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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람의 깊이 원문보기 글쓴이: 박철영
<인간과 문학> 봄호 13집 평론 당선작
서정성에 대한 탐색과 확신
-문병란 시선집 《장난감이 없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박철영
지금껏 노출된 문병란 시인의 객관적 세계가 망라된 문학적 연대기랄 수 있는 시집들을 살펴보면서 문학은 살아 있는 삶이기에 시의 형식을 통해 들추어 볼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있다. 특히 시인의 시와 삶이 광주라는 지역 한계에서 견고하게 갇혀 있다 보니 일반적 시선은 광주에 국한한 문제로 바라보는 편협함도 없지 않았다. 그런 관점 자체가 시인의 시를 관통하는 삶과 시에 내재된 인간 문병란 시인에 대한 접근을 차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편견을 배제하고 문병란 시인의 시 속에서 끊임없이 분출하도록 하는 시 창작 에너지의 충만한 근원은 무엇인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데 있다.
그것은 생전에 손수 뽑아 올린 시선집 《장난감이 없는 아이들》에서 일부나마 볼 수 있다. 금번 시선집을 통해 남들이 보지 못한 자신의 참된 시적 내면세계를 손수 되짚어 주고자 한 것은 아닐까 유추해본다. 지금도 끊임없이 뭇 사람들에게 애송되는 문병란 시인의 민중 저항시의 면면을 살펴보면 서정성이 은연중 저류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민중 저항의 표상처럼 각인된 시인의 참모습은 분명 아닐 뿐더러 일방향적인 저항시 일색은 더더욱 아님을 전제하며 서정시에 닿아 있는 탄착점을 찾아가는 노력을 하고자 한다.
문병란 시인은 이 시선집 《장난감이 없는 아이들》 ‘머리말’에서 스스로 자신의 시 속에 서정성이 온재溫在되어 있음을 밝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진솔하게 토로한다.
“시들은 향토에 밀착된 우렁차고도 뜨거운 가슴의 폭을 지녔으되, 바다를 향해 조용히 흘러가는 산골 개울물의 서늘함 같은 맑은 서정도 지니고 있었다.” 1981년 간행되어 군사 독재정권 시절에 판금 당해 있었던 창비시선 26권 <땅의 연가>에 대한 단평 소개 글이다. ---중략--- “이미 친숙한 <직녀에게>, <꽃씨>, <호수> 그런 시들과 더불어 묵혀 있던 나의 졸시들이 독자의 마음속에 스며들기 바란다.”며 《장난감이 없는 아이들》 시선집의 발간 목적을 그 동안 시집 속에 묻혀 있어 빛을 보지 못한 시들을 선정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기를 바란다”
-시선집 《장난감이 없는 아이들》의 ‘시인의 머리말’에서
이렇듯 그러한 행간을 유추해보면, 스스로도 시의 사회적 평가가 민중이나 사회 체제에 대한 비판 일변도거나 민중 저항시로 편향 각인되었음을 우려하거나 그런 현실을 인정하였다고 본다. 물론 당시 시기적으로 사회는 매우 숨 가쁘게 변화되었고 양심 있는 문학인들에게는 암묵적이지만 시대의 변화에 대한 욕구와 요청에 대한 시인의 소명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기에도 저항적인 시와 함께 원형적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서정시 혹은 비가悲歌라는 문학의 영토에서 일탈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시의 보편적 정서와 가치에 누구보다 충실했다는 것이다. 시의 본적지인 인간의 가치를 중시하는 서정의 주변을 그 당시뿐만이 아니고 지금껏 끊임없이 넘나들고 있었음을 방증傍證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 은연중 흐르고 있는 자애의 정신적 바탕으로 곧이어 목도하는 시대정신과 어우러진 거대한 시 창작의 원동력이 곧 도저道底한 사랑이었다.
1. 문병란 시의 서정적 발화원의 탐색
문병란 시인은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다. 광주 주변부 농촌에서 성장하며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다 스승인 김현승 시인에 의한 추천으로 <가로수>가 《현대문학》(1959.10)에 발표된다. 새삼 초기 시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그 시를 통해 문병란 시인의 시적 발화점이 어디인가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 시에서 보여주는 시어의 조탁을 통한 사유와 감정이 잘 절제되고 언어의 예술적 형상화를 이뤄낸다. 이러한 시의 특징은 탄탄한 언어의식을 통해 아름다운 서정을 지향하고 그런 바탕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그러한 초기 시 <가로수>에서 당 시대에 고향을 등진 사람들의 멍에 같은 향수를 제재로 삼아 우리를 가슴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향수鄕愁는 끝나고
그리하여 우리들은 오후의 강변江邊에서
돌아와 섰다
생활의 폐허廢墟에 부대끼던 겨울을 벗으면
빙점氷點에 서서 기다리는 우리들의 3월
동상凍傷의 가지마다
부풀은 지혈止血에 창문窓門이 열린다
허기진 발자욱들이 돌아오는 오후午後의 입구入口
아무데서나 너의 인사는 반갑고
너와 같이 걷는 이 길은
시진한 고독孤獨을 나누며 가는 계절의 좁은 길,
빈손 마주 모으고 돌아오는 밤이면
가난을 열지어 흐르는 어둠 속
서러운 까닭은
우리 모두 사랑을 따로이 간직하기 때문이다.
어둠을 호흡呼吸하는 고요론 자리
누리지는 별빛을 머금어
다가오는 3월三月 같은 머언 얼굴들이
쏟고 간 눈물
-시 <가로수>에서
외로운 것들이 제 자리를 잡아
은혜를 기다리는 시간
창가에 보랏빛 기다림이 이슬져 내리는
명후일明後日의 가슴이 있고
울먹이는 나무들의 어깨너머
찬란히 무늬지는 피빛 낙일落日
-시 <밤의 호흡>에서
빛과 빛이 모여 꽃을 이루고
꽃과 꽃이 모여 다시 빛을 이루는
오전의 능동지대能動地帶, 거기엔
그리움의 몸부림이 밝음을 향하여 모이는 자리.
서로의 미소가 열리는 곳에 가감加減의 손길이 대낮의 문을 열어
꽃을 밴 5월의 가슴이 정오로 누워 있고
무너져 가는 시간의 피안에
기다림이 마디마디 여물어 터지는 꽃밭
-시 <꽃밭>에서
위 세 편의 시 중에 먼저 <가로수>는 누구나 한 번쯤은 써 보았을 향수를 서정적 모티프로 취하고 있다. 여기에서 ‘향수’는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화순의 한 시절을 전부 의미하진 않는다. 봄의 어느 시기에 찾아간 봄 강변에서 문득 스스로가 자신이 자라고 성장한 곳에서 삶을 살지 못하고 밀려나 버린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만 “생활의 폐허廢墟에 부대끼던 겨울을 벗으면/빙점氷點에 서서 기다리는 우리들의 3월/동상凍傷의 가지마다/부풀은 지혈止血에 창문窓門이 열린다”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런 희망과 긍정적인 자기 인식은 “시진한 고독”과 “머언 얼굴들이 쏟고 간 눈물”에 침몰되지 않고 애써 절제하는 미학으로 극복해낸다. 더 나아가 3월 같은 머언 얼굴들이 쏟고 간 눈물이나 닦아내는 소심한 자기 방어가 아닌 “미쁘운 여인”과 같이 “거닐고 자운” 가로수 길을 통해 시인의 가슴속 내재되어있는 고향에 당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시가 더 시다운 것은 쉽게 감상에 빠져들어 자칫 현실을 부정하며 포기하거나 격렬한 저항 의식으로 전환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너는 5월의 휘앙새, 기대어 서면 너도,/나와 같이 고향이 멀다.”며 가로수와 자신이 똑같은 처지의 동류임을 인식하고 서로를 위로한다. 되짚어보면 가로수는 시인 자신의 오롯한 자화상이다.
따라서 서정시의 개념이 마주한 세계에 대한 감정과 사상을 압축 상징해서 표출한 주관적인 시적 세계로 보았을 때, 유형적으로는 순수 서정의 초기시로 현대문학에서 추천 완료된 연이은 두 편의 시 <밤의 호흡>과 <꽃밭>에서도 충분히 나타나고 있다. 특히 <밤의 호흡>에서는 삶의 공허함과 절대적 고독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초월하려는 강한 의지가 “은혜를 기다리는 시간”, “명후일의 가슴”, “찬란히 무늬지는 핏빛 낙일”로 보여지고 있다. 이어 밤의 이미지를 통해 긴장은 강화되지만 그런 어둠의 두려움은 “나무들의 어깨”를 곁고 감으로써 당연하게 도래할 여명의 공간에 존재하는 시간을 예비하고 있다. 또한, 시적 대상이나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에서도 시각적 이미지를 시간적으로 배열하고 있다. 이어 슬픔이나 자기 고독의 정서를 절제 미학으로 수용한다.
<꽃밭>에서처럼 시는 논리적이고 명징한 의미가 전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시를 이해하기에 앞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꽃밭>의 시를 통한 의미의 미적 감동의 선행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그런 조건을 관념이나 의미에서 충분히 전달하는 형식을 취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시의 시공간적 배경은 오월과 정오의 햇살로 충일한 꽃밭이다. 위 두 편에서 보여준 감상적인 절제는 더 이상 불필요하다. 오히려 격한 감정의 표출을 통해 시적 의미 전달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는 절제된 언어를 통한 서정적 정서가 전반에 깔려 있는 <꽃씨>에서 아직은 이어지고 있다.
가을날
빈손에 받아 든 작은 꽃 씨 한 알!
그 숱한 잎이며 꽃이며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
오직 한 알의 작은 꽃씨 속에 모여 든 가을
빛나는 여름의 오후午後
핏빛 꽃들의 몸부림이며
뜨거운 노을의 입김이 여물어
하나의 무게로 만져지는 것일까.
비애悲哀의 껍질을 모아 불태워 버리면
갑자기 뜰이 넓어가는 가을날
내 마음 어느 깊이에서도
고이 여물어 가는 빛나는 외로움!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
기인 기다림의 창변窓邊에
화려한 어젯날의 대화對話를 묻는다.
-시 <꽃씨> 전문
온전한 씨앗이 완성되기까지는, 꽃이 피고 일정한 시간을 자연조건에 순응해야만 주어지는 관조의 결과물이다. 그러한 자연 친화적 시상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시인이 화순의 농촌에서 성장하였기에 터득할 수 있는 자연 법칙이며 우주의 생명 법칙인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서정성이 강하게 표출되어진 서정시지만 자연을 내면화한 순수한 일면을 엿볼 수도 있다. “꽃씨 한 알 속”에 응집된 “찬란한 빛깔이 사라진 다음”의 실존적인 허무와 무상함에 “고이 여물어가는 빛나는 외로움!”마저 더해 꽃이 만개했을 때의 아름다움을 정서적으로 표출하고 더 나아가 시, 감각적으로 형상화한 서정시다. 그러면서 “오늘은 한 알의 꽃씨를 골라/기인 기다림의 창변窓邊에/화려한 어젯날의 대화對話를 묻는다.”며 자연법칙인 시적 현실에 담담히 긍정해가는 언어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자연 친화적인 소재에 집착한 꽃씨 한 알은 시인의 시적 바탕에 근접할 수 있는 주요 단서가 된다. 조그만 씨알 하나에도 존재적 가치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생명 존중의 정신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다만 꽃씨를 감싸고 있는 껍질을 비애로 인식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 껍질이 불편부당한 장애가 되어 “갑자기 뜰이 넓어가는 가을날”에 당도하지 못했다고 보았고, 그곳에 당도하기 위해 그마저 씨알의 본성을 소중히 감싸고 있는 껍질마저 불태워야 할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꽃씨를 감싸고 있는 껍질이 존재함으로써 더 크고 넓은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음을 간과한 것은 모순일 수 있다. 물론 시적 표현의 모순이 시의 완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면 반대로 긍정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내면화된 절대적인 사랑이 궁극에 도달할 수 있는 파토스를 부인할 수는 없다. 향후 창작을 통해 발표된 시중에서 보여지는 반시反詩 성향이나 전통적傳統的 유행가류流行歌類 또는 현실 비판적인 리얼리즘도 순수 서정과 어우러져 발아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꽃씨>의 시류는 아직 순수 서정의 범주에서 안주해 있다.
2. 서정성과 저항성의 변증법적 융화의 시편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문학》에서 추천 완료된 이후 몇 편의 시를 살펴보았을 때 문병란 시인의 시적 바탕은 순수 서정시와 낭만시의 근경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추론이 가능한 것은 시인의 주관적 정서나 내적 세계를 여실히 시적 형상화로 구체화하고 가감 없이 보여주었기에 그렇다. 더군다나 시적 자아와 대상 사이 대립이 부재하므로 시인의 내면적 자아로 형상화된 시와 동일한 정서로 받아들이기에 그렇다. 특히 《장난감이 없는 아이들》에 수록된 시들은 발표된 시의 순서에 준해 접근하고 있다. 많은 민중 참여 저항의 시의詩意와 여기에 실린 시를 조야해 봐도 일편향적 몰입이 아닌 시의 본래적 의미에 깊이 천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시의詩意에 있어 구체적 보편성과 시적 진실에 앞서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이다. 물론 시인의 시관에서 일부 형상화된 시를 보면 언어의 유희를 넘은 것은 당연하고 서정과 낭만적 감정마저 전투적이거나 구호적인 시로 변주되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먼저 <30세歲>의 시를 존재론적 근거로 접근하였을 때 무의식적 의식을 의식으로 전환하는 낭만적 서정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느 월간잡지月刊雜誌 속
빛나는 유명有名을 빌어
나도 잠깐 넌지시 던져본 미소
거기,
쓸쓸한 눈길 속에 숨어버린 30세歲
어느날
일류이발소一流理髮所의 거울 속에
점잔을 피어 문 소슬한 이마,
입술이 조금씩 옆으로 삐둘어져 간다.
목 언저리에 기어가는 면도面刀날 아래서
먼 주말여행週末旅行을 떠나는 쓸쓸한
30세歲-잊었던 연애를
다시 복습할까-차츰 주량酒量이 는다.
아직은 후회하지 않는 패기覇氣를 피워 물고
어느 날 흐린 술잔 속에서
비웃음을 이죽이며
고급 국산 담배를 피우는
30세歲-나도 이제 능청을 배우고 싶은가.
확률確率을 겨냥하는
나이 손길이
그녀의 유방 아래 잠든
오렌지 빛깔의 무의식無意識을 건드린다.
-시 <30세歲>에서
이 시는 문병란 시인의 생물적 연대를 명쾌하게 밝혀준다. 그런 시기의 사회적 환경과 아울러 어떠한 사유나 시적 관점에서 시적 의식과 인식을 갖고 접근하였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사례의 시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해 청년기 문병란 시인의 사회 초년생으로서 객기를 만나보는 행운을 만나게 된다. 또한 생존의 문제보다 더 절실한 청년기의 인간적 호기심과 불가분의 관계를 존재의식의 공간에서 관념적 의미공간으로 자연스럽게 대체하고 있다. 특히 눈여겨봐야 할 ‘건널목’, ‘화장실’, ‘일류이발소’는 우리의 일상에서 꼭 거쳐 가야 할 필요 불가분의 관계로 자리 매김한 장소를 가리킨다. 또한 사람으로서 최소한 문화적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생존을 위한 존재의식 공간이다. 그렇지만 “미니스커트 아래/고이 숨은 종아리”, “빛나는 유명有名을 빌어/나도 잠깐 넌지시 던져본 미소”, “어느 날 흐린 술잔 속에서/비웃음을 이죽이며/고급 국산 담배를 피우는/나도 잠깐 넌지시 던져본 미소”는 불필요한 의미로 선택되거나 해체 되어 무의식의 범주에서 기다린다. 그것은 마지막 연에 “ 확률確率을 겨냥하는 나의 회화會話가/그녀의 유방乳房아래 잠든/오렌지 빛깔의 무의식無意識을 건드린다.”며 30세歲 생존에서 긴요한 긴장의 의미를 단숨에 와해시켜 버린다. 어찌 보면 그런 창작 의도를 장치한 시인의 인식을 생존보다도 더한 무의식적 의식을 의식화하여 존재적 생존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것으로 단정한다면 너무 이를 수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면 서정적인 시적 자아와 세계가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치고 피로했을 때
여름이여, 너는 머언 항구에서 돌아와
갑자기 퍼붓는 소나기와 같은 그리움으로
피로에 지친 내 육신을 두들겨
천둥 번개로 내 영혼을 일깨우며
그대 불멸의 뜨거운 입술로
내 빈 갈망의 묵마른 잔에
그대 소나기의 연정 가득 채워다오.
그리고 여름이여, 창백한 도시의 빛깔을
푸른 바다의 물감으로 새로이 칠하고
지치고 창백한 일상의 언어들에
장밋빛 생기를 부어주는 사육제의 시간……
넘치는 바다의 그라스에
냉 맥주 보다 시원한
우유빛 새벽의 나체를 포옹하게 해다오.
지금은 오전 일곱시
제도와 의무를 반란하는 새벽
시민 조세지역을 탈출하는 한 사내의
우범 가능성 위험한 금요일을 위하여
바다로 향한 국도의 끝에 서서
이글거리는 7월의 태양에 입맞추게 해다오.
-시 <여름에게>에서
시인의 눈에 비친 전부가 시의 대상이다. 생기발랄한 여름도 그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치도록 푸른 바다의 여름은 7월의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 더 가치가 돋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7월은 내면에 층층이 쌓인 억눌림을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하고 표출하고 만다. 감각적인 시어에서 “내가 지치고 피로했을 때/여름이여, 너는 머언 항구에서 돌아와/갑자기 퍼붓는 소나기와 같은 그리움으로/피로에 지친 내 육신을 두들겨/천둥 번개로 내 영혼을 일깨우며/그대 불멸의 뜨거운 입술로/내 빈 갈망의 목마른 잔에/그대 소나기의 연정 가득 채워다오.”처럼 뭇 시선으로 이 시를 바라본다면, 감정선을 훌쩍 넘어 표출된 밀어蜜語의 서정시거나 가벼운 감상시에 그칠 수 있다. 그렇지만 한 꺼풀 겹을 벗겨본다면 시대의 암울한 체제에 대한 강한 저항 의식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어차피 시는 그 시를 읽는 독자의 몫이다. 그 몫이란 것은 받아들이는 의미마저도 시인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의미로 인식한다면 더욱 그렇다. 하여 이 시의 행간에 더 많은 의도가 함의되어 있다 해도 시의 행간에서 미소처럼 번져 나오는 서정의 의미를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다. 문병란 시에서 그런 시적 진폭은 더 많은 정서적 공감과 시적 울림으로 여운을 불러일으켜 독자에게는 중독성을 요구한다. 그것은 시적 형상화로 이뤄낸 보편적 원체험 공간이 변용적 생산력으로 변주되기 때문이다.
썩고 썩어도 썩지 않는 것
썩고 썩어도 맛이 생기는 것
그것은 전라도 젓갈의 맛이다.
전라도 갯땅의 깊은 맛이다.
괴고 괴어서 삭고 곰삭아서
맛 중의 맛이 된 맛
온갖 비린내 땀내 눈물내
갖가지 맛소금으로 절이고 절이어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맛
소금기 짭조름한 눈물의 맛
-시 <전라도 젓갈>에서
젓갈에다 전라도가 붙으면 그 순간 시선이 불편해지거나 기피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전라도에 사는 사람들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전라도 이외의 사람이 규정한 불편한 굴레다. 시인은 그런 불편부당한 외적 요소를 <전라도 젓갈>에서 고통스럽게 감내하던 것을 과감히 거부한다. 그것은 시인이 그토록 목메게 외치며 부딪치던 민중 저항 의식과 궤를 같이한다. 이어 역사나 시대정신에 따라 불편부당한 외적 요소를 전라도라는 젓갈 속에서 “괴고 괴어서 삭고 곰삭아서/맛 중의 맛이 된 맛/온갖 비린내 땀내 눈물내/갖가지 맛소금으로 절이고 절이어/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맛/소금기 짭조름한 눈물의 맛”으로 자연환경에 의한 융합을 이뤄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젓갈처럼 곰삭이고 나면 전라도만이 가질 수 있는 토종 전라도의 것이 된다. 애초부터 전라도 사람인 전봉준이며, 80년 광주이고, 문병란 시인이 그토록 외친 민중과 민족인 동시에 내면화된 실체다. 그렇기에 문병란 시인에게 서정시의 정의는 따로 필요 없다. 전라도 젓갈처럼 곰삭은 것에 다름이 아니기에 그렇다. 그것은 시인이 추구하는 치열한 삶의 언어가 서정과 참여 저항시로 이분된 분리가 아닌 동전의 양면처럼 상존함을 알 수 있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의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중략---
꿈꾸는 자여, 어둠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 길 멈추지 말라
인생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한 고비 지나면
구름 뒤 태양은 다시 뜨고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시 <희망가>에서
긴 터널에 들어서면 실낱같은 빛을 소망한다. 소망하는 것은 희망을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6,70년대의 우리 선배들이 살아온 세상이 그랬다. 시대의 암울은 의식과 행동의 자유와 양심마저 시인에게 박탈해 갔다. 시인의 본성은 감수성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 감수성은 양날의 칼과 같다. 시인의 눈빛은 서정적 의식에다 현실적인 이미지를 수없이 오버랩 시킨다. 시적 감수성으로 표출되어야 할 ‘꽃망울’과 ‘오아시스’가 ‘눈보라’와 ‘사막’에서 절망한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고 다독이며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 온다”는 강한 희망을 제시한다. 시 속의 얼음장 밑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의 미세한 움직임은 봄을 알 수 없지만, 꽃망울과 조응한다. 밀림 속 나비 한 마리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나비효과는 시인의 성찰로 극복하며 자연법칙의 존재가치마저 깨우치게 한다. 암울한 현실을 시 속에서 표징하고 있지만 자아라는 내면을 공고히 할 때 희망이라는 궁극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희망을 가정이라는 서정 공간 <아내의 상숑>에서 “인생은 30촉 백열등”으로 환하게 밝힌다.
계절이 먼저 오는 변두리
40평짜리 작은 단독주택.
부엌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도마질 소리.
딸각 딸각 딸각
이 저녁도 인생은
4분의 3박자로 흐른다.
기쁜 일 슬픈 일
가다가 엇박자도 섞으며
아내는 지금
쇠고기 반근을 다지고 있을까.
인생은 30촉 백열등
그 불빛처럼 쓸쓸해도
도마질 소리는
궁, 상, 각, 치, 우로 흐른다.
사랑하는 사람아, 해넘이
고운 노을 등에 지고
그대 어디쯤 흔들리고 있는가.
가난한 아내의 식칼 끝에 묻어나는
소슬한 음악, 한 접시 노을이
식탁 위에 곱게 타고 있다.
-시 <아내의 샹송>전문
남녀 간 사랑을 노래한 중세 프랑스의 샹송 음악이 흐르는 밤이다. 제목조차도 <아내의 샹송>은 시인의 삶을 시로 빌어 전경화한 리얼리티며 그림이 되기 직전의 목탄으로 그려가는 스케치다. 우선 변두리와 단독주택은 묘한 부조화를 이루면서 조화를 수용한다. 부엌과 도마질 소리는 아내의 말까지를 포함하여 침묵을 강요한다. 리얼리티한 삶은 항상 배고프다. 그러면서도 평안함이 충만한 삶의 전형을 꿈꾸지만 현실은 아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저녁이 있는 풍경을 수채화로 그려낸다. 도마질하기에 안성맞춤인 30촉 전구를 천장에 매달아 아늑한 조도를 실내에 배치하고 있다. 자그마한 집과 어스름이 제일 먼저 당도할 변두리다. 고요와 어둠이 만나면 적요하다. 그 적요의 틈으로 아내의 도마질 소리가 또각 또각이 아닌 딸각 딸각 4분의 3박자로 번져 나간다. 나이 든 아내의 감정에 따라 엇박자도 놓아주면서 슬픈 일과 기쁜 일을 짊어진 하루를 고스란히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들이민다. 가난이 노을 같은 전형적인 사랑이 충만한 서정시다.
아직도 젊고 팽팽한 몸뚱어리에
푸른 가지를 죽죽 뻗치고
남해의 푸른 하늘을 끌어안고 서 있는
곰내 팽나무
임진년 난리 때
이순신 장군의 노모 변씨와
그의 부인 방씨가
5년간 기거했다는 내력을 지니고
하나의 역사가 수천 개의 이파리를 달고서
눈부신 6월 햇살 아래
그 미끈한 아랫도리를 당당하게 서 있다.
팽나무는 그대로
아름다운 조선 역사
그날의 내력 안으로 간직하고
거대한 상형문자처럼 두 팔 발려
이 세상 사내란 사내 천하의 무든 수컷들을
죄다 삼키고도 모자랄 듯
천하의 햇살을 모조리 빨아들이고 서 있다.
천하장정들 다 오라
그 넉넉한 무당각시의 품을 열고
아랫도리 성한 왜놈들 부대쯤 모조리 삼키고
이 세상 남편과 자식 줄줄이 거느리고
그 수천 수만 개의 남근이 주렁주렁 매달리듯
저 용트림하는 장려한 나무의 풍만한 끼를 보라
-시 <곰내 팽나무>에서
문병란 시는 자연의 대상을 시적 구조물로 차용한다. 그것은 단순한 미적 차용에 그치지 않고 시적 의도를 장치한다. 여수의 곰내[熊川] 마을은 수백 년 묵은 팽나무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노모와 부인이 기거했던 유래를 갖고 있다. 그런 <곰내 팽나무>는 시인의 역사의식을 자극하고 통한痛恨의 임진년까지 함의한다. 임진년의 통한의 과거사를 해한解恨의 정서로 인식하며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풀이는 구호에 그치지 않고 시대의 확장을 넘어서 근 현대사를 관통하는 민족의 서정에 면면히 닿는다. 곰내 팽나무는 민족의 정서이고 혼이 깃든 대상이다. 팽나무는 고래古來부터 마을 앞이나 관가에 심어진 수호신으로 받들어진 신목神木으로 오랜 민족 정서 속에서 통시적 일체화한다. 시인은 범상치 않은 팽나무의 웅혼한 기상을 감지한다. “하나의 역사가 수천 개의 이파리를 달고서/눈부신 6월 햇살 아래/그 미끈한 아랫도리를 당당하게 서 있다.”고 하며 팽나무 한 그루가 늙은 사람들이 쉬어 가는 그늘이나 제공하는 정자나무가 아닌 여수 앞 바닷가 당시의 조선을 지키는 든든한 수호신으로 인식한다. 거기서 “내 나이 67세/아직은 젊고만 싶은 수컷으로/열 오른 이마 가까이 다가가 접신”까지 하는 정열을 가졌다. 과거와 현재 이 땅의 암울한 시대를 살아온 시인정신은 남다르다. 하여 내면화된 역사의식이나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정서는 자연의 사물 속에 투영된 서정적 시흥이 뼛속까지 관류하는 시인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
물을 찾는 뿌리를 안으로 감춘 채
원망과 그리움을 불길로 건네며
너는 나의 애달픈 꽃이 되고
나는 너의 서러운 꽃이 된다.
사랑은
저만치 피어 있는 한 송이 풀꽃
이 애틋한 몸짓
서로의 빛깔과 냄새를 나누어 가지며
사랑은 가진 것 하나씩 잃어 가는 일이다.
각기 다른 인연의 한 끝에 서서
눈물에 젖은 정한 눈빛 하늘거리며
바람결에도 곱게 무늬 지는 가슴
사랑은 서로의 눈물 속에 젖어 가는 일이다.
오가는 인생길에 애틋이 피어났던
너와 나의 애달픈 연분도
가시덤불 찔레꽃으로 어우러지고
다하지 못한 그리움
사랑은 하나가 되려나
마침내 부서진 가슴 핏빛 노을로 타오르려나
이 밤도 파도는 밀려와
잠 못 드는 바닷가에 모래알로 부서지고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 가는 일이다.
-시 <인연서설> 전문
이 시는 <아내의 샹송>에 버금가는 서정의 전형으로 “꽃이 꽃을 향하여 피어나듯이/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그렇게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다.”라며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 가는 일이다.”라고 확언하며 시적 형상화와 미적 국면에 도달한다. 그런 당당한 서정의 대상화로 존재하는 꽃은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 형태로써 의미를 부여받고 시적 의미 공간을 형성한다. 그러한 시적 공간 즉 의미의 궁극은 사랑의 열정을 강화시켜간다. 이 시는 사랑의 연가戀歌로 불려도 부족하지 않을 사랑을 노래한 시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파멸적인 사랑이 아닌 서로에게 다가가는 유연함으로 뼈저린 상처까지도 아우르는 사랑의 아우라다. 거기에 시적 언어 행에서 이루어내는 촘촘한 나열구조는 독자들이 시를 탐색하는 상상력과 맛을 감소시킬 수도 있겠지만 시인의 배려는 그것까지도 뛰어넘고 있다. 진정성으로 인식한 사랑이란 가치에 무감한 우리에게 절실한 울림은 시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서로의 영원을 담보로 출발한다. 그렇기에 죽음을 전제한 사랑은 아직은 예감하기 어렵다. 그러나 시인은 사랑의 완성을 “사랑은 서로의 가슴에 가서 고이 죽어 가는 일이다.”라며 선지자적 예언을 기어코 누설한다. 그래서 사랑은 시이고 시이면서 사랑이라고 노래한다. 그러므로 간간이 입에서 흥얼거려지는 유행가 가사조의 시는 더 오래 기억될 수밖에 없다. 문병란 시인의 영혼 같은 시는 앞으로 더 험난한 시대에서도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것이다.
여기 한 송이 꽃은
열흘 붉은 짧은 목숨이지만
그는 필 때보다
질 때가 더 아름답다
피는 꽃에 기약턴 마음
지는 꽃에 눈물 맺는 열매
맹세보다 사랑은 길다
오래 오래 피려 하지 마라라
붉게 붉게 타려 하지 마라라
저만치 놓인 인생의 갈림길
아니오와 예가 길을 막고 있다
하여가를 부를 것이냐
단심가를 부를 것이냐
부처님이 빙그레 웃고 있다.
사랑이여, 내개 길을 묻는 사랑이여!
빛깔은 시들고 향기는 썩는다
머물다 가는 시간 앞에
오늘 고희를 위한 메모를 쓴다
인간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다만 죽을 뿐이다-헤밍웨이,
이 아침 초대받지 않는 손님
세월이 옆문으로 와서 노크를 한다.
-시 <내게 길을 묻는 사랑이여_ 고희를 위한 메모> 전문
이 시를 읽다 보면 비장감마저 든다. 삶의 먼 길을 떠나 목적지에 닿은 듯한 비감한 결의를 엿볼 수 있다. “여기 한 송이 꽃은/열흘 붉은 짧은 목숨이지만/그는 필 때보다/질 때가 더 아름답다”는 시행은 잠언箴言처럼 들린다. 누구든 엄숙하고 숙연한 시의詩意 앞에서 세상이 뒤집힌다 해도 다른 생각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세상살이에 초연한 의지를 초극이라 한다. 초극의 경지에 든 시인이다. 삶은 생과 사로 구조되어 맞물린다. 안타깝게도 선생후사先生後死다. 시가 서정을 띄고 있느냐 마느냐의 시비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서정시의 본원적 형식논리와 “인간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다만 죽을 뿐이다-헤밍웨이,/이 아침 초대받지 않는 손님/세월이 옆문으로 와서 노크를 한다.”라며 누구에게나 죽음은 도래하는 슬픈 노래라는 명제를 차용하고 있다.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에서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라는 복음 같은 인식으로 시에 다가감은 비로소 사람다운 삶에 이르고자 함이다. 역설적이지만 “그 속에서 인생은 짧고 시는 영원하다.”며 이 땅의 사람들에게 시의 영원성을 다시 환기 시킨다. 그 시는 구호성 강한 시가 아닌 사람의 가슴으로 전달되는 서정성이 온재溫在한 시임은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전 생애를 관통하는 삶 속에서 우러나온 민족과 민중적 양심의 시적 발현은 특수한 시대가 만들어놓은 하나의 굴레였고 어둡던 우리의 자화상임을 부인할 수 없다. 구호로 불렸거나 저항의 중심에 선 시들은 과거로 저문 시대의 민중 속 가슴에서 아린 가락처럼 낭송되거나 노래로 불려지고 있다. 하지만 위에서 《장난감이 없는 아이들》에 수록된 80편의 시 속에서 눈에 띄는 시어들을 보면 인간의 삶에서 사랑과 연민의 서정적 정서에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60년대 반공 이데올로기 시대를 거쳐 80년대까지 사회 혁명의 시대에 시인으로서 언어적 텍스트의 근본에만 충실했다면 서정성의 결여로 문병란 시인의 시적 세계는 대단치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민중의 분노, 고통과 좌절에 대한 저항의 생생한 ‘아우성’과 텍스트로써의 ‘죽은’ 언어 사이에서 절망적 간극을 탄탄한 서정의 정서로 메워왔음을 확인해보았다. 시인은 비록 <죽순竹筍 밭에서>의 시에서 “아직도 낡은 연미복을 입은 시인詩人아/ 이제는 시들은 꽃다발을 던져 버려야 한다/가냘픈 피리는 내던져 버려야 한다/시詩는 시詩가 끝나는 데서부터 다시 시작돼야 한다”라며 반시주의反詩主義적 자세를 견지한다. 하지만 당시 민중의 순수하고 진솔한 의식과 맞닿기 위한 의도를 함의한다. 더 나아가 그들과 동지적 연대를 이어가기 위하여 밀의密意적 시를 거부하고 “불쌍한 백성의 밑구멍을 보아라/저 위엣 양반들이 먹고 싸지르는 냄새에/질식당하고 억눌린 밑바닥을 보아라”라며 <작별조作別調>에서 밑바닥 삶에 대한 열정적 사랑을 시적 인식으로 가져간다. 문병란 시에서 일관되게 민중 의식을 표현하는 시 속에도 가장 인간적인 삶에 대한 사랑으로의 천착은 굴지성인 땅과 닿아 있다. 땅은 밑바닥 하층 민중이다. 밑바닥 민중의 언어체계를 시적 세계로 끌어들여 인식에 성공한다. 따라서 문병란 시인의 시는 순수한 삶을 이어가는 질박한 사람들과 서정적 연대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문병란 시인의 많은 창작시 중 서정성이 배제된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인 상황에서도 역설적이지만, 민중의 서정적 삶을 복원하려는 강한 의지의 지향과 시적 세계는 서정성과 결연하게 맞닿는다. 그러한 인식을 토대로 암울한 시대에서 치열한 서정시인으로 살다간 시인임을 우리는 다시 한 번 환기하게 된다.
첫댓글
문병란 시인의 시 세계를 다시금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철영 시인님
~~^^
이른 새벽에 일어났네요
대단하세요 ^^ 축하드립니다 ^^
ㅎ
사람 잘 만나 이리 되었습니다
갈 길 물으면 반대로 아려주거나 외면하는 세상인데~~^^
다 잘하셨으니 그렇쵸
잘 가르쳐 줘도 엉뚱한곳으로 가는 사람있습니다^^
ㅎㅎ
하여간 여기까지 왔네요
길이 없는 곳에 길 하나 뚫고
나온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