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11월 17일 목요일 맑음
“어어, 오늘은 아침에 오셨네요. 매 번 밤에만 오시더니....”
“예 그렇게 되었어요. 일찍 출근하시네요”
백제당 막내 아드님이 반갑게 인사를 해 주신다.
어젯밤에 거름을 가지러 9시 경에 간다고 약속을 하고, 8시 50분에 도착해 보니 문이 잠겨있었다.
‘약속을 잊으셨나 ? 추운 밤이니까 그냥 들어가셨나 ?’
그동안 백제당에서 거름 싣는 일은 일하시는 분과 연락을 주고받아 해결해 왔었다. ‘이런 일은 없었는데.... 혹시 귀찮아 하시는 것은 아닐까 ?’ 헛걸음을 하고 새벽에 다시 와서 거름을 싣는 중이었다. 두 번 일이 된다.
얼른 싣고 가서 아들들이 학교 가기 전에 얼굴을 보고 정산으로 떠나고 싶었는데 이미 시간은 늦었다. 은근히 서운하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 두 아들이 모두 집에 있는 것이 아닌가.
“너희들 학교 아직 안 갔어 ?” “오늘 수능일이잖아요”
충희는 학교를 쉬고 충정이는 한 시간 늦게 간단다.
“아 참, 세월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고 살았구나. 충희야 내년 오늘이 네 수능일이야. 공부 열심히 하자” “예 아빠” 대답은 시원해서 좋다. 우리 큰 아들.
정산으로 출발하니 마음이 가벼워진다.
도착하자마자 버섯밭에 들렀다. 별 기대는 하지 않으면서도 습관이 되었다
‘어라. 버섯이 솟아오르고 있네. 그것도 많이. 이 거 신난다’
“어머님 버섯이 많이 올라와요” “얼마만 해 ?” “이만 해요”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여 드렸다. “날씨가 좋아야 클 텐데... 추우면 그냥 얼어 붙어” “그래요 ?” 이젠 날씨가 좋기만 기다려야겠다. 기대가 된다.
서당골에 와서 거름을 내리고 은행을 줍기 시작했다
‘이번 주 안에 끝내기 어렵겠는데.....’ 일이 자꾸 뒤로 미루어진다.
은행을 주으면서도 여러 생각이 뒤엉켜 집중이 안 된다.
‘집에 자주 가지 말까 ?’
집에만 가면 싸움이 일어난다. 티눈 때문에 5일을 있는 동안에 두 번이나 티걱거렸다.
토요일에는 아이들 교육 문제로, 화요일에는 싸울 일도 아닌데 싸움이 이루어졌다.
월요일에 안사람이 회식이 있다고 했다. 그러려니 했지.
설거지에 쓰레기 치우는 일까지 싹 해치웠다. 마누라한테 칭찬 들으려고....
11시쯤 되어 거나해서 들어왔다. 몸이 야간 비틀거린다.
“좀 덜 먹지 그랬어” “다른 사람은 소주 먹었지만 난 그래도 청하를 먹어서 덜 취했어” 하면서 침대에 눕더니 골아 떨어진다.
‘술도 잘 못하면서..... 교무 하려면 어쩔 수 없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화요일에는 축구 시합을 보고 나서 설거지를 말끔히 했다.
귀농일기를 쓸래도 안 방에서는 안 사람이, 충희 방에서는 충희가 컴퓨터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 한 사람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겠구나’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는데 안사람이 방에서 나왔다. 그 때 충정이가 “엄마, 왜 나왔어 ?” 하니까, 마누라 하는 말이 “네 아빠가 밥 안했다고 혼낼까봐 나왔어”한다. 이게 웬 말인가 ? 뭔가 뼈가 있는 말이다.
‘아하, 나보고 밥을 안 해놨다는 얘기 아닌가’ 또, 밥을 안 한 것이 탈이다.
그런데 설거지는 습관적으로 되는데 밥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설거지까지 만이라도 큰 일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 세대들의 공통점일 거라 생각한다. 거기까지는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TV로 달라들어 코드를 쑥 잡아 빼는 것이 아닌가.
“왜 그래. 설거지도 다 해놓고, 컴퓨터가 빌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소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나보고는 드라마 보지 말라고 해놓고 당신은 왜 TV를 봐” 이건 완전 시비다
그동안 마누라가 드라마에 너무 몰두하는 것 같아서 몇 번 당부를 했었다
“당신 보면 드라마 중독인 것 같애. 드라마에 빠지지 말고 온 집안이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보자. ”하면 “그럼 당신도 스포츠 보지마”하고 반발 했었다.
드라마를 안 보면 학교에서 대화 거리가 없대나 어쩠대나
‘그놈의 학교에선 맨날 드라마 얘기만 하나 보다’했었다.
그런데 그 얘기는 오늘 분위기하고는 영 딴판인 엉뚱하기 짝이 없는 얘기다. 이 건 의도적인 도발이야. 그러니 싸움이 될 수밖에...
소리가 커지니까 충정이와 충희가 가운데를 막아 선다. 전엔 없던 일이다.
‘우리 아들들이 다 컸네’ 대견했다. 그대로 풀려고 소파에 앉았다
그 때 안사람이 마지막으로 내 뱉는 말이 “어쩌다 술 한 번 먹고 들어왔다고 눈을 하얗게 흘겨 ? 자기는 술이 곤드레 취해서 들어온 날이 얼마나 많았었는데.... 누구는 마누라 술 먹었다고 차를 갖고 데리러 왔어”
아하 ! 이건 어제부터 못 풀고 쟁여놨던 감정이다. 의문이 확 풀린다.
그런데 술 먹었다고 눈을 흘긴 적은 없었고, 걱정으로 너무 마시지 말라고는 했었지. 미웠으면 이불을 덮어 주었겠는가 ? 그 건 완전 오해다. 자기가 그렇게 받아들였을 뿐이지.
또 발바닥이 아파서 걷지도 못하는 나보고 태우러 오지 않았다고 탓하는 것은 아닐테고 그 게 부러웠던 모양이다. 아니면 나를 훈련 시키려고 했던지....
얼마 전 이런 얘기를 하더라
“누구 남편은 실직을 하고 집안 일을 맡기로 했대” 밥하고 빨래하고 도맡아 한단다. 그 게 그렇게도 부러운가 ?
그리고 나는 실직이 아니라 농부로 전업한 것이 아닌가 ?
연금도 꼬박꼬박 나오고, 밤 값도 얼마는 했지 않았는가 말이다. 앞으로도 돈 벌거고....
“밥, 밥”하면서 나를 밥까지 하게 훈련시킬 속셈이 있는가 ?
밥하는 것은 별거 아니지만, 그러면서 하나하나 더 늘려나갈 속셈이라면....?
누구에게서 ‘남편 길들이기 법’을 전수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
한 번 찔러 보고 반응을 살펴보고 있는 건 아닌가 ?
퇴직했다고 얕잡아 보는 것인가 ?
벌써부터 이런다면 앞으로 어디까지 갈 건가 ?
지금도 이런데 더 늙으면 어떤 대접을 받을 건가 ?
그럼,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나 ?
나도 자존심 하나 갖고 살아온 사람인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대충 넘어갈 일은 아니다.
지금은 전환기, 새로운 질서를 어떻게 잡아나가야 할까 ?
그러니 상념이 깊어갈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