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 접속자(1)
일제는 중일 전쟁 이후부터 전쟁 인력의 부족을 느껴 지원병의 형태로 한국인 청년들을 자신들의 침략 전쟁에 이용하기 위하여 육군 특별 지원 병령을 1938년 2월 2일 칙령 제 95호로 공포하고 동년 4월 3일부터 시행했다.
지원병 실시에 윤치호는 지원병 제도를 실시히여 조선인들을 믿어 주신 데 대하여 크나 큰 감격과 감사를 느낀다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면서, 다만 염려되는 것은 당국의 신뢰에 관연 조선인 청년들이 만족할 만한 성적을 올릴까 걱정이라면서 청년들에게 분투할 것을 호소하였다.
지원병 모집 내용은 지원병을 전후기 합쳐 400여명을 선발해서 훈련시킨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대개 지식인들이 참가했는데 강연회 개최, 선동적 활동 등을 통해서 지원병 모집에 광분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주로 시국강연반을 구성하여 전국을 돌며 시국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동아 안정 세력으로써 일본의 지도적 위치를 인식시켰는 바, 약 1주일 또는 10일 정도의 일정으로 강연을 하였다. 이 때 주로 강연을 한 유명한 자들은 김영섭(감리교 목사), 김우현(장로교 목사), 양주삼(감리교 총리) 등이었다.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은 1940년 1월 이후, <1정(丁) 연맹 1명>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강연회, 좌담회 등을 통해서 지원병 권유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감리교회에서는 1940년 9월에 발표한 <프로테스탄트교 조선 감리회 혁신 조항>에서 "교도들이 지원병에 다수 참가할 것과 교도들에게 병역 의무를 철저히 인식케 할 것" 을 각 교회 주관자들에게 협조 요청을 하였다.
일제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미국과 관련이 깊은 교회들에 대하여 먼저 미국을 증오토록 유도케 한 바, 1941년 12월 20일 반도 호텔에서 교계 대표들이 모여 미-영 타도 좌담회를 개최케 하였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양주삼 외 17명이었으며 좌담회 내용은 미국과 영국에 대한 비방일색이었다. 미국과 영국에 대한 비방은 일본의 전쟁 정책에 의한 협조적 색채가 강하게 난다 할 수 있다.
1941년 12월 10일, 국민 총력 조선 연맹 주최로 부민관 대강당에서 결전 보국 대강연회가 열렸는 바, 신흥우는 「세계의 교란자는 누구인가」라는 강연 중 "한 번 결전하는 이상 제국의 행로에 종(腫)으로 있는 적성 국가는 분쇄시켜 전세계 인류의 참된 평화와 신동아 건설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라고 전제한 후, 여기 모인 제군들은 세계의 교란자가 누구인가를 깊이 인식하여 그 책임자를 격멸(擊滅)하자고 결론을 지었다.
또 한동년 12월 27일 조선 임전보국단 주최로 열린 <부인 대회>에서 김활란은 <여성의 무장>이라는 강연을 하였는 바, "흑인 노예 해방의 싸움을 성전이라 했고 십자군 원정도 성전이라 했다. 그러나 이제 성전은 정말로 내려진 것이다. 희생(犧牲)의 투구를 쓰고 적성(赤性)의 갑옷을 입고 긴장과 자각으로써 허리 띠를 꽉 매고 제 1선 장병과 보조를 같이 하여 미·영을 격퇴하여 버리자!" 고 호소했다.
전쟁이 확산되고 전선에서 전황이 치열해지자 일제는 결전 비상 조치를 취했는 바, 1942년 5월 8일 총독부는 한국인들에 대하여 1944년부터 징집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진행한다는 결정이 보도되자 친일파들은 일제히 환호를 올렸다. 그리하여 앞을 다투어 자신들의 견해 표명, 감사 예배, 결의 대회, 감사 전문 보내기 등을 대규모로 계속적으로 해 나갔다. 사실 이러한 제도가 생길 때마다 친일파들은 감격해 하였다.
윤치호는 징병제 실시에 대한 축하 메시지에서 "황국 신민으로서의 의무와 각오를 가지고 있는 저희들로서 얼마나 감격적인 소식입니까? 오늘 드디어 징병제가 실시되니 오늘부터 저희는 내지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보조하여 대동아 전선에서 싸우게 되는 감격을 새롭게 가지게 되며 전 반도인들은 오직 감격해 사모(思募)칠 것입니다." 라고 축하의 변을 토했다.
1942년 5월 11일 각 교파들 연합으로 승동 예배당에서 <징병제 감사 프로테스탄트교 신도 대회>가 1,000여명의 신도들과 창무(創茂) 조선군 보도부장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신도 대회 내용은 국민 의례, 감격사, 결의(수상 이하 관계 당국에 감사 전문을 타전), 강연(보도부장 : 징병제를 실시하게 된 경위, 고미(高尾) : 일제의 이상), 성명서 낭독, 성수 만세(聖壽萬歲) 등으로 이어졌다.
성명서에서는 "30여년 간 조선 시정(施政) 중 최대의 업적이며 내선일체 이념에 현실적 요소를 넣은 것이며 황국 신민의 대도가 열린 것이다. 이 감격에 어찌 울지 않을 수 있을까?" 라는 황국 신민의 감격을 표했다.
감사 전문은 "조선인 청년들에 대해서 징병제 실행의 결정에 저희는 깊은 감사 감격한다. 황은에 대하여 맹세코 받들어 보답할 각오이며 일사순국(一事殉國)의 결의를 나타낸다." 는 의지를 전문에 담아 보냈다. 1942년 5월 16일 야소교성결회(耶蘇敎聖潔會) 이사장 이명직의 이름으로 각 교회 주임 교역자에게 보내는 <반도에 징병 제도 실시 축하의 건>이란 공문에서 "천황 폐하의 일시동인(一視同仁) 하시는 성지를 인하여 징병제 실시를 강조하면서 축하회를 개최하되 당국에 문의하여 지도를 받아 형편에 따라 식순을 가질 것. 축하 예배 순서는 경계, 국가 봉창, 궁성요배, 성명서 낭독, 감사 전보, 황국 신민 서사 제창, 천황 폐하 만세" 를 넣도록 하였다.
뒤이어 1942년 5월 17일 경성 지역 성결교회 연합으로 경성 신학교 강당에서 성결교 신도 대회를 열고 징병제 축하 강연회를 갖고 성명서를 채택하였는 바, 요약하면 "반도에서 징병제 실시 방침 확립은 내선일체의 구현이며 2천 4백만 동포들은 무한한 기쁨과 감격에 달했다. 성결교 신도들은 신명을 바쳐 대동아 건설에 만전을 기하며 무궁한 황은에 감사하여 봉공하며 진충보국을 결의한다." 는 내용이었다.
재경(在京) 구세군 단원 연합회에서도 징병제 실시 감사 강연의 밤을 열고 감사 결의문을 채택하였고 각 지역 별로도 징병제 실시에 대한 대회들을 개최하였는 바, 진남포 지역에서는 구세군 서선 지방 본부 주최로 1942년 5월 17일 중앙 회관에서, 동년 6월 8일 해주에서도 강연회와 국방 헌금, 그리고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6월 10일 용강에서는 평서로회 주최로 징병 제도 축하식을 거행하였고, 6월 17일 청송군 현동면 도평 장로교회에서도 징병제 실시 감사회를 열었다.
장로교 제 31회 총회에서 총간사 정인과가 보고를 한 바, "1943년 2월중 본부 주최로 대동아 전쟁의 목적과 프로테스탄트교도의 의무를 재삼 격려하기 위하여 연사를 파견해 시국 강연회를 개최하고자 하며 징병령 실시를 철저하게 촉진할 것!" 을 강조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교 신문 이사 박인덕은 <징병제 실시와 반도 여성들의 각오>란 사설을 실었고, 조선 구세군 본부의 회원정의(檜原正義)도 <열혈 남아는 결전장으로 나서자!>란 촉구문을 실었다.
일제가 제 2차 세계 대전에 총력을 기울임에 따라 군대의 증강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력 또한 청장년의 대량 진출에 인력 난과 군수 산업의 폭발적인 노동 수요 증가는 1942년부터 국민 동원 계획으로 수정, 강화되었고 1943년 10월 8일의 생상 증강 노무 강화 대책 요강은 국민 징용령에 의한 유휴불급(遊休不急)노무의 전면도원의 전용과 근로 보국대의 강화, 군 비 복무자의 노무 동원과 여자 노무의 대체 이용 강화 등을 규정한 것이었다.
징용은 현원 징용(現員徵用) 및 친규 징용(親規徵用)으로 대별되며, 친규 징용은 특수 징용과 일반 징용으로 구분되는 바, 한국에서는 일반 징용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이유는 일할 수 있는 자들은 모두 있는 대로 다 끌어가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강제적 연은 상부로부터 일정한 숫자를 할당받은 면사무소의 노무계 담당자와 마을 구장(區長) 등이 계획을 세워서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곧바로 징용으로 보내졌다. 이러한 일을 일본인도 아닌 말단의 부일 한국인의 행패가 더욱 심하였다.
강제로 연행하기 위한 집단적이고 조직적 방법인 국민 동원 계획에 의한 동원을 하였다. 하지만 목표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원인이 조선 총독부 보고서에 나타나고 있는 바, "최근에 일반 징용의 실시가 발표되자 일부 지식층 및 유산 계급 중에서 재빨리 도피하거나 혹은 주거를 전전하는자, 그리고 병에 걸리게 하여 자기의 수족에 상처를 내어 불구자가 되어 징용을 기피하는 자들이 생겼다." 는 보고를 한 사실에서도 파악된다.
이 보고서에서 징용의 처참한 현상이 나타나는 바, 민심의 이러한 동향을 외면하면서 친일파들은 국민 개로(國民皆勞) 산업 보국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징용 동원에 혈안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프로테스탄트교 내에서도 나타나는 바, 프로테스탄트교 신문은 1944년 1월 25일과 2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국민 징용령이란 무엇인가?>라는 내용을 연재한 바, "징용은 병역에 다음가는 중요하고도 영광스런 의무이기에 징용된 사람은 충성을 다하여 명한 바, 일에 충실하여야 되는 성스러운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라고 징용의 대열에 설 것을 촉구하였다.
이어 1944년 6월 1일자 사설 <징용과 부인(婦人)>에서는 "결혼이 징용을 피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라면 전시 하 국민이 옳치 못한 부끄러운 행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항문(港門)의 사태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 후, 국가 봉사를 위해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고 여자의 징용 참가를 권유하였다.
일제는 1944년에 접어들면서부터 12-40세 미만의 처녀를 <자녀 정신대>라는 이름 아래 병사들을 위한 위안부로 강제 징용하였는 바, 특히 여학교에 대하여 2명씩의 여학생들을 정신대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일제의 강요에 소위 여성 지도자란 사람들이 앞장을 섰는데, 김활란, 박마리아, 박순천, 박인덕, 박은혜, 유각경, 황신덕, 임숙재, 모윤숙, 최이권, 서은숙, 배상명, 박승호 등은 민족의 딸들을 강제 징용하는데 충실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행위는 동족으로써, 같은 여성으로써 영원히 씻지 못할 죄악이라 할 수 있다.
일제는 1938년에 물자 동원 내용을 발표하였는 바, 그 내용은,
① 군수물자의 확보
② 비상 시 국민 생활 양식의 확립
③ 주요 물자의 증산
④ 폐품 회수의 조직화
⑤군수 공업의 능률화
등이다.
이러한 일제의 방침에 의해서 강행된 것들은 국방 헌금, 위문 금품, 저축 증대, 금 제품 헌납 강요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일제의 방침에 의하여 국방 헌금을 강제적으로 요구한 바, 제일 먼저 1938년 11월 수원 지구 각 파 교역자들이 수원 읍내 종로 예배당에서 <시국인식좌담회>를 열고 15원 14전을 모아 헌금한 것을 필두로 하여 계속적으로 각 교파 별, 지역 별로 국방 헌금을 하였다. 감리교회는 1942년 3월까지 양덕 교회외 72개 교회들에서 241원 84전을 헌금을 하였다.
이는 국방 헌금이 교단이 주도하여 개교회(個敎會)와 총회 부속 기관에게 협조를 요구하여 이루워 졌으며, 교단 행사에서도 행해졌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전시 하 프로테스탄트교는 장병들을 위한 위문 공연, 위문품 전달, 출정 군인 가족들을 위한 일들을 하였는 바, 감리교는 황군 위문품을 윤천읍 교회 외 222개 교회들에서 교단의 이름으로 헌물하였다.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