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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FX의 뻴로리뉴(Pelourinho)가 액튼(Acton/1834~1902))을 부르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남서진을 시작하여 100여m도 가지 못하고 VFX 역사(驛舍)를 향해 돌아섰다.
역 또는 다운타운의 무엇에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직 한낮을 넘지 않았는데, 이 하루의 예정(목적)지인 알베르까 역(Alverca)은 9km(철로 거리), 까미노로
는 10km정도 남아있다.
VFX의 유산(Património) 목록에서 발견한 돌 기둥(재판의 기둥/ Pelourinho de Vila Franca de Xira)
이 부르는 듯 한데 그냥 갈 수 있는가.
까미노에서 돌 기둥과 교감을 갖게 되기는 마드리드길(Camino de Madrid)의 비얄론 데 깜뽀스(Villalon
de Campos/Valladolid, Castilla y Leon)에서였다.
13c~14c에 세웠다는 마요르 광장(Plaza de Mayor)의 산 미겔 교회(Iglesia de San Miguel) 옆에 서있는
긴 돌 기둥이 중세 사법권을 상징하는 '로요 후리스딕시오날'(Rollo Jurisdiccional/재판의 기둥)이다.
프랑스 길 보아디야 델 까미노(Boadilla del Camino)에서 눈에 익히기는 하였으나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까미노의 메인 루트가 아닌 마드리드 길에서 인연이 닿은 돌 기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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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 사법재판권을 강조한 돌로 된 기둥.
이 돌 기둥들이 까미노 외에도 도처에 서있는데 교회의 전횡이 극에 달해 있었다는 역설(逆說/paradox)에
다름 아니다.
한 손에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든 정의의 여신 디케(Dike)의 입상을 왜 세웠는가.
정의와 형평을 갈망하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정의와 형평)이 보편적인 사회에는 디케가 출현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예수로부터 천국 열쇠를 받은 수제자 베드로(신약 마태오 16:19)의 후계자인 교황.
중세에 이르기 까지 교황의 권력은 절대적이었다.
가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영역에 대한 예수의 실물 교육이 있었는데도(마태오 22:19~21) 교황은 교회
권력을 넘어 세속 권력 위에 군림하여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필연적으로 따른 것이 부패였다.
그래서 도처에서 돌 기둥을 세우며 사법재판권을 부르짓게 된 것이다.
영국의 종교 역사가, 정치가, 작가인 액튼(John Emerich Edward Dalberg-Acton/1834~1902).
그는 제1차 바티칸공의회(First Vatican Ecumenical Council / 1870년)에서 교황 무류성(Infallibilitas/
無謬性) 교리의 선포를 저지하기 위해 진력했으나 실패했다.
교황이 전 기독교(가톨릭)의 우두머리로서 신앙이나 도덕에 관하여 교황좌에서 장엄하게 결정을 내릴 경우,
그 결정은 성령의 특은으로 보증되기 때문에 결단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교리인데.
액튼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하려다가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공의회의 결과에 반발한 신도들을 중심으로 고(古) 가톨릭교회(Old Catholic Church)가 태어났으나 가담
하지 않고 "로마 교황청과의 일치는 나에게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 고 스스로 말한 정통 가톨릭 신도였다.
그러면서도 교황청(당시)의 반자유주의 , 반민주주의 성향과 교황무류성 등을 비판했다.
“자유는 더 높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고 그 자체로 가장 높은 정치적 이상이다.
훌륭한 행정을 위해 자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와 사적 삶에서 최고로 가치있게 여기는 대상들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자유가 필요하다.”는 자유주의 사상이 투철한 그 였다.
저지에 실패한 액튼이 1887년에 성공회 주교(Mandell Creighton/1843~1901)에게 보낸 글에 "절대 권력
은 절대 부패한다"(Power tends to corrupt and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는 구절이 있다.
동 시대의 같은 영국 역사학자인 두 사람(Acton과Creighton)은 역사 저널 '영국 역사 리뷰'(The English
Historical Review)의 설립자(액튼)와 초대 편집자(크레이튼) 관계였으며 위 글은 편집자의 리뷰 요청에
따른 설립자(액튼)의 답신 중에 있다.
"위대한 사람은 대부분 항상 나쁜 사람"(Great men are almost always bad men)이라고 교황청을 향한
비판의 날을 세우기도 했다.
개인의 자유를 강력히 옹호했던 그가 집중된 권한의 위험성에 대한 시대를 초월한 관찰이라 하겠으나 실은,
19c는 이 교리의 선포가 별로 의미 없는 시대였다.
원천적으로 거부하고 비판하는 개신교(Protestant)는 물론 적지 않은 가톨릭 신도들까지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중세 이후 교황의 권력은 염려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쇠잔해 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황과 교황청이 표적이었던 이 글귀는 정치 권력을 비롯해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모든 권력집단
이 경각해야 하는 경고가 되었다.
늙은이가 늙은이를 기피하는 이유
VFX 관문(關門)의 하나인 역사(驛舍) 앞에는 뽀르뚜갈 투우사의 동상이 서있다.
이 지역이 이전의 히바떼주 주(Ribatejo)였을 때 이전부터 투우와 깊은 관련이 있어왔다는 의미일 것이다.
전회(前回/59-1)에서 언급한 대로, 히바떼주의 염기(鹽氣) 많은 습지에서 사육되는 황소와 말이 뽀르뚜갈
투우(鬪牛)의 으뜸이며 최고의 경주마라니 그럴 수 밖에.
이베리아 반도의 투우 축제는 스페인과 뽀르뚜갈이 쌍벽을 이루고 있단다.
두 나라의 국토 면적이 5대 1 정도의 차가 있는데도 투우장 규모가 대등한 것으로 보아 수긍이 간다.
다만, 양국 축제의 다른 점은 뽀르뚜갈에서는 스페인과 달리 축제 중에 동물(touro)의 피 흘리게 되는 일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단다는 것.
투우를 죽이지 않음을 의미하며 내가 투우 문화에 생소하지만 단연코 뽀르뚜갈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나는 역전 광장의 동상 앞에서 시청(Camara Municipal) 길을 물을 상대를 찾으려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재판의 돌기둥이 시청의 광장에 있다고 문서가 가이드하기 때문이었다.
지도의 위도(緯度) 상으로는 정서 보다 약간 아래(西西南)에 위치해 있으며 500m 미만의 거리지만 좌우의
블록(block)들을 거쳐가다가 알바하기 십상이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한 중로(中老)가 내게 다가왔다.
부유해 보이면서도 왠지 쓸쓸해 보이기도 한 그.
길 안내를 자임하고 나섰다.
500m도 못되는 거리를 가면서도 말을 나누기 위해 옆 자리를 고수하려 할 정도로 외로우며 이 고독을 물리
치기 위해 길을 걸어보지만 여의치 않다는 그에게 내가 말 상대로 걸려든 것인가.
지병으로 자유롭지 못하거나 동정심(sympathy)이 일게 할 만큼 깡마르거나 초라하고 쓸쓸해 보이며 동시
적으로 경계심의 발동을 부추기는 늙은이가 아무에게나 다가가 말을 거는 것이 보통인데 이 사람은 달랐다.
상대에게 필요한 도움을 줌으로서 자기에게도 이익이 되는 윈윈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는 고령자니까.
이베리아 반도를 걷는 중인 내게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한 습관이 바야흐로 고착화 중이라 할까.
80대 고령이면서도 늙은이를 경계하는 버릇이.
거의 평생을 산과 길을 걷는 나그네로 살아왔으며, 이베리아 반도의 까미노들에서도 동 연배라고 느껴지는
늙은이들에게 길 묻기를 거듭하며 걷고 있는 나인데도.
늙은이 끼리는 유유상종(類類相從), 상통(相通)하리라 믿기 때문이었으며 젊은이보다 연륜이 쌓인 노령자
의 안내에 더 신뢰가 가는 듯 했으니까.
그럼에도 늙은 내게 늙은이를 경계하는 고약한 버릇이 왜 생겨났는가.
촌락의 공원과 길가 또는 집 앞 벤치나 간이 의자에 외로이 앉아 있는 늙은이들.
산업사회와 초고령사회가 한꺼번에 몰려온 까닭이다.
어린이는 출산 기피로 없고 젊은이는 일터 찾아 떠나버렸고 남은 사람은 늙은이와 병약자 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길을 물었을 뿐인데, 그들은 갈길 바쁜 늙은 나그네를 붙들고 늘어지기 때문이다.
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재물도 명예도 아니고 오로지 온기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사람 자체다.
시코쿠 헨로(日本)의 도쿠시마켄(德島県)지역, 카미야마초 아가와(神山町 阿川)마을은 일명 카카시(かかし
/허수아비) 마을이다.
마을에는 빈집이 날로 늘어만 갔다.
학생이 부족하기 때문에 학교가 문을 닫았다.
누군가 나서서 허수아비를 만들기 시작했다.
땀을 쏟아내며 일하던 사람들이 사라진 논밭은 그 허수아비로 대체되었다.
아이들이 빠져나간 교실에도, 뛰어놀던 운동장에도 남녀 허수아비 선생과 학생들이 대신했다.
특이하게도 남녀노소 허수아비들이 서있거나 앉아서 헨로상들(Pilgrims)을 격려하고 있다.
"お氣を つけて 大日寺まで 約12kmです"(오기오 츠케테 다이니치지마데 야쿠12km데스/안녕히 가세요.
大日寺까지 약 12km입니다)
내가 1.200km 시코쿠 헨로를 걸은 때는 2014년 9월 하순 ~ 10월 중순이었다.
수년 후 어느날, 일본의 한 TV프로에서 낯 익은 마을을 보게 되었다.
참으로 우연이었을 뿐인데, 그 때는 몹씨 짠한 마음이게 했던 이 아가와 마을이 그 간에 일본에서 유명 관광
지가 되었음을 이 TV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허수아비(案山子/scarecrow)로 인하여.
헨로상의 신분으로 지나쳤을 뿐인데도 내 가슴을 아프게 했던 머을인데.
그 '누구'는 그 곳(아가와 마을)에 일터가 있었으나 직장의 폐쇄로 마을을 떠나게 된 타지(他地)의 한 청년.
일터를 잃은 것보다 더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미구에 사라지게 될 운명의 마을이었단다.
육안으로도 확인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살기 좋은 지세에 인심도 후한 마을이었는데 장정들이 앞다투
듯 직장을 찾아 마을을 떠났기 때문이다.
정든 마을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청년이 찾아낸 아이디어(idea)는 허수아비였다.
사람이 떠났기 때문에 빈(허전한) 자라를 채울 '더 베스트(the best)'로 찾아낸 것이 허수아비 인형이었으며
잔여 마을 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불철 주야, 여려 형의 허수아비 인형을 만들어 위치에 알맞게 세웠다.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있으랴만 시각적 허전감이라도 줄이려 했는데, 명품 관광지가 됨으로서 절로 체온이
회복되고 상승하는 결과를 낳았단다.
떠났던 마을민들의 귀향은 물론, 타지에서 오는 가족 단위 이주민들이 날로 늘어남으로서.
허수아비일 뿐인데도 사람을 닮은 형상이라는 이유로 효과를 발휘하는데 대화 상대의 부재야말로 치명적인
문제 아닌가.
길을 묻고 답하는 늙은이 간의 대화는 지극히 간단하다.
묻는 길의 옳고 그름을 판별해 주고, 바르지 않은 길은 바르게 가르쳐 주는 것으로 모두 끝난다.
더구나 노닥거릴 겨를이 없으며 갈길 바쁜 늙은 길손을 중언부언하기 위해 붙들고 늘어지는 늙은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의 늙은이임을 잘 알기 때문에 미연 방지를 위해 경계하는 것이다.
늙은이에게만 묻던 길 안내를 늙은이만은 제외하는 쪽으로.
스페인의 까미노들에서 늙은이에게 물었다가 놓아주지 않고(붙들고) 늘어지는 일을 열에 열번 당했기 때문
인데 뽀르뚜갈도 스페인과 동일한 이베리아 반도의 땅이기 때문에 경계할 수 밖에.
띠아구(Tiago)가 '열에 열'에서 10중 8~9'로 수정하게 하다
한데, 앞에서 말한 늙은이 경계에서 '열에 열'이 아니고 '10중 8~9'로 정정해야 할 것 같다.
71세(당시)로 나와 10살 차의 고령자인 그는 자기를 위해서 나를 붙들 만큼 무례한 늙은이가 아니다.
단지 안내에 충실하는 동안만 최선의 자기 만족을 누리려는 것일 뿐인 늙은이니까.
이름이 띠아구(Tiago/스페인어 발음은 띠아고/스페인의 어디선가 만난 사람의 이름도 같았는데 )라는 그.
페르난데즈(J. A. Fernandez/나바라대학교총동문회에 본부가 있는 대학인순례자협회회장)가 내게 지어준
크리스천 네임(Christian name) 산띠아고(Santiago)와 같은 이름이다.
본래의 Santiago는 사도 야고보(Santiago)를 말하며 띠아구(tiago)는 사도(San/聖)를 분리한 이름이니까.
그(Tiago)는 "내가 극동에서 온 늙은이로, 까미노를 걷고 있는 독실한 크리스천(Catholic)일 것"이라고 점
치고 있는데 맞느냐고 물어왔다.
3분의 2만 맞다는 내 대꾸에 3분의 1은 무엇이냐고 또 물었다.
크리스천은 맞지만 가톨릭이 아니고 프로테스턴트(Protestant/개신교)라는 내 답에 약간 실망스런 표정을
보일 만큼 24금 가톨릭 신도인 그다.
바둑판처럼 난 길이라 방향만 잘 잡으면 아무 길로 들어서도 되겠지만 이 길에서는 띠아구가 안내자다.
그를 따라서 역 광장~ 알메이다 가헤뜨 길(R. Almeida Garrett)을 따라 200m쯤 서진한 후 직각으로 좌회
전하여 알베스 헤둘 길(R. Alves Redol/N10) 200m 정도를 남하, 지자체 청사(Vila Franca de Xira City
Hall/Câmara Municipal de Vila Franca de Xira) 앞에 당도했다.
프레게지아 VFX의 청사(town hall)도 겸하는 건물이다.
청사 앞 광장(Praça Afonso de Albuquerque)에 서있는 장신의 돌기둥.
까미노 뽀르뚜게스를 이탈하여 찾아간 재판의 기둥(Pelourinho de Vila Franca de Xira)이다.
5개 계단이 있는 8각형 주각(柱脚) 위에 세워져 있으며 대리석 석조물인 이 사법의 기둥 꼭데기에는 연철로
된 혼천의(渾天儀/armillary sphere)와 십자가가 얹혀 있다.
16c 초(1510년?), 최초로 건설한 이래 원 위치(Praça Afonso de Albuquerque)에서 해체와 교체를 거듭
했으며 1910년(6월 16일?)에 국립기념물로 분류되었단다.
우리(Tiago와 나)의 일이 끝나고 헤어지는 일만 남았을 때 띠아구가 전혀 예상 밖의 말을 했다.
자기가 점심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더치페이(Dutch treat)가 일상화 되어 있는 서양인들이 남에게, 더구나 생면 부지의 사람에게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야 말로 희소한 일이기 때문에 아마도 내가 당황하는 표정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까미노에서 나는 이런 제의를 흔하게 받았다.
부부 또는 팀 순례자들이 자기네가 만든 음식의 식탁에 초대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그 때마다 최고령자에 대한 경의의 한 표현일 것으로 짐작하고 나도 흔쾌히 응했다.
그 짐작이 100% 사실임을 함께 식사하는 중에 확인한 나는 어떤 형태로든 고마움을 표시했다.
다만, 평생애 걸친 내 방식은 되로 받고 말로 주는 것이다.
대접으로 말하면 "받을 때는 최저치, 줄(베풀) 때는 최고치"가 내 불변의 원칙이다.
받을 때는 선호도와 관계 없이 가장 저렴한 메뉴를 택하고 줄 때는 최고의 기호 메뉴를 권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받을 수룩 내게는 더욱 부담되는 것이 남으로부터의 대접이다.
띠아구도 그랬는데, 아마도 내가 자기에게 마음 편한 상대였으며 자기의 궁금증을 모두 주저 없이 풀어준
내게 고마움의 한 표현일 것이지만 나는 이미 점심 식사를 했다.
내 식사 습관은 대부분이 아점(아침 겸 점심)이기 때문에 점심 시간이 이른데다 햄버거가 명품으로 알려진
식당(Urban Garden) 앞을 지나다가 견물생심의 발동으로 햄버거를 먹은 것.
대접하고 싶은 자기 마음을 사양 말고 받아달라는 그의 표정이 진지했기 때문에 타협을 했다.
나는 이미 햄버거로 점심식사를 했으므로 지근의 바르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우리가 간 곳은 재판의 돌기둥에서 수m에 불과한 까페(A Moleirinha).
커피를 마시러 들어갔으나 주문은 쎄르베자(cerveja/beer)였다.
뽀르뚜갈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맥주라는 수뻬르 보크(Super Bock).
내가 알고 있는 뽀르뚜갈의 맥주는, 까미노 뽀르뚜게스에서 내가 마셔온 맥주도 이것이 유일하므로 워낙 무
더운 날씨가 커피 대신 수뻬르보크를 찾게 했겠지만 그(Tiago)도 똑같은 것은 이심전심이었나.
니는 서원한 뻬레그리노다
미니 1병씩을 마시는 동안에 그도 나도 유창하지 못한 외국어(영어)로 나눌 수 있는 대화는 한계가 있었다.
이같은 핸디캡(handicap)에도 그가 내게 알려 주려 애쓴 것은 연중 행사인 '페스따 두 꼴레치 엥까르나두'
(Festas do Colete Encarnado/Red Waistcoat/빨간 조끼 파티)라는 축제였다.
황소와 말, 농부의 땅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가축 타기 대회, 황소의 거리 달리기 및 다양한 콘서트
가 특징으로 빌라 프랑까 지 시라의 정체성을 담고 있으며 가장 중요하고 인기있는 행사란다.
연중 행사로 매년 7월 첫 주말에 열리는데 금년(2015년)의 첫 주말은 7월 4일이다.
오늘(7월 3일 금요일)이 그 날의 1전일(前日)이며 전야제도 열린단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열릴 것이라며 그는 내가 원하면 축제에의 안내역도 맡겠다고 했다.
까미노에서 대학 방문 때, 휴일과 축일, 대학 자체의 행사 등에 저촉되지 않도록 일정 조정을 세심하게 하는
데도 차질이 발생하고 차후의 일정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기도 한다.
한데, 어떤 노력은 커녕 아무 관심이 없는데도 때맞추어 당도했으며 안내를 자임하는 볼런티어까지 있으니
내가 뻬레그리노가 아니고 일반 관광객이라면 이보다 더한 행운이 있을까.
그러나 나는 뻬레그리노(Peregrino)다.
2011년에 이어 2번째다.
현재, 노르떼 길에 이어 뽀르뚜 길의 최후 종점(始點)인 리스보아를 목전에 두고 있다.
전번(2011년)에 뽀르뚜 길(Camino Portugues/Porto→Santiago de Compostela)을 완주했으나 뽀르뚜
~또 하나의 최종 시발지도 되는 리스보아(Lisboa/Lisbon/뽀르뚜갈의 수도)를 연장중이다.
이는 6개월에 걸친 긴 여정 서원(誓願)의 이행이다.
작년(2014년) 9월에 일본의 시코쿠 헨로에서 남 몰래, 나도 모르게, 그러나 단단히 한 서원(誓願)이다.
시코쿠 헨로는 까미노 데 프랑세스의 사아군(Sahagun/Castilla y León자치지방의지자체)을 지날 때 홍보
판에 강렬한 유혹을 받았으나 일본땅이라는 이유가 쉬이 지워버릴 수 있게 했던 길이다.
그랬음에도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는 나를 그 길로 몰았다.
참사의 수습과 불시에 참변을 당한 가족들에게 미미하나마 위로와 도움이 되기 바라며 현장(진도팽목항)에
서 며칠을 보냈으나 쓸모는 없고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늙은이일 뿐이었다.
참담한 마음을 추스르는 길(方法)은 길(道路) 뿐이었으며 도피행각에 다름 아닌 길로는 시코쿠 헨로를 능가
할 길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소위, 찬밥 더운 밥 가릴 때였는가.
그럼에도, 나는 걷기를 강행한 첫날부터 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헨로미찌(遍路道)는 넓고 오래된 공동묘지의 한 구역(군인묘지)을 거쳐가야 하는데 한 일본 헨로상 팀이 이
일대를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문이 마멸되어 가고 있는 묘비들 앞에서 젊은 여 센다쯔(女先達/선도자,안내인)의 해설(?)에 감동적이 된
듯 엄숙해진 무리에게 길을 내달라고 청할 수 없을 만큼 진지한 분위기였으니까.
센다쯔의 열변과 무리의 표정들은 내 호기심을 자극했으며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 팀원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봐서는 안될 것들을 보게 되었으며 그로 인한 충격과 분노가 충천하려 했다.
그들이 감격하고 감사의 염을 보내고 있는 이 무덤들의 주인은 422년 전(2014년기준)인 임진(1592)과 정유
(1597)의 두 왜난 때 우리 강산을 짓밟고 우리의 선조들을 살육하다가 죽은 자들(倭軍)이기 때문이었다.
섬족(島嶼族)이 대륙을 탐하는 것은 숙명이라 할 수 있지만, 중국이라는 광대한 땅을 욕심낸 일본에게 조선
반도야말로 절대적인 교두보였다.
서구의 막강한 힘을 수입하여 강성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정명가도(征明假道)라는 황당한 구
실로 전쟁(壬辰倭亂 丁酉再亂)을 일으켰으며, 이 때 조선 땅에서 죽은 자들의 무덤이다.
반도의 해전뿐 아니라 선조(宣祖/14代)가 파천한 뷱쪽 끝 의주(義州)까지 추격하다가, 소위 전사한 자들.
자기네에게는 자손만대에 걸쳐서 자랑스런 공적이겠지만, 우리의 선조들이 당한 수모는 후손들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치욕의 역사에 다름 아니잖은가.
하긴, 중세의 같은 시기에 신토(神道)가 자기네의 국교에 다름 아닌데도 그들이 서구의 신문물 수입을 위해
기독교(가톨릭)를 등에 업었을 때 우리의 선조들은 자나깨나 당파 싸움에 몰입되어 있었다.
그들이 서구의 열강들과 자웅을 결할 만큼 강대해졌을 때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며 쇄국정책으로 맞선 사람
들이 후예가 감수해야 할 굴욕을 생각했겠는가.
오호통재( 嗚呼痛哉)뿐이로다.
우회 길이나 대체로가 없기 때문에 포기 아니면 울분을 극복해야 하는데 1.200km 헨로에서 이같은 무덤을
수시로 접하지 않을 수 없다니 이보다 더한 난관이 있겠는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해결의 길은 없고 각각으로 포기를 압박해 왔다.
정신적으로 기압골을 벗어나자 못하기 때문인지 말짱하던 몸도 최악으로 바뀌어 깄다.
그러나 지워버렸던 시코쿠 헨로(四國遍路)를 살려내고, 헨로미찌(遍路道)를 걷는 것은 전적으로 세월호의
참사로 인한 참담한 고통을 잊기 위함이 아닌가.
포기는 또 하나의 굴욕적 패배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기어코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절치부심 끝에 "이 1.200km 시코쿠 헨로의 극한적 난관을 극복, 무사히 마치고 귀국하게 되면 내년(2015
년)의 반년 이내에 남은 4개의 까미노(Main Caminos)를 완주하겠다"고 그 분과 자원 약속를 한 것이다.
진퇴유곡의 난관을 뚫기 위한 극단적 서원이었다.
종교에서 서원이란 신앙의 주체와의 특정한(조건부) 약속을 말한다.
기독교(특히 가톨릭)의 서원은 "특정 선행을 전제로 한 하느님과의 약속 행위"를 말하는 교리다.
불교에서는 부처와 보살이 중생 제도의 소원 성취를 마음속으로 염원하거나 성취의 맹서를 의미한다.
용어가 다를 뿐 모든 종교의 신앙 행위에는 필수적이다.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라는데 기성 종교와 무관한 사람이라도 내면에는 나름의 종교 행위로 자리잡고 있다.
까미노에서는 서원의 실체를 종종 목도하게 된다.
불시에 직면하는 재난 또는 횡액이 불가항력으로 느껴질 때, 개인 또는 집단적 서원을 한다.
재난과 횡액이 물러간 후 서원은 반드시 이뤄지는데, 워낙 다급하게 한 약속이라 합리적이지 못하거나 어색
한 성취가 되기도 한다.
반 밀레니엄(millennium) 세월 이전의 일인데도 온몸으로 직접 겪은 식민 압제의 질곡까지 겹쳐 되살아남
으로서 헨로 초반에 포기해야 할 처지에 직면했다가 49일 만에 서원 이행의 과제를 안고 무사히 귀국했다.
그랬기에 아내와 자식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이베리아 반도로 간 것이다.
그러므로 남은 까미노들 걷기를 마칠 때 까지는 까미노 걷기 외에는, 까미노 걷기를 지연시키거나 훼방하는
일체가 사탄의 유혹일 수 밖에 없다.
앞 장(前回/59-1)에서 언급한 대로 까미노에서 뻬레그리노스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문제들은 악마의 유혹으
로 단정하면 쉬이 해결된다.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각기 다른 주제로 3번이나 받은 예수의 최종 대응은 "사탄아 물러가라"였다.
공자의 말을 따라도 된다.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論語學而篇)
"근본이 확립되면(확립되어야) 바른 길이 절로 열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내게 띠아구는 야누스였다 할까
선량한 볼런티어였는가 하면 결과적으로는 유혹하는 사탄.
미련이 남아있을 리 없다.
정중히 사양하는 내 뜻을 알 리 없는 띠아구는 아쉬운 듯 따구스 강안의 시립 꼰스딴띠누 빨랴 유원(Jardim
Municipal Constantino Palha)까지 동행해 주었다.
욕심을 다스리면 황금도 돌로 보인다.
고려 말의 충신 최영(崔瑩) 장군의 말로 알려진 '견금여석'(見金如石)이다.
실은 그의 부친(崔元直)이 임종 중인 아들(崔瑩)에게 한 유훈이란다.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여느 해안도 능가할 만큼 아름답게 느껴졌던 따구스 강안의 긴 정원.
조금 전과 전혀 달리 시시해 보였다.
게다가 띠아구와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곁눈질 할 겨를이 없게 되었다.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할까.
갈리시아와 카스티아 이 레온 처럼 하면 안될까
아무리 무사통과를 다짐했다 해도 꼰스딴띠누 빨랴 광장(Praça Constantino Palha)의 조각상(Sculpture
/Monumento de Homenagem ao Cais da Jorna)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이 작품은 리스본 출신 조각가인 두아르떼(João Duarte/1952~ )의 흥미로운 청동 조각품들이며 일자리를
찾기 위해 조르나 부두(Cais da Jorna)에 모여드는 남녀 노동자들을 기린 기념비란다.
배를 타고 온 감독들에게 선택되면 레지리아(leziria/江岸의 저습지,침수지)의 들판이나 지자체의 공장들로
가서 하루를 일한다.
선택을 받지 못하면 그 날은 공치게 되며 이른 아침의 우리 주변에서도(소위人力會社) 더러 볼 수 있는 광경
인데 힘든 일을 하는 노동자라기 보다 매우 코믹해 보이는 모습이 인력(引力)을 발휘하고 있다 할까.
내년(2016년)에는 이 조각상에서 150m쯤 남하하는 위치에 어느 흉상(Busto de Álvaro Guerra)이 세워질
것을 예고하고 있다.
빌라 프랑까 지 시라(VFX)의 작가, 외교관 및 언론인이었던 '알바루 게하'(Álvaro Guerra1936~2002)란다.
부두 광장(Largo Cais), 부두 길(R. Cais) 등 긴 강안길 까미뉴 뻬도날 히베이리뉴(Caminho Pedonal Ri
beirinho/강변 보행자로)를 따르는 남서진이 생각 보다 더디어 갔다.
강안에 눈을 사로잡는 것들이 많다는 뜻이다.
프레게지아가 VFX에서 '알량드라, 상 주앙 도스 몬치스 에 깔량드리스'(Alhandra, São João dos Montes
e Calhandriz/2013년의 행정개혁으로 통합)로 바뀌기 까지.
따구스 강을 떠나 내륙 진입 직전의 강안 4km쯤에는 역사성 있는 랜드마크(Antigo cais de embarque)를
비롯해 공원과 레저 센터, 하이킹 구역과 관광 명소(tourist attraction)가 많기 때문이기도.
그러나 모든 것을 생략하고 잠자리를 만들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이미(체험으로) 알고 있는 사실은 까미노 뽀르뚜게스의 뽀르뚜갈 구간은 같은 이베리아 반도 땅이지만
스페인 지역에 비해 뻬레그리노스를 위한 시설(Albergue)에 인색하다는 점이다.
뽀르뚜갈의 지자체인 아잠부자 이후, 또 하나의 시 종점인 수도 리스보아(Lisboa/Lisbon)까지는 내가 묵을
알베르게(10€ 미만)가 전무하니까.
지자체 VFX의 알량드라(Freguesia)에는 값의 고하와 관계 없이 아예 없으며 이전(프레게지아VFX)과 다음
(Alverca do Ribatejo e Sobralinho)의 프레게지아에 있기는 하나 최저가가 내 상한가의 150%를 넘는다.
갈리시아(Galicia/스페인)는 까미노의 성지(Camino de Santiago/Santiago de Compostela)가 지기네의
자치 지방이라는 이유만(자긍심)으로 뻬레그리노스(Peregrinos)에게 물심 양면의 최선을 다한다.
도농 불문하고 알베르게가 무수하거니와 전체 알베르게가 최저가(實費)로 담합(逆가격 Kartell?)하고 있다.
이윤의 추구와 뻬레그리노스를 위한 서비스, 양자 중 후자를 택한 것이다.
식사도 봉사적이다.
음식점 메뉴판에 '뻬레그리노스'라는 특이한 이름이 등장한 곳이 적지 않다.
양과 질이 뛰어나면서도 져렴한 가격인 것이 특징이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속담처럼 종일 걷기만 하는 뻬레그리노스에게 맛 없는 음식이 있으랴마는 맛깔스럽고
푸짐한 기분이게 하는데다 이런 집일 수록 리필(refill)을 잊지 않는 주인의 후덕한 마음이 함께 한다.
이베리아 반도의 중앙고원 북부에 위치한 까스띠야 이 레온(Castilla y León) 자치지방 정부는 모든 까미노
의 가이드 북을 비롯해 뻬레그리노스에게 도움이 될 각종 책자들의 제작에 천문학적인 거금을 쓰고 있다.
뻬레그리노스에게 무상으로 무제한 공급하고 있는데, 까미노의 메인 루트는 물론 각 지선 루트들을 포함해
가장 많은 까미노가 자기 지방을 경유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란다.
17개 자치지방(Comunidad autónoma)과 2개의 자치 도시(ciudad autónoma)로 되어 있는 스페인에서
가장 큰 면적(505.990㎢의 18.62%인 94.223㎢)의 자치 지방인 까스띠야 이 레온.
뽀르뚜갈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내륙 지역으로 서북의 갈리시아를 비롯해 시계방향으로 9개 자치지방(Gali
cia, Principado de Asturias, Cantabria, Pais Vasco, La Rioja, Aragon, Castilla-La Mancha, Com
unidad de Madrid, Extremadura)과 접해 있다.
그러므로, 갈리시아에 소재한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Santiago de Compostela)로 이어지려면 대부분의
까미노가 이 지방을 경유할 수 밖에 없는 지리 때문인데도 그들의 자부심이 되고 있는 까미노다.
이에 반해 피레네 산맥(los Pirineos/국경)을 넘을 뿐인 프랑스 길과 아라곤 길, 대서양의 북쪽 길(Camino
Norte de Santiago) 등에 접해 있는 프랑스와 뽀르뚜 길의 뽀르뚜갈에는 야속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비록 뻬레그리노스를 자임한다 해도 겉과 속(言行)이 제각각인 프랑세스(Francés)에 대해서는 어떤 기대도
없지만 뽀르뚜게스(Português)에 대한 실망은 아마도 내가 그들에게 호의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