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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祭祀) 정의 : 신령(神靈)에게 음식을 바치며 기원을 드리거나, 돌아간 이를 추모하는 의식.
☆ 연원 및 변천 : 기원과 형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원시·고대인들은 우주 자연의 모든 현상과 변화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꼈을 것이며, 특히 천재지변을 겪을 때는 공포감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초월자 또는 절대자를 상정하고 삶의 안식과 안락을 기원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2) 천지 만물의 생성화육(生成化育)에 대해 외경심·신비감을 갖게 되는 동시에 생명에 감사를 표하는 행 사가 베풀어졌다.
3) 하늘[天]·땅[地]·해[日]·달[月]·별[星辰]·산·강[川]과 그 밖의 자연물에 초인적인 힘이나 신통력이 깃 들어 있다고 믿고 삶의 안녕과 복을 비는 의식이 생겨났다.
4) 인간의 사후 영혼을 신앙한 나머지 귀신을 섬기는 예식을 갖게 되었다.
5) 조령(祖靈)에 대한 외경심과 조상 숭배 사상이 합치되어 조상을 추모하고 자손의 번영, 친족간의 화목 을 도모하는 행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유래를 지닌 제사는 인지(人智)가 열리고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일정한 격식을 갖추게 되었고, 제도로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 대상도 뚜렷하게 설정이 되었다.
우리 민족은 아득한 고대로부터 하늘을 공경해 제천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농경(農耕)에 종사하게 된 뒤로는 우순풍조(雨順風調)와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이 성행하게 되었다. 옛 기록에 나타나 있는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濊)의 무천(舞天) 등이 모두 제천 의식인 동시에 농사와 연관이 있었던 듯하다. 그 후 국가 형태가 완비된 뒤로는 사직(社稷)과 종묘(宗廟), 그리고 원구(圜丘)·방택(方澤)·농업(先農壇)·잠업(先蠶壇) 등 국가 경영과 관련이 있는 제례가 갖추어졌고 조상 숭배 사상의 보편화와 함께 가정의 제례도 규격을 이루게 되었다.
국가에서는 원구·방택과 사직의 제사가 가장 중요하고, 왕가에서는 종묘의 제사를 으뜸으로 삼았으며, 일반 사가(私家)에서는 가묘(家廟)가 있어 조상제사를 정성껏 받들었다. 이런 제례는 모두 유교의 가르침에 따른 것으로,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주희(1130-1200 : 성리학을 확립시켜 유학사와 동아시아 사상사에 불후의 영향을 미친 학자)의 『가례』를 기본으로 삼아 제사를 지냈다.
이리살인 [ 以理殺人 ] 명분이 사람을 죽게 함
이 명교(名敎)의 특징은 오직 "명"만 강조하고 "실"은 상관하지 않는다. 임금, 아버지, 남편의 사람됨과 무관하게 신하, 아들, 아내는 그들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오로지) 그들이 명목상(名義上) 임금, 아버지, 남편이기 때문이다. 임금, 아버지, 남편으로서의 개인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냐 하는 점은 신하, 아들, 아내가 감히 제기할 수 없는 물음이다. 이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 곧 "명교"를 어기는 것으로서 전통 사회에서의 최대의 죄이다. 이런 맹목적 "명교" 때문에 억울하게 한을 품고 죽은 사람은 헤아릴 수 없는데, 이것이 바로 청대학자 대진(戴震, 1723-1777)이 말한 "이리살인(以理殺人)"이다. 그는 "사람이 법에 죽으면 그래도 동정을 받건만 명분(理)에 의해 죽을 경우 그 누가 동정하는가 ?"라고 하면서 도학(강상명교를 더욱 엄격히 적용한 성리학)을 통렬히 비판했다.(같은 책, 648쪽)
예컨대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효자와 열녀에게는 정문(旌門)을 내려서 표창을 했다. 효자는 부모가 죽은 뒤 시묘살이를 하다가 몸이 상하여 죽은 경우가 많았다. 또 열녀는 남편이 죽은 뒤에 따라 죽거나 자결하여 정조를 지킨 경우였다. 이들은 스스로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국가에서 그들에게는 파격적인 물질적 보상과 신분적 혜택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런 자살 행위를 조장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리살인'인 것이다.
경이원지 [ 敬而遠之 ]
공자가 말하였다. "인민이 의롭게 되는 일에 전심전력하고,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하는 것이 지혜라고 할 수 있다."(6-22 子曰 :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자로가 귀신 섬기는 일을 묻자, 공자는 말했다.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거늘, 어떻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감히 여쭙건대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삶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거늘, 어떻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11-12 季路問事鬼神, 子曰 : "未能事人, 焉能事鬼?" 曰 : "敢問死?" 曰 : "未知生, 焉知死?")
공자는 괴이한 일, 폭력, 분란(역적), 귀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7-21 子不語怪, 力, 亂, 神.)
귀신 내지 천도에 관한 인문주의적인 전통을 계승하여, 공자는 이와 같이 귀신에 대해 명확한 한계를 설정했다.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해야" 지혜인 만큼, 귀신을 멀리하지 않으면 지혜가 아니다. 아무튼 귀신의 존재에 대해 공자는 명확히 부인하지 않았으나 그 존재를 강조하지도 않았다. 한대(漢代)의 유향(劉向, 77-6 B.C.)이 저술한 『설원(說苑)』에 나오는 다음 대화에도 공자의 그런 분위기가 잘 반영되어 있다.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죽은 사람에게 지각이 있습니까 ? 없습니까 ?'(=귀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죽은 사람에게 지각이 있다고 말하자니 효성스런 자손이 생업에 방해되면서까지 장사에 몰두할까 염려되고, 지각이 없다고 말하자니 불효한 자손이 죽은 이를 유기하고 장사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자공아! 죽은 사람에게 지각이 있는지 없는지 알고 싶거든, 기다렸다가 죽으면 저절로 알게 되리니 그래도 늦지 않을 것이다. […] 이와 같은 태도가 바로 "귀신을 멀리하는" 일일 것이다. 『논어』도 공자는 귀신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7-21)
공자 이전의 인문주의적 전통
중국 전통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일찍부터 인간과 귀신 관계에 대해 인간 위주의 안목을 견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학문있는 선비들은 귀신에 대한 신앙은 물론이고 그에 대한 언급 자체도 학문이 부족한 소치로 여겼다. 귀신에 휘둘리지 않는 태도는 공자 이전부터 정립되기 시작했다. 『춘추좌전』의 다음 내용을 보자. "나라가 장차 흥하려면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나라가 장차 망하려면 귀신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國將興, 聽於民; 將亡, 聽於神)."(B.C. 662) "천도(天道)는 멀고 인도(人道)는 가까운 것이어서, 양자는 서로 상관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天道遠, 人道邇, 非所及也). 어떻게 천도로 말미암아 인도를 알 수 있겠는가?"(子産의 말, B.C. 524) "설나라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찾고, 송나라는 귀신으로부터 증거를 찾고 있기 때문에, 송나라의 죄가 더 크다."(B.C. 509)
어떤 사람이, 하늘의 별자리의 변동(즉 天道)을 핑계로 인간 세상에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을(즉 人道를 규제할 것을) 요청하자, 당시의 현명한 정치가 자산(子産)은 단호히 배척했던 것이다. 그는 "천도는 멀고 인도는 가깝다"고 전제했다. 천도는 누구도 쉽게 추측할 수 없는 일이나, 인도는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추측하기 어려운 영역의 어떤 일을 누가 임의로 해석한 다음 그런 해석을 바탕으로 인도(人道)를 제약하려는 발상은 그 자체로 이치에 맞지 않다고 자산은 여겼다. 고대에 천상(天象)의 변화를 빌미로 어떤 주장을 하는 경우는 대체로 그 발언 당사자가 어떤 이치를 깨달았다기보다는 그런 발언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물론 그런 주장에 현혹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자산은 명철한 논리로써 그런 현혹적인 주장을 물리쳤던 것이다. 물론 '천도'에는 귀신에 관한 일도 포함된다.
제사란 무엇인가 ?
공자가 말하였다. "우임금은 내가 비난할 데가 없다. 거친 음식을 드시면서도 귀신에게는 효성을 다했고(致孝乎鬼神), 허름한 의복을 입으시면서도 제사 예복은 아름답게 꾸몄고, 궁궐은 낮게 지었으나 치수 사업에 진력하셨으니, 우임금은 내가 비난할 데가 없다."(8-21 子曰 : "禹, 吾無間然矣. 菲飮食, 而致孝乎鬼神; 惡衣服, 而致美乎黻冕; 卑宮室, 而盡力乎溝洫. 禹, 吾無間然矣.")
증자가 말하였다. "부모상에 장례를 정중히 하고 조상을 추모하는 제사에 정성을 다하게 하면 사람들의 덕이 두터워진다"(1-9 曾子曰 :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제사란 무엇인가 ? "귀신에게는 효성을 다하는 것(致孝乎鬼神)", "존재의 시원을 추모하는 것(追遠)"이 제사이다. "귀신에 효성을 다한다 함은 선조 제사를 풍성하고 정결하게 한다는 것이다." (주희) 공자는 말하기를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하라(敬而遠之)"고 하였다. 멀리하지 않으면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공경해야 하는가 ? 거기에 인간의 도리가 있기 때문이다. 귀신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공경을 표하는 일이 곧 제사이다.
공자의 이러한 사상은 순자를 거쳐 한대(漢代) 『예기』에서 체계적인 제사관으로 확립되었다. 『예기』에 따르면 "예에는 오경(五經)이 있는데, 그중에 제례가 가장 중요하다. 제사란 밖으로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마음이 슬프기 때문에 예로써 받드는 것이다. 밖으로 제물을 극진히 마련하고 안으로 성심성의를 다하는 것, 이것이 제사를 올리는 마음가짐이다."(「제통(祭統)」) 『순자』에 따르면 "제사란 추모하는 마음의 표현으로서, 참마음과 믿음, 사랑과 공경의 지극함이요, 예절과 격식의 성대함이다. 군자는 제사를 인간의 도리(人道)로 여기고, 백성은 귀신에 관한 일(귀사)로 여긴다. 제사는 죽은 분을 살아 계신 듯 섬기고 없는 분을 있는 듯 섬기는 것인바, 제사 대상은 형체도 그림자도 없으나 격식을 완수하는 것이다."(「예론」)
그리고 "신종추원(愼終追遠) 민덕귀후(民德歸厚)"라는 증자의 말은 유교의 상례와 제례를 언급한 대표적인 말로 전해오고 있다. 주희의 설명에 따르면 "신종(愼終)은란 초상에 예를 극진히 하는 것이고, 추원(追遠)은 제사에 정성을 극진히 하는 것이다. 민덕귀후(民德歸厚)는 아래의 백성들이 교화되어 그들의 덕 또한 순후해지게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임종(終)이란 사람이 소홀히 하기 쉬운 것인데도 능히 근신하여 모시고, 선조(遠)는 사람이 망각하기 쉬운 일인데도 능히 추모하게 되는 것이 순후함의 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스스로 행하면 자신의 덕은 순후해지고 아래 백성이 교화되면 그들의 덕 또한 순후해지게 된다."
그러나 증자의 말은 공리주의(功利主義)의 혐의가 있다. 백성이 순후해지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상례와 제례를 지내면 이로움이 있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증자의 이러한 설명은 공자의 본뜻이 아니라고 풍우란은 이렇게 지적하였다. "인간의 마음의 진실된 발로는 예에 맞기만 한다면 바로 지극히 좋은 것이다. 그것을 행위로 옮긴 것이 과연 이로운 결과를 낳을지의 여부까지 꼭 따질 필요는 없다. 사실상 마음의 진실하고도 예에 맞는 발로가 행위로 표현되면 사회에 이익이 되면 되었지 적어도 해는 없는 것이다. 공자는 다만 이 사실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이다.
예컨대 3년상제는 증자가 말한 '부모상에 장례를 정중히 하고 조상을 추모하는 제사에 정성을 다하게 하면 사람들의 덕이 두터워진다'는 설로써 이론적 근거를 부여할 수도 있었겠으나, 공자는 그저 3년상을 행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행하면 편하다고만 말했을 따름이다. 이 제도가 비록 '인민의 덕을 두텁게'하는 이로운 결과를 내포했다손 치더라도 공자는 그것으로써 3년상제의 이론적 근거로 삼지 않았다는 말이다. 공자가 행위의 결과를 강조하지 않은 사실은 그의 일생 행적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로는 공자의 입장을 설명하여 '군자가 벼슬함은 자기의 의(군신의 도리)를 행하는 것일 따름이다. 도가 실현되지 않을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18-7)"(『중국철학사』 상, 125-6쪽)
제사의 방법
조상 제사를 드릴 때는 조상이 앞에 계신 듯이 드려야 하고, 신령께 제사를 드릴 때는 신령이 앞에 계신 듯이 드려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가 말하였다. "내가 제사에 몸소 참여하지 않으면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것과 같다."(3-12 祭如在, 祭神如神在. 子曰 : "吾不與祭, 如不祭.")
맹의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효란 무엇입니까?" "어기지 않는 것이다." 번지가 마차를 몰자 공자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맹손(맹의자)이 나에게 효를 묻길래 나는 '어기지 않는 것이다'고 말해주었다." "무슨 뜻입니까?" "살아계실 때는 예로써 섬기고, 돌아가시면 예로써 장례하고 예로써 제사하라는 것이다."(2-5 孟懿子問孝. 子曰 : "無違." 樊遲御, 子告之曰 : "孟孫問孝於我, 我對曰 '無違'." 樊遲曰 : "何謂也?" 子曰 : "生, 事之以禮; 死, 葬之以禮, 祭之以禮.")
주희에 따르면 "조상 제사는 효성이 위주이고 신령에 대한 제사는 공경함이 위주이다. 자기가 응당 제사해야 할 때 혹시라도 다른 이유로 참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시켜 그것을 주관하게 하면 귀신이 마치 앞에 계신 것과 같은 성의를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이미 제사를 드렸다고 하더라도 이 마음은 석연치 않은 것이 마치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것과 같게 된다는 말이다. 자기의 정성이 있으면 조상의 신이 있게 되고 정성이 없으면 조상의 신도 없으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내가 제사에 참여하지 않음은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것과 같은즉 정성이 실질이고 예는 허상이다."(『논어집주』)
공자는 "마치 조상의 귀신이 앞에 계신 듯이 정성을 다해 제사를 모셔라"고 말한다. 그러나 귀신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따라서 제사도 귀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제사하는 것이 아니다. 제사란 후손으로서 돌아가신 조상에 대한 추념 예식일 따름이다. 따라서 제사는 자신이 직접 드려야 하는 것이다. 자신은 참여하지 않고 남에게 시켜서 대신 제사 지내게 하는 것은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
제사의 도리
공자 왈 "자기의 귀신이 아닌데도 제사하는 것은 아첨이다."(2-24 子曰 : "非其鬼而祭之, 諂也. […]")
계씨가 태산에 여(旅 : 천자나 제후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를 드리자, 공자가 염유에게 말하였다. "네가 막을 수 없었는가 ?" "막을 수 없었습니다." "아 ! 태산의 신이 임방만도 못한 줄로 여긴단 말인가 ? "(3-6 季氏旅於泰山. 子謂冉有曰 : "女弗能救與?" 對曰 : "不能." 子曰 : "鳴呼! 曾謂泰山不如林放乎?")
공자가 말하였다. "체 제사는 강신주를 부은 뒤부터는 나는 보고 싶지 않다."(3-10 子曰 : "禘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
혹자가 체 제사의 내용을 묻자, 공자는 "모른다. 그 내용을 아는 자는 천하에 대하여 마치 이것을 보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손바닥을 가리켰다.(3-11 或問禘之說. 子曰 : "不知也. 知其說者之於天下也, 其如示諸斯乎!" 指其掌.)
공자에 따르면 도리상 자기와 아무 관련이 없는 귀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 즉 사회에 아무런 긍정적 의미가 없고 오히려 파괴적인 작용을 할 따름이다. 대부인 계씨가 제후만이 드릴 수 있는 태산에 제사를 올리자 공자는 탄식하였다. 공자가 보기에 그런 행위는 마치 오늘날 도지사나 군수가 국가 원수나 행할 수 있는 의전행사를 행하는 것처럼 참담한 짓이었기 때문이다. "귀신도 예에 맞지 않는 제사는 흠향하지 않는다"는 말 역시 그런 참담한 짓은 조상도 역겨워할 내용이라는 말이다. 공자는 제사를 올릴 자격이 없는 제사는 드려서는 안 된다고 했을 뿐 아니라, 그런 제사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운 일로 여겼다. 즉 천자만이 드릴 수 있는 체(禘) 제사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설명하는 것조차 거부하였던 것이다.
경건과 제사
공자는 거친 밥에 나물국을 먹을 때도 반드시 제사를 드렸고(고수레를 하였으며), 반드시 재계처럼 엄숙했다.(10-11 雖疏食菜羹, 瓜祭, 必齊如也.) 공자가 삼간 것은 재계, 전쟁, 질병이다.(7-13 子之所愼 : 齊, 戰, 疾.) 공자는 벗이 보내준 물건은 그것이 비록 수레나 말이라고 하더라도 제사 고기 말고는 절하지 않았다.(10-23 朋友之饋, 雖車馬, 非祭肉, 不拜.)
공자에게 있어서 제사는 "삶에 대한 경건한 태도의 표명" 그 자체였음을 알 수 있다. 주희는 설명하기를 "옛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 종류마다 조금씩 떼어내서 두간 사이에 두어 선대에 처음 음식을 만든 사람을 제사하였으니 근본을 잊지 않은 것이다. 재계는 엄숙하고 공경하는 모습이다. 공자는 박한 물건이라도 반드시 제사를 드렸으니 그 제사는 반드시 공경을 다했으니 성인의 정성이다." "재(齊)의 의미는 정돈한다는 것이다. 제사를 모시려면 정돈되지 못한 사려를 정돈하여 신명을 맞이하는 것이다. 지성을 모으는지 여부와 신의 흠향 여부는 모두 여기서 결정된다. 전쟁은 많은 사람의 생사와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는 것이고, 질병은 또 자신의 몸의 생사존망을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왕손가가 공자에게 질문하였다. "안방(귀신)에 잘 보이기보다는 부엌(귀신)에 잘 보여야 한다고들 말하는데 무슨 뜻입니까?" "그렇지 않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3-13 王孫賈問曰 : "與其媚於奥, 寧媚於竈, 何謂也?" 子曰 : "不然, 獲罪於天, 無所禱也.")
공자가 말하였다. "내게 잘못이 있었다면 하늘이 증오할 것이다 ! 하늘이 증오할 것이다!"(6-28)
공자가 말하였다. "하늘이 내게 덕을 부여해 주셨으니, 환퇴 따위가 감히 나를 어쩌겠는가?"(7-23 子曰 : "天生德於予, 桓魋其如予何?")
가정에서 봉행해 온 제사는 다음과 같다.
국가에서는 원구·방택과 사직의 제사가 가장 중요하고, 왕가에서는 종묘의 제사를 으뜸으로 삼았으며, 일반 사가(私家)에서는 가묘(家廟)가 있어 조상제사를 정성껏 받들었다. 이런 제례는 모두 유교의 가르침에 따른 것으로,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주희의 『가례』를 기본으로 삼아 제사를 지냈다.
1) 사당(祠堂)에 올리는 제의 : 대종(大宗)·소종(小宗)은 집 안에 사당을 모시고 있다. 사당에는 고조 이하 4대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는데, 초하루[朔]·보름[望]에 분향을 하고 기일(忌日)에는 제사를 드린다. 집안에 중대한 일이 생겼을 때는 반드시 고유(告由)를 하고, 색다른 음식이 생겼을 때 먼저 드리며, 계절의 신미(新味)가 났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삭망참(朔望參)이라고도 한다.
2) 사시제(四時祭) : 사계절에 드리는 제사로 중월(2·5·8·11월)에 사당에서 지낸다.
춘하추동의 계절마다(춘분, 하지, 추분, 동지(율곡 이이) 혹은 매 중월인 음력 2,5,8,11월 상순의 丁일이나 亥일에. 불가피할 때에는 계월인 1,4,7,10월에) 고조 이하의 조상을 함께 제사하던 합동제사의 하나이다. 예전에는(사례편람) 가장 중요한 제사였으나 조선시대이후 기제가 중시되면서 점차 퇴색되어 갔다. 요즈음에는 지내지 않거나 1년에 한번만 행하고 있다. 요즈음에는 청사제라고도 한다. 사시제는 사당이나 정침의 대청에서 행해졌다.
※요즈음에는 시제, 시사, 시향, 세향, 묘제, 묘사, 세일사, 세사, 세제라는 말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옛날의 세일사를 말함)
- 세일사(歲一祀) : 5대조 이상의 조상에 대하여 1년에 한 번 조상의 산소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세일사는 문중에서 지내므로 문중 대표(종손, 요즘에는 연장자가 대신하기도 함)가 주인이 된다. 추수가 끝난 음력 10월중 하루를 정해 제사를 올린다. 묘지에서 지내기 때문에 제상 위에 차일을 친다. 묘지가 없으면 위패를 모신 사우(祠宇)나 편리한 장소에서 지방을 모시고 지낸다. 가문에 따라서는 초헌시에 삽시정저(揷匙正箸)를 하며 첨작, 합문, 계문 절차가 없다. 가문에 따라 먼저 혹은 나중에 산신제를 지낸다. 요즈음 말하는 시제 혹은 묘제가 세일사이다.
- 산신제(山神祭)
조상의 묘를 모신 산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산신제를 지내는 날은 1년에 한번 조상의 묘지에 제사를 지낼 때 지낸다. 산신제를 지내는 장소는 조상묘지의 동북쪽에 제산을 모으고 지낸다. 같은 장소에 여러분 조상의 묘지가 있더라도 산신제는 한곳에서 한번 만 지낸다.
3) 시조제(始祖祭) : 시조를 잇는 대종손이 제주가 되어 동지에 지낸다. 동지는 일양(一陽)이 시생(始生)하는 날이라, 이를 상징하는 뜻에서 시조의 제사를 지낸다.
4) 선조제(先祖祭) : 초조(初祖) 이하 고조 이상을 입춘(立春)에 지낸다. 입춘은 생물지시(生物之始), 곧 만물이 싹을 틔우기 시작하는 날이기 때문에 이를 상징하여 선조를 제사지내는 것이다.
5) 이제(禰祭) : 아버지의 사당에 계추(季秋 음력 9월 15일)에 지내는 제사이다. 계추는 성물지시(成物之始), 곧 만물을 거두는 무렵이라 이를 상징하여 조상 중에 가까운 아버지의 제사를 지낸다.
부모의 제사를 특별히 따로 두었던 것은 그 친분이 다른 조상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6) 묘제(墓祭) : 산소에서 지낸다. 기제(忌祭)로 받들지 않는 조상에게 드리는 제향이다.
고조까지의 조상을 제사지내는 묘제이다. 한식 단오 또는 참배가 필요할 때 산소에 찾아가서 드리는 제사이다. 대개 3월 상순에 택일하여 그 날은 아침 일찍이 묘역을 청소하고 주인은 전날부터 재계한다. 산소에 도착하면 먼저 산신제를 지내고나서 묘사를 지낸다.
[격몽요결]에는 1년에 4번(정월 초하루, 한식, 단오, 추석) 묘제를 지낸다고 되어 있으나,
[사례편람]에는 3월 상순에 날을 택하여 지낸다고 적혀있다. 제찬은 기제와 마찬가지로 준비하고 토지신에게도 따로 제수를 마련하여 제사를 지낸다. 요즘은 지내지 않는다.
- 천신(薦新) 새로운 음식이나 과일이 생기면 가묘에 먼저 올린다.
- 유사즉고(有事則告) 살아계신 어른에게 여쭈어야 할 일이 생기면 가묘에도 아뢴다.
- 츨입필고(出入必告) 가족이 나들이 할 때는 꼭 아뢴다.
- 주인신알(主人晨謁) 주인은 아침마다 뵙는다. 다른 가족도 주인을 따른다.
7) 기제(忌祭) : 죽은 날, 즉 기일에 지낸다. 사대봉사(四代奉祀)라 하여 4대를 지내며 해당되는 신위에만 드린다. 기제는 기일제사의 약칭으로 기일 즉, 고인이 돌아가신 날에 해마다 한 번씩 지내는 제사로서 오늘날 제사라면 통상 기제를 말한다. 기제의 봉사대상은 과거에는 [주자가례]에 따라 4대조까지였으나 현대의 [건전가정의례준칙]에서는 2대 봉사를 권장하고 있다. 제사지내는 시간은 예전에는 고인이 돌아가신 날의 첫 시간인 子時(0시경, 돌아가시기 전 날밤 11시 넘어서)에 지냈었으나, 요즘은 [건전가정의례준칙]에 따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돌아가신 날 해가 진 뒤 적당한 시간에 지낸다. 내외분 다 별세 하셨을 경우는 합설(한 분의 제사 때 두 분을 같이 모시는 것))한다. [주자가례]등의 예서에는 당사자만 모신다고 되어 있으나 함께 모시는 것이 예법에 어긋날 것이 없고 인정상으로도 합당하다(퇴계 이황)하였다.
가묘에서 위패를 정청(큰방)으로 모셔다가 지낸다. 장자손이 주인이 되어 그 아내가 주부가 된어 지낸다.
- 생신제 : 돌아가신 부모님의 생신날에 지내는 제사인데 지금은 지내지 않는 가정이 많지만 돌아가신 후 첫 생신에는 지내는 가정이 많다.
- 사갑제 : 돌아가신 부모님의 환갑이 돌아오면 지내던 제사이다.
- 그 외 묘제때 지내는 산신제, 喪(상)중에 지내는 성복제, 발인제, 노제, 평토제(위령제), 초우제, 재우 제, 삼우제, 삭망전(朔望奠)... 등이 있고 喪과 관련된 졸곡, 부제(가묘제(家廟祭), 소상, 대상, 담제, 길제, 초혼제... 등이 있다.
8) 차례(茶禮) : 차례는 간소한 약식제사[無祝單酌]로서 음력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삭망참(朔望參)) 그리고 명절이나 조상의 생신날에 지내던 제사이며, 보통 아침이나 낮에(오전 중) 지낸다. [가례]를 비롯한 예서에는 오늘날의 차례는 없으나 우리나라에서 관습적으로 민속명절에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이다. 요즈음은 설에 지내는 연시제(年始祭)와 추석절의 절사(節祀)가 이에 해당된다. 차례는 기제를 지내는 조상에게 지낸다. 예를 들어 4대를 봉사하는 가정에서는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가 대상이 된다. 차례를 드리는 방법은 봉사의 대상이 되는 여러분을 한번에 모신다. 지방은 합사하는 경우 종이 한 장에 나란히 쓴다.(혹은 부부별로 한 장에 쓰기도 한다). 차례도 기제를 지내는 장손의 집에서 지내는 것이 원칙이지만 지방이나 가문의 전통에 따라 한식이나 추석에는 산소에서 지내기도 한다. 추석은 예서에는 나타나 있지 않고 율곡은 천신례(철에 따라 새로운 음식, 과일을 올림)로 규정하였다. 하지만 관행으로 가장 성행하게 차례를 지낸다. 결국 예서 보다는 전통적인 관행에 따라 행하여 오고 있다. 즉 [주자가례]가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설날 차례는 부모님께 세배를 드린 후에 올린다. 생자(生者)가 사자(死者)보다 우선 한다는 이치이다. 가문이나 지방에 따라서는 세배보다 차례를 먼저 지내기도 한다.
기제사(忌祭祀)보다 간략하다. 무축단잔(배)(無祝單盞(拜)): 축문을 읽지 않는다.
(예법서 에 따라서는 명절 제사의 축문 서식이 수록되어 있기도 하지만, 현대에는 사문화되어 사용하지 않는다) 헌작(잔 올리기)은 1회만 한다.(기제사처럼 헌작을 다하는 가문(지방)도 있다)
(차례에는 헌작 시 주전자로 상위의 잔에 직접 따르는 가문(지방)도 있다) 첨작, 합문, 계문절차가 없다.
작은집 식구들끼리 작은집 차례를 아침일찍 지내고나서 큰집으로 가서 다 모여 큰집차례를 지내는 가문(지방)도 있고 큰집부터 지내기도 한다. 설에는 차례를 먼저 지내는 가문(지방)도 있고 세배(歲拜: 살아있는 사람들끼리 인사를 올린다)를 먼저 하는 가문(지방)도 있다.
가문(지방)에 따라 새벽~이른 아침에 지내기도하고 혹은 좀 늦게 오전 중에 지내기도 한다.
기제사 대상 전 조상을 모신다.(기제사는 해당 조상 내외만 모신다)
촛불을 켜지 않는다(촛대와 초를 진설은 하지만 아침~오전이므로) 헌다(=진다, 숭늉 올리는 절차)절차가 없는 가문(지방)도 있다. 기제에는 식혜, 차례에는 해(생선젓, 조기)를 올리는 가문(지방)도 있다.
초헌 잔 올린 후 (제주만 재배 하나, 차례는 무축단잔임을 감안하여, 다 같이 제사를 모신다는 의미에서)일동재배 하기도 한다. 적(炙)은 고기(육적)와 생선(어적) 닭(계적)을 따로 담지 않고 한 접시에 담아 올리는 가문(지방)도 있다.
설 : 메 대신 떡국을 올린다.(요즈음에는 메도 같이 올리기도 한다)
추석 : 송편, 햇곡식, 햇과일, 토란국(요즈음에는 메와 송편을 다 올린다)
9) 한식 (寒食) : 한식에 묘제를 지내는 풍속은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한식을 대표적 명절로 여겨 국가에서는 종묘(宗廟)와 경령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관리에게 3일의 휴가를 주었으며, 죄수의 사형을 금하기도 하였다. 고려 말 이후 주자의 『가례(家禮)』가 수용되어 사당(祠堂)의 예가 강조되었지만, 민간에서도 묘제를 지내는 것이[上墓, 上墳] 매우 성하였으므로 설, 한식, 단오, 추석 같은 속절(俗節)에 묘제를 지내는 풍속을 허락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국가에서 한식에 종묘와 각 능원(陵園)에서 제향을 지냈고, 민간에서도 이를 좇아 술, 과일, 포 같은 음식으로 묘소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에 유학자들은 『가례』에 의거하여 사당에서의 예와 사시제(四時祭)를 강조하고 명절에 행하는 묘제를 폐지하도록 하였으나, 이언적(李彦迪)은 『봉선잡의(奉先雜儀)』에서 설, 한식, 단오, 추석에 묘소에 가서 배소(拜掃)하여도 인정상 해가 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이(李珥)는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마땅히 한식과 추석에는 『가례』 묘제에 의거하여 제수를 갖추어 축문을 읽고, 산신제를 지내야 한다.”라고 하여 한식의 묘제를 큰 제사로 여기었다. 특히 김장생의 『상례비요(喪禮備要)』 묘제조(墓祭條)에는 묘제의 축문에 상로기강 ‘雨露旣濡(계절이 바뀌어 비와 이슬에 이미 젖었고)’라고 하여, 기후가 변한 것을 느끼기 때문에 이에 추모의 정을 펼치고자 한다는 절사의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
한식 절사의 장소는 원칙적으로 묘소이지만, 요즘에 와서는 재실이나 사당에서 지내기도 한다. 절사의 절차는 『가례』 묘제에 준한다. 그 절차는 집안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진설, 강신, 참신, 초헌, 독축, 아헌, 종헌, 사신, 철상 순으로 진행하며, 산신제도 지낸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한식이 2월 내지는 3월에 걸치거나, 청명, 삼짇날과 중복되거나 하여 대체로 2월의 시제나 절일제(節日祭)와 겹치기도 했다. 또한 『가례』의 묘제가 3월에 택일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한식에 사당에서 시제를 지내거나 시조와 선조의 묘소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래서 『면암유고(勉菴遺稿)』에는 “각 능원과 묘궁에도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며, 4대조의 범위를 넘어선 조상의 산소에서 모두 제사를 지낸다.”라고 하였으며,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청명과 한식에 “산소에 간다.”라고 하여, 한식에는 4대조는 물론 5대조 이상 선조의 묘제를 지냈다.
이에 지역에 따라 한식에는 차례를 지내고 4대 조상의 묘제를 지내거나, 5대조 이상 조상의 묘제를 지내기도 한다. 오늘날 한식에는 성묘를 많이 하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아직도 절사(節祀)로서 4대 조상의 묘제를 지내기도 한다.
- 제사상 차림표 : (옛 예서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설사 다 갖추지 못해도 정성들여 지내면 될 것입니다)
1). 주자가례 : . . . . . . . . 지방(사진)
밥 . . 잔 . . 수저.젓가락 . . 초 . . 국
국수 . 고기 . . . 적 . . . . 어물 . . 떡
포혜 . 소채 . 포혜 . 소채. 포혜 . 소채
과일 . . 과일 . . 과일 . . 과일 . . 과일
2). 사례편람(도암) : 위의 주자가례 차림표와 같으나 과일이 6접시이고
나물(채)줄이 : 포 . 혜 . 간장 . 생채 . 혜 . 김치 로 다르다.
3). 격몽요결(율곡) : . . . . . . . . . 지방(사진)
밥 . 잔 . 국 . 수저.젓가락 . 밥 . 잔 . 국
국수 . 떡 . 육물 . 적 . 어물 . 국수 . 떡
. . . 탕 . . 탕 . . 탕 . . 탕 . . 탕
자반 . .포 . .나물 . .간장 . .식혜 . .김치
밤 . . . 대추 . . . 곶감 . . . 배 . . . 은행
4).가정의례준칙 : . . . . . . . . . . 사진(지방)
. . 밥 . . . . 국 . . .. . . . 밥 . . . . . 국
. . . . . 잔 . . . . . . . . . . . . . 잔
촛대 . . 채소 . . .간장 . .. . . 김치 . . 촛대
. . . . .어류 . . . . . 탕 .. . .. . 육류
. . . . .과일 . . . . 과일 . . . . .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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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차림 방법: (가문마다 지방마다 다름)
이들 제사 중 대표적인 기제의 절차를 『가례』를 바탕으로 속례를 참고해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하루 전에 재계(齋戒)를 하고 정침(正寢)을 깨끗이 쓸고 닦은 다음 제상(祭床)을 베푼다. 제청(祭廳)의 서북쪽 벽 아래에 남향으로 고서비동(考西妣東)이 되게 신위를 모신다. 고서비동이란 아버님 신위는 서쪽에, 어머님 신위는 동쪽에 모시는 것으로, 『가례』에는 기일에 해당하는 신위만 모시도록 되어 있으나 속례로는 합설(合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제사지내는 날짜, 시간
전통적으로 기제사는 돌아가신날(음력) 자시(23~1시)부터 인시(3~5시)까지 지냈습니다.
동양시 (子시(11:30~1:30시)에 지내는 의미는 돌아가신 날의 첫 시간에 조상님을 모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전에는 꼭 돌아가신 전날 밤 11시가 넘어서(=돌아가신날 자시) 제사를 지냈으므로 돌아가신 전날을 제사날로 기억하고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편리하기 때문에 돌아가신 전날을 제삿날 이라고 해왔던 것 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돌아가신 날이 제삿날 입니다.
그리고 또 요즘은 돌아가신 날마다 지내자니 설과 추석을 합하여 1년에 10번도 더 지내는 집도 있어 생활상 어려움이 많다하여 부모님 제사만을 돌아가신 날 밤에 집에서 지내고 그 외는 모두 오곡백과(五穀百果)가 풍성한 음력10월 첫 일요일이나 개천절에 한번으로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 즉 큰제사(門中大祭)나 묘제(墓祭)로 지내는 것이다. 큰제사로 한번에 지내니까 언뜻 생각하기에 제사를 빼먹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1년에 한번씩 따로따로 모시던 것을 한번에 모셔 놓고 지내는 것뿐이지 빼먹는 것은 아니다.” 조상님들께서도 외롭게 따로따로 오시는 것 보다는 좋고 후손들 역시 1년에 한번이라 모두가 참석해서 좋은 것이다. 그리고 후손들도 큰제사가 없으면 형제나 일가친척이 각자 제사를 지내게 되어 서로가 멀어질 수밖에 없지만 큰제사로 지내게 되면 모두가 모이게 되어 서로 화목하게 되고 또한 돕게 되어 좋은 것이다.
* 고조까지만 밤 제사를 지내라는 재래의 제법(4대봉사)도 모순이다. 지금까지는 부모, 조, 증조, 고조까지만 집에서 밤 제사로 지내고 그 위 분들은 시제(時祭)로 지내라고 했던 것인데, 문중에 사당이 있을 때만 가능했다. 사당이 없는 문중의 5대조이상의 조상님들은 제사상 한번 받지 못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조상님 중에서도 결혼 전에 돌아가신 분들이나 자손이 끊어진 분들은 제외되었던 것인데 이것도 모순이다. 그분들도 모두 우리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즉 시제(時祭)는 고조까지의 제사를 집에서 지내고 그 윗분들의 제사는 산소나 사당에 가서 지내는 것이지만 큰제사는 부모님 제사만을 집에서 지내고 그 윗분들의 제사는 모두 산소(묘제=墓祭)나 사당에서 지내는 것이다. 그리고 큰제사는 집에서 지내던 제사를 산소나 사당에서 지낼 뿐이라는 점에서 시제와는 다른 것이다. 시제는 “이번에는 몇 대손까지” “이번에는 몇 대손까지”라며 사람을 뺏다 넣었다 하고 그때마다 제물도 바꾸는 식의 복잡한 격식을 따르지만 큰제사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집에서 밤 제사를 지낼 때와 같이 한번 차린 상에 참석자 모두가 함께 절을 올리면 되는 것이다.
* 제사 지내는 비용
먹고 살기도 힘들었을 때는 제수(祭需) 작만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살기가 좋아져서 형제모두가 자진해서 돈을 낸다. 또 잘 사는 사람이 있을 때는 돈도 많이 내고 갈비도 짝으로 들여오고 관광버스로 산소에 가기도 해서 모두를 기쁘게 한다. 내가 돈을 내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내가 복을 받자는 것이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누가 얼마를 내건 그런 것을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 형편대로 내 성의(誠意) 것 내고 지내면 되는 것이다.
5. 설과 추석
설과 추석은 제사가 아니다. 명절(名節)인 것이다. 따라서 차례(茶禮)라고 한다. 즉
* 설은 새해를 맞이하는 기쁜 날, 일가친척이 모두 모여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 놓고 선대 조상님들께는 감사의 제(祭)를 올리고 웃어른들께는 만수무강하심을 비는 세배(歲拜)와 만수금(萬壽金)을 올리고, 웃어른들은 후손들에게 “복을 받으라.”는 덕담(德談)올 내리고 세뱃돈(복)올 내리는 축복(祝福) 날인 것이다.
* 추석은 오곡백과(五穀百果)가 풍성한 8월 한가윗날, 햇곡으로 떡을 빚고 술을 담그고 통통히 살이 오른 가축을 잡고, 잘 익은 햇과일들로 푸짐하게 상을 차리고, 일가친척이 모두 모여 선대조상님들께는 감사의 제(祭)를 올리고, 후손들은 마음껏 먹고 마시며, 서로가 따뜻한 정을 나누는 기쁨의 날인 것이다.
따라서 제삿날과는 달리 제례(祭禮)법 같은 것에 구애받을 필요 없는 것이다, 지방도 “현 선대 전조상님 신위(顯 先代 全祖上님 神位)”라고 한 장으로 쓰고. 설에는 떡국 9그릇. 추석에는 밥 9그릇과 송편 한 그릇에. 5육 5천 5채 8과의 진설(陳設)법을 기본으로 하되 기타 아무 것이라도 푸짐하게 차려놓고 조상님들에게는 제주만 단잔 가족들은 모두 첨작으로 술을 올리고 서로가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먹고 마시며 따뜻한 가족의 정을 나누며 온 가족이 조상님의 산소에 다녀오면 되는 것이다.
* 지금 우리가 따르고 있는 제례(祭禮)절차가 2500년 전 중국(中國) 유교에서 유래되었다는 것과 지금은 중국에서조차 지키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도 우리민족과 21세기에 맞는 방식으로 혁신해야 할 것이다. 절하는 방법이나 복식에도 구애받을 필요가 없고 女子라고 빠질 이유도 없는 것이다. 평소에 조상님을 대하듯 하면 되는 것이다. 하기야 제례법(祭禮法)을 만든 공자(孔子)께서도 대악필이 대례필간(大樂必易 大禮必簡) 즉 큰 잔치는 쉬어야 하고 큰 제사는 간단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가정의례준칙에도 '기제사는 돌아가신날 해진 후 적당한 시간에 지낸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시간은 해시(亥時) 말에서 자시(子時)초가 관습으로 되어 있었다. 요즈음 시간으로 대략 밤 11시 30분에서 12시 사이일 것 같다. 돌아가신 날의 첫 시각에 지내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근래에 저녁 시간에 지내는 풍습이 생겼는데, 반드시 돌아가신 날 저녁, 어둠이 짙은 뒤에 모셔야 될 것이다. 예(禮)는 정(情)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으로, 시간보다는 성의가 더 중요한 것이다.
공수법(拱手法) : 제사는 경사이므로 오른손 등을 왼손이 덮음. 애사는 초상 밖에 없음. 이때는 반대
여자는 남자의 반대로 왼손 등을 오른손이 덮어 오른손이 위쪽으로 함.
절할 때 : 명절 세배드릴 때는 남자는 왼손을 위로 올려 예를 다하고, 여자는 오른손을 위로 올려 예를 다합니다. 차례 한식 세일사등은 경사로 보며, 애사는 초상뿐으로 이와 반대로 남자는 남우여좌로 남자는 오른손을 위로 하고 여자는 왼손을 위로 하여 예를 다하고, 상주와 인사할 때는 남좌여우로 남자는 왼손을 위로 여자는 오른손을 위로 하여 예를 다 합니다.
고양이 연구에서 암컷은 오른발을 수컷은 왼발을 사용, 생즉 남좌여우(男左女右) 사즉 남우여좌(男右女左)
고조부 4대조 까지 방안제사를 지냄
- 대(代) : 자기 제외하고 밑에서 위로, 자신을 기준으로 위 선대조를 지칭할 때.
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 현조부, 6대조, 7대조, 8대조 9대조, 10대조, 할아버님...
- 세(世) : 선대조 포함하여 위에서 밑으로, 자신을 기준으로 위 선대조에서 자신을 지칭할 때
효자, 효손, 효증손, 효현손, 효래손, 효곤손, 효잉손, 효운손, 10세손, 자신의 이름.
예고 도리라 여겨 드리는 것이 제사가 아닐까요 ?
just****님 프로필 이미지
행복해지기는 간단하다. 다만 간단해지기가 어려울뿐
비는 누구의 머리 위에나 똑같이 내린다. 하지만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
사랑은 책임과 의무가 아니다. 사랑은 마음이 가는 것이다. 내 마음이 저절로 상대에게 가 닿는 마음이다.
더 많이 배울수록 모르는 것은 더 많아진다. 과학자가 되는 기쁨이 바로 이를 발견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내가 정말 나다워질 수 있는지 아는 것이다.
과거의 선택을 최고의 선택으로 만드는 것은 앞으로의 당신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간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 나는 청춘이 쥐도 새도 모르게 다녀가는 걸 진심으로 원치 않기 때문이다.
두고온 것은 사랑이 아니라 청춘의 한 시절이다. 그들은 각각 그 시간을 통과해 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질문의 크기가 내 삶의 크기를 결정한다.
아버지에게 자전거를 배운 추억 엄마가 해준 따뜻한 밥을 기역하는 것만으로 살아갈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