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눈을 거슴츠레하게 뜨고 화면을
바라보다가 리모컨으로 그것을 껐다. 이제
그것을 더 이상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피로감이 덮쳐왔다.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한참 후 그녀는 담배를 피워문 채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가볍게 샤워를
하고 나서 방으로 나온 그녀는 문득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0시 30분이 지나고
그녀는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화기를 집어들고
도쿄에 가 있는 오빠한테 국제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오빠 배창기는 외국에 나가더라도
꼭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의 전화번호와
객실번호 같은 것을 집에다 알려주는
자상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
긴자거리에서 가까운 임페리얼호텔
1315호실에 투숙하고 있었다.
임페리얼호텔은 객실수가 1,140개나 되는
아주 큰 호텔이다.
한참 동안 신호가 가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미화는 오빠가 방에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수화기를 막
내려놓으려고 하는데 신호가 떨어지면서
"모시모시......."
그것은 귀에 익은 오빠의 목소리가 아닌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의외의 목소리에
당황한 미화가 머뭇거리고 있는데 상대방은
계속 "모시모시......"하고 이쪽을
불러댄다. 뭐라고 말하지 않으면 금방
전화를 끊을 것 같다. 전화가 혹시 다른
방으로 연결되었는지도 모른다.
"여보세요. 거기 혹시 1315호실
아닌가요?"
한국말로 물었다. 다른 나라 말은 할 줄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대방도 일본말로 뭐라고 대꾸해
왔는데 미화로서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가
매우 아름다운 젊은 여자라는 것, 그리고
구니들이 들으면 섭섭해 할 게다."
여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그녀의
눈에 질투의 불꽃이 이글거리다가 스러지는
것 같았다. 상대방이 다시 일본말로 뭐라고
지껄인다. 미화는 한국말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영어단어를 서투르게
늘어놓아 보았다.
"헬로...... 아이 앰 인 서울...... 위
아 브라더...... 아이 앰 시스터......
마이 브라더...... 아이......
아이......."
나중에는 뒤죽박죽 되어버려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행히 상대방은 알아들었는지
전화를 끊지 않고 반가운 기색으로
"오우케이!"하고 말했다.
전화는 끊어지지 않은 채 한동안 정적만
흘렀는데 수화기를 통해 여자가 속삭이는
들려오고 있었다.
조금 후 마침내 잠에서 덜 깬 듯한
남자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화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확인하고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 얌전한 오빠가 일본
여자와 함께 잠을 자다니! 그것은 그야말로
놀라 자빠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가슴에 휘몰아치는 뜨거운 감정을 누르면서
"오빠 저예요."하고 가만히 말했다.
"아, 난 또 누구라고...... 웬
일이야...... 이렇게 밤늦게...... 지금이
몇 시야...... 12시가 넘었잖아...... 별일
없니?"
그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가냘프다.
"별일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렸다.
"무슨 별일? 무슨 일 생겼니?"
"그보다도 오빠, 그 여자 누구예요? 일본
아가씨예요?"
"아, 업무 관계로 잠시 좀 들렀을
뿐이야."
멋적어하는 것 같은 목소리에 미화는
입가에 냉소를 흘렸다.
"오빠, 지금이 몇 시인데 업무
운운하시는 거예요? 침대에서 하는 업무도
다 있나요?"
"이, 이봐. 지금 어디서 전화거는 거야?"
"왜요? 겁나세요? 옆에 언니 있으니까
바꿔드릴까요?"
"안 돼! 바꾸지 마!"
그가 놀라는 것을 보고 그녀는 다시
차갑게 미소지었다.
예쁘던데요.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언니한테 전화 넘길 거예요. 일본
아가씨예요?"
"그, 그래.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모른 체해."
"이름이 뭐예요?"
"그건 알아서 뭐하려고 그래?"
"제가 오빠 애인 이름 좀 알면 안
되나요? 가르쳐줘요. 방해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냥 알고 싶어서 그래요.
이름이 예쁠 것 같아요. 뭐예요?"
"그냥 미치코라고 불러."
"미치코...... 예쁜 이름이네요.
대학생이에요? 아니면 오피스걸이에요?
아니면......?"
"그만 좀 해둬. 나중에 가서 이야기해
줄께."
그럴수록 그녀는 호기심이 동해 견딜
수가 없다.
"대강만 이야기해 줘요. 그 여자 예뻐요?
몇 살이에요?"
"나이 같은 건 나도 몰라. 예쁘지도
않아."
"언니보다 예뻐요?"
"예쁘지 않다니까!"
오빠가 역정을 냈지만 그녀는 차갑게
웃기만 한다. 그가 부인할수록 그녀는
미치코라는 여자가 틀림없이 기막히게 예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자에 대한 그의
취향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화장실에도 가지 않는
아름답고 깨끗한 존재로 인식하고
싶어했다. 따라서 아름답지 않고 지저분한
여자한테서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이번에 돌아오실 때 미치코 한번 데리고
와봐요. 제가 친구 되어줄께요."
그 말에 배창기는 펄쩍 뛰었다.
"언니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예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할 이야기
없으면 전화 끊자."
"할 이야기 많아요. 오빠, 언니 무서워할
필요 없어요. 언니는 낮이나 밤이나 바쁘신
몸이라 집에도 있지 않아요. 도대체 뭐가
그렇게 바쁜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운을 떼어놓고 그녀는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게 무슨 말인지? 그 사람 지금 집에
없다는 거야?"
그의 목소리에 긴장이 감도는 것을 보고
그녀도 긴장했다.
"오빠도 참 한심해요.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좀 가져보세요. 오빠가
그렇게 무관심하니까 언니도 그렇게
나가지요."
그녀는 우호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갔다.
"그렇게 나가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지금 집에 있어 없어?"
"언니 얼굴 보기 참 힘들어요.
벌써......."
그녀는 차마 입을 열기 난처하다는 듯
머뭇거렸다.
"언제 나갔는데 아직도 안 들어오고
있어? 숨기지 말고 말해봐."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작아지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가 몹시 흥분하기
시작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화내지 마세요. 어제 나가서는 아직 안
들어오고 있어요."
너무 충격적인 말이었던지 창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너무 오랫 동안 침묵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전화연락도 없어요. 오빠가 걱정할까봐
말 안하려고 했는데......."
"그 전에도 외박한 적이 있니?"
"오빠가 외국에 나가 있을 때 몇 번 그런
적이 있어요."
"왜 그런 걸 지금까지 나한테 말해 주지
않았지?"
창기의 목소리는 비참할 정도로 작게
들렸다.
이야기해요. 괜찮아지려니 했는데......
갈수록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정말 큰 일이에요. 오빠가 언니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든지 아니면......."
그녀는 마지막에 오빠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정확히 집에서 나간 게 언제였어?"
"그러니까...... 자정이 지났으니까
어제...... 19일...... 12시경이었어요.
잠깐 다녀올 데가 있다고 하면서
나갔어요."
"어디 간다고 했어?"
"그건 모르겠어요. 어디 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나갔으니까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아까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었지만 길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전화 연락도 없었단 말이지?"
"네, 아무 연락도 없었어요."
"차는 몰고 나갔니?"
"그야 물론이죠."
"혹시 짐 같은 거 싸들고 나가지
않았니?"
"아뇨. 핸드백만 하나 달랑 들고
나갔어요. 하지만 모르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차 뒤에다 몰래 짐을 실었는지도."
"잘 알았다. 이제 됐어. 그만 전화
끊자."
"오빠!"
첫댓글 나중에 모였다 본다는게 궁금해서 또 봤네요........근데 글들이 좁고 길게 되여서 전보다 보기 힘드네...........
오~ 뒷글이 궁금해죽겟네....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