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과 공생 발전하는 나라, 호주와 뉴질랜드 기행문
1.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8월 16일 저녁 7시 반경에 인천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 KE121기는 지루한 비행 끝에 드디어 호주의 시드니 공항에 도착하였다.
시드니 시각으로 6시 30분에 도착하였으니, 무려 10시간이 걸려(서울과 시드니의 시차는 1시간) 나의 첫 외국 나들이는 시작된 셈이다.
저녁 식사와 다음날 아침 식사는 비행기에서 제공하는 비빔밥과 양식으로 대신하였는데, 신체적 활동이 없이 밥만 먹자니 배가 더부룩하기 짝이 없었다.
다른 여행객들은 대부분 비행기 좌석에 설치된 이어폰과 비디오를 통해 영화 감상 등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영화에 별로 취미가 없는 나는 오디오로 음악만 내리 들으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지루하면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보기도 하였지만 의식은 너무나 또렷하여 잘 수가 없었다.
7박 9일 여행 일정의 첫날은 이렇게 비행기 안에서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면서 지났다.
그래도 한 가지 즐거움이 있었다면 늘씬한 미모의 여승무원들이 수시로 오가며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었는데 어쩌면 어디서 저리도 아름다운 여자들만 선발했는지 감탄할 정도였다.
스튜어디스 중에는 외국인 여성도 있었는데 중국인, 베트남 여성이었다.
그녀들 역시 우리말에 유창하고 모습도 우리나라 사람과 비슷해서 이름표에 새겨진 국기를 보지 않고는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과거에는 스튜어디스라는 직업이 여성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종이라서 경쟁이 심했지만 요즈음은 그녀들이 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 3D 업종에 포함될 만큼 기피하는 경향까지 보인다고 들었는데 사실과 다르게 느껴졌다.
(이런 나의 인식은 호주에서 ‘퀀터스’라는 호주 국적 비행기를 타면서 수정되었다.)
10시간 동안 비좁은 비행기 좌석에서 잠 한숨 자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갇혀 있다가 마침내 비행기에서 내리게 되자 외국 땅을 처음 밟아본다는 기대나 설렘보다 우선 몸이 자유로워서 좋았다.
우리 여행단 24명은 시드니 공항에서 입국수속을 밟느라 1시간여를 지체하였다.
내가 가지고 간 복분자주와 녹차 봉지가 통관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어 우리 여행단의 가이드인 현수미 소장에게 맡겼고, 현소장의 노력으로 우려와는 달리 무사히 통관되었다.
입국 수속을 마친 우리에게는 휴식을 취할 장소나 시간이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겨우 공항 화장실에서 세면을 하거나 용변을 보는 정도로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밤새 비행기에서 시달린 끝에 도착한 시드니 공항에서 우리는 곧바로 여행 이틀째 일정에 들어가야만 했다.
나는 늘 규칙적으로 아침이면 화장실에서 차분히 용변을 봐야만 쾌적한 하루가 시작되는 게 몸에 배어 있었는데, 이역만리 공항 화장실에서 시간에 쫒겨 화장실을 들어가니 내 배변 습관이 작동될 리도 없으며, 불안한 심리 상태에서 소변마저도 시원하게 보지 못할 만큼 몸이 당황하고 있었다.
그렇게 비행기에서 날밤을 새운 끝에 휴식도 없고, 용변도 보지 못한 심한 복부팽창감에 부대끼는 비몽사몽간에 관광버스에 올랐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르면 여행의 첫날만 이런 고된 스케줄이고, 이튿날부터는 편안하고 쾌적한 여행이 될 것이라며, 우리를 달랬지만 나는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평소에 잠자리만 바뀌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가 하면, 음식도 무척 까다로워서 외국 여행이 나에게는 즐거움보다는 부담으로 여겨졌었는데 시작부터 내 몸과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아침 9시에 NSW (New South Wales)주 교육청을 방문하기로 되었는데 시간이 20여분 여유가 있다고 하면서 오페라 하우스가 건너다 뵈는 건너편 공원으로 사진 촬영을 하러갔다.
아침 일찍이어서 그런지 공원에는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아 무척 조용하였고, 놀라울 만큼 깨끗하였다.
이후 일주일 여의 호주와 뉴질랜드 여행 중에서 우리는 길에 떨어진 휴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그곳의 거리는 청결하였다.
우리 일행은 오페라 하우스를 배경으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간 사진으로만 보던 그 유명한 오페라 하우스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는 감회에 젖어 한참이나 너나없이 즐거워했다.
우리 일행은 10여 분의 공원 산책과 사진 촬영을 마치고, 시대 중심가에 있는 NSW (New South Wales)주 교육청을 방문하였다.
공원에서 불과 차로 5분 거리인 주 교육청의 모습은 내 기대와는 상당히 딴판이었다.
호주는 6개의 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가장 큰 주인 NSW주의 교육청이라 하여 최소한 우리로 보면 전라남도 교육청 규모 이상을 기대했었다.
인구의 규모로나, 학교수 등 모든 면에서 NSW주의 크기는 전라남도의 규모를 넘으면 넘었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청의 청사는 나의 기대와는 완전히 어긋난 것이었다.
교육청 청사는 시드니의 번잡한 시내의 한 빌딩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아마 건물 전체가 청사가 아니고 일부만 청사로 활용하고 있는 듯 보였다.
우리나라의 관공서가 공통으로 갖는 단독 건물로 된 청사와 드넓은 주차장 ,운동장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풍기는 청사였다.
New South Wales주 교육차관의 한 시간여의 브리핑을 통해 호주 교육제도의 전반에 대해 알게 되었다.
주정부의 교육차관이라는 분은 여성이었으며, 권위적인 모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실무적인 공직자의 전형이었다.
브리핑의 내용을 한국인 가이드가 통역하고 우리는 그 통역을 통해 호주 교육의 실상을 접하는 식으로, 우리의 궁금증 역시 가이드의 통역을 통해 해소되어야 하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연수단은 매우 진지하게 브리핑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질의응답 시간의 마지막 순서에서 나는 세 가지 질문을 하였는데 그 중 하나는 호주 교원노조와 교육청과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호주의 교원노조 가입률은 약 90% 정도이며, 교육청과 교원노조 사이에 원만한 협조체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으며, 호주의 교원은 정치적으로 자유스럽게 권리를 행사 한다고 하였다.
정당에 가입하는 것은 물론 우리나라의 교수들처럼 피선거권을 행사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저조한 교원노조 가입률이나 정당 가입은커녕 후원금만 냈다고 해서 처벌하는 풍토와는 너무나 상이하였다.
교육이 선진화하려면 제도가 뒷받침되어야하는 데, 금지와 제재 일속인 우리의 교육법 (제도)이 아쉽게 느껴졌다.
주 교육청사의 왜소한 모습이나 교육차관의 성의껏 준비된 브리핑, 예정 시간보다도 1시간 가까이 초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질의에 진지하게 답변하는 모습, 그리고 브리핑의 내용에 담긴 호주의 교육제도 전반이 우리의 교육 현실과 극명하게 비교되었다.
그들에게 경제적으로 선진국이네, 교육 선진화가 이루어졌다고 평가하는 이유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전라남도교육청에서 선발된 학력, 인성 지도 우수교사로 이루어진 호주, 뉴질랜드 국외 연수단으로 전라남도 각 시군에서 한 명씩 선발된 교사이며, 우리의 인솔을 위해 도교육청 이용덕 장학사와 무안초등학교의 이화진 교감이 단장으로 선발되었다.
남자 10명, 여자 14명으로 이루어졌으며, 남자 중에서는 내가 가장 연장자이며, 여자 단원중에는 나보다 1년 선배 교사도 있었다.
대체적으로 남성보다는 여성 교사가 경력이나 지위가 높아서 우리들 남자 10명은 여성 단원들에 비해 소극적인 편이었다.
더구나 호주와 뉴질랜드는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우대받는 사회라서 우리의 입지는 더욱 위축되었다.
호주 현지 가이드의 말을 빌리면 호주에서 대우받는 순위를 매기자면 여성이 1위이고, 다음으로 어린이, 노인이며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개와 고양이이며, 그 다음으로 여섯 번째가 남자라고 한다.
웃자고 하는 소리이겠지만 그만큼 호주 사회에서 남성의 위상이 여성에 비해 열세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여행일정 내내 우리 남성들은 그리 활력을 보이지 못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연장자인 내가 그 중요한 역할을 아니 했다고 할 수 없기에 내 책임이 더욱 컸었다.
교육청을 들어가고, 나서는 동안 버스에서, 공원에서 보았던 시드니 시가지의 인상을 몇 줄 적어본다.
호주의 인구는 약 2000여 만 명으로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이 되지 못하지만 국토의 넓이는 한반도의 열 배가 넘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것도 막대한 광물이 매장된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어서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얼마나 복 받은 나라인가?
이러한 나라의 최대 도시인 시드니에는 호주 인구의 약 1/4인 400여 만 명이 살고 있으며
시드니 시의 땅 넓이는 서울보다도 훨씬 넓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차를 타고 시드니 중심가를 지나도 우리나라의 대도시에서 느끼는 번잡함, 소란스러움을 전혀 느낄 수가 없는 무척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대부분의 시가지의 도로들은 왕복 2차선 또는 4차선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시가지 대부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풍스런 건물 때문이라고 했다.
3층에서 5층 높이의 중세풍의 건물들이 연이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데 이 건물들은 적어도 100년 나이를 훌쩍 넘긴 것들로 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허물어뜨리고 고층건물을 신축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래된 건물들은 국가나 주정부에서 보존의 책임을 지고 관리하고 있기에 전혀 낡았다는 인상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깨끗하고 단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대개의 고 건축물들은 도로의 양편에 이웃건물과 틈새 없이 도열해 있었는데 마치 다정한 친구가 어깨동무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우리나라 건축물과 대조되는 모습은 바로 건물과 건물들이 틈이 없이 붙어 있다는 점이었는데 이곳의 법이나 제도는 우리의 생활양식과 건축법과는 너무나 판이하였다.
우리나라는 이웃하는 건물이 각기 자기가 소유한 대지 위에서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게 상식이고, 법적인 규제인데 이 나라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제도와 어떤 생각들을 가졌기에
대부분의 건물들이 붙어 있는 것일까?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시드니 시내의 주택 가격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비싸다고 하는 데 그것이 이런 기이한 모습의 건축물들을 탄생하게 했는가 하는 의구심을 들게도 했다.
또 대부분의 건물들의 색조인데 고풍스런 건물들은 당연히 건축재의 재질을 살려 파스텔 톤의 은은한 빛으로 전체적으로 편안한 느낌을 주었으며, 건물의 외관에 어떠한 돌출형 간판도 없었다.
건물의 출입구 또는 쇼윈도우 위편에 건물의 이름을 새겼을 뿐 어떠한 장식도 없었다.
그 건물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기호나 알파벳 표기 이외의 설명이나 도식적인 안내가 없었기에 쇼윈도우를 들여다보지 않는 한 그 건물이나 가게의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절제된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렇게 단순하고 안정된 시가지의 모습을 여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시드니의 시가지의 모습 위로 자꾸만 우리나라 대도시의 화려하고 요란스런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그렇다고 시드니 전체가 이렇게 고풍스럽지만은 않았다.
중심가 일부는 그러니까 가장 상업적으로 발전한 구역에서는 우리나라처럼 하늘을 가릴 듯한 고층빌딩들이 즐비하였고, 그러한 건물들은 매우 세련되어 보였다.
한마디로 현재와 근대가 공존하는 현장이었고, 그러한 공존이 시드니를 세계 3대 미항의 하나로 발돋음하게 하지 않았나 하고 짐작하게 하였다.
시내와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항구는 붙어 있었다.
시드니라는 도시가 굴곡이 심한 만(하버)에 세워졌기 때문에 바다 자체가 시가지의 중심으로 요철을 드나들고 있었고, 그 중심에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리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오페라 하우스를 직접 발로 밟을 수 있었고, 오페라 하우스 내부의 일부를 관람하였다.
내부 관람이라야 겨우 매점이나 매표소, 화장실 정도였는데, 공연장을 들어가 보지 못한 까닭은 공연 티켓을 사서 입장하는 입장객 외에는 공연장을 개방하지 않는다는 규칙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공연장 구경을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기라도 하듯 화장실에 우리의 흔적을 남기고 왔다.
오페라 하우스는 크게 두 개의 공연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왼편의 보다 큰 건물은 일반 공연장으로 고가의 대관료를 내면 누구나 공연이 가능한 데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송대관과 조수미 등 3명이 이미 공연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오른편의 작은 공연장은 오페라 전용 공연장으로서 전 세계 유수의 오페라 단이 앞다투어 공연을 하고 있다고 했다.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미항의 상징인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은 무대 예술가에는 평생의 숙원일 법한 일이라고 수긍이 되었다.
오페라 하우스의 건립에 대해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귀가 쫑긋해졌다.
오페라 하우스는 1957년에 세워졌는데 세계적인 공모에서 당선된 네덜란드 건축가의 설계작품이라고 한다.
오페라 하우스는 외부 곡면의 경사가 급격하여 사람이 인공적으로 청소를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빗물에 의해 자동 세척이 되도록 골을 만들었으며, 표면은 타일로 부착하였다.
그래서 빗물이 흘러내리면서 때나 오물이 씻겨 내려가는 구조를 택했는데, 그래도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갈매기 떼였다고 한다.
갈매기가 날아다니거나 내려 앉다보면 갈매기의 배설물이 오페라 하우스의 외관을 더럽히게 될 것이라는 우려로 인해 이를 방지할 특수 장치를 하였다고 한다.
그 특수 장치라는 것은 오페라 하우스 주변에서 갈매기가 싫어하는 음파를 발사한다는 것이었다.
사람에게는 인식되지 않지만 갈매기를 쫒아내는 그 특수한 음파 발송 장치 덕분에 오페라 하우스는 갈매기의 배설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나의 관심을 더 끌었던 대목은 오페라 하우스의 건립 자금에 대한 설명이었다.
1950에 일어난 6.25 한국전쟁 때 호주가 참전국이라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었는데 호주는 당시 한국전쟁의 군수품 보급기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전쟁 덕분에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이 축적된 부의 사용처를 놓고 호주국민들은 세계적인 문화센터를 짓기로 합의를 했다는 것이다.
50여 년 전에 이러한 현명한 선택을 한 호주의 선진 국민 의식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그러한 자금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하고 추측해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결정은 호주의 시드니를 세계 3대 미항의 반열에 올라서게 했으며, 그 동인이 발 한국전쟁이었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 한 일인가?
한 쪽에서는 전쟁의 폐허로 세계 최빈국이 되어 밀가루 원조로 끼니를 연명하고 있는데, 그 반사 이익을 얻은 한쪽에서는 세계적인 명 건축물을 지을 사치스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아무튼 오페라 하우스는 우리가 사진 촬영을 하면서 즐기기에는 무언가 깨름직한 사연을 전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