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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비평의 기원과 전개와 방향
이숭원(李崇源)
1. 비평의 출발에 관한 자전적 회고
지난날을 돌이켜볼 때 내가 이렇게 문학을 직업으로 삼고 그 중에서도 문학비평을 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 같다. 선친(先親)의 영향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는 국문학 전공의 교수셨고 시조시인이었지만 어렵게 얻은 외아들이 문학을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50년대나 60년대만 해도 대학교수 생활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빈손으로 집안을 일으킨 아버지는 아들이 돈 걱정 안하고 넉넉하게 살 수 있는 직업을 갖기를 원하셨다.
1955년 4월 6일 내가 동대문구 숭인동에서 태어났을 때 아버지 나이가 마흔셋, 어머니가 마흔넷이니 지금으로 보아도 노산(老産)이다. 위로 누이를 셋 두고 셋째 누이와 9년 차이로 아들을 얻은 것이다. 아버지는 43세의 이화여대 교수였다. 21세 때부터 집안의 가장 역할을 했던 아버지는 춘천에서 서울로 이주하면서 빚까지 얻어 숭인동 동망산 채석장 옆 비탈길의 적산가옥을 수리한 세 칸짜리 양철 지붕 집을 마련했다. 그 집은 무척 어두웠고, 비가 오면 양철 지붕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여기저기 비가 샜다. 양동이와 대야를 받쳐 놓고 빗물을 받았는데, 여름에 비가 많이 올 때는 양동이와 대야를 여러 차례 바꾸어 댔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나는 철이 들면서 점점 문학에 빠져들게 되었다. 누나들과는 나이 차이가 많고 숫기가 없어서 동네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못했던 나는 아버지 서가에서 아무 책이나 빼서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책들이 대부분 문학 책이니 나도 모르게 문학적 감성이 싹트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다가 아버지는 시조를 한 수 지으시면 흥을 이기지 못하여 온 가족을 모아놓고 작품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그런 체험을 통해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문학적 감수성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특이한 순간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끝나가는 겨울, 눈 내리는 밤 책을 읽다가, 옆에 있는 난로에 눈길을 돌렸을 때 문득 이 세상 망망대해에 나 혼자라는 느낌이 들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린 나는 까닭 없는 외로움에 눈물을 흘렸다. 그때의 야릇한 감정이 지금도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내가 다시 문학적 경험을 한 것은 중학교 일학년이 끝나가는 겨울이었다. 학원 부록으로 발간된 ‘청소년을 위한 한국현대시선’이라는 포켓판 시집을 읽게 되었다. 그 책 첫 장에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나와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그 ‘시’의 어구 하나하나를 읽으며 경탄해 마지않았다. 야릇한 흥분을 느끼며 계속 읽어가니, 책에 중간쯤에 유치환의 「깃발」이 나왔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첫 구절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말을 이렇게 다룰 수 있을까? 세상에는 시인이라는 묘한 존재가 있고 그들이 쓰는 시라는 묘한 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새롭게 깨달았다. 몇 페이지 뒤에 있는 윤동주의 저 아름답고 슬픈 구절,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를 읽으며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평생 이런 시를 읽으며 살 것이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어릴 때의 꿈을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김유정의 「동백꽃」에 대한 독후감을 써서 학교에서 주는 무슨 상을 받았다. 아버지께서는 상장을 받아보시고 아들의 평소 행적을 볼 때 아들에게 문학이 대물림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감하셨는지 이렇게 엉뚱한 말씀을 하셨다. “문학이 좋으면 평론가가 돼라. 평론가가 되려면 이어령만큼 돼라.” 나는 평론이 어떤 것인지 그때 정확히 알지 못하였고, 독후감을 좀 더 발전시키면 평론이 되는 것인가 막연히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참으로 순진하게도 이어령이라는 사람만큼 평론을 쓰면 먹고 살 수는 있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국어를 담당하신 이종성 선생님을 만나서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분이 만들어 건 급훈은 “바로 살기란 퍽도 어려운 일인 것 같다”였다. 틀에 박힌 급훈만 보던 나에게 그 산문체의 급훈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안 되어 김소월의 「금잔디」를 배우게 되었다. 선생님은, 이 시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도라지타령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하고 당시 유행하던 절규 풍의 유행가를 목청 높이 부르기도 하셨다. 그리고는 칠판에 다음과 같은 한 줄의 글귀를 적으셨다. “눈에다 지게미를 돋치고 게엘 겔 거리는 것만이 님을 생각하는 정(情)이 깊은 것이 아님을 알면 이 시의 시상이 얼마나 승화되어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임이 죽었다고 몸부림치고 울며 법석을 떨지 않고도 사랑을 표현할 길이 얼마든지 있으며, 그러한 미묘한 감정을 단수 높게 표현한 작품이 바로 「금잔디」라는 설명이었다. 그분의 수업시간은 어떤 것이 바로 사는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탐구의 연속이었다. 그분께 일 년 간 국어를 배우며 문학과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했고 나도 저분처럼 국어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학을 하면 배고프다는데, 국어 교사가 되면 먹고 살 수는 있으리라는 생각도 했다.
오래 세월이 흘러 내가 대학원을 마치던 때 석사논문을 선생님께 보내드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 번 찾아뵙지도 못했고 편지를 올린 일도 없었지만 석사논문만은 그분께 꼭 보내드리고 싶었다. 나에게 문학의 가치를, 그리고 바로 사는 일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분이 바로 그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어느 해 연말 뜻밖에 선생님의 편지를 받았다. 그때 나는 충남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고 결혼도 했을 때였다. 그 편지의 서두는 “말없이 캐고 굳히기만 하러들 터인 이 교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값진 논문을 제때인 옛적에 받고서도 회답 쓸 한때를 놓친 게 그만 스스로 이런 죄인을 만들고 말았습니다.”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읽고 기억의 저편에 접어 두었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라 한동안 망연자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 편지를 거듭 읽으며 옛 생각이 자꾸 떠올라 나는 부끄러움도 잊고 엉엉 울고 말았다. 그리고는 선생님께 여러 날 걸려 고치고 고쳐 쓴 답장을 올렸다.
그 답장에서 고등학생 시절 학급회의 시간에 선생님의 흉내를 내던 일을 기억하시겠느냐고 여쭈어 보면서 앞에서 쓴 것과 같은 내용의 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실어 보냈다. 일주일 후 선생님의 답장이 도착했다. 선생님께서는 “모든 얘기가 다 어제 일처럼 기억됩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셨다. 다시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선생님께 박사논문을 보내드렸다. 선생님의 답장이 왔는데, 결코 잊히지 않을 그 한 구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나같이 깡그리 기맥이 빠진 사람에게 공부 얘기를 전해 주는 게 무엇보다 고마웠습니다.”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신 분이며 내가 세상 떠나는 그날까지 잊히지 않을 선생님이다.
대학에 들어 와서도 주로 시를 읽으며 한편으로는 시작 노트를 만들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시를 썼다. 때로는 대학 신문에 발표도 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사대 문학회에 불려나가 합평회 말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기도 했다. 3학년 2학기 비평론 강의 시간에 만난 김윤식 교수는 내 생에 또 하나의 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 특유의 침통한 표정으로 이렇게 강의의 서두를 시작하였는데 그 한 마디는 나이 육십이 넘은 지금까지 내 가슴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학문에 대한 열정은 고독을 동반하는 동시에 광기를 동반하는 것이다. 학문은 혼자 하는 것이고 미쳐야 하는 것이다.” 그분의 강의에 매혹되어 그의 책을 사 읽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평론 공부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대학원에 들어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방향도 잡을 수 없는 이론의 삼림 속에서 시를 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리라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는 사이에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지속되던 나의 시 쓰기는 중단되었다. 아니 중단된 것이 아니라 종언을 고했다. 내가 쓴 시를 읽어 보니 거의 대부분이 모방과 차용으로 얼룩진 삼류 시였던 것이다. 몇 권이나 되던 시작 노트를 단칼에 없애 버렸다. 내 시가 삼류 작품임을 알아차리는 것을 보니 비평가로서의 감식안은 괜찮은 모양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1981년 8월 충남대학교 강단에 섰을 때 내 나이 스물일곱. 피가 끓고 힘이 솟는 젊음의 절정에 있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총각 교수였기에 학생들과 술집에서 어울려 토론에 열을 올리다가 멱살잡이 싸움을 벌인 적도 있다. 강의 중에 잡담을 하거나 딴청을 하는 학생이 있으면 벌컥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고 달려가 귀싸대기를 올려붙이기도 했다. 지금 같으면 폭력 교수로 대자보에 오를 만한 행동을 그때는 그렇게 거침없이 했다.
일찍 교수가 된 것이 남의 부러움을 살 만한 일이었고 그때는 나 자신도 그것을 자랑스러워했으나 한편으로는 나의 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점도 있었다. 나는 너무 일찍 안정된 자리에 안착해 버린 것이었다. 그것에 대한 반성이 서른 살을 넘기면서 강하게 밀려들었다. 도대체 내가 하려던 일이 무엇인가. 남들에게 감동을 주는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글을 쓰기 위해 호구지책으로 문학교사를 선택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본말이 전도되어 글쓰기의 꿈은 사라지고 문학교사로 주저앉고 만 것이다. 나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문학연구란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처럼 객관적 엄밀성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특히 대학의 현대문학 교수는 꺼지지 않는 문학적 열정을 간직해야 연구업적도 나오고 학생들에게 생동감 있는 강의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1985년이 저무는 겨울 한편의 글을 써 가지고 인사동의 어느 찻집에서 전영태 선배를 만났다. 그리고는 한국문학으로 찾아가 당시 주간을 맡고 있던 조정래 선생을 만났다. 조정래 선생은 눈에 띄게 곱실한 머릿결이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문단에 첫발을 디디려는 낯선 젊은이를 너털웃음으로 친근하게 맞아주면서 문학하는 사람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며 종국에는 문학에 대한 신명까지 불어넣어 주는 것이었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나는 등단하게 되었다. 1991년 서울여대로 자리를 옮겨 서울에 정착한 다음부터 더욱 평론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비평에 전념하여 문학상도 받고 여러 책이 우수도서로 선정되었다.
시집을 코에 박고 북받치는 감정을 달래던 소년은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노년의 문학교수가 되었다. 쉬지 않고 흘러 한 번도 끊어진 적 없는 시간의 구절양장은 우리 마음에 여러 가지 파문을 일으킨다. 내가 늘 읽으며 마음을 달래는 시는 불세출의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무지개」(“My Heart Leaps Up”)다. 그 시는 소년 시절 시를 대하며 처음 접했던 가슴 설렘이 평생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대변해 준다.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뛴다.
인생을 처음 시작했을 때 그러했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며,
나이 들어서도 그러할지니,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으로 가기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그래서 나는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에 대한 경건함과 합쳐지기를 바랄 뿐이다.
워즈워스는 하늘의 무지개를 보며 가슴 설레던 어린 날의 경이감이 늙을 때까지 지속되기를 염원했다. 여기서의 무지개를 시로 대치하면 내 소망과 유사하다. 시에 대한 나의 열정이 열세 살의 사춘기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 다행스럽다. 지금도 좋은 시를 보면 가슴이 설레고 남에게 그 시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싶은 충동이 솟구친다. 이 마음이 여든, 아흔까지 이어지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그리하여 정년퇴직 이후에도 대학에 처음 발을 디뎠던 스물일곱의 열정으로 강의하고, 좋은 시를 보면 설레는 마음으로 글을 쓰게 되기를 빌어마지 않는다.
김윤식 교수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를 인용하여, 비평이란 남을 칭찬하는 독특한 기술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 말에 깊은 인상을 받아 비평을 할 때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려고 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정지용, 백석, 김영랑, 서정주의 시를 논하면서 그들의 영혼과 정신을 불러내 대화를 나눔으로써 작품의 내부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 시인들도 미처 지각하지 못한 작품의 세부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교묘한 방법으로 그들의 작품을 칭찬하고자 했다. 현재 활동하는 시인들의 작품을 다룰 때도 그런 감각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문학을 하는 것도 일종의 수행과 실천의 과정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문학은 예술적 창조 작업이면서도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활동에 속한다. 그래서 글 쓰는 것도 수행의 하나로 여기고 문학을 통해 내 정신을 연마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고 있다.
2. 비평의 의의와 방향에 대한 고백
‘비평’은 “사물의 미추(美醜)·선악(善惡)·장단(長短) 등을 들추어내어 그 가치를 판단하는 일”이다. ‘문학비평’은 “문학에 관한 지적 논의와 해석·평가의 활동”으로 규정된다. 이것은 문학에 대한 이론적 검토와 실제 비평 활동을 포괄한 정의다. 일반적으로 문학비평은 분석(analysis), 해석(Interpretation), 평가(Evaluation)의 과정을 밟는다. 다양한 층으로 형성되어 있는 작품의 구조를 분석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며, 그것을 종합하여 작품의 아름다움과 진실성의 수준을 평가하는 것이 비평이다. 비평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과연 아름다움과 진실성의 정도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일이 가능한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시인은, 미인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절벽에 기어올라 꽃을 따서 바치는 저 신라 향가 「헌화가」의 주인공, 견우노옹의 후예들이다. 사랑의 마성에 휘감긴 존재들, 생의 매혹에 도취되어 죽음마저 잊어버린 페드라와 히폴리투스의 후예들, 악기 하나를 방패삼아 잃어버린 짝을 찾아 저승 끝판으로 여행했던 오르페우스의 후예들, 그들이 바로 시인이며 예술가들인 것이다. 그 시인들의 작품을 놓고 이해와 공감과 선망과 상찬의 언술을 논리적으로 엮어내는 일이 문학비평이다. 창작과 비평은 이렇게 미묘한 관계에 있다.
작품의 분석은 어느 정도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지만, 작품의 해석과 평가에는 주관이 개입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비평가라면 주관적 해석이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작품의 가치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드러내야 한다. 아름답고 진실한 것을 아름답고 진실하다고 말하고, 그렇지 못한 것을 그렇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이 비평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우리 비평에서 찾기 힘든 사례가 바로 비판적 논평이다. 비판 이후에 벌어질 번잡한 상황을 우려하여 주로 작품의 좋은 점만 언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도 그 점에서 결코 예외가 아니다. 내 마음에 드는 좋은 작품을 부드럽게 옹호하는 작업을 오래도록 해 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정말 쓰고 싶은 평론은 진정한 비판의 글이다. 심미적·정신적 가치가 높지 않은데도 부당하게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들을 제대로 비판하고 싶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실제 비평이 내세우는 평가적 담론이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비평가의 해석과 평가는 언제나 새로운 도전과 반론에 부딪칠 수 있다. 다른 관점의 방법론을 적용하면 자신이 부정적으로 평가한 작품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 비평의 운명이다. 이런 점에서 비평 활동은 미래의 새로운 해석 앞에 분해될 운명을 갖고 있는 유동적 작업이다.
이러한 비평 행위가 글로 발표된 것을 ‘평론’이라고 한다. 평론은 학술 논문이 아니기에 문장 구성이나 문체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비평가는 평론도 문학 활동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시인이나 소설가 못지않게 유려하고 감성적인 문장을 구사하려고 노력한다. 이 의식이 결여된 비평가는 일급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 글을 쓰는 동안 비평가는 스스로 일급의 창작을 하는 예술가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작품 분석의 결과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여기에 비평가의 딜레마가 있다. 문장 서술 과정에서 주관과 객관이 마찰을 일으키고 감성과 논리가 길항 작용을 한다. 그래서 어떤 평론은 주관적 감성이 우세한 글이 있고 어떤 평론은 객관적 논리에 기울어진 글도 있다. 나는 지금까지 감성에 기운 글을 많이 써 왔다. 앞으로는 논리가 우세한 글을 쓰고 싶은데, 그런 경우에도 저 옛날 피타고라스학파가 내세운 황금비율을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비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에 대한 설득이다. 비평은 작품에 대한 비평가의 판단을 독자에게 서술하여 동의를 구하는 형식이다. 감성과 논리는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동원된 도구다. 주관적 감성에 의지하건 객관적 논리의 힘을 빌리든 독자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의 논지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고 독자를 설득할 수 있으면 목적을 이룬 것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 양자의 황금비율이다. 물컹한 주관적 감성이나 딱딱한 객관적 논리만으로는 독자를 설득하기 어렵다. 이 둘을 어떻게 배합하여 명품을 만드느냐 하는 것이 연금술사인 비평가의 과업이다.
독자를 설득하는 작업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선 비평의 대상에 대해 깊고 넓은 이해력을 지녀야 할 것이다. 자신이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논리적으로 남을 설득하는 글을 쓸 수 있겠는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내용은 남도 이해시킬 수 없다. 그러면 작품에 대한 치밀한 통찰력과 깊은 이해는 어디서 오는가? 오랫동안의 숙련을 거친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에서 온다.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이 훌륭한 비평가와 범상한 비평가를 가르는 시금석이다. 좋은 작품을 읽고 감동과 전율을 느끼는 사람은 좋은 비평가가 될 자격이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뛰어난 문학적 감성과 재능을 갖춘 사람은 대부분 작가가 되지 비평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문학적 감성과 논리적 사고력을 함께 갖춘 사람이 시인이 되는 일은 드물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람은 비평에 적합하다. 소설가에게는 그런 일이 없는데, 시창작과 비평을 겸하는 시인들이 있다. 이들이 양자를 겸하면서도 각 방면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유전적으로 타고난 문학적 감수성에 수련에 의한 논리적 분석력이 결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적 감수성과 논리적 사고력 외에 비평가가 갖추어야 할 또 하나의 덕목이 문장력이다.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나고 논리적 사고력이 뒤를 받쳐주어도 문장력이 따르지 않으면 훌륭한 비평가가 될 수 없다. 평론도 창조적인 문학 활동이기 때문에 시나 소설 못지않은 문학적 감동을 선사해야 독자를 설득시킬 수 있다. 독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더 나아가 감성의 파문을 일으키게 하는 절대적 도구가 문장이다. 그래서 비평가는 시인 못지않은 대단한 언어 감도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시 비평은 시를 읽는 감각을 정련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감각적 수용의 결과를 논리적으로 펼쳐간다는 점에서 정신의 수련에 해당하며, 감각과 정신의 긴장을 문장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문체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비평가로서 비평을 포기할 시점은, 좋은 작품을 읽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거나, 어떤 느낌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글로 표현할 의욕이 생기지 않을 때이다. 문학적 감성이나 정열이 소진되었는데도 지난날의 관성 때문에 평론을 쓰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나이 들어 내가 그런 자리에 이른다면 평론은 절대 쓰지 않겠고, 작품에 대한 소박한 감상문이나 쓸 작정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년 전 ‘시와시학사’에서 낸 평론집 머리말에 담긴 내용이 문학에 대한 내 생각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고, 그 생각이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여기 인용하고 글을 끝내려 한다.
구체적인 시작품이 아무리 순수한 절대미의 경지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현실적 삶과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 예전부터 일관되어 온 나의 관점이다. 그래서 시의 현실 인식에 관심을 가져 보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의 마당과 어떠한 관련을 맺는가를 분석해 보았다. 그런 한편 최근에 와서는 시는 산문 양식과는 달리 몽상적 성격이 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는 고통스런 상황에 맞서 꿈을 꾸며, 축복과 환희의 상황 속에서도 꿈을 꾼다. 이육사는 절망의 절정에 처하여 목숨마저도 위협받는 그 극한 상황 속에서,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고 시에 적었다. 이러매 눈감고 생각해 보는 것, 그 내면의 몽상을 통해 겨울이라는 현실이 강철 무지개의 신비로운 환상으로 환치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광야의 노래를 목 놓아 부를 것을 꿈꾸었다. 또한 심훈은 자신의 두개골까지 박살내며 기쁨으로 죽을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꿈꾸었고, 신석정은 해방 공간의 혼탁 속에서 민족의 진정한 화합을 염원하며 그 어느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 볼 것을 꿈꾸었다.
사람은 저마다 꿈꿀 능력과 권리를 갖추고 있는데, 시인은 그러한 권능을 최대로 지닌 존재다. 나는 시 작품을 통하여 시인의 꿈과 소망이 어떻게 형상화되는가를 살펴보고, 그것이 지상의 삶과 어떤 관련을 맺는가를 분석하려 하였다. 그 결과 시에 담긴 지상의 꿈이 사랑의 토양 위에서 풍요롭게 성장한다는 것도 감지하게 되었다. 또한 사랑은 진공 속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현실적 삶 속에서 솟아나는 것임도 깨닫게 되었다. 이 모든 깨달음이 시를 읽어서 얻어진 것이기에, 좋은 시를 써 준 모든 시인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하고자 한다. (현대시와 지상의 꿈, 시와시학사, 1995)
※ 이 글은 전에 발표한 「시 비평가의 길에 서서」(월간문학, 2017. 3)와 「감성과 논리의 황금비율」(시와 표현, 2016. 4)을 중심으로 수정 보완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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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