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금으로 차량과 인적이 끊긴 서울역 앞
1982년 1월 5일 명동
밤이 시작됐을 때 기념 사진을 찍는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다.
밤을 호흡하려는 시민들이 명동을 누볐다.
북악스카이웨이와 남산을 1시간30분 정도 돌아보는 ‘시내 야경관광’ 입간판이 거리에 나왔다.
1982년 1월4일 자정, 해방 이후 37년 만에 처음으로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됐다.
물론 통금 시절에도 서울의 밤은 있었다.
그것은 분단된 시간이었다.
밤 12시까지의 ‘숏타임’과 통금이 해제되는 새벽 4시까지의 ‘긴 밤’ 서비스는
당시 서울의 밤을 지배하는 두 얼굴이었다.
서민들은 숏타임과 긴 밤 가운데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했다.
그 경계를 넘나들며 자정 이후의 서울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것은
정치인, 고급 관료, 경찰, 그리고 기자들 뿐 .
“통금에 쫓겨 여관에 가면 베니어판으로 된 칸막이 옆에서
‘이럴 거면 왜 따라왔어’ 하는 소리까지 들렸어요.”
연극연출가 정일성의 회고다.
서울의 밤문화는 일제강점기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서울의 밤문화 변천사를 말해준다.
가장 중대한 고비는 통금 해제다.
서민들은 이때부터 서울의 밤거리를 공식적으로 접수했다.
통금 해제 직후인 1982년 2월6일, 서울극장에서 심야영화가 처음으로 선보였는데
개봉작이 영화배우 안소영 주연의 '애마부인'이었다.
첫날 밤, 1500석의 서울극장에 5천여명의 관객이 몰렸고
극장 유리창이 깨지는 소동 끝에 경찰이 출동했다.
통금 해제는 서울 밤의 색깔과 공기를 바꿔놓았다.
서울 밤문화의 원형질은 아무래도 1909년 문을 연 ‘명월관’이다.
그때까지 집 밖에서 먹고 노는 외식 문화는 생소한 것이었다.
친지와 이웃을 집으로 불러 한상 차려 대접하는 이른바 잔치 문화였다.
명월관은 구한말 왕실의 몰락으로 궁중 연회의 주인공들이 궁 밖으로 나와 설립한 특급 요릿집이었다.
악공, 기생이 배석하여 흥을 돋우는 가운데 최고 특권층이 비싼 값을 치르고 임금님 수라상을 받았다.
전국 각지에 명월관을 흉내낸 고급 요릿집이 생겨났다.
고급 요릿집은 다시 중하위 계층에 맞춘 요릿집과 유흥시설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남들과 구분되는 배타적 공간에서 특별한 음식과 음악을 즐기며 성적 긴장까지 해소하는
명월관의 콘텐츠는 서울 밤문화 100년의 고갱이다.
2007년 서울의 밤거리에서 사람들은 똑같은 것을 찾아 헤맨다.
통금 해제는 명월관 문화의 현대식 버전을 밤새 즐겨도 좋다는 나라님의 허가였다.
서울 시민들은 더 강렬하고 더 기발하며 더 대담한 욕망의 출구를 궁구하기 시작했다.
이후 25년여 동안 서울의 밤거리가 주조됐다.
임금 행차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피맛골은 80년대부터 대폿집과 해장국집이 들어섰고,
새로 형성된 도심인 홍대 앞길, 신사동 가로수길, 삼청동 역시 80년대부터 예술가들이 조금씩 모여들어
1990년대부터 만개한다.
야간통금
“왜애애앵… 호르륵, 호르륵…”
요란한 사이렌과 함께 느닷없는 호르라기 소리에 쫓겨 컴컴한 골목이나 처마 밑으로 황급히 몸을 숨겨야 했던 야간 통행금지 시절이 있었다.
1945년 9월 미 군정사령관 하지 장군의 군정포고 1호로 이 땅에서 시작된 야간통금은 ‘서울의 봄’ 이후 정권을 잡은 제5공화국이 82년 1월5일 밤(6일 자정)을 기해 전면 해제할 때까지 37년동안 밤마다 일희일비를 양산했다.
TV 컬러방송(80년 12월1일)에 이어 중고생 두발 자유화와 함께 실시된 야간 통금 해제는 5공화국의 선심정책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으나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괄호 속에 4시간을 넣어두고 살아야 했던 ‘그때 그 시절’의 청장년들에겐 숱한 일화를 남겼다.
‘574세대’(50년대 출생, 70년대 학번, 40대 나이)인 이모(45·인제대 교수)씨는 밤늦도록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허둥지둥 술집을 빠져나와 뒷골목으로 숨어다녔고 쫓아오는 경찰 야경꾼과 요리조리 숨바꼭질하곤 했다”고 술회한다.
청춘 남녀에게 야간 통금은 찬란한 밤의 역사(?)를 만드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은행 간부인 김모(50·경남 마산시 구산동)씨는 “총각 행원 시절, 같은 지점의 여행원인 홍모(49)씨를 너무나 좋아했으나 워낙 쌀쌀맞아 데이트 신청 한번 제대로 못했다”며 “그러던 77년 12월 어느날, 연말 결산 마감으로 야근을 하게 됐는데 통금을 넘겨 어쩔줄 몰라하는 홍씨의 숙소를 잡아주기 위해 여관까지 따라갔다 이듬해 봄 결혼에 골인하는 행운을 얻었다”고 말했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거리로 쏟아진 시민들은 택시를 잡으려고 허둥댔고 상가는 부랴부랴 가게 문을 닫기에 바빴다.
주점과 다방에는 얼큰히 술이 오른 취객을 대상으로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라는 이별 노래를 들려주며 통금을 예고하던 ‘미스터 DJ’가 있었고 역과 터미널엔 막차를 내린 승객들도 자정 전에 귀가하기 위해 택시를 잡느라 고래고래 소리치며 숨가쁘게 살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통금 시절 경찰을 돕는 방범대원의 월권 횡포가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호텔 나이트클럽이나 고급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통금시간을 넘긴 사람들에게 여관을 안내해 주고 양쪽에서 돈을 받거나 통금직전 술집 앞에 지켜 서 있다가 나오는 손님을 미끼로 술집주인에게 금전을 받아 말썽이 되기도 했던 것.
자영업을 하는 서모(56·마산시 산호동)씨는 “70년대말 서울에서 직장 상사와 술을 마시다보니 통금시간을 넘기고 말았는데 술집을 나서려니 종업원이 다가와 ‘통금에 걸리지 않고 여관까지 가는 방법이 있다’며 소개받은 방범대원에게 돈을 주고 100m 쯤 떨어진 여관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이렇듯 야간 통금시대엔 날마다 어김없는 귀가전쟁을 치러야 했지만 성탄절 전야 만큼은 경찰도 단속망을 늦춰 크리스찬 뿐만 아니라 대다수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하얗게 밤을 새우며 해방감을 만끽하곤 했다.
야간 통금의 역사는 동서고금을 통해 유구했다.
조선시대에는 ‘인정(人定:인경이라고도 했다)’이라 하여 매일 밤 10시에 28번 종을 쳐 성문을 닫고 통금을 알렸으며 새벽 4시에 종을 33번 쳐서 통금 해제를 알렸는데 이를 ‘파루’라 했다. 인정 이후에 통행하다가 적발되면 경수소(警守所)에 가두고 이튿날 곤장을 쳤는데 형벌의 양은 곤장 10대에서 30대까지 어긴 시간에 따라 달랐다고 한다.
중세 유럽에서도 자정이 되면 사탄이나 마녀가 밤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나그네를 유혹하거나 저주를 내린다고 믿어 엄격히 야간 통행을 금지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먹은 괴테의 ‘파우스트’나 음산한 밤의 여왕이 등장하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같은 불후의 명작은 야간 통금이 모티브를 제공했다.
중세의 통금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마녀사냥’이다. 13세기 프랑스에서 불기 시작해 기독교 국가가 밀집한 서유럽 전역을 황폐화시키고 수만명의 여자들이 마녀로 몰려 산채로 불태워 졌는데 마녀로 몰린 여자들의 공통점은 밤중에 어딘가를 다녔다는 의심을 받았다는 점이다.
야간 통금이 해제된지 20년이 지난 2002년 1월 새벽 2시. 부산의 밤거리를 가보자.
심야극장에서 ‘두사부일체’ ‘해리포터’ 등 방화와 허리우드영화를 즐긴 10~20대 심야족이 거리로 쏟아지고 헬스와 찜질방은 회사원이나 중년의 손님들로 만원이다.
대낮처럼 밝힌 대형 마트에서 쇼핑하는 부부, 24시간 편의점에서 햄버거를 먹는 데이트족, 인터넷 카페에서 미국의 거래처와 전자상거래를 하는 소호족도 보인다.
서울에 가족을 두고 김해 안동공단의 제조업체 이사로 근무하는 이모(53)씨는 토요일 업무를 마감한 뒤 새벽 1시 심야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한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 님 오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고 읊었던 조선조 기생 황진이는 지금의 밤거리를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국제신문 추억의 풍속도 20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