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가 되는 글자와 말』의 저자
다카노 마사오 선생님에게 배운다.
천성호(파울로 프레이리 센터)
2006년 추수를 마친 늦가을로 기억한다. 서울 대학로에서 생태, 환경한마당이 열렸는데, 마침 지역에서 공동육아를 하는 조합원들이 있어 가족과 함께 참석했다. 그래서 이리저리 아이와 함께 축제 구경을 하면서 다니고 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 한 분이 계셨다. 얼굴에 수염이 하얗게 나고, 모택동 모자를 쓴 분이었다. “인간선언”, “다카노 마사오”, “야간중학” 등의 글자를 써 넣은 노란색 티를 입고, 부스 한 자리에 앉아 자신이 쓴 두 권의 책을 팔고 있었다.
다카노 마사오 선생님 (2006년 생태, 환경 한마당에서)
다가가서 아는 체를 하면서 몇 마디를 물어보았다. 내가 일본말을 모르고, 선생님은 한국말을 잘 모르니 대화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말보다 눈빛과 몸짓으로 몇 마디 의견을 나누었고, 선생이 쓰신 두 번째 책『마음의 조국, 한국』을 한 권 샀다. 선생은 책 안쪽에 ‘꿈에 살다. 다카노 마사오’라는 글귀를 한글로 적어 내게 주셨다. 책을 사고는 언젠가 한 번 찾아뵙겠다는 말은 전하고 헤어졌다.
2000년쯤에 선생님의『무기가 되는 글자와 말』을 읽었는데 당시의 강렬한 느낌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무기가 되는 말, 빼앗긴 말과 글을 되찾아 오는 것” 등의 글귀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무기가 되는 글자와 말
마음의 조국 한국
당시, 나는 문해교육을 가르치는 교사였는데 단순히 기능적인 문해교육이 아니라 민중에게 가르치는 말과 글이 어떻게 무기가 될 수 있을까를 꽤나 고민했던 것 같다.
선생이 쓰신 책은 두 권이 있는데,『무기가 되는 글자와 말1)』는 일본 야간중학교의 역사에 맞물려 말과 글을 빼앗으려는 당국에 맞선 선생의 삶과 투쟁을 기록한 것이고,『마음의 조국, 한국2)』은 선생이 한국에 와서 180일 동안 머물면서 한국어를 배우면서 느끼고 경험한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담고 있다. 선생은 한국어를 배우는 것도 마치 하나의 투쟁처럼 여기고 있었다.
처음 뵙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선생은 틈틈이 한국에 들려 전국 문해, 성인 기초교육 협의회에서 강연도 하시고 안양시민대학에서 한국어도 배우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래서 한 번 뵙고 도대체 어떤 삶과 실천을 해 오신 것이고,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듣고 싶었다.
이 인터뷰는 선생이 쓰신 책 두 권을 읽어야 제대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소개한 두 권의 책은 선생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객관적인 측면에 대한 서술이 적고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했고, 이 과정 속에서 선생의 철학과 사상을 서술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선생을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 야간중학에서의 투쟁사뿐만이 아니라 삶의 여백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터뷰는 책에서 말하지 않는 부분도 중요하게 질문을 하였다. 예를 들면 야간중학폐지운동을 하지 않는 시기에 할 일, 가족에 대한 질문 등이다. 통역은 이성건3), 섭외와 녹취는 김한수4), 소개는 문해 교육단체인 전국문해, 성인기초교육협의회가 도와주었다.
우선, 선생님이 살아오신 삶을 책에서 간단히 옮긴다.
다카노 마사오(高野雄夫)는 1939년 구 만주에서 출생, 아버지는 전사하고 일본으로 오는 중에 어머니와 사별, 전쟁고아가 됨, 규슈하카다의 암시장, 도쿄 우에노 공원, 상야(山谷)에서 생활, 제일 조선인 폐품 수집상 할아버지에게 ‘가루타’로 글자와 말을 배움, 21세에 도쿄도 아리카와 제 9중학 야간학급에 입학하여 24세에 졸업, 69년부터 야간학교 폐지반대운동, 증설운동에 헌신, 약 16년간의 침묵 후에 90년 ‘패자부활전의 무대’에 올라가 야간중학운동 재개, 그 공로를 인정받아 93년 제 8회 도쿄 변호사 인권상 수상, 간사이(關西) 지방의 야간중학을 중심으로 자기 자신의 삶의 방법을 묻는 ‘수업’을 전개, 98년 9월부터 99년 2월까지 서울대 언어연구소에 유학했음(『마음의 조국 한국』에서 발췌)
선생은 현재 일본에 계시고, 세 번째 책을 쓰고 있다고 하신다. 또한 일본에서의 야간학교 운동은 공식적으로 접으셨다. 이 인터뷰는 두 차례로 기획했고, 소책자로 만들려고 계획했었다. 그런데 두 번째는 통역자 섭외 문제, 선생의 한국에서의 바쁜 일정으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면서 2차 인터뷰를 준비했지만, 현재로써 가능성만 열어둔 상태이다. 그렇지만, 1차 인터뷰 내용도 의미 있는 자료임으로 묵혀두기보다는 정리하기로 했다. 선생과의 인터뷰는 2007년 5월 24일 6시에서 9시까지 경기 안양의 한 찻집에서 이루어졌다.
---다카노 마사오 선생님과의 인터뷰------------------
질 문: 안녕하십니까? 저희들은 한국에서 야학을 하고 있고, 선생님의 책을 읽고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배우려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질 문: 혹시 한국의 야학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은 있는지요?
다카노 마사오: 원광대의 동학을 연구하시는 국문과의 박맹수 교수님을 알고 있는데, 이 분 수업에서 일본야간중학에 대한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다.
질 문: 일본의 야간 중학교와 한국 야학과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다카노 마사오: 일본은 1940년대 중반 전후 부모가 없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위해 지역 차원에서 만들어졌다.5)
인터뷰 중인 선생님
질 문: 한국야학은 1898년부터 비제도권에서 교육에서 시작되었고, 학력인정과는 다른 목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본 야간중학과 차이점인 것 같습니다. 그럼.. 인터뷰의 순서는 크게 선생님의 삶, 야간중학, 저서, 활동, 가족들의 순서로 물어보겠습니다. 먼저 책에 나오지 않은 시기에 선생님의 삶에 대해 물어보게 씁니다. 1974년까지 1990년까지 무엇을 하시면서 사셨는지요? 책에는 간략하게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카노 마사오: 오키나와에 있었다. 1974년부터..
질 문: 그곳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다카노 마사오: 오키나와는 1973년까지 미국령이었다. 학생들과 시민들이 대모를 하고 싸워서 1974년에 반환을 받았다. 오키나와에 관심이 갖게 된 것은 오키나와는 일본 야마토 정권에 의해 귀속된 나라인데, 일본에 속하고 싶은 열망이 항상 있었다. 똑 같이 야간중학도 제도권에 배신을 당하면서, 제도권에 속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마치 손등과 바닥처럼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6) 그래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오키나와는 본토에 귀속하는 싶은 열망이 있는데, 1975년에 세계해양박람회가 열렸다. 오키나와는 경제적으로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본토 자본이 들어와 호텔 같은 것을 만들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돈을 벌지 못하고, 외지 사람들이 돈을 벌게 되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던 사람들인데, 밭 같은 것은 민박이나 주차장으로 변했고, 결국은 망하게 되었다.
질 문: 오키나와에 나와 책 판매 일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카노 마사오: 그 이후에 도쿄 옆에 있는 미야케(三宅)에서 활동을 하였다. 오키나와에서 좌절을 눈으로 봤기에, 미야케에서 새롭게 자립(自立)을 실천하려고 했었다. 그곳에는 온천도 있고, 학교도 있고,.. 했는데, 현지 사람들 가운데 아픈 사람들을 모아서, 병을 낳게 하고,.. 그 사람들을 섬 안에 있는 학교로 보내 배우게 했다. 그것이 자립이 아닌가 한다. 오키나와는 계속 외부 자본이 들어와서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질 문: 1990년 전까지 계속 활동을 하셨는가요?
다카노 마사오: 오키나와는 1975년까지 있었고, 미야케에서는 1976년에 들어가서 1985년까지 있었다. 그때 장남과 차남이 같이 일을 하였다. 당시 상황을 책으로 엮었고, 나중에 이 책을 팔로 다녔다. 미야케에는 화산이 나오는데, 1985년에 분화가 시작하면서 아쉽게도 학교와 모든 것을 놔두고 나올 수밖에는 없었다. 그때 목표로 했던 것들이 다 끝나버린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왜 그 섬을 택했는가? 세상에 약자와 강자가 있다. 약자가 강자를 기대거나, 강자가 약자를 베푸는 구조에서 자립은 없다. 패자(敗者)의 개념에서 패자 부활전을 해야 하고, 무대도 만들어야 했다. 도쿄에 건축법에 나무로 집을 짓거나 하는 것은 불법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다른 곳을 찾게 되었다. 일본에 죄인들이 수용하는 감방 같은 섬들이 몇 개 있었다. 미야케 섬이 그중에서 제일 질이 안 좋은 사람들을 수용하는 섬이다. 그 사람들이 패자에서 부활을 해야 한다. 그곳에서 건물 같은 곳을 짓는데, 비바람에 쓰려진 나무들을 모아서 집을 만들었다.
질 문: 생투학사(生鬪學舍)를 만들었는데, 의미가 무엇인가요?
다카노 마사오: 두 아이들이 아프고, 부등교로 학교를 가지 않았다. 그래서 오키나와로 갈 때 아이들에게 그런 마음들을 ‘어떻게 해결 할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미야케로 옮기고 나서, ‘아이들 스스로 공부를 하고, 처음부터 가고 싶은 학교를 요구했고, 학교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었다. 이름은 막내가 지었다. 생투학사는 “살아가는 것은 싸우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질 문: 일본 야간학교의 개략적인 현황과 모습7)은 어떤가요?
다카노 마사오: 야간중학교, 고등학교, 대학도 있다.
중학교는 1961년 훈령이 있어 법에 의해 인력을 못 받았는데, 일본본토에는 35개가 남아 있다. 동경에 8개 가까운 현에 하나, 요코하마에 5개 정도가 있다. 전체 학생수는 3천여 명 된다.
질 문: 현재 일본 야간중학 운영에 어려움은 없는가요?
다카노 마사오: 일본 야간중학은 원래 분교를 만들었고, 1부, 2부로 운영되고, 야간학교는 2부로 운영된다. 급여와 운영비는 나라에서 반, 지방에서 반 정도 지원받는데, 재정적으로 크게 어려움은 없는 것으로 본다.
안양시민대학과 일본이 다른 것처럼, 나라에서 배울 권리는 당연히 나라에서 보장해야 한다. 그런데 마치 국가에서 시혜하고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은 잘못 된 것이다.
질 문: 선생님 삶에서 야간중학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요?
다카노 마사오: 중국에서 본토로 돌아가는 길인 하카다 항에서 난 거의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살기가 너무 힘들었다. 주워 먹기도, 훔쳐 먹기도, 빼앗아 먹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서 도쿄까지 왔다. 이건은 인간의 삶이 아니었다. 그런 나를 인간의 삶으로 만들어준 것이 야간중학이다. 일본 속담에 ‘나를 낳아준 부모와 키워준 부모가 따로 있다.’라는 말이 있다. 야간중학은 나를 키워준 어머니, 아버지였다. 1966년에 ‘야간중학을 폐지하라’는 것은 나에게 엄마, 아버지를 빼앗아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 아버지를 지키는 위해 투쟁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고집이 세고, 이상하게 보일 때도 있었다.
질 문: 일본 야간중학을 하시는 분 중에 선생님 의견에 비판을 하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요?
다카노 마사오: (선생님은 종이위에 일본글로 자신의 관점을 설명하시면서..)
지식이 아니라 무기가 되는 글과 말이 되어야 한다. 야간중학생인 제일동포 어머니나 야간 학생이나 처음에 배운다는 것에는 어떤 감동이 있다. 그 감동을 어떻게 연결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선생님의 역할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미담(美談)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할머니가 글을 배워 높은 대학까지 갔다는 것.. 그러나 미담이 아닌, 다른 하나는 싸움이 있어야 한다. 감동이 있고, 배운 것에 대해 “감사 합니다”가 아니다.
제일동포들이 강제 이민을 왔는데, 왜 어머니, 아버지는 강제 이민되었는지, 왜 부모들이 글을 모르고, 나도 글을 모르나? 이런 것들 속에는 한(恨)이 있고, 화가 나는데.. 야간중학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친절함에 감사하면서 잊어버린다. 왜 현재 상황이 이럴까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야간중학에서 빼앗긴 것들을 찾아와야 하고, 그래야 무기가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다른 선생님들과 다른 관점에서 오는 차이와 갈등과 충돌이 있다.
일본의 학생 어머니들이 선생님한데 불만이 있으면 이야기해야 하는데, 불만을 잘 애기 하지 않는다. 불만을 이야기해서 성공한 역사가 없기에.. 그래서 내가 불만을 막 이야기 하면, 오히려 다른 어머님들이 그만하라고 얘기한다.
- 조금 쉬어다가 다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쉬는 동안 사는 얘기를 나누었다. 현재는 안양에 한 고시텔에서 묵고, 식사는 밥과 김치는 고시텔에서 주고, 가끔씩은 시장에서 사서 해 드신다고 한다.)
질 문: 한국에 오신 이유와 찾으려 했던 것을 찾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다카노 마사오: 18세때 외조부님이 제일동포 할아버지였는데, 그래서 꼭 할아버지 나라에 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오게 되었다. 서울대 어학 연구소에 공부를 했다. 처음에 어학연수 자격이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하고, 나이는 60세를 넘어서 안 된다면 오지 말라고 했다. 한국을 느끼고 싶어, 말도 몰랐지만 무작정 오게 되었다. 도착해서 문해교육을 하는 곳을 찾았고, 봉천 9동의 어머니 교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교회 옆에 배우는 곳이 있었는데, 다음에 갔더니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서울대 어학연구소를 가게 되었다. 다른 곳은 비싸서 갈수도 없었다.
질 문: 장남과 차남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다카노 마사오: 장남은 20세 때부터 해외로 여행을 다녔는데 아마도 지금은 발터 3국에 어디쯤에 있을 것 같다. 둘째는 작가 생활을 하고 있는데, 책은 잘 안 팔리고 있는 것 같다. 천식은 많이 좋아졌다. 동경에서 작가 생활을 하고 있다.
질 문: 저번에 “꿈에 살다”라는 글귀를 써 주셨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요?
다카노 마사오: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꿈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죽어도 하지 마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야간학교에서 글을 알고, 직장을 옮기고, 더 나은 곳으로 또 옮기도 해도.. 이런 것들은 내가 선택하는 삶이 아니라, 선택당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는 것을 중요한 목표이자, 꿈으로 생각한다.
오키나와의 경우가 그렇다. 그곳에서 아무리 본토로 사람들을 보내도 오키나와가 진정한 독립을 하기 위해서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질 문: 최근 일본에서 어떤 활동을 하시고 계신가요?
다카노 마사오: 한국과 일본이 교류는 하는데, 여러 선생님들과 교류에 어려움이 있다. 처음에 잠깐 이야기했지만, 생각에 차이들이 있는 것 같다. 일본의 야간중학교 내부에서 오는 의견들은 몰라도,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에 굉장히 배타적인 조직이다. 그리고 졸업한 학생들은 참견하지 말라는 의견들이 지배적이다. 교사들이 일정부분 권력화 내지, 관료화되어 있는 것 같다.
(이후 사상을 설명하면서 약자와 강자의 논리가 아닌, 패자의 논리를 가져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
질 문: 한국의 야학을 포함해서 모순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선생님은 글자의 통해 강자의 사상인 씨앗사상(內-外-內)과 약자의 사상인 거름사상을 (外-內-外)을 설명하셨다. )
다카노 마사오: 거름사상은 기준을 나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밖에다 두는 것이다. 기준을 자기 안에서 가지지 말고, 밖에다 두어야 한다. 그래서 밖에서 두고, 서로를 만나야 한다. 안에 두면 안 된다. 예를 들면 교토 의정서를 보면 미국이나 중국이 합의를 하지 않는다. 자기 기준에 의해 가입을 안 하고, 밖에다 기준을 두지 않는다. 강자사상이 플러스(+)의 사상인데, 약자사상인 마이너스(-)의 사상을 가져야 한다. 강자가 아닌, 패자(敗者)사상으로 보아야 한다.
보통에 문해(文解) 교육 강연이 있으면, 오는 모든 사람들이 교수나 비슷한 사람들이 오고, 학생들은 참여하지 못한다. 잘 못 된 것이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글을 안다는 것은 공기를 마시는 것과 같은데, 맡아본 사람들과 맡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그런데 그런 공기를 맡아 보지 않은 사람들이 강연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강자로 약자로 살아온 사람들 서로가 틀렸다고 보진 않는다. 다만 서로 다르다 생각한다. 어떤 접점(接點)을 가지고 만나야 한다. 약자로 살아온 사람들의 경험이 다르고, 머릿속으로 살아온 사람들 역시 다른데, 그 가운데서 만나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배웠기 때문에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적을 먼저 두고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를 괴롭혔던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기 위해 내가 글을 배우는 것이지, 글을 알기 때문에 편지를 보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글을 배우고, 보살펴준 할아버지에게 그런 마음을 돌려줘야 하겠다. 라는 것을 생각했다. 그렇게 40년 동안을 야간중학을 하게 된 것 같다.
인터뷰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은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선생으로 불릴 만큼 타락하지 않았다.”라는 말씀도 하셨다. 그래서 다카노 마사오씨라고 부르면 된다고 했다. 경어에 익숙한 우리에게 좀 어색하지만 말이다. )
다카노 마사오 선생님의 삶의 역사
선생의 삶을 보면 떠오르는 단어는 “외곬”이다. 스스로 ‘상쾌하게 객사할 각오를 간직(무기, 2638))’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사는 방법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죽는 방법을 결정해야 한다(무기, 249)’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선생의 삶을 형성한 중요한 지점을 시간 순서로 정리한다.
선생은 어린시절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들개처럼 자랐다. 일곱 살 무렵 조선인 넝마주이 할아버지를 만나 겨우 제이름을 배울 수 있었다. ‘이름을 쓰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그리고 이름을 쓰지 못하여 두들겨 맞고 걷어채인 원한이 글자와 말을 탈환하기 위한 투쟁의 원점’(무기, 37)이 되었다. 새벽에 전단을 돌리고, 낮에는 영화관, 밤에는 호객꾼으로 일을 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비가 와서 공치는 날이면 전차 차표를 사서 전동차안에 붙은 광고나 차창 밖으로 보이는 글들을 읽으며 배움을 지속했지만 실력은 늘지 않았다. 고난하고, 비루한 삶을 유지하던 중 우연히 야간중학을 알게 되어 스물한 살에 도쿄 구립 제 2중학교 2부 야학중학에 나갔고 처음으로 차별 없는 세상을 알게 되었다.(무기, 51)
선생은 야간중학에서 글자와 말뿐이 아닌, ‘인간으로 긍지와 권리’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배웠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저 먹고 살기만을 위해서 일하는 건 죽어도 싫다”며, “결코 인간의 긍지를 빼앗긴 노동자 따위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무기, 58)” 선언했다. 이것은 야간 중학에서 배움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깨닫고, 인간으로서 자유를 선언하는 것이며 나중 그의 핵심 철학인 ‘거름의 사상’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4년 야간중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고, 65년 첫 아이를 얻었다. 아버지의 책임을 가지고 날품팔이, 운전사, 조수일 등을 닥치는 되로 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그러다 66년 11월 행정관리청이 야간중학을 조기 폐교를 권고한다는 기사를 보고, 그에게 말과 글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 야간중학을 사수하기 위해 투쟁에 돌입했다. 상영시간 48분, 제작비 38만 6천엔의 자금으로 증언영화〈야간중학생〉을 제작하여 일본 전국을 돌면 상영하면서 소외된 이들을 위한 야간중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야간중학의 교육이란 단순히 읽고 쓰는 것을 배우는 것만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특히, 야간 중학 교육은 그렇다는 것입니다.’(무기, 92) 일본 전국을 돌면서 ‘홀로 압력단체’라는 별명과 함께 야간중학 폐교에 맞서는 한편 요구가 있는 곳에 야간 중학을 설립하는 활동도 전개 하였다.
1971년 큰 아들 세이(生)에게 취학통지서가 나오고 야간중학 예비생을 양성하는 공교육에 반대한 선생은 고민 할 수밖에는 없었다. 또한 야간중학의 학생들이 자신의 민족성을 버리고, 훌륭한 일본인이 되는 것을 추구하면서 갈등의 골은 깊어갔다. 선생에게 빨갱이 딱지도 붙여졌다. 그래서 1973년에 와서 야학중학과 결별하기로 하고 75년 야간중학을 떠났다.
이후에 아이들과 함께 야간중학을 방문하면서 오키나와로 들어갔다. 그의 표현대로 ‘패자부활전’을 가는 것이다. 오키나와에서 1년의 시간을 보내고 패자부활전을 위해 미야케 섬으로 갔다. 아이들과 함께 폐침묵 6,500개를 구입하여 ‘생투학사(生鬪學舍)’를 건축하였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자립 할 수 있는 큰 경험을 쌓게 되고, 작은 아들은 책을 쓰고, 큰 아들은 자신의 삶을 찾아 열다섯의 나이로 아프리카로 떠났다. 이곳에서 자립운동을 통해 그는 중요한 투쟁의 철학인 ‘거름의 사상’을 완성했다.
야간중학 밖에서 15~16년의 세월을 책을 팔기도 하면서 보내고, 1990년 국제식자년 집회를 계기를 다시 야간중학운동에 나섰다. 문부성이 사회교육국을 폐지하고, 생애학습(평생교육)국을 폐지하고 ‘생애학습진흥법’을 법제화하여 시행했다. 선생은 커다란 두려움에 쌓인다. 그것은 문부성의 노선에 대해 당시의 ‘야간중학생이 싸울 수 있는 글자와 말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무기, 232)9)이라고 생각했다. 야간중학 폐지에 맞서고 ‘무기가 되는 글과 말’을 향한 선생은 노력과 투쟁은 계속되었다.
1998년부터 할아버지의 나라 마음의 조국 한국에서 약 18개월동안 서울대와 봉천동의 어머니 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한일 문해 교류를 진행하였고, 여전히 빼앗긴 말과 글을 되찾는 꿈에 살고 있다.
다카노 마사오 선생님의 삶과 투쟁의 철학
다카노 마사오 선생의 철학은 소위 “야생(野生)”의 철학이라 불릴만하다. 보통의 사상가와 지식인의 철학은 제도권의 학문을 통해 배우고,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철학은 일부의 혁명적인 사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제도권의 틀에 갇힌다. 제도권의 틀 밖에 존재하는 새로운 진리에 대한 접근과 포착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제도권의 학문을 한다는 것은 인간을 체계와 이론에 길들이므로 꼭 유용한 것만은 아니다. 인류역사에 있어 중요한 사상과 철학은 만든 사람은 소수이고, 여러 사람에 의해 조금씩 변용되거나 아류가 만들어질 뿐이다.
선생의 경우 제도 밖에서 스스로의 실천과 투쟁 속에서 철학을 형성하였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전후 전쟁고아의 양육강식의 치열한 삶의 현실에서 몸을 통해 경험으로 사고했고, 실천했다. 그 투쟁의 과정 속에서 몸(실천)을 통해 철학을 형성했고, 신념을 형성하고, 의식화되었다. 선생의 삶의 철학(거창하게 철학이라 이름을 붙였지만 “선생의 중요한 삶과 투쟁의 원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름의 사상”이다. 거름의 사상은 선생이 야간 중학폐지투쟁을 떠나 오키나와와 미야케에서 자립운동을 하면서 형성되었다.
“온 세계의 황량한 대지, 부패된 토양에 아무리 훌륭한 씨앗을 뿌려봤자 될 리가 없습니다. 대지 그 자체가 죽어 있으면 어느 땅에 씨앗을 뿌려도 새로운 싹이 틀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대지 그 자체를 기름지게 하는 거름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이렇게 거름이 요구되고 있는데도 누구도, 어느 민족도, 어느 나라도 ‘거름’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식하든 못 하든 모든 사람에게 ‘씨알의 사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무기, 252)”
이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모두 강자가 되려고 노력 할 뿐 진정 패자(敗者)의 입장에서 거름이 되지 않고 모두가 씨앗이 되려는 것이 현재와 같은 모순을 생산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거름이 되고자 한 것은 쓰러진 패자들인데, 이들의 역사를 부정하고, 오직 강자의 역사, 이긴 자의 역사, 플러스의 사상만이 부활하고 있다. 패자의 역사에서 배우고 이어받는 것이 죽은 대지, 부패된 토양을 살찌우는 거름의 사상인 것이다. 선생의 거름의 사상에서 지향하는 인간의 상(像)은 다음과 같다.
*산다는 것은 투쟁하는 것이고 배우는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배우는 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물으며 확인하는 것이고, 산다는 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물으며 확인하는 것이다.
*무기가 되는 글과 말은 모든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만든다.
*돈으로 살수 없는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풍부한 사람이다. 상쾌하게 객사 할 수 있는 사람이 풍부한 사람이다.(무기, 258)
‘거름의 사상’을 중심에 놓고 선생이 생각하는 교육이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삶을 방법을 묻는 것”이라고 했다.
‘가르친다-가르침을 받는다’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배우는 작업’, 즉 ‘내(內)-외(外)-내(內)10)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으면 확신하는 작업’이 유일한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저의 표현을 쓴다면 ‘새까맣게 투명해진다’가 됩니다. (무기, 256)
선생은 교육방법은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받아들이는 기능적 수업이 아니고, 교육의 내용(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성찰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고민으로 주가 되어야 한다. 교육이 삶에서 떨어진 관념적, 지식위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현재의 사회와 교육과 사상은 씨앗의 사상으로 편입되는 강자의 방식인 것이다. 야간중학, 문해교육을 통해 말과 글을 배우는 것이 단순히 말과 글이 아닌, 삶의 말과 글이 되어야 하며 새로운 거름의 존재로써, 인류의 거름으로 인간이 다시 태어남을 말한다.
다카노 마사오 선생님의 삶과 투쟁의 철학을 조약하게 정리해보았다. 여전히 더 많은 자료와 보충이 필요하다. 이 글은 선생을 이해하기 위해선 쓴 첫걸음 정도가 될 것이다. 선생은 한 평생 온 몸으로 투쟁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며 살아왔고, 인간은 거름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말과 글이 무기가 되는 것“ 그리고 인간의 존재는 “꿈에 사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선생과 비슷하게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고 몸으로 경험하고, 투쟁의 삶을 살았던 실천가는 한국에는 많지 않은 것 같다.11) 나는 선생의 삶과 투쟁을 보면서 억압하는 모순에 대한 저항하고, 비타협적인 투쟁을 전개한 “완전한 자유주의자"로 부르고 싶다.
참고 문헌
1. 다카노 마사오(2001),『무기가 되는 글자와 말』, 사람 생각
(2002),『마음의 조국, 한국』, 범우사
2. 김윤정(2008), “일본 성인문해교육의 현황과 전망”,『성인문해교육을 통한 학력인정방안 세미나“, 평생교육진흥원
3. 시라이 젠고(2008), “보다 큰 전진을 위하여”,「2008 전국문해교육심포지엄 녹취록“」, 전국문해, 성인기초교육협의회
4. 이성건(2005), “동경의 야간학교”,《야학21》, 13호, 야학 21편집부
참고자료: 선생님에 관한 국내 신문 기사 자료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