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어느 역사 사이트의 토론 주제로 제가 올렸던 글입니다..^^;; 부족함은 많지만 광무황제와 명성황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고종과 명성황후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글을 시작하며
고종과 명성황후는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인물들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나라를 망친 군왕' 이니 혹은 '나라를 송두리째 망쳐놓은 암탉(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속담에서 명성황후를 그렇게 비유한 것이 아닌가 함)' 이니 하는 식으로 그들에 대한 평가는 그들이 죽은 지 80∼100년이 되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부정적으로 평가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은 왜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왔을까? 이것에 대해서는 1910년 이후 우리의 국권을 강탈해 간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절하된 것도 한 몫을 할 수 있겠지만, 1880 ∼ 1900년대 이후 서구열강의 침략에 따른 국권 수호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데 대한 백성들의 곱지 않았던 시각도 이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자리매김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굳이 이런 점들을 들지 않더라도 우리가 흔히 아는 사실과는 달리 그들은 너무나 지나치게 평가절하된 것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행적을 분석하여 그들에 대한 인식을 다시 정립해 보고자 한다.
2. 고종과 명성황후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1) 고종
우리가 알고 있는 고종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오늘날 알고 있는 고종에 대해 여러 자료들을 토대로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을 세운 초대 황제이기도 했던 고종은 영조의 현손인 흥선군 이하응과 부대부인 민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어려서의 이름은 명복(命福), 처음의 이름은 재황(載晃)이라 하였으나, 즉위 후에 희(熙)로 개명하였고, 자를 성림(聖臨)이라 하였으나, 후에 명부(明夫)로 개자(改字)했고. 호는 성헌(誠軒)이라 하였다.
1852년 음력 7월 25일 정선방(貞善坊) 소재의 흥선군 사제(私第)인 현재의 운현궁(雲峴宮)에서 출생하였다. 1863년 12월, 후사가 없던 철종이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고종은 익종(추존, 순조의 아들로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대통을 계승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의 아버지 흥선군과 익종 비(翼宗妃)였던 조대비(趙大妃)와의 정치적인 결탁에 의해서였다.
즉, 철종의 후사가 없음을 간과하고 있던 대원군과 조대비는 철종 죽기 이전에 비밀리에 만나 철종의 후사를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부로 정하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러다가 철종이 33세로 죽은후 조대비가 재빨리 흥선군의 둘째아들인 고종으로 하여금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하여 그를 익성군 (翼成君)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하여 국왕에 즉위하게 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12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되었으나, 그의 부친인 흥선군이 생존해 있다는 이유를 들어 흥선군으로 하여금 흥선대원군으로 높여 국정을 대리하게 하였다.
대원군의 10년여에 걸친 섭정 이후(1873년 퇴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정권은 명성황후의 척족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민씨 척족 정권은 흥선대원군이 취했던 강력한 척사양이정책(斥邪攘夷政策, 쇄국정책)과는 달리 개방 및 개화 정책을 추진하여, 1876년에는 일본과 수호조약(강화도 조약)을 맺고 미국, 영국등 구미 열강과도 차례로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화시책을 틈타 일본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침투해 오자, 척사상소운동(斥邪上疏運動)·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농민혁명운동 등으로 개화·수구 양파의 대립이 첨예하게 나타났다. 게다가 급격하게 변하는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열강의 이권다툼의 싸움터가 되어 1894년에는 청일전쟁이, 다시 1904년에는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이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나 아관파천(俄館播遷)과 같은 민족의 자존심이 손상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국모의 시해와 일인들의 경복궁 난입으로 일시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있었던 고종은 자주국가 수립을 갈망하는 여론의 기대에 부응하여 1897년 10월에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고 대한제국의 수립을 대내외에 선포하여 황제위에 올라,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 불리우는 대대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무 11년이던 1907년 6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의 문제를 호소하고자 특사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위종을 보낸 일로, 이완용(李完用)·송병준(宋秉畯) 등 친일 매국대신들과 군사력을 동반한 일제의 강요로 한일협약을 위배한 책임을 진다는 명분하에 같은해 7월 20일 강제퇴위 되었다.
퇴위한 고종의 뒤를 이어 황태자 였던 순종이 즉위하면서, 고종은 태황제(太皇帝)가 되었으나 실권이 없는 허위(虛位)에 불과하였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병하면서,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되면서,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19년 정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 때에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풍문이 유포되어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실제로 그때 사용되던 그릇이나 관련 증언들이 쏟아져 나와 독살설이 사실로 굳혀지고 있다. 이해 3월 인산(因山)이 거행될 때 전국 각지에서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고종에 대해 알려진 자료들을 토대로 고종의 행적에 대해 되짚어 보았다.
이와 같이 정리해 놓은 자료들을 토대로 살펴보면, 고종은 뒤에서 다룰 명성황후와 함께 망국의 주범인양 온갖 비난과 함께 그 평가도 상당히 왜곡, 절하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고종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개화정책을 직접 추진하였으며, 부국강병과 함께 기울어진 국권의 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다.
이에 대해서는 3 항목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2) 명성황후
고종과 함께 망국의 원흉이라 지칭되어 왔던 명성황후, 그에 대한 평가는 고종의 그것보다도 더 심각하게 왜곡되어 왔다. 심지어 '나라를 망친 여우' 혹은 '나라를 망친 암탉' 이라는 악명까지도 얻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명성황후는 너무나 지나칠 정도로 왜곡되어 왔다는 데 그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듯 하다.
그렇다면, 명성황후는 어떤 인물이고 어떠한 행적을 해 왔기에 그토록 매몰찬 비난을 받아야 했을까? 고종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들을 토대로 명성황후에 대한 행적을 살펴보자.
명성황후는 여흥부원군 민치록의 딸로서, 8세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 1866년 한 살 아래인 고종과 가례를 올리고 입궁하였다.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집안의 배경이 미흡하여 외척의 득세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흥선대원군은 외척에 의해 정권이 장악된 순조·헌종·철종의 3대 60여 년간의 세도 정치의 폐단 때문에 왕실이 안정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부인 민씨의 집안에서 왕비를 간택하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총명했기 때문에 왕비가 되고 몇 년 후에는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서 흥선대원군과 정적의 관계에 놓이게 되어 결국 흥선대원군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틈이 벌어진 원인은 궁녀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완화군을 흥선대원군이 세자로 책봉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벌어지자 대원군의 정적인 안동 김씨 및 대왕대비 조씨의 세력 및 유림과 규합하고 유림의 거두 최익현에게서 흥선대원군 탄핵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1873년의 이 상소로 인해 흥선대원군은 실각하고 명성황후는 일족인 민씨들을 등용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게 하는 등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반대파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1882년 개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은 서로 협력하여 임오군란을 일으켜 명성황후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으나 명성황후는 궁에서 빠져나와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피하여 화를 면하고 비밀리에 고종과 접촉하여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고, 그에 응하여 출동한 청군은 대원군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압송하여 명성황후는 위기를 넘겼다.
그 후 명성황후는 친청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개혁이 늦추어지자 개화파의 불만이 증가하여 급진 개화파에 의해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급진 개화파는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다시 청군이 개입하여 불과 3일간의 천하로 끝이 나고, 정권은 명성황후가 지원하는 온건 개화파에게로 넘어갔다.
이후로 계속되는 외교문제가 명성황후의 주도로 해결되고,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 봉기가 일어나 조선의 내정이 혼란해지자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청에서 돌아와 은거하던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명성황후를 견제하려 하였으나 명성황후는 오히려 친러파를 중용하여 일본을 견제하였다.
1894년에 동학교도가 중심이 된 농민봉기가 일어나 조선의 정국이 혼미하게 되자 조선에서의 세력확장을 노리던 일본은 갑오개혁(1894) 에 간여하면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려 하였고 명성황후는 이에 대항하였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친라파를 제거하고 조선에서의 우위를 얻기 위하여 친러파를 후원하던 명성황후를 시해하였으며 (을미사변) , 고종으로 하여금 명성황후를 폐서인 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1895년 10월 10일에 신원되었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위에 오른 189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장례가 치루어 지는데, 경복궁 태원전에 빈전이 마련되었다가 이해 가을에 숙릉에 장례되고,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금곡의 홍릉으로 옮겨 모셔졌다.
지금까지의 자료들을 토대로 정리해 본 결과, 명성황후는 대원군과의 권력 싸움, 그리고 척족 세력을 단속하지 않은 데 따른 전횡과 국정의 문란, 그리고 줄타기식 외교 노선과 무분별한 개화정책의 추진으로 국가를 망국의 지경에 이르렀다는 극히 비판적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제시괴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3항목에서 다루기로 한다.
3. 고종과 명성황후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고종에 대한 평가
(1) 고종의 성격
고종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엇갈리고 있다.
그 하나는 고종의 성격이 나약하고 우유부단하여 신하의 설득에 곧잘 넘어가는 기골과 목적의식이 없는 임금이라는 주장이다. 외국인 멕켄지나 개화파 지식인 윤치호는 고종의 나약함을 주장하며 그 근거로 고종의 결단력 부족을 지적하였다.
이것을 기화로 일제는 고종에 대해 암군론(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을 제기하였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고종을 무능한 임금, 어리석은 임금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데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고종에 대한 평가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고종이 통치자로서 근면하고, 업무전반에 대해 숙지하고 있으며 친절하고, 치밀하며, 한 민족의 군주답게 확고함과 명쾌함과 인내를 보여주고 있다는 주장이다. 2년동안 조선정부의 외교고문으로서 박정양 주미공사 파견을 도우는 데 한몫을 했던 외국인 데니는 이 과정에서 고종에 대한 평가를 내리게 되는데, 그의 고종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청국의 제국주의적 요구에 거슬리면서까지 유럽과 미국에 사절을 파견한 지금에 와서도 국왕은 겁이 많다거니 성격상 소신이 없다느니 하는 비난(윤치호나 멕켄지의 주장)을 더 이상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략)... 국왕은 오만한 힘을 과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왕국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나약함과 두려움을 보임으로써 잃을수도 있는 왕국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것이다."
최근 저서 '고종시대의 재조명'를 펴낸 서울대 이태진 교수는 이 책 에서 종전의 고종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에 대해 대거 반박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고종이 {암우(暗愚)[어둡고 어리석은]}한 인물이라는 비평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사건을 구실로 일본측이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킬 때 처음 나온 것으로 확인된다고 말했다.
(2) 고종의 개혁 의지
그렇다면, 일제나 일부 지식인들의 주장대로 고종은 과연 개혁의지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다음의 기록은 고종이 개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기록은 고종실록에 나와 있는 고종의 입장을 추스려 정리해 본 것이다. 물론 고종실록은 고종의 사후 일제에 의해 편찬되었기 때문에 의도적인 왜곡과 평가절하가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적어도 1900년대 이전의 기록은 그와 다르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수습되자 강력한 개혁의지를 표명한 고종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중략‥ 만약 외국인들이 올때마다 군대를 모집하여 그들을 몰아 낸다면 우리는 천하만민의 공적이 된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중략‥ 이제까지 그대들은 오로지 공맹(孔孟)의 경서만을 읽었으며, 그사상에 너무도 심취했기 때문에 설사 외국인들이 그들의 종교를 퍼트리려고 하더라도 그대들의 마음 을 돌려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중략‥ 그들의 영농방법, 약품, 의술, 운송, 도구, 기관술, 총포술과 그밖의 여가 모두 우수한데 왜 우리가 그들의 기술을 배우지 않겠는가?
‥중략‥ 만약 우리가 내정을 개혁하고 더 나아가 외국과 우호적인 조선에서 친교할수만 있다면 우리도 곧 그들과 마찬가지로 부강하게 될것 이다.
‥중략‥ 외국인들이 들어오면 그들을 따뜻하게 대해주라. 만약 저들이 그대들을 핍박한다면 과인은 사태를 예의 주시할것이다. 왜냐하면 과인은 저들보다는 나의 백성들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필자 주 - 정조의 애민사상 답습, 고종은 특히 정조의 정치를 구현하고자 어느때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3) 개혁군주, 주체적 저항군주로서의 면모
고종황제는 그동안 우유부단하고 무능하며 어리석었던 군주라고 이야기를 해 왔고, 또 그렇게 인식되어왔다. 물론 이렇게 되기 까지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사관이 한 몫을 한 것도 있지만, 이 과정에서 일제의 식민사관의 의해 많은 부분이 왜곡되거나 평가 절하된 부분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많다.
1876년의 개항 이후 고종은 개화정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영선사 및 수신사들을 파견하여 근대적인 문물을 배워오도록 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생각은 1880년대에 있어 각종 근대적 시설을 도입하여 설치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흔히, 명성황후와 주변 인물들에 의한 무차별적 개항으로 도입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될 지 모르겠으나, 이후까지 추진되는 개화정책은 모두 고종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황제에 즉위한 이후에도 그의 개혁에 대한 의지는 계속 이어졌다. 광무개혁을 통해서 각종 측량사업, 철도부설, 광산개발, 화폐개혁을 단행하였으며, 부국강병을 꾀하기 위해 서구식 군대로의 개편과 병기의 개량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게다가 그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국운을 바로 잡기 위해 을사조약의 비준을 거부하고 외교권을 확보하려했던 저항적 주체군주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1882년의 태극기 제정과, 1897년 대한제국을 수립할 때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명명할 때 보여준 그의 생각에서 잘 알 수 있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삼한의 땅으로서 나라의 초기에 하늘의 지시를 받고 한 개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나라의 이름을 대한이라고 한다고 해서 안될 것이 없고 또한 매번 일찍이 보건대 여러 나라의 문헌에는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전에 이여 '한'으로 될 징표가 있어 가지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포하지 않아도 세상에서는 모두 '대한'이라는 이름을 알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고종실록 권 36. 광무원년(1897) 10월 11일조-
이렇듯 고종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잡고 부국강병에 힘쓰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였으나, 거듭되는 서구 열강들의 치열한 다툼과 내정의 문란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한 비운의 개혁군주라 할 수 있다.
2.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
그렇다면,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인 명성황후를 어떻게 볼 것인가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설명한 바 있지만, 명성황후는 대체로 대원군과의 권력투쟁, 척족들을 단속하지 못해 발생한 전횡과 그에 따른 국정의 문란, 줄타기 외교에 따른 서구 열강의 각축과 무분별한 개화정책으로 망국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명성황후와 대원군은 권력을 둘러싼 싸움보다는 정치노선, 즉 개화 냐 쇄국이냐 하는 노선을 두고 대립한 것으로 보이며, 줄타기식 외교 노선을 지향한 것은 단순히 권력의 이익에 집착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이익에 합치되는 방향으로 외교노선을 전개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견해(이상 이태진 교수의 견해)가 있다.
또, 그들에 의해 추진된 개화정책은 명성황후가 아닌 고종의 주도에 의해 이루어 졌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듯 하다. 그들이 아무리 정권을 쥐고 농단하고 있었다 해도 국사의 최종 결정권자는 국왕인 고종에게 있었기에 그들 자의대로 무분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주장에 불과한 셈이다.
또, 명성황후가 나라를 망친 불여우니 혹은 나라를 망친 암탉이라고 표현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당시 고종이 최고 책임자였던 상황에서 명성황후는 단순히 고종의 정치와 대외관계에서 조언을 해 주는 충실한 참모 역할을 하고 있었던 유능한 왕비였다. 거기에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깨닫고 왕비로서 나름대로의 역할과 본분을 다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명성황후가 앞장서서 국사를 좌우하고 외교노선을 결정해서 나라를 망쳤다느니 하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것이다.
또, 명성황후는 총명하고 사리 깊었던 인물로 그의 타고난 재질은 그의 사후 고종이 직접 써서 내린 [명성황후 행록] 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척족을 단속하지 못한 그녀의 정치적 행보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는 평가도 제기된다. 명성황후를 며느리이자 고종의 왕비로 맞아들인 대원군은 척족의 전횡을 막기위해 이렇다 할 친인척이 없었던 명성황후를 맞아들였지만, 자신의 처남인 민승호를 명성황후의 양오빠로 입적시키면서 외척의 발호를 사실상 부추겼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이러한 자신들 척족의 발호에 대해 별다른 단속이나 주의를 주지 않았고, 결국 이들의 전횡은 1882년에 있었던 임오군란의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첫댓글 군비증강은 별 실효가 없는 정책이됩니다. 수시로바뀌는 군사고문단은 매번 자국식을 주장햇고 그바람에 조선군은 부대별로장비가 전혀 호환이 안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거금주고 일본에게 사기당한 군함 구입건도 그렇고( 수송선에 포 몇개달고 군함이라고 팔아먹는데나 그걸 사는나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