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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차 북한 사찰순례. 원산 명적사 답사기 (1)
김형근
미주현대불교 주최로 북한사찰순례를 4번째로 다녀왔다. 북한에서 8월 30일 도착하여 9월 12일 나왔다. 총 13박 14일 이지만 비행기를 타는 시간까지 하면 15박 16일 이다. 2005년 1차 순례를 갈 때는 L.A. 관음사 도안스님을 단장으로 모시고 22명이 갔는데 이번에는 9명이 다녀왔다. 도안스님은 1차 순례 다음 해인 2006년 8월 28일 입적하였다. 올해가 도안스님 입적 10주기 인데 관음사에서 8월 28일 열린 그 행사를 참가하고 싶었지만 필자는 24일 미리 한국으로 출발하여야 하였기 때문에 참가할 수가 없었다.
묘향산 보현사에서 참가자들과 기념사진
명적사 대웅전
전에와 마찬가지로‘북한사찰순례와 문화유적 답사’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모집하였다. 사찰 순례를 기본으로 하여 금강산, 묘향산, 칠보산, 구월산, 백두산 등 명산과 박물관과 선죽교, 박연폭포 등 유적지를 관광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참가자 중에는 불교신자를 비롯하여 무종교, 개신교, 천주교 등 종교에 관계없이 참가하였다. 북한 여행을 한다는 말을 듣고 30명 가까이 문의가 오며 관심을 보였다. 그중 실제로 12명이 돈을 내고 신청을 하였으나 신청한 사람들 중 3명이 여러 가지 이유로 도중하차 하면서 결국 9명이 약 보름간의 여정에 올랐다. 참가자 모집이 가장 중요한데 최소 15명 이상이 되어야 큰 차량이 나오고 호텔도 특급호텔에 들어갈 수 있고 비용 측면에서도 문제가 없는데 9명이기 때문에 큰 부담감을 안고 출발하게 되었다. 남북관계가 거의 단절되어 경색된 이 시기에 공개적으로 북한을 방문하는 관광단은 미국에서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리가 유일한 것 같았다. 우리가 평양에 들어가는 날에도 남한에서는‘을지프리덤가디언’훈련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남북긴장이 매우 높은 시기였다. 순례기간 중에 북한이 5차 핵실험을 하였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우리 일행은 뉴욕, 워싱턴 DC, 켈리포니아 주, 네바다 주 등 여러 지역에서 참가하기 때문에 인천공항에서 만나 북경을 거쳐 8월 30일 4시 경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평양 순안 비행장은 입국 절차에 있어서 검색이 매우 철저하다. 이제는 전과 달리 핸드폰은 통과가 되었으나 책의 반입은 신고를 하고 그 숫자를 다 세어서 기록한다. 그리고 다시 나올때는 다시 그 책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 필자는 작년 순례기를 기록한 미주현대불교 잡지와 고려 사경과 고려불화에 관한 자료를 많이 가지고 갔기 때문에 30분 정도에 걸쳐 이것을 일일이 기록하고 맨 나중에야 나올 수 있었다. 이러한 절차는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필자가 가지고 간 이 자료들은 여행 중에 보려는 것이 아니고 원래는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과 개성의 고려박물관에도 기증할 예정이었지만 모든 책을 며칠 후에 방문한 조선불교도 연맹에 기증하면서 이들 기관에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번 순례단 여정
이번 여행은 그 전에 비해 유독 비 오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비 때문에 가지 못한 곳도 있어고 외금강은 비를 맞으며 올랐다.
우리 일행이 간 곳은 평양을 비롯하여 묘향산, 원산과 금강산, 함경북도 칠보산과 주을(경성)온천, 남포를 거쳐 서해갑문과 구월산, 개성과 사리원 성불사였다. 원산에서 마식령 스키장도 구경하였으나 작년에 가려고 했던 명사십리 해수욕장을 가려고 했으나 안내를 맡은 사람이 입구에서 경비를 선 군인과 30여분 동안 교섭을 하다가 결국은 방문하지 못했다. 원래 가보려고 했던 통천의 총석정도 갈 수 없다고 한다. 이유가 없이 갈 수 없다는 곳은 대부분 군사 시설과 관련이 있다. 백두산은 일정이 부족하여 갈 수가 없었다. 작년에 백두산 간 경험이 있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그것은 필자가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백두산 대신 칠보산과 주을 온천에서 3박 4일을 보냈다. 백두산과 칠보산 2곳을 다 가려면 25명 정도가 참가하여 32인승 전세 비행기로 가야 가능하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평양에서는 여러 날에 걸쳐 법운암 방문과 대동강 맥주축제 참가, 조선미술박물관과 조선중앙역사박물관, 지하철과, 만수대 창작사, 만경대 김일성 주석 생가, 련광정과 대동문, 련못공원, 주체탑 관광을 하였고 옥류관에서 그 유명한 냉면을 실컷 먹었다. 하지만 시간 부족으로 평양의 을밀대, 전쟁박물관 등은 방문하지 못했다.
명적사 부도와 비
묘향산 방문과 3번 신청 끝에 가게 된 원산의 명적사, 그리고 이성계가 창건한 고산의 석왕사
31일 첫 일정으로 묘향산을 갔다. 도착한 직후 국제친선관람관을 방문하였다. 이 관람관은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 그리고 현재 북한의 김정은 지도자가 세계 각국에서 받은 선물을 전시해 놓은 것이다. 이 관람관은 2개의 건물로 되어 있는데 우리 참가자들은 건물 보수공사 때문에 김일성 주석이 받은 선물을 전시한 건물은 볼 수가 없었다. 묘향산 관광호텔에서 점심 후에 보현사를 방문하였는데 결국 비 때문에 보현사 방문만 하고 서산대사가 수 십년을 기거하던 금강굴은 갈 수가 없었다. 보현사는 북한 제 일의 사찰로 많은 전각과 고려시기 만들어진 9층 탑과 팔각 13층 석탑이 있는 곳이고, 또 한국전쟁 중에 폭격으로 건물이 전부 소실된 금강산 대찰 유점사의 종도 있고 수 많은 유물이 이곳에 있다. 이날 안내 강사로 나온 사람은 2013년 2차 순례로 보현사를 갔을 때 안내 강사를 하였던 혜정보살이었다. 묘향산을 가면 보현사를 둘러보고 왼쪽으로 2시간 정도 올라가면 상운암이 있고, 오른쪽으로 1시간 정도 가면 하비로암이 있다. 그리고 보현사 뒷 쪽에 서산대사가 수 십년을 살았다는 금강굴이 있다. 이번 참가자들 중에는 70살이 넘은 분들이 여러 명 참가하였기 때문에 금강굴을 가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비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9월 1일에 우리 일행은 평양의 법운암을 갔는데 필자는 전에도 여러번 방문한 곳이기 때문에 법운암에는 가지 않고 대신 이날 조선불교도 연맹을 방문하여 고려불화와 고려 사경 책, 그리고 미주현대불교 잡지 등을 전달하였다.
9월 3일에는 원산을 거쳐 금강산을 갔다. 원산에서 금강산 지역은 북한이 관광특구로 정하고 관광지로 개발을 하는 지역이다. 북한은 관광을 명승지와 더불어 민족문화유산이 함께 있는 곳으로 한다는 글을 어딘선가 읽은 적이 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원산 금강산 지역은 딱 맞아 떨어지는 지역이고 사찰이 민족문화유산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원산과 금강산에 이르는 이 지역에는 송도원 해수욕장, 갈마반도의 갈마비행장과 명사십리, 마식령 스키장, 시중호, 총석정 등이 있다. 사찰로는 무학대사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왕이 될 꿈 풀이를 해 주었다는 석왕사, 안변 보현사와 령추암, 원산의 명적사, 그리고 금강산의 신계사, 표훈사, 정양사, 보덕암 등이 있다.
9월 3일 원산을 경유하여 명적사를 방문하였다. 북한에서 발행한‘조선의 절’이라는 책에는 이 절이 원산시 영삼리에서 2km 떨어진 반룡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고 설명 되어있었다. 이 책 소개에 의하면 원산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라고 생각이 되어 2차, 3차 순례에 신청을 하였는데 무슨 이유인지 안내인들은 이곳을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이번 4차 방문 때에 드디어 이곳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방문을 한 후에 지금까지 안내받지 못했던 이유를 알았다. 이 사찰에는 단지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만 2채가 있었고 안에는 불상도 탱화도 아무런 불구도 없었다. 현재 북한에는 이 명적사 뿐만 아니라 개성의 대흥사, 금강산 불지암 등 여러 곳이 건물만 있고 안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사찰들이 있다.
원산에서 이 사찰을 안내하기 위해 해외동포원회위원회 강원도 처장이 나오고 원산시에서 이 명적사를 비롯한 문화유적을 관리하는 직원 2명이 함께 갔다. 강원도 처장에 의하면 명적사는 원산시에서 16km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원산에서 명적사 가는 길은 고속도로가 나기 전에 원산에서 평양을 가는 마식령도로라고 한다. 즉 구 도로인 셈이다. 우리는 그 도로로 갔는데 명적사 까지는 차량이 갈 수 있는 도로가 나 있지 않아 도중에 차를 세우고 돌로 된 징검다리를 건너고 나무로 된 다리를 건너 마을을 지난 30분 정도 걸어갔다. 아름다운 징검다리였고 정겨워 보이는 나무다리였지만 노인들과 여성들에게는 좀 위험한 나무다리이기도 하였다. 시간이 흐르면 이 다리들은 시멘트 다리로 변할 것이고 다리를 건너면서 느끼는 시골스러운 포근하고 정겨운 맛도 사라질 것이다. 명적사를 향해 가면서 문화유적 관리를 하는 40대 직원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우리 일행이 어떻게 이 명적사를 알고 오는지 매우 궁금해 했다. 아무도 찾지 않았고 북한 주민 외에는 우리가 명적사를 찾는 최초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명적사 부근은 약초도 많고, 물이 좋아서 병이 든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고 명적사 부근의 주민들이 말한다고 한다. 입구에 아름다운 부도 4개와 부도비가 아주 의젓하게 오랜 풍상을 이겨내고 늠름하게 서 있었다. 마치 우리가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부도와 비를 보는 순간 흥분되었고 어렵게 찾아온 보람을 느꼈다. 부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탁본을 해야 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한 개는 대조계종학곡당대선사탑(大曺溪宗鶴谷堂大禪師塔)라고 뚜렷하게 보였다.
우리 일행은 명적사에 도착하여 강혜관 관리원으로부터 명적사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북한 국보유적 105호인 이 명적사는 원래 고구려시기에 세워졌고 건물이 11채였는데 한국 전쟁시기에 9채가 폭파되어 지금은 대웅전과 극락전만이 남아있다. 1669년에 중수되었고 그 후 1771년과 1869년에 대 보수를 하였다고 한다. 대웅전은 포식 건물로 두공의 짝도리 겹처마로 용과 봉황새 조각이 아주 볼만하다고 설명을 하였다. 크기는 앞면 3칸(11m), 옆면 3칸(7.5m), 밖 7폭 안 9폭의 두공 건물이고 문의 문양은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연꽃, 매화, 국화, 모란 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1985년에 새로 단청을 하였다고 설명을 하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상태는 좋아 보였다. 필자는 불상이 없는 대웅전을 처음 보아서 좀 당황스러웠다. 우리는 스님도 없고 불상도 없는 이 절에서 가지고 간 향을 땅에 꼭고 필자가 목탁을 치며 반야심경을 봉독을 하였다. 앞으로 3년 정도 지나면 불상도 모시고 제대로 된 사찰의 모습을 갖출 것이라고 하는데 꼭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었지만 비가 쏟아질 것 같아 만약 폭우가 쏟아지면 개울물이 불어나 건널 수 없을 것이라는 몇 사람들의 우려 때문에 극락보전 안은 미처 보지도 못하고 서둘러 허둥지둥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명적사를 조사해보니 자세한 설명을 한 글들이 있었는데 북한 안내원들이 한 말들하고는 차이가 많았다. 사찰 건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쓴 글인데 대웅전 불상과 부도에 대한 언급이 없다. 현장을 가보지 않고 북한에서 발행한 책과 인터넷 자료를 가지고 쓴 글 같았다.
아래 글은 대한불교진흥원에서 제공한 자료를 불교포커스에서 보도한 글이다.
지정번호-북한국보문화유물 제105호(대웅전) 소 재 지-강원도 원산시 영삼리 시 대-신라(600년)창건,1771년 중건 명적사(明寂寺)는 강원도 원산시 영삼리에서 북쪽으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반룡산 중턱에 자리한다. 대웅전은 북한의 국보문화유물 제10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사찰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마식령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속고산의 웅장한 모습이 한눈에 조망된다. 명적사는 석왕사의 말사였다. 명적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이라고 하나 창건연대는 분명치 않다. 1635년과 1771년 및 1895년에 중수하였다. 또 1757~1765년에 편찬된『여지도서』「덕원부 읍지」에, ‘덕원부 서쪽 25리 반룡산 밑에 자리한다. 절에는 30명의 스님이 있다.’라고 나온 것으로 볼 때 조선시대에 법등을 이어왔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현재는 대웅전과 심검당이 있고, 석조물로서 부도들이 있다. 대웅전은 3단 높이로 쌓은 장대석 기단 위에 세운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잘 다듬은 주춧돌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웠는데, 어칸에는 연꽃과 매화꽃 무늬를 새긴 꽃살문 4짝을, 좌우 협칸에는 모란꽃과 국화무늬를 새긴 3짝의 화려한 꽃살문을 달았다. 기둥 위에는 바깥쪽 7포, 안쪽 9포의 아름다운 두공을 올렸다. 내부에는 살미 끝 연봉 조각이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천장은 마루반자와 빗반자로 구성되었다. 이 부분은 충남 논산 쌍계사 대웅전과도 비슷한 형식인데, 명적사 대웅전 것이 쌍계사 대웅전보다 좀 더 낫다는 평도 있다. 천장의 측보에는 용머리 조각을 얹었고 부재마다 아름다운 모로단청을 입혔다. 이 건물은 공포의 조각 수법과 형식 등이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운 특징을 보이고 있어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점심을 원산 항 부근에서 하고 난 후에는 명사십리를 가지 못하고 안변 석왕사를 방문하였다. 시골 길을 따라 이 곳을 잘 모르는 운전사가 주민들에게 물어 물어 도착하였다. 4시 30분 경에 도착하였는데 무슨 일인지 석왕사 입구에서 우리 일행이 들어가지 못한다고 사찰 관리 책임자와 우리 안내인이 이야기가 길어 졌다. 오기 전에 우리 일행이 간다고 통보를 하였는데 정작 사찰에서는 그 통보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행정 착오가 생긴 것이다. 이 문제로 30분 이상 우리는 그냥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북한 사회의 엄격함을 보면서 동시에 경직성을 동시에 보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짜증이 날 수 밖에 없었고 이 지연은 역사적이고 볼 것 많은 석왕사를 시간에 쫓기어 대충 볼 수 밖에 없었다.
석왕사 주변은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울창하였다. 입구에는 이 지역이‘인민문화휴양지’라고 하고 백두산 영웅인 김일성, 김정숙, 김정일 3인과 관련 깊은 곳이라는 안내문이 있었다. 큰 건물들이 있는 이 휴양지를 차로 조금 지나니 석왕사가 나왔다.
석왕사는 고려 우왕 때인 1386년 이 성계가 무학대사에게 귀의하여 응진전을 1년 반에 걸쳐 건립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성계는 조선을 세우면서 불교를 배척하고 왕건이 세운 절을 포함하여 많은 사찰을 파괴시켰는데 석왕사는 이성계가 세운 절이기 때문에 번창하였다. 강사에 의하면 무학대사의 스승은 원나라 지공스님이며 고향은 경상도 합천이고 본명은 박자초로 1327년생 이라고 한다. 강사가 말한 지공은 인도 출신 스님으로 고려시대 활약한 나옹대사에게 많은 지도를 한 스님으로 알려졌다. 지공은 무학의 여러 스승중의 한 스님이다.
건립중인 석왕사 대웅전
석왕사는 조선을 건국한 이 성계의 원찰이라 1394년에 53채의 건물이 있을 정도로 큰 사찰이었고 27명의 조선 왕들이 이곳을 다녀갔다고 안내 강사는 소개하였다.
강사의 소개에 의하면 1314년 석왕사는 53채의 건물이 있었는데 1951년 6월 13일 폭격으로 대부분 건물이 폭파되었고 오직 1394년에 세운 조계문만이 파괴되지 않았고 호지문은 1952년에, 불이문은 1995년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어 강사는“한 때는 비구 300명, 계곡너머에 비구니 200명이 살았고 33채는 처마를 이어서 지었고, 10채는 골짜기 마다 지었으며 10째는 비구니 절인 보문암과 백련암에 지었다”고 53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유교가 국교인 이조시대에도 태조 이성계가 건립한 사찰이기 때문에 계속 번창하여 이조 말에는 아주 큰절이 되었다. 그리고 이 사찰은 함경도 정평에서 강원도 이천까지 소작지를 두었다고 한다.
석왕사 불이문에서 설명하는 안내강사
이 석왕사는 북한 지역에 있는 대표적인 사찰이기 때문에 북한에서도 복원을 하려고 오랜전 부터 노력을 해왔다. 이에 대한 보도가 2015년에는 ‘조선신보’ 보도되었다.
신문에 따르면, 고려말기에 세운 응진전과 호지문, 조선시대에 세운 대웅전과 팔상전을 비롯하여 53채의 건물들이 있었는데, 6.25전쟁 시기인 1951년 6월 미군의 폭격으로 불이문과 조계문, 설성동루를 제외한 모든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북한 민족유산보호지도국과 강원도인민위원회의 일꾼들, 도내 인민들이 대웅전을 원상태로 복원하기 위한 사업에 나섰다.
이 석왕사 지역은 타코마 서미사 주지 일면스님의 고향이라고 한다. 일면스님은 어린 시절 이 절을 종종 갔는데 아주 큰절이라고 어린 시절 고향에서 본 석왕사를 회상하였다. 석왕사는 지금은 전쟁중에 사라진 금강산 유점사, 평양의 영명사와 함께 북부 지역의 대찰이었던 것이다. 직접 가서 본 석왕사 지역은 남북 전지역과 비교해도 어느 사찰에 뒤지지 않을 큰 가람을 이룰 터전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전에 LA 도안스님이 법타스님과, 문수사 도범스님, LA현철스님, 등 여러 미주 지역 스님들과 함께 북한 사찰순례를 하면서 이 사찰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강사에 의하면 현재 대웅전 건립은 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워 3년 전부터 시멘트로 공사를 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크기는 208평방이라고 하는데 얼마나 큰 규모인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우리 일행이 방문하였을 때에도 어둑 어둑한 속에서 일꾼들이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이 공사를 한 후에는 남한이나 해외동포들의 방문은 우리가 처음이라고 한다. 강사의 마지막 설명은 이성계와 인연깊은 응진전 터에서 들었다.
우리는 시간상 금강산으로 출발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유서 깊은 대찰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떠나야 한다는 것이 몹시 아쉬웠다. 어느 곳에서도 향을 사르지 못했고, 시주도 할 기회도 없이 떠나왔다. 내년 혹은 이 다음에 갈 때는 최소한 한 나절 정도의 시간을 가지고 충분한 설명을 들으면서 다시 이 사찰을 돌아보고 싶다.
강수진 조선불교도 연매 위원장과 필자
5차 북한사찰순례와 문화유적 답사는 2017년 9월 말 가을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북한사찰순례는 안전한 여행입니다. 4차례 다니는 동안 최상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기간은 13박 14일이고 비용은 $4,900 정도입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연락바랍니다.
Tel. (718) 757-9949 mobuddhis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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