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3. 5. 5 코펜하겐~1855. 11. 11 코펜하겐. 합리론을 비판한 덴마크의 종교철학자.실존주의 철학자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초기 생애 키에르케고르의 성격은 아버지 미켈 페데르센 키에르케고르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는 서부 유틀란트의 황무지에서 한 가난한 소작인의 조수로 일을 시작했다. 어느날 신이 자신의 고통과 가난에 무관심한 데 절망과 격분을 느껴 언덕 위에 올라가 준열하게 신을 저주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코펜하겐에서 목재상을 하고 있던 삼촌에게 갔는데, 그때부터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하여 죽을 때는 수도 코펜하겐에 5채의 집을 소유한 부자가 되었다. 1838년 아버지가 죽자 키에르케고르는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으며, 그 덕분에 금전문제에 방해받지 않으면서 저술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키에르케고르가 한 사람의 인간이자 작가로서 성장한 데는 재정적 유산보다는 심리적 유산이 훨씬 더 크게 작용했다. 그의 아버지는 정통 루터교를 엄격히 고수했고 형식논증의 논리를 좋아했지만, 아들 중에서 가장 총명한 키에르케고르에게 시킨 엄격한 종교적·지적 훈련은 상상력이 넘치는 것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의 강한 성격과 경건한 모습 이면에 불안하게 놓여 있는 억눌린 우수의 영향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죄의식을 알게 되었으며, 뒷날 그 이유가 아버지가 어릴 적에 신에게 퍼부었던 저주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죄를 알고 충격을 받은 그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고 어머니의 죽음과 6명의 형제 자매 중 5명의 죽음이 신의 저주를 증거한다는 확신이 늘 그를 괴롭혔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러 코펜하겐대학교에 갔으나 오히려 철학 쪽에 관심을 가졌다. 1838년 아버지가 죽자 키에르케고르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신학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2년 뒤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목표를 바꾼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레기네 올센이라는 어린 소녀와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그 어린 소녀와 설명할 수 없는 죄의식과 복잡한 인간정신에 대한 유별난 의식에 짓눌리고 있는 자신 사이에 커다란 틈이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파혼했고 베를린으로 가서 6개월을 살았다. 이 사소한 연애사건은 통속소설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그의 몇몇 저작에서 반성과 해설의 자료가 되었다. 초기의 철학 저술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삶의 단상〉(1843)의 방대한 원고를 가방에 넣고 베를린에서 돌아왔다. 키에르케고르의 책은 거의 모두가 익명이나 각 저작에 어울리는 가명으로 출판되었다. 이것은 독자들에게 내놓는 사상을 권위자의 견해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독자들의 판단, 특히 선택을 위해 제시된 다양한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이것이 책 제목인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의미이다. 즉 이 책은 미적 인생관 또는 윤리적(윤리종교적) 인생관의 대안을 제시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각 개인이 삶의 여러 길 가운데 하나를 완전히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고 믿었는데, 그의 이러한 생각은 모든 실존주의 사상과 저술에서 기초가 되었다. 같은 해에 출판된 〈공포와 전율〉·〈반복〉에서는 신앙이란 본질적으로 역설적이라고 결론짓는다.
1844년에는 〈철학 단상〉·〈불안의 개념〉을 발표했다. 그는 〈철학 단상〉에서 그리스도교가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모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그리스도교가 자유의지를 전제로 존립하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색인:헤겔주의). 그는 자유의지가 없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고 믿었다.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헤겔 철학에 대한 공격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겔 철학과의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 전에 먼저 자유의 철학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심리학 분야로 확장할 필요를 느꼈다(→ 불안). 그 결과가 〈불안의 개념〉이었다. 비상할 정도로 통찰력이 번득이는 이 책은 아마 현존하는 최초의 심층심리학 저술일 것이다. 1845년 키에르케고르는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이라는 새 책을 준비했다. 이 책은 방대하며, 그의 저술 가운데 가장 성숙한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제목이 시사하듯이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담긴 사상을 반복하는 면도 있지만 사실상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종교적 단계 혹은 종교적 영역은 미적 단계만이 아니라 윤리적 단계와도 구분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색인:미학). 사실 이러한 발전은 인간 윤리가 삶의 방식으로는 부적합하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 이전의 모든 저술들에 구현되어 있는 생각들의 논리적 결과였다. 따라서 〈이것이냐 저것이냐〉에는 미적 영역과 윤리적 영역 둘만 있었던 데 반해 〈인생행로의 단계〉에는 종교적 영역을 포함해 세 영역이 있다.
인생과 인간성 전체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견해는 점차 음울한 쪽으로 나아갔다. 그의 심리적 분위기가 이렇게 바뀐 것은 불쾌한 경험을 많이 한 탓이었다. 레기네 올센은 결혼을 해버렸으며, 그리하여 속세를 벗어나 그녀와 일종의 신성결혼을 맺은 상태에서 오로지 신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때만 기다리던 낭만적 환상은 깨어지고 말았다. 사실상 이 환상은 〈공포와 전율〉·〈반복〉의 2책에 깔려 있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환상을 버렸다는 것은 〈인생 행로의 단계들〉의 제1부인 〈성찬〉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성찬〉은 플라톤의 〈향연〉을 본떠 사랑·에로스·성·여자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여성 일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가차없는 경멸을 담고 있다. 헤겔주의에 대한 공격 키에르케고르는 그밖의 몇 가지 점에 대해서도 실망했다. 그는 자신의 저술들에 담긴 취지를 제대로 보지 못하거나, 심지어 제대로 보면서도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애쓴 문학비평가들과 언쟁을 벌였다. 이 언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판명나기는 했지만 그의 마음은 깊은 상처를 받았고 인간에 대한 심한 혐오감으로 가득 찼다. 이 쓰라림은 그 후에 쓴 대부분의 저술들에서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언쟁 직후에 쓴 조금 색다른 책인 〈철학 단상에 대한 결론적·비학문적 후기, 모방적·감상적·변증법적 구성, 실존적인 기고〉(1846)는 인상적인 제목과 함께 "요한네스 클리마쿠스가 짓고 S.키에르케고르가 출판함"이라는 글귀를 달고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가장 중요한 철학 저서가 한 책의 후기 형태이며 그 책의 분량의 1/5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가 지닌 아니러니의 전형이다. 그리고 그 저서를 '실존적인 기고'라고 칭함으로써 독자에게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즉 그의 목표는 당대 유럽을 휩쓴 지배적 철학인 헤겔 철학에 보복을 가하는 일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실존하는 것 전체를 체계화하려는 헤겔의 시도를 공격하면서, 실존은 불완전하고 끊임없이 발전하기 때문에 체계로 구성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나아가 그는 논리에 운동성을 도입하려는 헤겔의 시도에서 논리적인 오류가 발생하는 것에 주목하고, 범주들을 뒤섞는 데서 혼란이 일어났다고 폭로했다. 헤겔은 자신이 객관적 인식론을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키에르케고르는 주관성이 진리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키에르케고르의 정의를 인용하면, "헌신성이라는 가장 정열적인 정신은 객관적으로 불확실하며, 이 불확실성이 실존적인 인간에게는 진리, 그것도 최고의 진리이다."
현대 실존주의의 초석이 된 이 교설은 헤겔이 자신의 철학을 가리켜 일컬었던 '체계'를 손상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철학 체계를 근거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체계를 구축하는 자는 실존을 지성으로써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절대로 깨닫지 못할 것이다. 헤겔은 실존과 사유를 동일시함으로써 신앙의 여지를 하나도 남겨 놓지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체계 속의 한 단락에 지나지 않는 것, 즉 일반자의 예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수모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도가 되도록 설교해야 한다는 소명감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동시대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지를 이해시키려는 의무감만큼은 확실히 느꼈다. 나아가 그는 신이 자신에게 특별한 임무를 지정해주었기에 글쓰는 일마저도 완전히 그만두어야 한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교회와의 대결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의 은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글쓰는 일을 그만둘 수 없었으며, 이번에는 사상을 구체적으로 다듬기 시작하는 일이 '소명'이 되었다. 그는 동시대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참모습을 알리는 임무와 세속사회에서 안락을 추구하는 등 한마디로 성직자가 그리스도의 종 대신에 시민의 노예가 됨으로써 종교를 배반한 덴마크 국교회의 수치스런 상황을 폭로하는 임무를 신에게 명령받았다고 생각했다(→ 색인:덴마크 복음주의 루터교 민족교회). 키에르케고르의 종교적 사고는 더욱더 엄격한 방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당시의 저술들, 특히 〈탐구 정신에 관한 교훈적 담론〉(1847)·〈사랑의 작품〉(1847)·〈그리스도교 담론〉(1848)·〈죽음에 이르는 병〉(1849)·〈그리스도교 훈련〉(1850) 등에서 그리스도교를 다른 어떤 저술보다 더 완고하고 비타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 훈련〉은 덴마크 교회의 지도부에 대한 공격을 가장한 것이기ㄱ도 했다. 1855년 무렵 그는 신에게서 국교와 성직자들을 가차없이 공격하도록 권위를 부여받았음을 확신하고는 즉시 많은 양의 소책자·팜플렛과 〈순간〉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 잡지는 그중 10권이 키에르케고르 혼자만의 기고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과도하게 진행된 국교회 비판운동으로 그의 건강은 몹시 쇠약해졌다. 운동을 시작한 지 거의 2년이 지날 무렵 그는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 1개월 후 죽었다. 그무렵에는 재산도 탕진한 상태였다. 졸도하기 전 〈순간〉 제10호를 인쇄소로 보내면서 남은 유산을 다 써버렸다. 그는 소유하고 있던 몇 안 되는 귀중품을 그가 사랑한 여자이자 당시 관리와 결혼하여 덴마크령 서인도제도에서 살고 있던 레기네 올센 앞으로 남겨 두었다.
현대 실존주의에 대한 영향
키에르케고르 저작의 정점을 이룬 국교회에 대한 치열한 공격은 관리하기가 무척 힘든 유산이었다. 이 책은 국교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했으나, 많은 성직자들 개개인이 국교회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수정하거나 심지어 인연을 끊게 만들었다. 키에르케고르 저작의 철학적·예술적 진가는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인정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1877년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최초의 저서를 출판하여 그의 사상과 삶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제공한 덴마크의 문학비평가 게오르 브란데스(1842~ 1927)의 공이 컸다. 브란데스는 공공연한 무신론자이자 그리스도교 증오자였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키에르케고르를 교회에 반항한 인물로 다루었다.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은 종교에 특별히 헌신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사상의 그리스도교적 교설에 찬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호소력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키에르케고르 저작집 초판의 편집자 3명 가운데 한 사람은 확고한 그리스도교도였고 다른 두 사람은 무신론자, 그것도 한 사람은 그리스도교회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자였다.
독일에서는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관심이 널리 퍼져 제1차 세계대전 전에 그의 모든 작품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이 광범위하게 알려진 것은 제1·2차세계대전이 진행된 기간이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프로이트주의 정신분석학자들이 기여했는데, 이들은 대개 '죽음에 이르는 병' 등 키에르케고르가 다룬 것과 똑같은 현상을 취급했다. 스위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카를 바르트의 신학도 카를 야스퍼스와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 사상과 유대인 종교사상가 마르틴 부버와 같이 실존주의 사상을 고양하는 데 공헌했다. 키에르케고르의 저작에 대한 결정적인 이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나타났는데, 이 과정에서 '불안'·'고통' 등의 상태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이루어졌다. 이제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관심은 영국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고독하게 죽은 뒤 약 1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그의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브리태니커백과>
키에르케고르<Sen Aabye Kierkegaard>
덴마크의 철학자. 코펜하겐 출생. 아버지는 비천한 신분에서 입신한 모직물 상인으로 경건한 그리스도교인이었고, 어머니는 그의 하녀에서 후처가 된 여인이었다. 7형제의 막내로,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체질이었으나, 비범한 정신적 재능은 특출하였으며 이것이 특이한 교육으로 배양되어 풍부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변중(辨證)의 재능이 되었다. 소년시절부터 아버지에게 그리스도교의 엄한 수련을 받았고, 청년시절에는 코펜하겐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하여 1841년에 논문 《이로니의 개념에 대하여》로 학위를 받았다. 그 동안에, 1837년경 그가 스스로 ‘대지진(大地震)’이라고 부른 심각한 체험을 하였다. 그 내용은 아버지가 소년시절에 유틀란트의 광야에서 너무나 허기지고 추운 나머지 하나님을 저주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과, 바로 자기자신이 결혼 전에 아이를 밴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것 등을 안 사실로 죄의식이 심화되었고, 인생을 보는 눈과 그리스도교를 보는 눈에 근본적인 변혁이 생겼다. 한편, 37년 당시 14세의 소녀 레기네 올센을 알게 되자, 곧 사랑의 포로가 되어 약혼까지 하였으나, 애정의 상극과 내면의 죄의식 때문에 41년 가을에 약혼을 파기하였다.
이른바 레기네 사건이며, 이 때에 체험한 정신적인 갈등이 훗날 미적 저작의 주제가 되었다. 그 후 한때 베를린에 나가 당시 명성을 떨치던 철학자 F.W.셸링의 강의를 듣기도 하고, 《돈 죠반니》 《파우스트》 등 많은 오페라를 관람하기도 하다가 이듬해인 42년에 귀국하여 저술을 시작하였다. 그의 활동은 활발하여 43~46년의 짧은 기간에 《이것이냐 저것이냐:Enten-Eller》(43) 《반복:Gjentagelsen》(43) 《공포와 전율:Frygt og Baeven》(43) 《불안의 개념:Begrebet Angest》(44)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Stadier paa Livets vei》(45) 등과 같은 이른바 미적 저작과 《철학적 단편:Philosophiske Smuler》(44) 《철학적 단편을 위한 결말의 비학문적 후서(非學問的 後書):Afsulttende uvidenskabelig Efterskrift til de Philosophiske Smuler》(46) 등의 철학적 저작을 모두 익명으로 출판하였고,이 밖에도 그리스도교에 관한 많은 교화적인 강화(講話)를 발표하였다. 그 후 저술에 싫증이 난 그는 시골의 목사가 되어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 풍자신문 《코르사르》에 그의 작품과 인물에 대하여 오해에 찬 비평이 실려, 그것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논쟁하는 사이에, 또 다시 그리스도교도로서의 새로운 정신활동과 저술을 향한 의욕이 용솟음쳤다. 그는 신문의 무책임한 비평과 세간의 비웃음에도 굴복하지 않고, 한편에서는 대중의 비자주성과 위선적 신앙을 엄하게 비판하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단독자(單獨者)로서의 신(神)을 탐구하는 종교적 실존의 존재방식을 《죽음에 이르는 병:Sygdommen ti1 D풼en》(49) 《그리스도교의 수련:Indoevelse i Christendom》(50) 가운데에서 추구하였다. 그는 기성 그리스도교와 교회까지도 비판하였으며 《순간》 등의 팸플릿을 통한 공격은 매우 격렬하였다. 그런 와중인 55년 10월 갑자기 노상에서 졸도한 후 다음달 병원에서 죽었다. G.W.F.헤겔의 범논리주의를 배제하여 불안과 절망 속에 개인의 주체적 진리를 탐구한 그의 사상은 20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국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1909년부터 독일에서 C.슈램프가 키르케고르의 번역집을 내어 당시 신진이었던 P.바르트, J.H.하이데거, K.야스퍼스 등의 변증법 신학자와 실존주의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그로부터 그의 명성은 현대 그리스도교 사상과 실존사상의 선구자로서 세계에 알려졌다. 1995년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오!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당신은 너무 추한 곳에 계십니다. 거룩한 영이신 당신이 부정하고 더러운 곳에 계십니다. 지혜의 영이신 당신이 어리석은 사람 안에 계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당신이 거짓에 속아넘어간 이 사람 안에 계십니다.
오! 거할 만한 곳을 찾아다니지 않는 분이시여, 제 마음에 계속 머물러 주소서. 창조자요 구속자이신 주님, 합당한 거처를 찾아보아도 한 곳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 하오니 제 마음에 계속 머물러 계시옵소서.
그러면 언젠가 어리석고 속기 쉽고 순결하지 못한 제 마음속에 만드신 거처를 기뻐하실 날이 올 것입니다.
<키에르케르고, 덴마크의 철학자·신학자, 1813-1855>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연구
- 정승원 합동신학대학교수의 현대신학해설
보통 '키에르케고르' 하면 자유주의 신학자 보다는 복음주의 신학자로 통한다. 물론 그의 신학에 긍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복음주의 신학자로 불리우기에는 그의 신학에 비성경적인 내용이 많이들어있다. 또한 그의 신학은 여러 현대 신학자들에게 은근히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살아있을 때 보다 죽은 뒤 몇 십년 지나서 더 유명하게 되었다.
그의 신학은 특별히 바르트와 불트만에게 리츨주의(Ritschlianism)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고 실존주의(Existentialism)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바르트는 '만약 한 사람의 철학을 택하라면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이다' 라고 말하기까지 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다른 자유주의 신학자들과는 달리 복음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의 주안점은 어떻게 관료적이며 형식적인 교회안에서 참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가에 있었고, 특별히 헤겔이 기독교를 철학적 체계로 추락 시킨 것에 많은 비판을 가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주장하기를 어떤 추상적 개념을 가지고는 개인의 존재와 행동을 바로 묘사할 수 없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 개인의 결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그 결단을 설명하는 구체적인 묘사라고 한다. 또한 기독교의 교리 역시 어떤 추상적 개념으로 설명될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개인적 결단으로 봐야 한다고 한다. 이런 결단과 관련해서 그는 '진정한(authentic) 믿음'과 '不진정한(inauthentic) 믿음'을 구분한다. 진정한 믿음은 역설적(paradoxical) 결단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의 유명한 논리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을 위해서는 어떤 '건너 뜀'(leap)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를 '종교 A'와 '종교 B' 두 종류로 나누는데, 일반적 종교와 형식적인 기독교가 '종교 A'에 속하고, 오직 믿음으로 다스려지는 참다운 기독교가 바로 '종교 B'에 속한다.
이 진정한 종교는 어떤 증거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지만 믿음위에 근거한다고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이 그 예라고 한다). 비록 '종교 A' 는 하나님을 단순히 관념으로 생각하지만 '종교 B'는 하나님을 인격으로 본다고 한다. 또한 그는 주장하기를 '종교 B'는 단순히 성경과 같은 어떤 명제적(propositional) 진리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한다. 종교적 명제란 참 믿음 없이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키에르케고르의 역설적 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 많은 강조를 한다. 하나님은 전적 타자(wholly Other)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질적으로 무한한 차이'(qualitatively infinite difference)를 주장한다 (이것은 바로 바르트 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반면에 하나님은 또한 우리와 함께 거하실 수 있는 동시대성(同時代性)을 지닐 수 있다고 한다. 참 하나님은 과학이나 철학, 즉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오직 '정열적 內性(inwardness)'에 의해 알 수 있는 분이라고 한다. 또한 역사 역시 어떤 개연성은 제공하지만 믿음처럼 확실성은 제공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계시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주관적 계시 이해와 그리스도에 향한 순간적 믿음을 주장한다.
그는 '만약 한사람은 참 하나님의 예배당에 올라가서 참 하나님의 지식을 갖고 기도하지만 거짓 영을 가지고 기도한다고 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우상이 가득한 집에서 기도하지만 영원한 자(하나님)에게 진지하게 기도한다면 누가 더 참 믿음을 가진자냐?' 물으면서 바로 우상 앞에서 기도하지만 참 하나님에 대해 기도하는 자가 참 믿음을 가졌다고 말한다. 참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잘못 기도하는 것이 우상 숭배라는 것이다. 이렇듯이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의 객관적 신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 계시나 진리보다 개인의 주관적 결단이 믿음의 정수요 참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키에르케고르의 신학을 크게 두 가지로 비판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신앙에 있어서 계시적 명제(성경)의 중요성을 간과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객관적 계시와 인간 개인이 갖는 주관적 이해 내지는 결단, 이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확실한지는 사실 자명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단지 개인의 실존적 결단의 필요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계시의 확실성과 역사성까지 부인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결국 성경의 권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적 혹은 실존적 믿음이 자신에게는 확실한 것처럼 느낄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러한 믿음은 오히려 근거없는 주관적 과신이나 착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개인적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믿음의 그런 개인적 특징은 먼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역설적 믿음을 참 된 믿음의 모델로 제시하는데, 사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개인적 신뢰와 결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그에게 명령하신(계시하신) 언약의 하나님의 미쁘심에 근거한 것이었다.
둘째, 키에르케고르는 역사, 철학, 윤리 같은 분야에 어떤 중립성(neutrality)을 부여하고 있다.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의 사고나, 역사나, 윤리를 초월하는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사고나 역사나 윤리 모든 것에 직접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 마음의 결단만을 주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영역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떠나선 어떤 중립적인 영역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식의 키에르케고르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로 하여금 좋은 신학적 도구를 제공했다고 하겠다. 특별히 그의 '역설적 믿음'이라는 개념은 복음적인 것 같지만, 사실 그런 개념은 계시의 역사성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역사성을 주관적 성찰로 하락시키고 하나님의 초월성이나 영원성을 순간적 참여나 내재성(immanence)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보는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생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정승원 합동신학대학교수의 현대신학해설>
키에르케고르 (Kierkegaard, 1813-1855)
보통 '키에르케고르' 하면 자유주의 신학자 보다는 복음주의 신학자로 통한다. 물론 그의 신학에 긍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복음주의 신학자로 불리우기에는 그의 신학에 비성경적인 내용이 많이들어있다. 또한 그의 신학은 여러 현대 신학자들에게 은근히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살아있을 때 보다 죽은 뒤 몇 십년 지나서 더 유명하게 되었다.
그의 신학은 특별히 바르트와 불트만에게 리츨주의(Ritschlianism)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고 실존주의(Existentialism)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바르트는 '만약 한 사람의 철학을 택하라면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이다' 라고 말하기까지 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다른 자유주의 신학자들과는 달리 복음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의 주안점은 어떻게 관료적이며 형식적인 교회안에서 참 기독교인
이 될 수 있는 가에 있었고, 특별히 헤겔이 기독교를 철학적 체계로 추락 시킨 것에 많은 비판을 가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주장하기를 어떤 추상적 개념을 가지고는 개인의 존재와 행동을 바로 묘사할 수 없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사람 개인의 결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그 결단을 설명하는 구체적인 묘사라고 한다. 또한 기독교의 교리 역시 어떤 추상적 개념으로 설명될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개인적 결단으로 봐야 한다고 한다. 이런 결단과 관련해서 그는 '진정한(authentic) 믿음'과 '不진정한(inauthentic) 믿음'을 구분한다. 진정한 믿음은 역설적(paradoxical) 결단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의 유명한 논리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을 위해서는 어떤 '건너 뜀'(leap)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를 '종교 A'와 '종교 B' 두 종류로 나누는데, 일반적 종교와 형식적인 기독교가 '종교 A'에 속하고, 오직 믿음으로 다스려지는 참다운 기독교가 바로 '종교 B'에 속한다.
이 진정한 종교는 어떤 증거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지만 믿음위에 근거한다고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이 그 예라고 한다). 비록 '종교 A' 는 하나님을 단순히 관념으로 생각하지만 '종교 B'는 하나님을 인격으로 본다고 한다. 또한 그는 주장하기를 '종교 B'는 단순히 성경과 같은 어떤 명제적(propositional) 진리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한다. 종교적 명제란 참 믿음 없이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키에르케고르의 역설적 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 많은 강조를 한다. 하나님은 전적 타자(wholly Other)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질적으로 무한한 차이'(qualitatively infinite difference)를 주장한다 (이것은 바로 바르트 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반면에 하나님은 또한 우리와 함께 거하실 수 있는 동시대성(同時代性)을 지닐 수 있다고 한다. 참 하나님은 과학이나 철학, 즉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오직 '정열적 內性(inwardness)'에 의해 알 수 있는 분이라고 한다. 또한 역사 역시 어떤 개연성은 제공하지만 믿음처럼 확실성은 제공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계시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주관적 계시 이해와 그리스도에 향한 순간적 믿음을 주장한다.
그는 '만약 한사람은 참 하나님의 예배당에 올라가서 참 하나님의 지식을 갖고 기도하지만 거짓 영을 가지고 기도한다고 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우상이 가득한 집에서 기도하지만 영원한 자(하나님)에게 진지하게 기도한다면 누가 더 참 믿음을 가진자냐?' 물으면서 바로 우상 앞에서 기도하지만 참 하나님에 대해 기도하는 자가 참 믿음을 가졌다고 말한다. 참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잘못 기도하는 것이 우상 숭배라는 것이다. 이렇듯이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의 객관적 신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 계시나 진리보다 개인의 주관적 결단이 믿음의 정수요 참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키에르케고르의 신학을 크게 두 가지로 비판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신앙에 있어서 계시적 명제(성경)의 중요성을 간과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객관적 계시와 인간 개인이 갖는 주관적 이해 내지는 결단, 이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확실한지는 사실 자명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단지 개인의 실존적 결단의 필요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계시의 확실성과 역사성까지 부인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결국 성경의 권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적 혹은 실존적 믿음이 자신에게는 확실한 것처럼 느낄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러한 믿음은 오히려 근거없는 주관적 과신이나 착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개인적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믿음의 그런 개인적 특징은 먼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역설적 믿음을 참 된 믿음의 모델로 제시하는데, 사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개인적 신뢰와 결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그에게 명령하신(계시하신) 언약의 하나님의 미쁘심에 근거한 것이었다.
둘째, 키에르케고르는 역사, 철학, 윤리 같은 분야에 어떤 중립성(neutrality)을 부여하고 있다.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의 사고나, 역사나, 윤리를 초월하는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사고나 역사나 윤리 모든 것에 직접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 마음의 결단만을 주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영역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떠나선 어떤 중립적인 영역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식의 키에르케고르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로 하여금 좋은 신학적 도구를 제공했다고 하겠다. 특별히 그의 '역설적 믿음'이라는 개념은 복음적인 것 같지만, 사실 그런 개념은 계시의 역사성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역사성을 주관적 성찰로 하락시키고 하나님의 초월성이나 영원성을 순간적 참여나 내재성(immanence)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보는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생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자료출처: solus primo eram>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민성사, 1994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고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개체란 주지하다시피 시간과 일상을 막론하고 전체 삶과 역사에서 무의미와 허무, 공허에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그 외현을 적극적인 생명력으로 투영, 변개시킬 수 있는 능력 있는 인간을 말한다. 키에르케고르가 처음부터 당시에 풍미하던 주류 철학의 사조와 담론을 공격하며 이렇게 개인의 주체적 좌표를 목표로 파고들며 강조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먼저는 헤겔에 이르러 거의 도그마의 권위에 육박하도록 심화된 관념론의 비인격성에 대한 반발이고 그 다음의 연장선에서 그 관념론이 구축해 올린 거대담론이 장차 현상되어 나타날 사회 국가 이데올로기나 기계문명의 맹위 속에서 필연적으로 개체 인간을 하나의 메마른 먼지나 부품으로 축약시켜버릴 것에 대한 전망과 우려 때문이다.
이성에 축을 옮겨 사고의 엄밀성과 그 권위의 확보를 목적으로 발전된 근대철학의 주요 줄기가 점차 독일의 관념론으로 흡착, 융합되면서 체계의 위격이 더하게 되고 그 관념론의 종국인 헤겔에 와서는 그 내용이 과거 교회의 권위를 대신해 줄 만큼이나 층위화 되고 종합된다. 이 사이에 개체 인간은 거대 담론의 철골구조 속에서 한 점으로 수단화되고 미세하게 축소되는데, 이에 개체의 자리를 파고들며 키에르케고르가 거꾸로 뒤집고자 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서의 인간은 근본적으로 소외되어 있다. 이 ‘소외’는 인간의 외면에서 일어나는 어떤 경험이나 돌발적인 우연이 아니라 인간 근원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이며 운명적인 문제로 전체 인간의 보편적인 자신의 문제이다. 이 우울하기 그지없는 심층심리의 철학자가 볼 때는 이런 문제제기의 연장선에서 고대 그리이스 정신에서부터 관념론에 이르기 까지 근본적으로 철학의 위업전체가 인간의 조건, 즉 자아로부터 비껴나 있는 채 가건물로 축적된 것이다.
이런 인식에서 특히 그는 당시 일면 철학의 ‘종말’(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에서 말하는 의미의) 로 까지 받들어 지던 헤겔을 향해 그래서 이런 풍자도 서슴치 않는다.
“어떤 사상가에겐 전 인류와 세계사를 일시에 수용하고 정리할 수 있는 체계를 세우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상가의 개인적인 생활을 살펴볼 때 놀랍게도 그 자신은 이 거대하고 높고 둥근 천정으로 된 전당에는 살지 않고 그 옆에 있는 헛간이나 개집이나 혹은 기껏해야 문간방에나 살고 있는, 실로 놀랍고도 우스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체계만이 완성된다면 -오류의 도움으로-그는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근원적으로 소외된 인간은 헤겔처럼 아무리 정교하고 현란한 체계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거나 그런 엄밀한 논리의 영광에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그 영예를 누리고 향락할 자아를 주장하지 못한다. 그 실제가 위업의 영광이 되지 못하고 항시 허상과 같은 그림의 떡으로 공허하게 경험될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자신의 자아와 유리되어 있고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술과 재능으로 화려한 집을 짓고 치장하되 그 집에 살지 못하는 빈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이 소외의 문제를 묻거나 해석해내지 못하고 시작, 적체된 철학의 업적은 어차피 인간이 누리지 못할 허상의 건축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키에르케고르에게서의 철학의 과제와 중심은 당연히 다시 이 소외된 자아를 찾고 극복되어져야 하는 통렬한 물음으로 되돌려 진다. 그의 짧지만 심대한 고뇌의 자리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개체의 회복과 극복을 주창하는 키에르케고르의 인간에는 다음 세 가지 상황의 존재론적 절망의 문제가 놓여 있다.
상황1.인간의 정신이 절망 속에서 자아를 소유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의 절망
상황2.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회피하는 절망적인 상황
상황3.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상황
인간의 보편적인 상태인 이 세 유형의 상황들을 좀 더 부연해서 이해해 보자.
근대철학이후 인간의 우주론과 세계관에서 절대타자의 상층점이 상실된 이래로 인간은 생물학적 사고를 넘어설 내적 기제를 잃어버린다. 무한으로 뒤집히고 치환되어 신성을 확보할 수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포인트와 같은 연결점, 초월자가 부정되어 버리면 이제 인간의 사유는 유한의 범주에 갇힌다. 그렇게 메마르게 된 유한만의 철학은 결국 어떤 실증적 방법론이나 관념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심화된 유한의 공허는 마침내 전체 인간을 자연스럽게 흡입, 건조하게 말려 버리는 결과를 불러 오고 말 것이다. 이렇게 도저히 정리할 수 없는 이 인간 정신의 치명적인 갭에 대하여 그래서 헤겔은 유한과 무한을 이 세계내적 문제의 통일과 종합으로 섞는 형식으로 보상하고자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키에르케고르가 볼 때는 인간의 혼동과 절망만 증폭시킬 더 큰 오류일 뿐이다.
헤겔이 보여준 것처럼 무한의 요소가 유한의 역사 내에 환상으로도 제시되면 개체인간은 자연히 자신의 근원적인 상실의 내적 문제를 자신의 근원자아와 대결하기를 그치고 자신의 존재를 ‘국가’나 ‘정의’와 같은 외피적인 세계내적 환상이나 권위에 투사하고 투영하는 심리기제를 발전시키게 된다. 이렇게 되면 결국 개체는 자신의 자아를 근원적으로 자각하고 해결할 길을 전면적으로 잃어버리고 필연적으로 표피적인 우민으로 전락한다. 이런 세계이면 자아가 살아 있는 개체 인간은 이제부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헤겔의 역사 범신론은 이 점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안고 있다. 곧 키에르케고르에게서의 헤겔철학은 바로 이 개체의 상실을 영구히 고착화 시키고자 하는 왜곡의 신학과 다름이 아닌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키에르케고르가 예견한 것처럼 독일 관념론 이후의 세계는 존재하지도 않는 체계의 환상에 몽환적으로 휘둘려 인격과 의미를 물을 수 없는 복제 인간들이 대량생산되는 체제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이 절망적인 상황, 이 절망이 바로 키에르케고르가 선구적으로 감지한 절망이다. 이 절망 속에 인간은 ‘자신과의 관계’즉 자아에서 자신에게 자아가 존재하는 사실조차 망각해 버리는 이미 죽은 인간으로 경험되고(상황1) 이렇게 죽어 버린 자아를 그나마 희미하게 생각이라도 하는 사람은 허약한 자아의 공포에 짓눌러 국가나 사회, 정신과 같은 거대담론의 외피 속으로 또한 도피해 버린다.(상황2) 한편, 또한 그 중에서 자아를 이해하는 소수의 정직한(?)인간은 체계나 시장과 같은 표피적인 대체물로는 자아의 문제가 극복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상황을 알고 그 스스로의 절망적인 자아를 비관적으로 받아들이며 염세주의와 같은 파괴적인 삶을 살며 위축된다.(상황3)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초월의 상층을 잃어버린 인간은 소외를 극복할 길이 없이 이렇게 절망의 위기에서 자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키에르케고르가 말하고자 하는 절망의 내용이며 이 책, <죽음에 이르는 병>이 당대에 묻고 도전하고자한 내용의 개관이요 그 일깨움의 대략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는 미적 체험, 윤리적 체험 그리고 종교적 체험 등 세 단계의 인생 체험이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이행해 나가지만, 어떤 이들은 첫 단계를 결코 넘어서지 못하는 수도 있다.
1) 미적 체험
미적 체험의 단계에서 개인은 쾌락주의자가 되거나 추상적 지식인이 된다. 쾌락주의의 미적 인간은 미래를 돌보지 않고 직접적인 쾌락만을 좇는다. 그는 달콤한 것과 관능적인 기쁨이나 받아들이지 부부간의 애정과 결혼에 몸소 뛰어들지 못한다.
추상적 지식인은 순수한 추상성이나 보편자의 이론적 세계 속에서 파묻혀 숨어 지내면서, 현실적인 사건들의 격투장과 동떨어져서 살아간다. 그는 세계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지 못한 채 세계를 초연한 객관적인 방식에서 관찰할 뿐이다. 그의 눈에 헤겔주의는 사상가 없는 사상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실존한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을, 행동에 뛰어든다는 것을, 인생사에 몸소 참여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추상적 지식인은 추상성의 영역으로 들어감으로써 실존을 피하고, 쾌락주의자는 윤리적으로 무감각해짐으로써 결단을 교묘히 회피해 버린다. 그리하여 그의 인생은 절망으로 끝나 버리고 만다.
참된 자기성은 열정, 자유, 선택, 참여 같은 주체성 안에서 찾아진다. 절망도 일종의 주체성이기 때문에 절망을 딛고 본래적 자기성으로 돌진해 들어갈 수 있다. 절망을 택하는 가운데 우유부단함이 결단으로 고양되며, 얽혀드는 인생사를 회피하는 대신에 참여의 결단을 내리게 된다.
2) 윤리적 체험
개인은 결단과 참여를 통해서 윤리적 체험의 단계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 단계가 결단과 참여의 단계이다. 이러한 선택으로 비로소 참된 자기성 내지 본래성이 찾아진다. 왜냐하면 결단과 참여를 통해서 자기(self)는 미적 생활의 직접성으로부터 해방되고 하나의 통일성으로 통합되기 때문이다.
3) 종교적 체험
절망한 인간이 미적 체험의 단계에서 윤리적 체험의 단계로 나아가듯이, 이제 소외된 인간이 윤리적 단계에서 종교적 체험의 단계로 넘어간다. 이 단계의 경우 주체성의 최고 정점은 고난의 내면성에서 발견된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죄는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지 못해서 절망하거나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해서 절망하는 것이다. 즉, 죄는 절망의 노골화이다. 죄와 절망을 극복하는 길은 신앙뿐이다. 신앙은 자기에 대한 의식의 기준이다. 자기에 대한 의식이 확고해질수록 의지에 대한 의식도 확고해지며, 의지에 대한 의식이 확고해질수록 자기에 대한 의식도 확고해진다. 의지 없는 인간은 자기 없는 인간인 것이다.
윤리적 실존이 자신의 양심에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면 종교적 실존은 자신의 신앙에 충실하게 사는 삶이다. 유한한 인간은 결국 무(無)로 돌아갈 존재이기에 아무리 양심을 가지고 반성하며 자신을 돌아본다고 해도 소용이 없으며, 이러한 노력 자체에 후모르(Humor: 허탈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허탈감 속에서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역설적인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 자체에는 절망 뿐이지만 신이 그에게 희망을 부여해 준다는 역설을 믿는 것이다. 이로니(Ironie)가 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 사이의 경계이었듯이, 이 후모르는 윤리적 실존과 종교적 실존 사이의 경계를 이룬다. 각 실존의 절망적인 상황을 깨닫고 비약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종교적 실존의 단계는 다시 종교성 A와 종교성 B로 구분된다. 종교성 A는 인간의 내재적인 진리 인식 가능성에 바탕을 둔 종교 일반을, 종교성 B는 계시에 의거한 초월종교, 곧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를 가리킨다. 종교적 실존이 현실화되는 것은 고뇌를 통해서이다. 고뇌(agony)는 종교적 실존의 특색이니,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해서든 무한한 초월자인 신에게 나아가 보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신의 무한성에 비하여 보았을 때 인간은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고뇌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죄를 지었음을 안다." 종교적인 실존의 결정적인 지각(perception)은 나에게 죄가 있다는 것이다. 완전무결하고 의로운 신 앞에서 단독자의 실존은 추악한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신의 거룩하심 앞에서 그는 자신의 죄책을 안고 전율한다. 죄는 신에 대하여 짓는 것이다. 자신의 죄됨에 대한 의식이 깊어지면서 "주체성은 비진리이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종교성 A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내면에 진리가 존재한다. 즉 주체성은 진리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일깨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 거룩함 앞에 설 때 단독자는 자신이 철저한 비(非)진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두려워하게 된다.
초월자의 힘이 없이는 사람은 결코 이러한 죄의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에 종교성 일반과 그리스도교의 질적인 차이가 있다. 종교성 일반은 자신의 내부에 무엇인가 신과 교통할 수 있는 영원한 요소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자신의 "죄됨"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초월자의 힘에 의하여 사람이 자기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직시하게 되었을 때, 즉 단독자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철저한 비진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옳고 현명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실상은 거짓과 허위로 가득찬 존재였음을 알게 된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영원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는 것, 그것은 오직 허위와 죄 뿐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사람은 죄인인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이 무한한 질적인 차이, 무한한 거리. 어떻게 이 양자 사이에 다리가 놓이고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역설이 있다. 사람에게 영원한 진리와 복을 선물로 주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여기에 걸려 넘어진다. 시간 속으로 들어온 영원자, 개별자로서 시간 안에 탄생하고 자라고 죽은 하나님을 사람의 이성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성은 이것을 알려지지 않은 것·이질적인 것·완전히 다른 것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고, 사람의 생각은 끊임없이 이 역설과 충돌하며 거리끼고 분노한다.
그러나 분노를 넘어서서 이 모순(Absurde), 이 절대적인 역설을 받아들일 때에 신앙은 성립한다. 사람은 스스로의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고 죽음의 비약을 할 때에 궁극적인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모험이다. 그러나 "모험 없이는 신앙도 없다. 신앙이란 바로 내면성의 무한한 정열과 객관적인 불확실성 사이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이다.
< -키에르케고르 연구 (지성의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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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는 자신 안에 심미적인 사람, 윤리적인 사람, 종교성 A의 사람,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모든 성향을 다 발견하고 그것을 표현해 낸 것이다. 죠시아 톰슨이 다음과 같이잘 표현한 바와 같이 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익명의 저자들을 통해서 자신의 상상과 감정을 분출해 내었다....... 그는 자신이 써야만 한다고 느꼈다. 수년 동안 그려온 개념들과 공상들의 물줄기를 다 부어내야만한다고 느꼈다.
그러므로 그의 익명의 저작들에서 발전되고 있는 삶의 영역들은 그가 자신 안에서 발견한 경향들에 대한 일종의 이상화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때 나는 키에르케고르의 '삶의 영역들'(spheres of life)이 키에르케고르가 친히 체험해 나간 삶의 단계들의 발전을 표현해 낸 것이라는 견해와 나의 입장을 구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 안에 있는 이런 성향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심미적인 인간, 단순히 윤리적인 인간, 종교성 A에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의 익명의 저자들이 보이고 있는 인생관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가능한 방식들의 표현들이다. 그 삶의 방식들은 서로 다른 것이다. 가르디너(Gardiner)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들은 "(그의) 내면으로부터, 각 관점의 입장에서 삶을 생각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표현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 익명의 저자들은, 마틴 떠스트(Martin Thust)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키에르케고르의 인형극의 인형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키에르케고르는 자신과 익명의 저자들의 거리를 확언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익명의 저자들은 익명의 저자들로서 다루어져야만 한다. 이 익명의 저자
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말하는 이의 목소리는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은 내 목소리가 아니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나의 사상은 아니다."
각기 다른 익명의 저작들은 각기 다른 문제를 다루고 있고, 각각의 익명의 저자들은 각기 다른 관점을 지닌 것이다. 클라이츠(Crites)가 표현하고 있듯이 "각 작품은 각기 독특한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클라이츠도 인정하듯이, 이들 작품들을 모두 감싸는 일종의 커다란 구조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커다란 구조는 그의 저작의 시초가 아니라, 마지막에서라야 드러나고 계시될 수 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나는 1846년까지 계속되는 초기 저작의 내용이 키에르케고르의 생각과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지를 논의했다. {이것이야 저것이냐}, {인생의 제 단계}, {공포와 전율}, {반복}, {불안의 개념}, {철학적 단편}, {철학적 단편에 붙이는 결정적 비과학적 후서} 등이 이 첫째 저작에 속한다. 키에르케고르 자신은 이 초기 저작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문학에 있어서의 나의 기여는 실존의 전 양상(the whole of the compass of existence)의 결정적인 특성들을 이제까지 그 어떤 작가의 작품들도 그렇게 하지 못한 변증법적 명료성과독창성을 가지고 제시했다는 데에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 존재의 성격은 다른 존재나 실재와 통하기 때문에 존재는 인간 실존의 견지에서만 의미를 띤다. 인간 실존은 선택을 제한하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인간은 ‘현존재(Dasein)’라 불린다. 현존재의 존재는 ‘세계내존재’이다. 왜냐하면 실존론적으로 인간이 없다면 세계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존재의 가능성은 자신의 선택 여하에 달려 있다. 그래서 현존재가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와 있을 때에는 본래적이 되며, 아무 데에나 정신 팔려 있을 때에는 비본래적이 된다. 또한 현존재는 평균성이나 일상성에 의해 막연한 존재자로 여겨질 수도 있다. 막연한 존재자는 익명성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에 공공성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게 된다. 공공성이란 개인성을 상실함으로써 얻게 되는 실존론적 성격이다.
인간은 세계에 직면하여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불안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불명확한 무(無)이다. 무는 불안의 원천이다. 불안을 통해 노정되는 세계는 현존재의 구조를 ‘염려’로 노정시킨다. 즉, 인간의 기본적인 기분은 불안이며 인간의 근본적인 구조는 염려이다.
불안의 기분은 무에 직면하여 야기되는 인간의 유한성의 징표이다. 또한 불안은 인간의 실존을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 노정시킨다. 이제 죽음의식은 개인이 생애를 살아가면서 내리는 여러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그가 어떠한 선택을 하든 다른 것들을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는 자각을 경험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실현되지 못한 그 밖의 선택으로 인하여 책임의식을 느낀다.
첫댓글 저도걸을때마다묵상기도가제겐가장큰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