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이 완연한 4월의 하루,
올해도 운이 좋게 길위의 인문학여행에 동참하게 되어 기대와 설레는 마음으로 새벽을 깨워 길을 떠났다.
평일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고속도로도 훤히 뚫려서 버스는 거침없이 남쪽으로 달려서 예정된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경남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섬진강변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한식당 하늘채에서 재첩국과 참게장으로 천리를 달려온 시장기를 달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깨끗하고 완만하게 흐른다는 섬진강 푸른 물을 보며 잠깐 강변을 거닐었다. 북쪽에는 아직도 꽃이 제대로 피지도 않았는데 남쪽은 벌써 매화와 산수유는 일찍이 젖거니와 벚꽃도 다 지고 말았다. 조금은 아쉽지만 그래도 그 모진 겨울의 추위를 이기고 파랗게 돋은 신록을 보니 꽃보다 더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고 잔잔하게 흐르는 섬진강의 잔물결이 세속에 찌든 마음을 달래주며 평온하게 가라 앉혀주는 듯하였다.

점심을 먹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하동장이다.
하동장은 매2일과 7일에 5일장이 열린다. 일찍이 섬진강 푸른 물결 따라 형성된 하동장은 그 역사가 100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곳으로 교통이 좋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사투리와 다양한 농산물이 모이는 이름 있는 장터로 우리나라 5대장을 꼽힐 정도로 큰 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대형마트에 밀려서 그런지 장터가 썰렁하기가 그지없다. 우리의 장날은 만남의 장이요, 5일 만에 한 번씩 유일한 나들이의 장소이며 인근 여러 동네 남녀노소가 함께 모여 작은 잔치가 열리던 곳이다. 그리고 바로 우리의 문화가 된 장날이 이제는 서서히 쇠퇴하는 모습을 보는 듯하여 마음이 개운치가 않았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은 온갖 채소를 비롯한 갖가지 물건을 가지고 나온 할머니들의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너무나 애처롭게 느껴졌다.

백년된 우물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화개장터다. 시장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강한 노래 소리가 나서 보니 엿장수 아주머니의 엿판 가위를 두들기며 부르는 신나는 노래였다. 옛날 한 많고 멋들어진 춘향가나 서민의 애환을 발산하던 육자배기 대신 부르는 엿장수 아주머니의 노래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흥도 흥이거니와 윗마을 구례사람과 아랫마을 하동사람들이 모이고, 있을 것은 다 있고 없을 것은 없는 그 유명한 화개장터, 소설 김동리의 역마의 배경이 되기도 한 화개장은 산골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 등의 임산물과 전라도의 방물인 실, 바늘, 면경 등이며 하동지역의 섬진강 하류의 김, 미역, 청각, 고등어 등 해산물들이 한 곳에 모여서 성황을 이루던 곳으로, 모두 잘 알거니와 조영남의 노래로 유명해지면서 관광객이 몰려들어 그런대로 시끌벅쩍한 시장의 분위기를 살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다소 위안이 되었다. 온갖 약재를 파는데 모든 약재를 넣은 비닐봉지에 이름을 다 붙인 것이 특색이었고 화초가게를 지날 때 퍼지는 진한 향기의 근원을 찾아가 보았더니 천리향리라는 화초였다. 지금도 그 향이 코끝에 머무는 듯, 잊을 수가 없다.

다음에 간곳이 茶始培地다. 신라 흥덕와 3년(828년)에 당나라에서 대령공이 종자를 가지고 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으라고 명하여 이곳이 심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쌍계사의 장죽전이 시배지가 된 이래 천년을 이어 지금에 이르고 화개에서 재배한 차가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조정에 진상되어 명성을 떨쳤으며 특히 추사 김정희는 중국의 최고인 승설차보다 낫다고 하였으며 초의선사는 신선 같은 풍모와 고결한 자태는 그 종자부터 다르다고 격찬을 했다고 한다. 경남도에서는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 현실이다.

쌍계사!
신라 성덕왕21년(722년)에 대비, 삼법 두 화상이 선종의 육조이신 혜능스님 晶相을 모시고 귀국하여 지리산 설리갈화처(눈이 쌓인 계곡, 칡꽃이 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이곳에 지은 절이 쌍계사라고 한다.
쌍계사에는 국보 47호인 진감전사 대공탑비가 있고 대웅전을 비롯한 쌍계사 부도, 팔상전 영산회상도 등 보물 3점을 보유하고 있는 서부 경남의 대표적인 사찰로 손꼽히는 이름 있는 절이다. 특히 화개장터에서 이곳 쌍계사에 이르는 십리 벚꽃 길은 전국적으로도 유명하여 벚꽃이 필무렵이면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곁드려 차시배지를 보는 것은 역사적 의미와 더불어 여행의 참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례군 산동면 탑정리의 일송정 식당에서 먹은 저녁식사의 돼지고기 볶음과 쌈, 된장국은 시장해서 그런지 참 맛있는 시골 밥상 같은 맛이었다.

다음날 처음으로 찾은 四聖庵은 원래는 鼇山庵이라 하던 사찰로 연기조사가 처음 건립하였다고 한다. 오산의 바위가 거북이 등껍질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며 화엄사의 본찰이었으나 지음은 화엄사에 딸린 암자가 되었다고 한다. 원효, 도선국사, 진각스님, 의상대사 4명의 성인이 수도를 하여서 사성암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절벽에 붙여 지은 암자의 모습이 보기에도 아찔할 정도다. 어떻게 절묘하게 절벽에 집을 지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정도다 . 마치 여수의 향일암을 연상케 한다고 하였더니 누군가 옆에서 작은 향일암이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렇지 하는 동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암자 뒤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구례의 시가지와 벌판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정경이 참으로 가슴을 확 트이게 하여 봄기운이 저절로 나의 숨길을 타고 온 몸으로 빨려드는 것 같았다.

구례장!
구례장은 3일과 8일에 열린다고 한다. 구례장도 지역인구의 감소로 시장규모가 작아지고 옛날 같지를 않다고 하는데 그나마 하동시장보다는 많이 활기가 있고 사람들도 많으며 물건도 다양한 것 같았다. 일행 4명이 시장 골목의 어느 가게에 들어가서 막걸리 한 병과 해물파전을 시켰는데 파전이 얼마나 크며 값도 싼데다가 묵무침까지 덤으로 준다는 것을 곧 점심 먹을 때라 사양하고 나왔지만 예나 지금이나 전라도의 후덕한 인심을 느낄 수가 있어서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전통시장의 맛이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시골에서 재배한 각종 봄나물과 수산물, 공산품 등 시장에는 온갖 것들이 다 준비되어 있고 오고가는 인정도 나누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도 활기가 있는 전통시장의 모습을 보아서 흐뭇한 시간이었다. 일행들이 제법 봄나물들을 사는 것 같아서 시장 활성화에 미흡하나마 이바지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원에서의 마지막 식사 비빕밥. 시장하던 차에 맛있게 먹고 한 숨 돌린 다음 마지막 여행지 화엄사로 가다.
화엄사는 지리산의 아름답고 뛰어난 산세를 배경으로 우리나라 화엄종의 총본산으로 규모와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를 보더라도 큰 사찰로서의 위치와 품격을 갖춘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1964년 고등학교 시절 수확여행을 가보고 그 뒤로도 여러 번 가보았지만 이번처럼 해설사를 동행한 적은 처음이라 기대하는 마음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국보 67호인 각황전은 석가모니, 아미타불, 약시불의 삼존불 들을 모신 곳으로 의상법사가 670년이 전립한 장륙전으로 양식은 앞면은 7칸, 옆면은 5칸, 중층 8각 지붕과 기둥은 편주이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숙종 25년(1699년)에서 3년간 성능대사가 중건하였으며 숙종이 각황전 이름을 사액하였다고 한다. 동양최대 목조건물이라고 하며 覺凰殿이라는 뜻이 훗날 영조가 깨달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해설사의 설명이었다.

국보 12호인 각황전 앞의 석등은 신라 문무와 17년에 의상조사가 조성한 것으로 높이가 6,36m로 우담바라를 형상화 한 우리나라 최대석등이라고 한다.
국보 35호 4사자3층석탑은 각황전 뒤 108계단위에 우뚝 서서 화엄사 전체를 아우르는 듯 뒤편의 고아한 소나무와 산과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명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조사 어머니의 전설을 담은 것으로 신라 선덕여왕 14년(645년) 자장율사가 당에서 불사리 73점을 모셔 와서 연기조사 공덕과 부처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공양탑이라고 한다. 탑을 받치고 있는 사자들의 입모습이 제각기 다른데 그 설명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쉽다.

국보 301호는 괘불인데 조선 효종 4년(1653년)에 만든 것으로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인 영산회상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길이가 11,95m, 폭이 7,76m로 너무 커서 접어서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일전에 조선일보에 게재한 오태진 논설위원의 글을 읽고 부푼 가슴을 안고 찾아간
흑매의 모습!

붉은 빛이 너무나 선연하여 오히려 검은 느낌을 주어 훍매라고 했던가.
약간 철이 지난 것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본래의 붉고 고아한 자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나를 맞아주는 듯하여 안도의 숨을 쉬면서 찬찬히 둘러보았다. 높이가 18m인 각황전의 처마를 살짝 올라앉은 가느다란 가지들 끝에 송알송알 맺혀 있는 꽃잎이 약간은 성글어서 더 정이 가고 본래의 자태를 느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등걸에 건버섯처럼 청회색 이끼가 그 나무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었다. 300년이 넘는 공덕을 쌓았다고 오태진 씨의 글에 썼는데 지금도 화엄사의 역사를 한 몸에 짊어지고 산 증인으로 의연히 자리를 지키고 있구나 하는 마음에 고개가 숙여졌다.
4행시 선정을 하였는데 처음에는 떨어졌는데 차 안에서 추가로 선정이 되었다고 하며 상품은 택배로 보내준다고 주소를 적어가다.
하 : 하늘의 선녀가 인간으로 하강하여
동 : 동서를 아우르는 섬진강 몰결로
포 : 포구를 돌고돌아
구 : 구만리 넓고 먼 바닷길을 열도다.

아들 내외와 함께
화엄사 구경을 다 하고 나오는 길에 마침 여행 온 아들 내외를 반갑게 만나고 일기의 변화로 어제까지만 해도 추웠는데 이날은 잠시 더위를 느낄 정도의 화창하고 좋은 날, 화엄사 구경을 마지막으로 올해 처음 참가한 길위의 인문학 ‘문학이 된 장날, 문화가 된 장날’의 일정을 마무리 하고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니 노곤한 몸에 졸음이 찾아온다. 또 다음을 기대하며 가만히 접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