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7권, 4년(1395 을해 / 명 홍무(洪武) 28년)
4월 19일(임오) 1번째 기사
검교 참찬문하부사 최무선의 졸기
검교 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최무선(崔茂宣)이 졸(卒)하였다. 무선의 본관은 영주(永州)요, 광흥창 사(廣興倉使) 최동순(崔東洵)의 아들이다.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方略)이 많으며, 병법(兵法)을 말하기 좋아하였다. 고려조에 벼슬이 문하 부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말하기를,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火藥) 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라고 하였다. 무선은 항상 〈중국〉 강남(江南)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곧 만나보고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 어떤 상인 한 사람이 대강 안다고 대답하므로, 자기 집에 데려다가 의복과 음식을 주고 수십 일 동안 물어서 대강 요령을 얻은 뒤, 도당(都堂)에 말하여 시험해 보자고 하였으나, 모두 믿지 않고 무선을 속이는 자라 하고 험담까지 하였다. 여러 해를 두고 헌의(獻議)하여 마침내 성의가 감동되어, 화약국(火藥局)을 설치하고 무선을 제조(提調)로 삼아 마침내 화약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 화포는 대장군포(大將軍砲) · 이장군포(二將軍砲) · 삼장군포(三將軍砲) · 육화석포(六花石砲) · 화포(火砲) · 신포(信砲) · 화통(火㷁) · 화전(火箭) · 철령전(鐵翎箭) · 피령전(皮翎箭) · 질려포(蒺藜砲) · 철탄자(鐵彈子) · 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 유화(流火) · 주화(走火) · 촉천화(觸天火) 등의 이름이 있었다. 기계가 이루어지매,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또 전함(戰艦)의 제도를 연구하여 도당(都堂)에 말해서 모두 만들어 내었다.
경신년(1380) 가을에 왜선 3백여 척이 전라도 진포(鎭浦)에 침입했을 때 조정에서 최무선의 화약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무선을〉 부원수(副元帥)에 임명하고 도원수(都元帥) 심덕부(沈德符)·상원수(上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배를 타고 화구(火具)를 싣고 바로 진포에 이르렀다. 왜구가 화약이 있는 줄을 뜻하지 못하고 배를 한곳에 집결시켜 힘을 다하여 싸우려고 하였으므로, 무선이 화포를 발사하여 그 배를 다 태워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육지에 올라와서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노략질하고 도로 운봉(雲峯)에 모였는데, 이때 태조가 병마 도원수(兵馬都元帥)로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왜구를 〈한 놈도〉 빠짐없이 섬멸하였다. 이로부터 왜구가 점점 덜해지고 항복하는 자가 서로 잇달아 나타나서, 바닷가의 백성들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것은 태조(太祖)의 덕이 하늘에 응한 까닭이나, 무선의 공이 역시 작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개국 후에 늙어서 쓰이지는 못했으나, 임금이 그 공을 생각하여 검교 참찬(檢校參贊)을 제수하였다. 죽음에 미쳐 임금이 슬퍼하여 후하게 부의(賻儀)하였으며, 신사년에 의정부 우정승·영성 부원군(永城府院君)으로 추증(追贈)하였다. 아들이 있으니 최해산(崔海山)이다. 무선이 임종할 때에 책 한 권을 그 부인에게 주고 부탁하기를,
“아이가 장성하거든 이 책을 주라.”
하였다. 부인이 잘 감추어 두었다가 해산의 나이 15세에 약간 글자를 알게 되어 내어주니, 곧 화약을 만드는 법이었다. 해산이 그 법을 배워서 조정에 쓰이게 되어, 지금 군기 소감(軍器少監)으로 있다.
○壬午/檢校參贊門下府事崔茂宣卒。 茂宣, 永州人, 廣興倉使東洵之子。 性巧慧多方略, 喜談兵法。 仕前朝, 官至知門下府事。 嘗曰: “制倭寇莫若火藥, 國人未有知者。” 茂宣每見商客自江南來者, 便問火藥之法。 有一商以粗知對, 請置其家, 給養衣食, 累旬諮問, 頗得要領。 言於都堂欲試之, 皆不信, 至有欺詆。 茂宣積以歲月, 獻計不已, 卒以誠意感之, 乃許立局, 以茂宣爲提調官, 乃得修鍊火藥。 其具有大將軍、二將軍、三將軍、六花石砲、火砲、信砲、火㷁、火箭、鐵翎箭、皮翎箭、蒺藜砲、鐵彈子、穿山五龍箭、流火、走火、觸天火等名。 旣成, 觀者莫不驚嘆。 又訪求戰艦之制, 言於都堂, 監督備造。 及庚申秋, 倭寇三百餘艘至全羅道鎭浦, 朝議崔公火藥, 今可試矣。 乃命爲副元帥, 與都元帥沈德符、上元帥羅世, 乘船齎火具, 直至鎭浦。 寇不意有火藥, 聚船相維, 欲盡力拒戰, 茂宣發火具盡燒其船。 寇旣失船, 遂登岸刼掠全羅以至慶尙, 還聚于雲峰。 上時爲兵馬都元帥, 與諸將殲盡無遺。 自爾倭寇漸息, 乞降者相繼, 濱海之民, 復業如舊。 雖由上德應天之所致, 茂宣之功, 亦不小矣。 至國初, 以年老未見用, 上念其功, 授檢校參贊, 及卒, 上嗟悼, 賻以厚。 歲辛巳, 追贈議政府右政丞、永城府院君。 子海山。 茂宣臨卒, 以一卷書屬其夫人曰: “待兒長, 以此與之。” 夫人藏之甚密, 及海山年十五稍識字, 出而與之, 乃火藥修鍊之法。 海山學其法見用, 今爲軍器少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