 되어 버리면, 사람들이 선을 행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명박 장로님이 대통령이 될 모양인데, 그 대통령이 우리에게 전부 국민소득을 다 높여주고, 그런 거 기대하면 안됩니다. 물론 그리되면 좋겠는데, 대통령 한 사람이 힘이란 건 얼마되지 않는 거에요. 그래서 공과 의를 행하고, 권력을 가지고 힘있는 자들의 힘을 낮은 데로 흐르게 해서, 높은 산이 낮아지고, 낮은 곳이 채워지는 이런 걸 이뤄내는 게 진정한 정치라는 거에요. 공과 의를 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보호를 받고, 약자가 보호를 받고, 강자의 횡포가 사라지게 되고, 이런 것이 진정한 정치라는 거에요. 성경이 보이는 정치가 이런 정치에요.

 

유명한 프리메이슨이긴 하지만,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한 말이,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바른 정치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진짜 정치를 할 사람은 진짜 성경을 잘 알아야 해요. 그래서 정치를 한다는 것은 그게 하나님의 한 손이거든요. 하나님의 한 손길이야. 권세는 위로부터 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거죠. 칼빈 같은 분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두 손이 있는데, 하나는 정부고, 하나는 교회라’는 거야. 교회라는 손과 정부라는 손, 두 양손을 가지고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그렇게 주장을 하셨는데, 교회가 당당한 권위로 서 있어서, 정부가 잘못할 때, 바로 바른 말 할 수 있어야 돼. 교회가. 그럼 그걸 정치인들이 받아들일 권위가 있어야 하는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전혀 권위가 없습니다. 왜 권위가 없어졌느냐? 스스로 권위를 포기한 거에요. 그것은 품위가 떨어지면, 권위는 자동 상실입니다.

 

제일 종교 중에 세계에서 제일 품위 없는 종교가 기독교야. 제일 세속적이고, 품위가 없어. 그래서 품위와 권위가 떨어져버리면, 맛을 잃은 소금이야. 한국은. 여러분, 이미 우리 한국은 맛을 잃은 소금이 돼서, 사람들이 길바닥에 놓고 밟아버립니다. 이렇게 품위를 잃어버리게 된 데는, 절대적으로 우리 목회자들에게 책임이 있고, 청년들도 정신을 차려야 돼요. 오늘 교회 청년들은 교회에 와서 아무 것도 하는 게 없고, 딱 한가지 하는 게, CCM. 그 CCM이 뭐냐면 시시한 뮤직이야, 그게 다. 아무 품위도 없고, 천박한 그런 노래를 불러가지고, 그건 복음도 아니고 소음이야. 그래버리니까 사람들이 와서 세상이 시끄러워서 좀 조용한 곳을 찾아 교회로 왔는데, 교회가 세상보다 열배나 더 시끄러우니까. 소위 그래도 진리를 찾고, 경건을 찾고 하던 사람들은 왔다가 가버립니다. 그래서 빨리 청년들도 각성해야 되고, 목회자들도 정신을 차리고 품위를 잃지 않도록 해요. 내용은 없지만 그래도 카톨릭이라던지, 불교는 품위가 있잖아요. 그래도. 뭐 싸움박질할 때는 그렇게 한다고 해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거든요.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너무 품위도 없이 행동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 사회에, 정부에 아무 어필하는 게 없고, 어려운 일이 있거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정치인들이 어떤 교단의 총회장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항상 추기경을 찾아가는 거에요. 숫자도 기독교 절반도 안되는데, 거길 찾아가는 거에요.

 

우리 빨리 개신교가 총회장 하겠다는 그런 생각 버려야 되요. 여기 오신 목사님들 전도사님들요, 노회장이나 총회장하겠다는 그런 생각 버려요. 학교다닐 때, 분단장도 한번 못한 실력가지고, 한이 맺혀가지고, 노회장이 되는 게 큰 벼슬이요, 감투인 줄 아는데, 진작에 그만 두는 게 좋습니다. 저는 시찰장로도 안하고 은퇴하는 유일한 목사가 되려고 끝까지, 아직까지 시찰장로도 안했으니까, 노회장 하는 것은 틀렸죠. 일부러 노회를 한번 가고, 한번 안가고 그러합니다. 그러니까 오는가하면 안오고, 안오는가 하면 오니까, 시키지도 못하고 안시키지도 못하고 지금. 그러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그런 것 하겠다는 그 자체가 한심한 발상이야. 저는 무슨 회장을 했던지 노회장이니까, 성이 노가니까. 저는 신학교 다닐 때, 총학생회장을 했기 때문에 이미 노회장을 했어요. 앞으로 그런 거 다, 그런 것이 사람을 초라하게 추하게 만들어요. 아무 것도 아닌 데, 그걸 하겠다.

 

저는 제일 관심 있는 것이 첫째는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읽어내는 것,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더하지 않고, 빼지않고, 왜곡하지 않고, 비틀지 않고 그대로 전달해서 사람들이 그걸 듣고 하나님 말씀 앞에 인격적으로 응답해서 삶이 거룩한 쪽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는 것. 그런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세상에서 추구할 만한 게 없더라구요. 보니까. 여러분들 아마 젊은 신학도들이 제가 하는 말씀을 잘 새겨듣고, 정말 66권을 완전히 통달한 다음에, 66권을 원만하게 이해한 다음에, 그것을 사람들에게 그대로 첫째 더하지 말 것, 둘째, 빼지 말 것, 비틀지 말 것, 왜곡하지 말고 바르게 빠르게 심어서 그 인격이 하나님의 진리에 감각되어서 거기에 응답되어 삶을 살게 하는, 그리되면 목사가 없어도 상관이 없어야 돼. 목사가 없으면 신앙이 안되면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그건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야. 젖이 덜 떨어진 자. 그래서 저는 우리 성도들에게 3년이상, 4년 이상 젖을 먹으려고 하지 말라. 3, 4년 되면, 그 때는 목사의 설교하고 상관없이, 본인이 본인에게 설교하고, 스스로 양식을 퍼먹고, 성경을 읽어서 자기 양식 자기가 삼아야지, 항상 목사의 설교의 젖이나 빨고 있는 그리 하면 안돼. 젖도 2살, 3살까지나 먹어야지, 이빨이 허예가지고. 그렇게 하면 안되잖아요.

 

저는 성도들을 어린애 취급을 하지 않고, 어린애 노릇도 못하게 해요. 맨날 가서 돌아보고 막 축복해주고, 심방을 가고 달래고 교회에 데려오는 그런 유치한 짓 하지 말라고. 저는 내가 어떻게 성도 집을 다 돌아보느냐. 나보고 심방 오라고 하지 말고, 당신들이 우리 집에 심방 오소. 그리고 상담할 것이 있으면, 교회 왔을 때 얼마든지 열러 있으니까. 그래가지고 성도들의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내가 제일 하기 싫은 게, 목사님은 남자 혼자고, 여자 권사님들이 꽁무니 졸졸 따라다니면서 심방 다니는 거 제일 싫어요. 애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모양이 그렇잖아요. 성도들 집에 가서 맨날 축복해주고 그러는데, 언제까지 그런 신앙 유지할 거에요.

 

스스로. 자기 스스로 일어서게 만들어야 돼. 저의 목표는 모든 성도가 목사가 되는 거야. 성도가 목사가 되게끔. 아무데 보내놔도 교회를 세울 만큼 하는 것. 그래서 우리 교회 성도들은 한 뭐 많이 모이면 150명 정도 모이는데, 한 3년 되고 나면 꽤 여럿이 나갈 겁니다. 예배당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부단히 키워서 교회 없는 마을로 쫓아 보내는 거에요. 지금 한 가정이 금년 4월쯤이나 교회 없는 마을로 가서 시작을 하려고 해요. 그래서 예배당 안에 있는 성도 수를 세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성도들이 주일에 몇 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이것을 세자고. 꼭 예배당 담장 안에 갇혀 있는 그 수를 세서 목회 성공했다고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지금 기독교인들이 대개 일반 학력들이 높아서 실력들이 대단하기 때문에, 조금만 성경 배우면, 다 전도사, 다 목사 할 수 있어. 우리 교회 권사님들 장로님들 중에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가르칠 수 있는 분이 여럿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는 제가 안가르쳐요. 밖에서는 제가 하지만, 교회에서는 제가 설교만 할 뿐이고, 교육은 다 권사님, 장로님들이 합니다. 전도사님들하고 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강의합니다. 한권도 안빼고. 그것도 한번 끝난 게 아니라, 여러분 끝낸 분이 있어요. 6번, 7번 지금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수료시킨 사람들이 여럿입니다. 한 일년씩, 일년반씩 걸려서 끝을 내요.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을 왜 제가 그랬냐하면, 제가 가르칠 수 있고, 제가 조금 더 잘할 수 있지만, 그걸 노목사만 하는 거라면 아무 상품 가치가 없어요. 누구든지 배워서 누구든지 할 수 있어야 가치가 있는 거죠. 내가 안시켜서 그렇지 시키면, 더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 사람 더 있어요. 그 중에 우리 교회에서 여기 제일 많이 참여한 분은 아마 20번쯤 참여한 사람이 몇 사람 있습니다. 이 강좌를 20번쯤. 내가 지금 강의하고 있으면, 그 사람들은 내가 그 다음에 무슨 말할까 내보다 먼저 강의하고 있어요. 앉아서. 그리고 뭐 빼먹으면 뭐 빼먹었다 체크하고 앉았죠. 훤하죠 훤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그래서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적어도 교사들이라고 하면, 교사나 전도사님, 목사라고 하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훤해야 되요. 그거 빨리 다 설교할 수 있어야 돼요. 계시록도 모르면 안됩니다. 계시록도 완전히 알아야 돼.

 

그런 성도들이 있기 때문에, 제가 교회를 한달쯤 비워도 아무 문제 없어요. 여기 있을 때만 그런게 아니라, 전에도 원지 있을 때에도, 교회를 한달쯤 비워도, 성지순례 33박 34일. 그리 갔다 와도 전혀 문제없어요. 제가 우리 교회를 목회하게 되면, 모든 것을 성도들에게 다 맡깁니다. 설교하는 것, 성례식 하는 것, 그것만 제가 주로 하고, 기도하는 것,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고, 성례식 하는 것은 목회자고 나머지는 몽땅 성도들에게 다 맡기는 거야. 그리고 저는 예산, 결산 저는 몰라요.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아예. 100% 다 맡겨버려요. 완전히 다. 그리고 교회가 땅을 사든 지, 집을 사든 지 모릅니다. 장로님들이 상의하러 오면 제가 그래요. ‘아니, 한 나라의 대통령을 할 만한 어른들이 지방재산을 그것까지 목사가 신경 써서 해야 되겠습니까? 알아서 하세요. 알아서. 사기만 안당하면 되니까 알아서 하시라고.’ 그래도 제가 있으면 맨날 사자고 하면 제가 반대하고 하니까, 보통 제가 해외 갔다 나오거나, 어디 갔다 오면, 목사 없을 때 해 버리자, 목사 있으면 반대해서 곤란하다 해서 대개 내가 없을 때, 일이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러니 제가 얼마나 자유 하겠어요. 그러니까 목사님들이 좀 그릇이 있어야 되요. 사람을 믿어주는 신뢰,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일을 못합니다. 사람이 속을 때 속더라도 사람을 믿어야 되요. 그래야 일을 할 수 있어요. 지금 우리 교회는 2년 남짓 되었기에 아직도 개척교회 티를 벗어나지만, 그래도 제가 일절 타치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다 맡겨버렸어요. 잘해요. 목사님들이 너무 붙잡고 발발 떨지 말고, 과감하게 좀 맡기라고.

 

제가 이렇게 집회 나와 있을 때에는 우리 교회 전도사님들이 여럿입니다. 전도사님들이라도 우리 교회 와서, 그분은 우리 교회가 청빙한 전도사가 아니고, 신학을 했지만, 사실은 성경을 너무 모르기 때문에 샤론교회에 가서 전도사라도 일반 성도들의 자리에 앉아서 성경부터 배워가지고 그리고 목회하겠다 해서 온 전도사님들인데, 많을 때는 8명까지 갔어요. 개척교회인데 전도사가 한 8명, 장로님이 한 6명, 권사님이 7명, 8명 이렇게 계시니까, 내가 아무 염려할 게 없죠. 권사님도 설교합니다. 제가 없을 때, 권사님도 설교해요. 장로님도 물론 하죠. 집사님도 물론 설교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스데반 집사 설교하는 것 보세요.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가서 부흥회하는 거 봐요. 그게 성경적이지. 그러니까, 그런 거 못맡겨 가지고, 발발 떨면 안되요. 그런 거 과감하게 다 맡겨요. 설교를 잘하면 교회에 은혜를 끼치는 것이고, 설교를 잘못하면 설교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달을 것이고,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 그런거 염려 안해요. 얼마든지 저는 뭐, 저는 세례도 안받아서 설교했거든요. 세례도 안받았는데, 우리 전도사님이 나보고 강대상에 데려다놓고 뭘 떠들라고 하는데, 나도 아무 것도 모르니까, 무식하면 담대하다고, 뭘 떠들었어. 또 감동을 받았데. 나는 감동을 안줬는데. 제가 또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저도 뭐 이런 거 저런 거 염려하지 않고 과감하게 맡깁니다. 지금은 옛날에 비해서 교회 집사님과 장로님들이 그 학력과 지적 수준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성경만 부지런히 가르치면, 금방 설교할 수 있어요.

 

제가 그걸 어디서 배웠느냐? 이는 신학교에서 배운 게 아니고, 여호와의 증인들한테 가서 배운 거에요. 가서 배운 게 아니고, 가서 보니까, 여호와의 증인들은 세계에 200만 신자가 되는데, 그 신자 이꼴은 다 전도사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전도사에요.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런 거 우리가 배워야 안되겠습니까? 여러분, 이단에도 배울 게 있다니까. 그리고 몰몬교회도 그래요. 몰몬교도 청년들이 우리처럼 교회 예산 타서, 뭐 또 단기선교 가서 붙잡혀서 애먹이고 그리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은 자비량으로 해외 가서, 2년 이상씩을 선교해요. 이게 몰몬교야. 교회 예산 가지고 가는 게 전혀 아니고, 자기 예산가지고, 2년 이상을 선교하는 거에요. 그런 것도 우리가 보면 뒤졌어요. 훨씬 더 뒤떨어지고 있는 거에요. 여호와의 증인들이 훨씬 더 열심이죠. 지금 신천지 무료성경신학원의 사람들은 매일 하루 2시간씩 성경공부해요. 모여서. 음식을 가리고 피가 제일 깨끗한 건 안식교인들이야. 그러니까 좋은 건 전부 이단, 사이비가 하고 있고, 우린 뭐하느냐? CCM. 하는 거 있어요? 하는 거 아무 것도 없고, CCM 그 하나밖에 하는 거 없잖아요. 한심한 얘기죠. 그래서 좀 우리 교회 지도자들이 각성하고, 좋은 것은 우리가 일반 세상 학교 가서 배우지 않습니까? 유익하고 도움이 되고, 가치가 있다 싶으면, 일반 세상학교 가서도 배우는데, 저는 뭐 이단에서고 사이비에서고, 진짜 그들에게서 본받을 점이 있고, 배울 점이 있다면, 그런거 전혀 꺼리지 않고 옳은 건 배워요.

 

자, 이사야가 지적하는 그 당시의 죄악을 놓고 크게 말하면, 한 3가지 죄악이 있는데, 첫째는 우상숭배를 했다는 거에요. 그때 인간들이 그 시대에 우상숭배에 빠졌다. 두번째는 남자들의 교만입니다. 남자들의 교만이 죄가 되요. 세번째, 여자들의 사치가 죄가 된다는 거에요. 죄인들인 주제에 사치하다는 자체가 죄가 된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상숭배, 하나님을 등지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이고, 남자들의 교만들, 그리고 여자들의 사치하는 것들. 이런 것은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지적하는 점이에요. 그리고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반드시 지적하는 죄야. 우리가 뭐 다른 신들이야 섬기지 않을런지 몰라도, 만약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게 있다던지, 하나님보다 더 귀중한 게 있다던지, 하나님보다 더 우선적인 게 있다던지, 그런게 우상이야. 예수님께서는 ‘아비나 어미나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해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그것도 우상이야. 그런 우상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거든요. 지금도. 그리고 뭐 좀 하면, 교만하더던지, 그리고 꽤 사치한 거 같애. 우리 한국 사람들도.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 이런 사치한 거 죄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 종들에게는 사치한 게 해당이 안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고, 그렇게 아끼고 검소하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부요하고, 풍성해야지, 마이너스가 되는 건 뭐냐. 전부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사치하게 써버린 거. 이런 건 전부 마이너스에요. 천국에 가면 그런 거 다 마이너스가 되어 있을 거에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쓴 것은 플러스가 되어 있을 것이고, 자기를 위해서 사치하게 쓴 것은 마이너스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좀 우리가 이사야서안에서 우리가 지킬 윤리들, 그런 교훈들을 새겨들어야겠습니다.

 

2장을 보면, 2장 12절에,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 어떤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까지,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오른 작은 산과 모든 높은 망대와 모든 높은 성벽과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니,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으시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는 날이 올 것이다.’ 인간들이 교만을 떨지 말라 그 말이죠? 그리고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다.’

 

여러분, 땅에 다가 요즘 한국에 건설기술이 발달했다고 해서, 거기다가 뭐 오십층 아파트를 세웠다고 기고만장하고, 바벨탑을 쌓았다고, 그것 또 샀다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양인데, 어느날 한번 흔들면 그 교만 다 무너져 내리는 거에요. 그러니 그런거 조심해야 돼요. 지금 남북극에 있는 빙하가 녹아 흘러서, 지구에 가해지는 압력이 균형이 깨지게 되면, 안정적으로 있다가 균형이 깨지게 되면, 지진이 갑자기 그 빈도와 강도가 높아지면서, 겉잡을 수 없는 세계가 올 수 있다 하는 걸 경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도 생각을 해가면서, 그런 기껏해서 돈 벌어서 온통 집 하나 장만하는데, 거기 세상 집짓는데 거기다 쏟아 버리고, 그런데 어느 날 흔들려버리면, 끝나 버립니다. 거기 가치가 있는 게 아니에요. 자꾸 그렇게 도시 밀도를 높여서 교통 혼잡만 만들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온 천지에 편만하게 균형 발전되어서 땅을 다스려야하는데, 계속 인간들은. 그래서 그런 속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농촌을 만드는데, 마귀는 도시를 만들었다고. 마귀가 만드는데 동참하지 말고. 하나님은 이 푸른 녹색의 세계를 만드는데, 인간들은 회색을 만들었데요. 그게 시멘트 문화라는 거에요. 그래서 생각을 좀 하면서 삶을 설계했으면 좋겠어요.

 

3장에 보면,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의뢰하는 모든 양식과 그 의뢰하는 모든 물과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공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들 그리 하실 것이며, 그가 또 아이들로 그들의 방백을 삼으시며, 빨가벗은 적자들로 그들을 다스리게 하실 것이다.’ 그러니까 전부 이게 다 세상을 뒤집어 엎어버린다는 거에요.

 

3장 13절.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따질 것은 따진다는 거죠.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을 국문하시는데,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 너희 집에 있도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리로다.’ 여러분, 뭐 좀 가졌다고 해서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는 그런 짓 하지 말라는 거에요. 아까 아침에 말씀드린 대로 어떤 교수님이 그 뭐 노력한 것도 아니고, 땅을 한번 샀더니 그게 값이 너무 올라서 그걸 챙피한 줄 알아야지, 그걸 가졌다고 해서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는 그런 짓은 하지 말라는 거에요.

 

15절.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뇨?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여자들도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 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완전히 세상 여자들하고 똑같이.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지환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 주머니와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 여자들은 챙길 것도 많죠? ‘그걸 다 제하시리니,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 할 것이며, 너희 장정은 칼에, 너희 용사는 전란에 망할 것이며, 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시온은 황무하여 땅에 앉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상숭배하고 있는 주제에, 남자나 여자나 교만하고 사치했다는 거에요. 그것 때문에 언젠가 벌할 때에는 여지없이, 나중에 예레미야서에 가면, 예레미야서 가서 예루살렘 멸망한 것 보면, 이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보시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 사회를 볼 때, 너무 사치한 것 같아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런 화장품 같은 것은 전혀 한국 사람을 위해서, 한국 여성들을 염두에 두고 개발됩니다. 한국 사람이 아니면 화장품이 안팔리니까. 외국서는 영화배우나 탤런트가 무슨 카메라 앞에 나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장을 한다, 그런 정도이지, 모든 여자가 다 화장하는 그런 나라는 한국밖에 없어요. 나중에 시장을 가도 화장을 하니까. 화장이 아니고 나중엔 환장을 하는 거에요. 완전히. 분장이죠. 이렇게 하면 안되요. 아마 세계에서 화장품 소비가 제일 심한 나라가 한국일거에요. 저는 남자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저는 화장은 거의 뭐, 세수도 비누 쓸 때도 있고 안쓸 때도 있고 그렇게 하고, 누가 로션을 갖다가 하나 선물을 하면, 쓰다가 쓰다가 못해서 한 10년 쓰다가 썩어서 내버리고, 다 끝까지 써버린 로션 병이 없는 거 같아요. 쓰다말다 놔두고 오래 놔두니까 냄새나서 내 버리고. 그래도 뭐 여러분보다 피부 곱잖아요. 와서 만져봐요. 안믿어지걸랑. 여러분, 화장품이란 게 그게 병 주고 약 주고, 그거 한번 바르기 시작하면 안바르면 못살죠. 저는 영 잘 안바르니까 괜찮아요. 저는 아직 화장품이 안에서 나옵니다. 닦아내면 되요. 이건 나만 한게 아니고 영국에서 어떤 분이 40일간 실험을 해 봤어요. 자기 인체, 생체 실험했는데, 40일간 세수도 안하고 양치질도 안하고 아무 것도 안해봤어요. 안해봤는데 아무 이상이 없는데, 치과에는 문제가 생겼다는 거에요. 그래서 40일간 목욕도 세수도 안했기 때문에, 머리도 안감고, 내가 시내 나가면 전부 나를 보고 얼굴을 찡그릴 것이고, 차에 타면 내 곁에서 냄새가 나서 다 피할 것이라 했는데, 아무도 안피하더랍니다. 그 신문에 인터넷판에 나왔죠. 그런데 치과에는 이상이 생겨서 다녀왔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전부 여러분 피부이론은 화장품 회사가 화장품 팔아먹기 위해서 만든 이론들이야. 나는 그 이론 안믿어든요. 안믿고 나는 내 맘대로 하는데 내가 더 피부가 곱잖아요. 그래 음식이나 가려 잘 먹어봐. 그러면 화장품 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우리 여성들요, 1년에 그 화장품하는, 화장품 사는 데 쓰는 돈만큼도 선교비를 선교헌금을 하지 않는 신앙은 가짜에요. 좀 생각을 해보시라고. 괜히 하나님 작품에다가 자꾸 황칠을 하지 말고, 그 원판 불변의 법칙이 있어서 고쳐봐야 거기서 거기니까.

 

그리고 아침에 한다고 시간 보내고, 그리고 지운다고 또 시간 보내고, 그 시간을 합하면 7년이에요. 그래서 왜 여자들에게 남자보다 7년 더 살게 해주는가 보니까, 그 화장 로스타임이 생겼으니까, 화장하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보냈어. 그래서 한 7년 더 살게 해주는 가봐요. 너무 그런데 신경쓰지 말고, 좀 영혼을 아름답게, 영혼을 좀 더 깨끗하게,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이사야 3장 읽을 때마다, 여성들이 이걸 전혀 안보는 거 같아요. 나 혼자 보는.

 

4장입니다. ‘그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을테니까, 오직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우리로 수치를 면케 하라.’ 남자들이 다 죽어버렸다는 그 말이에요. 그래서 일곱 여자가 한 남자 바지가랑이 매달려서 제발 절 데려다가 과부소리만 안듣게 해 달라. 이렇게 한다는 거에요. 인간들이 교만을 떨고 사치하다가 망하고 나서는 이 모양이 될 것이다.

 

5장입니다. 포도원의 노래라고 해서 유명한 노래죠?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옮겨다가 예루살렘 아름다운 산꼭대기에 심었더니, 좋은 포도를 바랬는데, 들포도를 맺혔다 하고 지적을 하는 거죠.

 

5장 8절 보세요.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할 자가 없을 것이라.’ 그러니까 전부 막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리고, 가옥에 가옥을 연하고, 계속 땅에다가 그렇게 쏟아붓는데, 언젠가는 다 무너져 버리고, 황폐하여 사람이 없을 때가 온다는 그 말이죠.

 

12절 보세요. ‘그들이 연회에는’ 연회는 잔치죠.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자기들 잔치하는데 정신이 없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아무 감각도 없는 사람들이야. 하나님이 뭐하고 있는가도 감각도 못하고, 계속 가옥에 가옥을 연하고, 집에 집을 더 짓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고, 이 땅에 홀로 거하려고. 여러분, 인생이 이 땅의 삶은 얼마나 사는 거 같아요? 금방 일순간이 다 합니다. 땅에다가 너무 그런 거 쏟지말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거를 찾아야 되요.

 

이렇게 세밀히 하기 어렵고요, 6장을 보세요. 6장에 가서 이사야가 소명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가 웃시야의 죽던 해입니다. 웃시야의 죽던 해니까, 735년 740년 그 어간 됩니다. 웃시야 왕은 790년부터 52년간을 치리했으니까, 상당히 장기간. 므낫세가 제일 오래 55년을 통치했고, 두번째 장기가 52년 웃시야 왕이죠. ‘웃시야의 죽던 해인데,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 스랍이 아니고, 세라핌입니다. 세라핌하는 말을 음역하기 힘드니까 스랍 이렇게 한 거에요. 천사죠.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세라핌의 하나가 불젓가락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게 하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런 것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다시 돌아와서 내게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해서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고 여쭈었더니 대답하시되, 어느 때까지냐? 성읍들이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 그 때까지 나라가 완전 폭삭 망할 때까지 은혜의 문은 닫혀진다’는 겁니다. 은혜의 문도 지혜의 문도 다 닫혀서, 마음으로 둔하게 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해 버리면 전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거죠. ‘그 중의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그래도 밤나무나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다.’ 앞을 보세요. 이 때 말하는 밤나무란 것은 북왕국을 말하는 것같고, 상수리나무는 남왕국을 말하는 것같은데, 그 둘 다 벤다. 베. 나중에 보면 721년에 북왕국을 베고, BC 586년에 남왕국 예루살렘을 베어 버립니다. 끝장나버려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끝나버리는 게 아니고, 그 뿌리쪽에서 그루터기가 새움이 돋아나는 것처럼,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다. 거룩한 씨는 예수님을 말하는 거죠.

 

이사야 예언자가 깨달은 하나님의 뜻은 그 이스라엘 나라, 유대 나라를 어떻게 손 봐가지고 어떻게 유지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어요. 아무 희망이 없고, 그 세대 사람들은 다 눈이 감기고, 귀가 막히고, 마음으로 둔하게 되서 깨닫지 못하고, 은혜 받지 못할 것이고 그것으로 끝나는 겁니다. 완전히 황폐한 바 되고, 남한도 베고, 북한도 다 베는데, 베어버려도, 그 뿌리 쪽에서 그루터기가 솟아나는 것처럼, 이 땅에 거룩한 씨야말로 그루터기가 되며, 거기서 다시 무슨 희망이 있지, 예수님 오기 전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거에요. 지금 우리 사회도 제가 볼 때는 예수님이 와가지고, 새로운 세계로 갈 그런 희망이나 있을지 몰라도, 이 땅에서는 무슨 희망을 갖기 어렵습니다. 이 땅에서는 이제 어려워져요. 갈수록.

 

조금 있다가 나올텐데, 여러분이 목이 터져라고 나오는 노래 있죠?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그건 깨끗이 착각이거든요. 그런 날은 절대 오지 않습니다.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는 언제를 두고 하는 말이냐, 그건 하박국이 한 말인데, 하박국은 바벨론이란 악한 나라가 와서 어떻게 의로운 예루살렘을 에워싸는데, 그런 걸 하나님께서 가만 보고 계십니까? 그리고 하박국이 바벨론에 대해서 그런 성토를 했을 때, 너 딱 보면 모르겠냐? 바벨론 그거 교만이 오래 가는 거 아니다. 봐라, 그 마음이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고 교만한데 그게 얼마나 오래 가겠느냐? 하면서 그 바벨론이 무너지는 날, 바벨론 곧 무너질거야, 이 사람아. 지금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까불지만 그 바벨론이 오래 갈 거 아니다. 그 바벨론이 무너지는 날에는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할거야. 그건 BC 539년에 지금으로부터 2,500년전에 이미 이루어져버린 겁니다. 그건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건요.

 

이미 2500년전에 성취되고 끝난 얘기인데, 그게 성경에 있으니까, 앞으로 우리에게 있을런가 싶어가지고, 박종호씨가 또 어지간히 한국교회에 그 노래 가르쳐 가지고. 성도들 보니까, 또 좋거든요. 말이. 어느 시, 어느 때를 지시하는 지 알지도 못하고 그냥 목이 터져라 부릅니다. 제가 분명히 가사를 고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할거요.’ 두고 봅시다. 누구 말이 맞는지. 거의 여러분이 CCM 노래 부르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 엉터리에요. 우리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것을, 성경도 모르고 역사도 모르고, 과거도 현재도 모르고, 가사만 좋으면 끌어붙여서 곡을 붙여서 마구 흔들어요. 자기 보고 한 말도 아닌데 열심히 불러요. 우리 시대보고 한 말도 아닌데 그냥. 그런 것을 놓고 아모스가 ‘헛된 노래를 지절거린다’는 거에요. 또 그걸 틀렸는지, 말았는지 그걸 판단하고 분별해 줄 아무 사람도 없어요. 그러니까 만사를 다 긍정적으로 본다고 하는데, 현기증나요. 그 조엘 오스틴보고 나하고 이야기 좀 해보자고 해요. 뭘 긍정할 수 있는지 한번 해보자고. 아무 때나 오라고 해요. 나는 시간이 있으니까. 지금 하나님이 세운 교회가 갈수록 안되가고 있는데, 뭘 가지고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에요.

 

요즘 한국에는 또 아주사 거리의 웃음 부흥회, 그게 유행이죠? 회개하고 울고 통곡을 하고 거꾸러져도 시원치않은데, 웃음부흥회한다고 하면서, 비인격적으로 웃게 하는 거야. 비인격적으로 웃게 하는 거. 여러분, 교회가 이렇게 썩어가는데, 무슨 성령이 할 일이 없어서 성도들을 깔깔대고 웃게 하겠어요? 그것도 어떤 강사가 와서 멀쩡히 서 있는 집사를 쓰러뜨려가지고, 쓰러져서, 그렇게 그냥 뭐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온 머리를 뒤흔들고 몸을 경련을 하면서 넘어져서 2시간씩이나 비인격적으로 웃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쓰러뜨려놓고, 쓰러뜨린 것도 죄야. 죄. 하나님의 형상을 왜 쓰러뜨려요. 멀쩡한 걸. 하나님의 형상을 쓰러뜨리는 것은 이순신 동상을 쓰러뜨리는 것도 죄가 될텐데, 하나님의 형상을 쓰러뜨려서 비인격적으로 2시간씩이나 웃게 하는데, 무슨 성령이 할 일이 없어서 그런 거 하겠어요? 분별력도 없는 거에요. 이 교회가. 오늘 아침에 누가 그런 동영상을 홈페이지에 올려놓았는데, 어이가 없는 거에요. 그런 걸 배우기 위해서 한국의 목사들이 3000명이나 비행기를 타고 미국을 날라가서. 그 예산이 얼마나 날라 갔겠어요. 불방망이 같은 하나님 말씀이 우리 손에 있는데, 뭘 찾으러 가서 뭘 보러 가겠다는 거에요. 도대체가.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가 소명 받은 내용은 긍정적인 내용이 아닙니다.

 

10절 다시 봐요.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이사야 당시의 백성으로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내게 고침을 받을까 염려다.’ 그래서 은혜의 문이 닫히게 되는데, 이것은 BC 586년 예루살렘 망할 때까지. 이때부터는 희망이, 이 히브리 역사 가운데, 예루살렘 역사 가운데, BC 586년까지는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사야가 절규하죠. ‘내가 가로되, 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 이렇게 닫히느냐?’ ‘그 예루살렘 시민 중의 십분 일이 오히려 남아있을 것인데, 그것까지도 삼킨 바 될 것이다. 밤나무도 상수리나무도 다 벤다’는 거에요. 두렵고 떨리는 말씀을 들은 거에요. 긍정이 아닙니다. 파스칼이라던지, 칼 바르트 같은 분도 무슨 얘길 하느냐? 기독교의 진리는 역설적인 진리가 있다는 거에요. 역설적인 다분히 역설적인 데, 파라독스한 데가 있다. 무슨 말이냐. 자기를 부정하게 되면, 오히려 긍정을 입게 되고, 자기를 긍정, 자기를 긍정하는 게 자긍하는 거에요. 교만한 것과 자긍한 것과. 이 스스로 자긍하는 것. 자기가 잘났다고 긍정하는 그 자체가 잘못됐다는 거에요. 파스칼은 이걸 풀어서 이렇게 합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가 의인이라는 죄인이 있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의인이 있다.’ 그런 말을 써 놓았어요. 예수님께서도 ‘나를 따라오는 자는’ 자기를 긍정하라 합니까?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7장입니다.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에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여기 어려운 얘기인데요, 앞을 정신차리고 잘 보셔야 돼요. 바깥에 비가 촉촉히 오고 하니까, 딱 잠자기 좋죠. 바닥을 따뜻하지, 밖에는 비가 촉촉히 오지, 꼭 졸리기 좋은 때죠. 여기 7장이 좀 어려운 얘기인데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야 되요.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줄 긋고, 아하스 해놓고, 풋노트하고 괄호 열고 정신 나간 아하스. 그리 쓰고 또 괄호 열고 열왕기하서 16장 써놓아요. 열왕기하서 16장 가서 보면 이 아하스가 얼마나 정신 나간 짓을 많이 하는지, ‘아하스 때에 아람 왕 르신하고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가로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을 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어졌더라.’ 만일 우리가 지금 일본이 만약이 이북하고 동맹을 했다, 그리 되면 어찌될까요? 그러면 남한 사람들이 걱정이 되겠죠. 어느날 우리가 일본하고 북한이 외교 수립하겠다고 하는데, 외교 수립정도가 아니라 동맹을 하겠다고 그래봐. 그러면 불안하겠죠. 하는 것처럼 남쪽 유다가 두지파로 이루어진 나라인데, 열지파로 이루어진 북왕국하고, 아람 나라는 항상 큰 나라입니다. 아람이란 나라는 아주 오래된 나라요, 아람 방언은 아람어는 히브리어보다 훨씬 큰 언어야. 그래서 아람어를 능숙하게 하면, 바벨론까지 다 통해요. 그 정도로 아람이 막강한 나라인데, 그 아람하고 북왕국이 동맹을 했다는 거에요. 동맹을 하면 같이 죽고 같이 살자는 거야. 그래 이 두나라가 한번 이제 자기들 동맹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침공을 해서, 물론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지만, 어떻든 결과적으로 두 나라가 한번 예루살렘 공격을 시도했다가 실패했지만, 그 뒤로 오히려 이들은 더 결속을 돈독히 해서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이 동맹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까, ‘들었으므로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같이 흔들렸다.’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는 거에요. 아하스왕과 함께 유다 사람들이 바들 바들 떨게 된거라.

 

그때 3절 보세요.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가 거기 있는데 만나라.’ 그 이사야 보고 이사야 아들하고 함께 가서, 아하스 왕을 길에서 만나서 이르기를, 왕을 보고 하는 말입니다. ‘너는 삼가며, 왕이여 왕은 말이나 행동을 조심하고 삼가하며 종용하라. 침착해.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이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갱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앞을 보세요. 지금 방금 그 이 두 왕이, 아람 왕하고 북왕국의 베가하고 둘이 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거든. 물러가서 동맹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하스왕이 바들바들 떨고, 백성들이 사시나무떨듯이 떠는데,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삼가하고 침착하고 두려워할 것 없어. 그 두 나라 왕이 뭐 심히 노한다고 할지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해.’ 앞을 보세요. 부지깽이. 연기나는 부지깽이. 부지깽이 잘 모르죠? 나이가 40, 50 넘은 사람은 알 것이고, 젊은 사람은 부지깽이를 잘 몰라. 부엌에 불 땔때에 나무를 이리 밀어넣고, 불이 잘 타게 조금 떨쳐주고, 산소가 더 통하게 하는 건데, 이게 부엌에 불 땔때에 쓰는 나무 작대기인데, 점점 타들어가고, 날마다 요만큼씩 타고 하는 건데, 그것은 활활타는 게 아니고, 불은 꺼졌고, 연기만 실실나는 거야. 그것은 태울 만한 불이 아니죠. 연기나는 부지깽이에 불과하니까 그리 두려워할 게 없다 그 말이에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두려워하지말고, 침착하고 종용해라. 그 두 나라 해봤자, 연기나는 부지깽이에 불과하다.

 

아람과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곤하게 하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파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을 삼자 하였으나,’ 그 사람들은 그런 소리하지만,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는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한다.’ 그들이 암만 떠들어도 그대로 되는 게 아니야. ‘대저 아람의 머리는 해봤자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 해봤자,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야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지만, 65년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그러니까 북왕국이나 아람이나 65년내에 끝날 나라야. 그런 것까지 다 알려주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떨지 말고, 그 좀 조용히 하고, 좀 침착하라.’ 사실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이에요? 그쵸? 그런데 이 아하스라는 사람이 이게 정신이 없어요. 이게 누구냐면 히스기야의 아버지야. 히스기야의 아버지란 사람이 이 모양이라.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해봐.’ 깊은 데 뭐 바다가 갈라지게 해보라 한다던지, 누구처럼 태양을 멈추게 해봐, 안 믿어지거든. 믿을 만한 그런 징조를 보여줄 수 있으니까 해보라 하니까, 아하스가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그럼 믿든지 말이야. 믿도 안하고, 징조도 구하지 아니하고, 그러면서도 버들버들 떨고, 이런 참 속썩이는 사람이야. 그래서 이사야가 가로되,‘아이고 참 이 다윗의 집이여.’ 다윗의 집은 아하스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너 지금 징조를 구해보라니까, 아니 징조를 구해가지고라도,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거에요. 원래는 그런 징조 없이 그저 말씀으로 할 때 믿는 게 제일 좋은 믿음인데, 그래도 안믿어지겠거든, 징조를 구해서라도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데,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믿는 것도 없으면서 부들부들 떨고 있으니까 속이 상하는 거죠.

 

그래서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너 징조를 안 구한다고 하니까, 네가 구하든 안구하든 간에 주께서 친히 징조를 줄테니 잘 봐. 그러면서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거야. 그런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어. 이것아.’

 

이걸 갖다가 예수님 탄생의 예언이라고 해석한 게 마태가 그리한 건데, 그건 실수입니다. 사실은요. 또 목에 뭐 아침부터 걸린 거죠? 잘봐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 나중에 얘기하고, 지금 현재 이 무슨 얘기인지 들어보라고. 이게 예수님 탄생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지금 현재 아하스 앞에서 ‘네가 지금 징조를 구해보라’고 하는데, 안구한다는 거에요. 믿음도 없으면서도. ‘네가 안구한다고 하니까, 네가 안 구해도 주께서 친히 징조를 보여 줄꺼야.’ 징조는 어떤 거냐. ‘봐라.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처녀가 잉태하여.’

 

처녀라고 되어 있는데, 처녀가 아닙니다. 히브리어 원어 보면, 이걸 처녀로 만들었어. 이게 오역이야. 처녀가 아니고, 처녀라고 하면 ‘베툴라’라고 히브리어로 ‘베툴라’라고 해야 하는데, 이건 ‘알마’입니다. ‘알마’는 젊은 부인이야, 젊은 여자. 그냥 젊은 여자가, 한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거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라. 왜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냐면, 그 뜻은 뭐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고 지어라. 그러니까 지금 아하스 왕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어요. 왜 떠는 거죠? 아람 왕하고 북왕국 이스라엘 베가하고 동맹을 맺었다고 하니까, 떨고 있죠.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떨지 않아도 될 근거가 뭐냐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떨지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동맹해 봤자, 연기나는 부지깽이 끄트머리에 불과해. 65년 되면 망할 거야. 안믿어지거든 징조를 구해 봐. 하니까 징조를 안구한다고 그래. 그러니 네가 안구해도 하나님이 징조를 친히 보여줄테니, 그게 뭐냐, 지금 알마가 젊은 여자가 아들 하나 낳을 거야. 알간? 그 아들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을 거야. 왜냐? 네가 부들부들 떠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고 이름을 지을거야.

 

그 다음 봐요. ‘그가’ 그 임마누엘이라는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여러분, 악을 버리고 선을 선택할 즈음 되면, 몇 살쯤 되겠어요? 대개 10살에서 12살. 13살. 그 정도 되면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압니다. 근데 히브리인들은 만 12살, 13살되면 성년식을 해요. 그 때는 선악을 분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래서 10년내지 12년정도 이 정도 임마누엘 나이가 그 때쯤 될 때에, ‘그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선택할 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 바 되리라.’

 

이해가 됩니까? 그 미워하는 두 왕이 누구야? 아람왕하고 북왕국의 베가왕이죠. 그 베가의 땅이 버린 바 된다. 그래서 임마누엘의 나이가 몇살이라고 딱 말하지 않고, 선을 선택하고 악을 버릴 나이가 되기 전에, 젖 떨어져서 버터와 꿀을 먹을 만할 때, 벌써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은 폐한 바 될테니까,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니까, 이 때 이 이야기는 전혀 예수님 탄생을 예언한 예언은 아닙니다. 이해가 된다는 거에요? 안된다는 거에요? 된다는 것도 아니고, 안된다는 것도 아니고? 근데 마태가 무례한 인용을 한 거야. 이건 전혀 메시야 탄생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아하스왕이 너무 너무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으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소리거든요. 그게. 그게 처녀도 아니고 베툴라가 아니고 알마야. 젊은 여자가. 어떤 사람은 이 젊은 여자가 바로 이사야의 아내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말하는 분도 있는데, 저는 그건 확신이 없어요. 이사야 아내 같진 않고, 어떤 여자인데, 아니면 아하스왕의 아내던지, 어떤 여자가 그 아하스 왕이 잘 알만한 여자여야 되겠죠? 그 여자가 지금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건데, 그 아이가 젖떨어져서 뻐터도 먹고, 꿀을 먹고 할 수 있을 때, 선과 악을 분별할 만한 고 정도 되었을 때,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이 버린 바 될테니까, 부들부들 떨지 말라고 하는 얘기에요. 그 얘기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기 무슨 메시야 잉태한다는 걸 전혀 한 게 아닌데, 마태부터 시작해서 전체가 이걸 갖다가 메시야 탄생 예언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예언이 아니었어요. 마태가 무리하게.

 

근데 곧 이런 일이 있습니다. 마태가 인용하려면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정확하게 하면, 옛날 아하스 왕 때에 사람들이 그 아람왕하고 이스라엘을 두려워해서 세상 끝나는 줄 알고 했지만, 그때도 한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 아이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은 것처럼, 오늘도 지금 로마가 우리를 잡아 삼키고, 헤롯이 왕권을 잡고 있지만, 나라 끝난 건 아니고, 지금 다시 처녀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게 징표가 되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되었다. 그걸 유비로 하면 말은 될 수 있어. 예언은 아닙니다. 그 사건하고 이 사건은 유비, 일종의 아날로기가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이 무슨 예언한 것이고, 그것이 성취된 것이 전혀 아니라는 거에요. 그런데 마태는 마치 이것이 예언이었다가 성취된 것처럼 인용을 했는데, 그건 마태가 잘못한 거에요. 성경학자들은 그걸 다 마태가 무리한 인용을 했다고 다 알고 있는데, 그것을 차마 목회자들이 설교를 못해서 그냥 있는 거에요. 그냥 마태처럼 하고 넘어갑니다. 괜히 평지 풍파 일으킬 이유가 없다하면서, 넘어가는 거에요. 그래도 우리가 알 것은 또 바로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이런 걸 지금 성경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런 걸, 특히 안티 크리스챤들이 이걸 딱 빼서 기독교 엉터리하고 있다고 되게 떠드는데, 우리만 모르고 있다. 전부다. 그걸 알았을 때,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고, 우리도 다 알고 있어. 나도 안다, 내 딸아, 나도 안다. 그렇게 넘어가야, 예방주사를 맞아놔야지, 모르고 있다가 아 진짜 그렇네 하면요. 크게 당하는 거야. 저는 이런 거, 성도들에게 일찍 가르쳐 놓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와서 뚱딴지 같은 시비해도 우리도 다 알고 있는 얘기네 하고 넘어가려고요.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비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의 오는 날이라.’ 그러니까 언제 결국 이 아람과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냐면, 앗수르가 와서 이 두 나라를 잡아갈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 없다. 그런 얘기거든요.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을 것이라. 그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편에서, 유브라데스 하수 저편에서, 세를 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털과 발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깍아버릴 것이다. 그날에 사람이 한 어린 염소와 두 양을 기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앗수르 왕이 한번 휩쓸고 지나갔을 때는 그야말로 끝장이 날 것을 말합니다.

 

아까 중요한 것은 이사야 7장 14절에 그 처녀라는 데 줄긋고, 처녀는 ‘베툴라’이고요, 그냥 젊은 여자는 ‘알마’인데, 히브리어로, 여기는 알마로 되어 있어요. 조금 빨리 가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성경을 차근차근 읽고 설명하고 하는데, 제가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은 전부 이렇게 해요. 한자 한자, 한단어, 한단어, 한절 한절, 짚어 정리하면서, 번역 잘못된 것 전부다 챙겨서, 이 단어는 이렇게 번역해야 맞습니다 하는 것도. 거의 저는 이번주일에 뭘 설교할 것인가, 다음 주일에 뭘 설교할 것인가, 그런 거 염려하는 시간에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도 찾아서 단어도 챙기고, 번역이 잘되었는가 번역비평도 해가지고, 이 내용은 이렇게 읽어야 바르게 읽는 것이다. 그렇게 해가지고 성도들이 다 알아들으니까, 뭐 설교 그 준비한다고 뭐, 오랜 시간 끌고 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단어, 애매한 단어, 번역이 애매한 단어 이거 빨리 빨리 찾아서 정리해요. 그래서 저 생각에는 지금이라도 번역을, 정말 정확하게 하는 번역을 한번 더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너무 어려운 말 빼고. 용어도 바꿀 게 많아요.

 

아까 그 스랍. 그러면 안되고 세라핌. 그룹 그러면 안되고, 케루빔. 히브리어로 음역을 하려면 정확하게 해야지, 어줍지 않게 영어하고, 엇비슷하게. 여러분, 영어로 그 음역을 한 것을 보면, 형편없는 것이거든요. 영어 문자가 워낙 발달이 안되었기 때문에, 영어 기호라던지, 영어 발음 자체가 영 문자화 잘 안되는 게 많아요. 케루빔 이런 거 할 수 있는데 잘못되서 그룹하는 것이고, 예수쓰인데, 지저스가 나오면 그건 엉터리죠. 뭘 지지지긴 지져요. 그게 히브리어로는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인데, 이것을 헬라어로 할 때, 여호수아가 안되어서 예수쓰로 했어요. 예수쓰 했는데, 예수쓰 하는 건 힘드니까, 예수쓰의 쓰는 빼버리고 예수하는 거에요. 한국 사람들은 이름을 석자로 하는 거 힘드니까, 예수 해버려요. 이런 음역을 한 것을 보면, 한국 사람들은 모음이 발달하고, 자음이 발달했기 때문에, 무슨 글자든지, 무슨 발음이든지 깨끗하게 음역할 수 있습니다. 세계 어떤 언어라도 다 표기할 수 있어요. 괜히 영어 흉내내다가 발음을 버려놓게 많은 거에요. 저는 그걸 지금 번역하기 때문에 전부 바꿔야 되요. 케루빔. 세라핌 이렇게 바꾸고, 구부로 하지 말고, 키프로스 이렇게 해야 되겠고, 바사 하지 말고, 페르시야. 그래야 세계사람들이 함꼐 공용어처럼 될 거 아니에요.

 

특히 숫자. 숫자를 갖다가 아라비아 숫자로 안쓰고 한글 글자를 떡 써놓았어.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명이라고 한글로 써놓은 거야. 그거 아라비아 숫자로 고치면 얼마나 읽기 쉽겠어요. 근데 그걸 갖다가 한글 글자로 된 걸 아라비아 숫자로 고치면 지옥가는 줄 알고 아무도 손을 못대. 특히 이 고신측하고 합동측 보수교단 목사님들은 그거 고치면 당장 지옥가는 줄 알고, 겁이 나서 발발 떨고, 번역할 때마다 속을 썩여요. 애 먹이고. 연세 많은 사람들은 구제불능이니 놔두고, 앞으로 젊은 사람들이 할 때는 빨리 빨리 양보를 해. 그 고신 고집부릴 고 짜야. 고집부릴 것도 아닌 걸 가지고 고집 부려가지고. 옛날에는 성경을 내려쓰기 했잖아요? 내려쓰기할 때 아라비아 숫자는 곤란해. 옆으로 쓸 수도 없고, 그러니까 한글로 했는데, 이제는 글 읽기가 가독력이 내려쓰는 것 보다는 옆으로 쓰는 게 옳다고 본 거라. 왜냐하면 눈이 옆으로 붙었으니까. 그래서 가로쓰기를 해야 읽기가 수월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가로쓰기를 한다면, 다시 한글로 할 필요가 없고, 이제는 아라비아 숫자로 써도 충분히 되거든요. 그런데 기어이 한글 숫자로 쓰는 건 참말로 속이 상해. 그 고집부릴 걸 부려야지.

 

인명들도, 지명들도 빨리 빨리 좀 국제 감각을 가지고, 누구든지 읽으면 이해할 수 있도록. 발음 들으면 뭐 어디를 말하는지 알수 있도록 바꿔야 되요. 저는 나이가 많으니까, 잘 안되는데, 용기를 못내는데, 젊은 사람들이 빨리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듣고 번역 문제, 또 그런 것 좀 지적하면 젊은 신학도들이 진작부터 준비해가지고, 정말 좋은 번역, 원어에도 충실하고, 용어들이 다 인명, 지명, 고유명사가 국제감각에 맞게, 그런 발음을 어디가서 들어도 어딘지 말하는 건지 서로 통할 수 있는 그런 지명으로 합리화해야 돼요. 그런 면에서 저는 지금도 한국에 태어난 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고맙게 생각해요. 제일 흔한 이름이 요한. 요한이라던지 이런 말은 서양 세계에서 참 많이 씁니다. 요한이라던지 이런 이름들을. 베드로라는 말은 원래 페트로스죠. 페트로스라는 그 이름도 저쪽에서는 많이 써요. 그래서 다른 나라 가보면, 발음이 참 기가 막힌 거에요. 요한을 갖다가 우리는 요한. 오케이. 요한 할 수 있죠. 원래는 여호하난이거든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요한의 이름이 여호하난. 여호하난을 빨리 하니까, 요한이 된거야. 헬라어로는 요하난. 요하난 하다가 요하네스라고 했거든요. 헬라어로는. 영어에나 헬라어에 보면 끄트머리에 스로 끝나는 게 많아. 여호수아인데, 예수쓰는 뭐에요. 여호하난인데, 요하네스라고 스짜를 갖다 놓아요. 그 사람들은 스를 끄트머리에 갖다 붙이는 게 습관이 되어 있어요. 요하네스 했는데, 영어에 가면 존이 되어 버려요. 희안한 거에요. 어떻게 존이 됩니까? 여호하난에서 존이 된거에요. 덴마크라던지 북구라파에 가면 얀이 되요. 요한을 빨리하면 얀이 되는 거죠. 요한, 요한슨 하면, 요한슨은 요한의 아들이란 말이에요. 요한슨할 때, 얀센. 얀센이란 말이 요한슨에서 온 거야. 얀이 또 프랑스 가면 짱이 되고요. 짱 깔뱅. 우리가 존 칼빈하는 게 짱 깔뱅이야. 더 웃기는 것도 있어요. 저 러시아 가면요, 이 요한이 이반이 되어 버려요. 등신아, 이반이 아니고, 요한. 이반인지, 삼반인지. 그렇게 발음이 다 엉터리야. 우리는 여호하난, 요하난, 다 할 수 있잖아요. 이반, 삼반 다 할 수 있어요. 얀, 짱, 다 할 수 있잖아. 뭐든지. 물론 존도 할 수 있고.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은 음역을 잘 가다듬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히브리 원어에 딱 가깝게 할 수도 있고. 그래서 번역을 할 때, 인명, 지명, 용어순화 위원회, 특별 위원회를 만들어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나오는 모든 이름들을 전부다 순환시키는, 음역을 개선하는 걸 그런 것들을 빨리 해야 돼.

 

제가 나이가 한 10년만 젊으면, 그런 것을 좀 공부해서, 한 10년 해서 성경 번역 한번 내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성경을 공부한 학자들의 최고 소원은 사역을 한번 해보는 거야. 성경을 완전히 한번, 히브리어, 헬라어에서 우리말로 한번 개인적 번역을 해보는 것. 그래서 루터역. 대작 아닙니까? 벌게이트라고 하는, 불가타역이라고 하는 제롬같은 학자가 번역하는, 대 학자 아닙니까? 물론 해석은 엉터리로 했지만. 그런 학자들의 최고의 소원과 목적이란 것은 성경을 원어에서 자기 말로 번역을 해보는 건데, 저같은 사람이 어두운 눈으로 봐도, 번역이 좀 원만하지 않은 데가 상당히 많이 보이거든요. 아까 그 젊은 여자를 갖다가 처녀로 해가지고, 처녀로 하니까 동정녀가 되어서 속을 썩이는 거에요. 그런데 알마. 젊은 여자인데. 자 조금더 빨리 갑시다.

 

이 이사야서의 내용을 좀 정리하면, 그 이사야 예언자의 소명과 어떤 선포 같은 게 앞에 나오고, 그 다음에 이사야는 그 주요 사상 속의 하나가, 지금 이 시대는 기대할 게 없고, 메시야가 와야 문제가 해결 된다. 하여튼 메시야만 기대하는 그런 입장이죠.

그 다음에 열방. 방금 우리가 8장, 9장에 보면, 메시야가 온다는 그런 얘기를 하고요, 10장에는 이 앗수르가 좀 까불고 있는데, 이거 한번 혼이 나야되겠다는 하는 얘길을 합니다. 11장을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아까 그루터기 이야기했죠. 이 그루터기가 어떻게 나오느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난다는 거에요. 싹이. 싹이라는 것은요, 호테르. 히브리어로 호테르라고 하는데, 맨 처음에 뾰족이 내밀 때가 싹이에요. 싹에서 조금더 자라면 그게 움이 되요. 움이 더 자라면 순이 됩니다. 순이란 것은 풀처럼 야들야들 할 때 순이고, 그것이 굳어지면 가지가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말이 훨씬 발달되었죠. 처음에는 뭐랴고요. 싹이 보인다. 싹이 좀더 돋우면 움이 되고, 움이 뭐되고? 순이 되고, 순이 굳어지면 가지가 되고. 그러니까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서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거기에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 이게 성령이야.

 

여러분, 성령이 뭐 넘어지게 하고, 금이빨의 신이요, 그런 게 아닙니다. 성령이 무슨 깔깔대고 2시간씩이나 웃게 하고, 이런 신이 아니야.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공과 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사으이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이건 에수님 오실 때 종말 때에 일어날 일인데, 이 안에는 예수님이 하시던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 있어요. 그래서 12장에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구원이시다 하는 고백이 나오게 될 것이다 해놓고, 13장부터는 열방에 대한 예언이 나와요. 첫째는 바벨론에게. 13장, 14장이 다 바벨론이죠. 15장에는 모압에 대한 예언이고요. 모압도 왜 망하느냐? 보나마다 뻔합니다. 교만하면 망하는 거야. 우상 숭배하고 교만하고 악하면 망합니다. 그러니까 그 멸망하는 죄라는 게 첫째는 우상숭배, 둘째는 교만, 세번째는 도덕적으로 악하다. 그러면 망해요.

 

16장 6절 보세요. ‘우리가 모압의’ 뭘 들었어요? 교만을 들었어요.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의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 과장이 헛되도다.’ 교만하고 거만하고 오만하고, 그러면 망하는 거에요.

17장다메섹. 18장구스 강 건너편. 19장애굽. 20장까지도 다 애굽 이야기고요, 21장에는 바벨론. 21장 11절 이하는 두마, 에돔에 대한 이야기이고. 22장은 다시 이상 골짜기, 예루살렘 쪽으로 다시 날아옵니다.

그리고 23장에는 두로에 대한 예언이에요. 두로가 옛날에는 굉장히 부자였어요. 두로가 얼마나 부하였는지, 그 부귀 영화가 극에 달해서, 지중해 무역의 중심이 되면서, 돈이 막 넘쳐나서, 그들이 교만하고 사치합니다. 그 두로와 시돈이 얼마나 돈이 많아가지고, 교만하고 사치했는데, 그거 때문에. 여러분, 두로 같은 데가 망하는 이유가 단지 교만하고 사치했던 것 때문에 망해. 그래서 훗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라던지, 고라신, 벳새다 같은 데서 기적을 많이 행하셨는데, 회개하지 않았을 때, 그런 말씀 한 적이 있어요. ‘너희에게서 행한 이적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으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두로와 시돈 같은 곳이 그렇게 악한 게 아니고, 단지 돈이 너무 많았다는 거에요. 돈이 너무 많아서 교만하고 그것 때문에 그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어요. 그래서 부자가 된다는 건 실로 두려운 일이죠. 예수님 말씀대로면, 부자가 천국들어가기 어렵다는 거에요. 얼마나 어려우냐.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는 거에요. 그야말로 안된다는 말인데, 안된다는 말 안하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어려우냐 이렇게 한 거에요. 지난 2, 3년전에는 새해인사를 새해에는 부자되세요 그랬죠. 아, 새해에는 지옥가세요. 그러면서 서로. 성경을 안보고, 긍정적으로 인사하느라고, 부자되세요. 그러는 거에요. 그만큼 우리가 물질주의에 빠졌다는 거에요.

 

24장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다. 24, 25, 26, 27장까지가 이사야의 종말론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종말론. 이사야의 종말론도 대단합니다. 거기 한번 보세요. 24장 끝에 한번 봐요. 24장 끄트머리에 보면, 19절. ‘땅이 깨어지고 깨어지며, 땅이 갈라지고,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땅이 취한 자같이 비틀비틀하며, 침망같이 흔들리며.’ 여러분, 침망 아세요? 나무 사이에 나무하고 나무사이, 그물 같은 거 걸어놨죠. 침망. 거기 가서 사람이 누워있으면 흔들 흔들 잠 잘 오겠죠. 나무 그늘에 바람도 설렁설렁하고. 그런데 땅이 침망처럼 흔들려 그냥. ‘침망처럼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지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같이 모음을 입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라.’ 음부에 가서 있다가 ‘그때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27장에 보면, ‘그날에’ 그 심판하는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마지막에 잡힐 용이 잡힐 것까지 이사야 종말론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7장 1절은 사실 26장 끝에 올라가 있어야 되고, 27장은 2절부터 27장 1절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장구분이 매끄럽지 못하죠. 28장에는 앗수르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그리고 29장에는 예루살렘. ‘아리엘이여, 슬프다 아리엘이여’ 하는 데, 이 아리엘하는 것이 예루살렘을 별칭으로 부르는 겁니다. 에루살렘의 별명을 아리엘이라고.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은 강한 자라는 뜻인데, 에루살렘을 향해서 다시 하시는 말씀이죠. 30장에는 이 백성들이 자꾸만 애굽을 의지하려고 하고, 아니면 앗수르에 기대하려고 해요. 오늘도 한국 사람들이 괜히 뭐 미국에 피하면, 미국하고 동맹을 맺으면 무슨 덕이 있을란가. 여러분, 우리가 정말 미국은 불가근, 불가원이라. 그렇다고 우리가 미국을 배척할 수도 없고, 또 미국을 따라가도 되는 것도 아니고, 굉장히 어럽습니다. 미국이 절대 간단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반미 운동도 해봐야 덕이 하나도 안되요. 반미운동하면 괜히 우리 상품만 안팔린다고. 알긴 알아야 돼요.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31장에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가 화가 있다. 그러니까 꼭 그저 애굽으로 가지 말라 그러면 앗수르로 가고, 아니야 하면 또 애굽으로 가고. 계속해서 앗수르로 가고, 애굽으로 가고 이렇게 하는데, 그걸 경고합니다. 32장에는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다. 가깝게는 그래도 요시야든지, 아니면 뭐 히스기야 이후에는 요시야 외에는 인물같은 인물이 안나오니까, 요시야요. 가까이 볼 때는. 멀리 보면 예수님을 말하는 거에요.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말합니다.

 

33장에는 주께서 반드시 일어나신다. 그때 주께서 일어나셔서 심판하실 때 어떤 사람이 마지막으로 설 수 있느냐? 잘 보세요. 33장 15절. 이런 건 진짜 요절이야.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노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 보장이 되며, 그 양식은 공급되고 그 물은 끊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이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살아갈 때, 깨끗하게 살아야 돼.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이렇게 악에서 멀어져서 깨끗하게 살아야 돼요. 우리 산청 사람들의 자랑이 있다면, 아직 산청 출신 정치인들이 꽤 많거든요. 이 조그만 산청군에서 당 대표가 세 사람이나 나왔어요. 옛날에 최병렬, 서울 시장했던 사람이 여기 산청 사람입니다. 그 참 꽤 잘나가던 무슨 당이지요? 당하도 이름 바꾸니까 나도 기억을 못해요. 지금 한나라당 전신인데, 그때 이회장씨하고 당대표로 대선후보까지 나왔던 사람이 최병렬씨야. 사람이 신사입니다. 그 정치판에 나왔던 사람치고, 그 정도 신사가 잘 없어요. 최병렬씨가 여기 사람이고요, 그 다음에 권익현씨가 여기 사람이죠. 권익현씨가 다 전두환, 노태후, 정호용이 그 함께 하나회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은 한번도 스켄들에 나온 적이 없고, 오공청문회때도 안불려 나왔습니다. 사람이 깨끗하니까. 그리고 권영길씨가, 민노당 대표가 여기 사람이에요. 그 외에도 여기 사람들 있는데, 한번도 그 지저분한 돈 받아서 정치스켄들에 오르는 그런게 없습니다. 여기 산청이란 게, 산청, 수청, 인청. 산이 맑고 물이 맑고 사람이 맑다. 맑은 사람을 만들어낸다. 그게 산청 사람이에요. 칼칼하고 투명하고, 그런 산청 사람이다 해서, 산청 사람들은 그런 긍지가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 또 어떤 사람 나올지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그래요.

 

그래서 항상‘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마지막 심판 때에 가면 그런 사람이라야, 하나님 앞에 선다는 거에요. 앞을 보세요. 루터가 위대한 인물이긴 하지만, 우리 기독교의 신앙을 이상하게 만들었어요. 오직 믿음이라고. 제가 성경을 뭐 한 200번 가까이 봤는데, 오직 믿음이란 말이 없습니다. 그 믿음이란 말이 피스티오, 피스티스라는 말인데, 믿음이란 말도 되고, 신실함으로 라는 말도 되고, 충성됨으로 라는 말도 돼. 그게. 믿음으로만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만약에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는 말을 갖다가 오직 충성됨으로서만 구원받는다고 하면 전혀 달라져 버립니다. 믿음으로 하니까, 그냥 예수 믿는다고 말만 하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러고. 믿~쑵니다! 그러고. 교회만 다니고 그러면 구원을 받는 것처럼, 행동을 개차반하면서. 그렇게 번역을 하지 않고, 만약에 신실함으로, 그 충성됨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오늘 교인들 다 떨어집니다. 다 떨어져 버려요. 그 믿음이 어쨌다는 거에요. 도대체가. 신실하지도 않고, 충성되지도 않으면 그 믿음이 무슨 가치가 있느냐고. 그 피스티오, 피스티스하는 말이 신실하다, 충성되다 하는 말로도 번역이 되요. 그런데 믿음이란 말보다 훨씬 더 가까운 말이 충성됨이고, 충성된 게,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이렇게 하면 믿음으로가 아니고, 충성됨으로야. 신실함으로. 그래서 우리 기독교가 그냥 믿음으로 믿음으로 하는데, 그 믿음이 무슨 말이냐하면 대답을 잘 못해요. 충성됨으로. 신실함으로. 그래서 성경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무슨 주의에 기울어져 그리 보면 안되고, 원만하게 제대로 봐야 되요. 이런 걸 안봤기 때문에 믿음이란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몰라. 나중에 그 믿음으로 믿음으로 하는 말이 너무 타락을 해서 이상해 지니까, 야고보 때에 행함이 없는 믿음, 신실한 충성된 실천이, 사랑의 실천이 없는 믿음은 믿음 자체가 헛 거다. 죽은 것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아무런 열매도 없이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 것은 거짓 믿음에 불과하니까, 사도 바울도 디모데를 부를 때, ‘네 속에 있는 거짓없는 믿음을 보고 싶어 함이라.’ 이리 말해요. 그래서 피스티오, 피스티스라는 말이 그냥 믿음이란 말도 되지만, 충성됨으로 신실함으로 하면 어감이 한참 달라집니다. 충성되지도 못하고 신실하지도 못하면 교회 다녀도 구원 받는 보장이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반드시 믿음으로 할 때, 신실함도 따라와야 되고, 당연히 충성된 것도 따라와야 그게 진짜 믿음이에요. 그런 사람에게 영광스런 내일이 있다는 얘기죠.

 

34장에돔 사람들을 위한 겁니다. 나중에 에돔 사람들 오바댜서 할 때 보시길 하고요, 34장에는 에돔은 반드시 망한다고 하고, 반면에 그 에돔 사람들이 항상 그저 괴롭혀서, 늘 괴롭힘을 당하기만 하던 택한 백성 유대 예루살렘, 이스라엘 사람들은 회복되는 날이 온다는 하는 얘기를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36장부터 39장까지는 히스기야 왕의 공과. 공로와 그런 어떤 실수. 실행. 잘못한 것 이런 것들도 보여줍니다. 과오를. 공로와 공과를 다 함께 보여주는 거죠. 36장부터 39장까지. 히스기야 왕이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 다음에 40장부터 66장까지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준비를 하라. 이미 바벨론 포로에 가 있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돌아올 준비를 해야 한다. 왜 돌아오게 되느냐. 어떻게 돌아오게 되느냐. 돌아오려면 어떻게 되느냐? 돌아와서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얘길 주욱 쓰는데, 이 부분을 보통 성경학자들이 제2이사야서라는 말을 해요. 또 이 보수교단 목사님들은 그 제2이사야 말만 들어도 질겁을 하죠. 이거 무슨 신신학 자유주의요 하면서 하는데, 내용을 공부해 보면, 앞에 쓴 이사야가 입에 담을 수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얘기가 나오니까, 이미 시제가 예루살렘이 불에 탔다고 예루살렘이 불에 탄 게 과거로 나오고 있어요. 그럼 이사야가 쓸 수 없는 내용이에요. 성경 본문을 원어를 가지고 충분히 공부해 본 사람들이 그것도 신신학 자유주의가 한 것이 아니고, 12세기에 벌써 이 부분은 앞의 이사야가 쓴 게 아니다, 이런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있어요. 아브라함 이반 에스라라는 학자가 12세기 학자에요. 이런 분들이 이미 진작부터 이사야서의 구조에 대해서 이게 한사람이 쓴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런 얘길 한거죠. 자, 조금 읽어서 본문을 읽은 다음에 말씀을 드리죠. 이사야서를 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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