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비장전 소개>
" 알몸으로 썩 나서면서 그래도 소경이 될까
염려되어 두 눈을 잔뜩 감고 이를 악물고 왈칵 두 손을 짚으면서
허우적거린다 한참 동안 이 모양으로 헤엄쳐 갈 때
동헌 댓돌에다가 대가리를 부딪히니 "
기생 줄 돈 있으면 나라를 위해 피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
옛날에는 기생을 해어화(解語花)라 했다. 규방 규수들이 꼭꼭 닫혀진 대문 속에서 바느질을 하는 동안 기생이라는 특정 계층의 여자들은 남자들의 술자리에서 술시중을 들어 한량들이 일컬어 '말하는 꽃이다' 해서 해어화라는 이름을 얻었다.
기생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고대부족사회의 무녀가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겠나 하는 추측이 일반적이다. 즉 제사와 정치가 하나였던 사회에서의 사제였던 무녀가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고 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지방세력가와 결합해 근대의 기생 비슷한 역할을 했을 거라는 얘기다.
조선 중기 이후 기생문화는 독특하다. 우선 유교문화와 더불어 사대부들의 문학 예술이 기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면서 황진이, 이매창 같은 명인들이 문명을 날렸다. 한편 말기에 오면서 기생들은 일패(一牌),이패, 삼패 등 셋으로 구분되는데, 일패는 전통 무가의 보존, 전승자로 뛰어난 예술감각을 지닌 기생들이다. 일패는 대부분 관기로 그들 내부에서는 규율도 엄했고, 자부심도 굉장했다. 이패는 밀매음(密賣淫),삼패는 공창(公娼)의 기능을 했다. 일제시대 진주 기생 산홍은 "기생 줄 돈이 있으면 나라를 위해 피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고 하릴없는 한량들을 꾸짖었다고 한다.
〈배비장전〉은 일패기생 애랑이 양반을 갖고 노는 이야기로 애교 있고, 의기 있고, 재주 뛰어나고, 미모도 있는 애랑이와 애랑의 꾀에 빠진 배비장에 대한 풍자가 주된 이야기로 전개된다.
중세적 인간형의 위선과 이중성을 고발하는 풍자 한마당
명절이면 어김없이 안방으로 찾아오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더욱 친숙한〈배비장전〉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풍자소설로 알려져 있다. 민중을 대표하는 방자와 애랑을 통해 양반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통렬히 고발하는 풍자소설이라는 것이 〈배비장전〉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다. 〈배비장전〉은 양반 계층에 속하는 배비장이 양반의 윤리와 도덕을 내세우다가 기생의 유혹에 빠져들어 망신을 당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배비장전〉의 풍자가 배비장이라는 인물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과정에 집중되어 있다면 이 과정을 배후에서 조정, 혹은 방조하는 인물이 바로 제주목사라는 사실은 〈배비장전〉에 담긴 풍자의 대상이 단순히 양반계층 그 자체만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더구나 '배비장'이라는 인물에 대한 풍자는 연암 박지원의 한문단편인 〈양반전〉이나 〈호질〉 등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직접적이지도, 신랄하지도 않다.
무엇보다 배비장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과정은 모략이라기보다는 '장난'에 가까우며, 이 한바탕의 장난이 끝난 후 모든 사람들은 서로 화해할 뿐만 아니라 더욱 가까워진다.
그렇다면 〈배비장전〉에서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해학적으로 비틀어서 한바탕 웃게 한 후에 문득 심각하게 돌아보게 만드는, 그 웃음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비수는 과연 무엇일까?
〈배비장전〉에 담긴 풍자의 의미는 단순히 민중을 수탈한 대가로 호위호식하며 여색이나 밝히는 양반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표면의 한 층위를 벗기고 〈배비장전〉에 담긴 풍자의 의미를 한층 깊이 탐색해 보면, 풍자의 초점이 바로 중세적인 도덕 관념의 허위성과 관념성을 제시하는 동시에 지배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인간형이 지닌 모순을 지적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전소설은 창작과 유통방식이 현대소설과 달라 수많은 이본(異本)들이 존재하며 이 각각의 이본들은 그 나름의 독자적인 개성과 가치를 지닌다. 특정 개인에 의해 창작되어 인쇄, 출판의 과정을 거쳐 유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가 원본(元本)을 확인하기 어렵다.
누군가에 의해 한 번 씌어진 후 필사하여(때로는 판각하기도 함) 돌려보는 과정에서 읽는 이에 따라 조금씩 수정을 가해 전혀 다른 새로운 본들이 계속 재생산되는 것이다. 어느 본이 높은 가치를 지닌 본이며, 어느 본이 원래의 본에 가까운 것인지 연구과정을 통해 추정할 수는 있지만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따라서 고전소설을 읽을 때는 각 이본에 따른 차이점을 고려해야 한다.
〈배비장전〉은 전해지는 본이 두 가지다. 1916년 신구서림에서 간행된 구활자본과 김삼불이 교주한 국제문화관본(1950년)이 있는데 두 본 모두 개작한 흔적이 뚜렷하다. 18세기 만화본 춘향가(1754), 19세기 관우희(송만재:1788-1851), 송남잡지(1855), 신재효본 오섬가(신재효:1812-1884)등에 〈배비장전〉과 관련된 기록이 나오므로 그 판소리의 형성시기는 18세기에서 19세기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신구서림본에는 배비장이 제주 목사의 배려로 정의현감으로 부임한 후 선정을 베풀어 출세하고 애랑이 배비장의 자식을 낳아 그 자식들이 또한 벼슬에 나아가는 과정이 첨가되어 있는데 현대적인 개작의 징후가 분명하다.
김삼불본에서는 이러한 결말 부분이 생략된 채 양반들의 부도덕성과 방자의 민중성이 강화되어 있다. 이는 구활자본이 상업적인 대중소설이며 주된 독자층이 여성인 데 반해, 김삼불본은 김삼불의 사회정치의식이 강하게 개입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구활자본에서는 배비장이 풍류남자로 묘사되어 해학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고 김삼불본에서는 배비장이 호색양반으로 형상화되어 풍자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배비장전〉은 창(唱)을 잃어버린 판소리 7마당 중의 하나로 판소리적인 문체와 대중문화로서 판소리가 지닌 대중성과 민중성, 유흥성을 모두 보여준다. 또한 다른 판소리계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설화들을 그 안에 수용하고 있는데 양반이 기생에게 속아 이빨을 뽑아주는 발치설화나 속임수에 걸려 궤 속에 들어가 수모를 당하는 미궤설화 등은 야담의 여러 작품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설화들이다.
그리고 〈배비장전>은 〈이춘풍전〉과 함께 기생이 양반의 허위의식을 폭로하고 풍자하는 '남성훼절담'의 전통 위에 있어 변화한 여성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편 〈배비장전〉은 시정에 대한 뛰어난 묘사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세태소설로 읽히기도 한다. 세태는 '한 사회의 삶의 제반 형편'을 일컫는 것으로 경험적 현실과 이에 대한 현실인식을 드러내는데 세태소설에 반영된 세태란, '중세적 관념'에 대립되는 근대지향적인 인식에 의해 문제시된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세태소설은 유교적인 금욕이념을 비판하고, 이데올로기적인 명분이나 방탕한 향락생활을 비판하며, 물질적 풍요가 중요시된다.
대체적인 양상은 경직된 관념체계의 허위성을 폭로, 풍자하면서 하층민의 발랄함이 함께 구현되는 형태로 드러나는데 이러한 양상의 밑바탕에는 경험지향적인 세계관과 사실적인 예술인식 등이 깔려 있다. 시정의 일상인들을 등장시킴으로써 낭만적인 환상성과 관념적인 이념성을 떠나 일상성에 주목하는 새로운 소설사 적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