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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베트 불교의 특성과 분류>
(목차)
1) 금강승(金剛乘, Vajra yana)
2) 딴트리즘
3) 만다라
4) 티베트 불교의 종파들
1) 금강승(金剛乘, Vajra yana)
이 금강승은 인도불교사적으로는 탄트릭 부디즘(Tantric Buddhism)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한역권에서는 대승의 한 줄기로 인식하여 밀교(密敎)란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서구에서는 완전히 대·소승과 어깨를 같이 하는 3대 산맥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알려진 대로 고향인 인도에서 불교는 중세기 이슬람의 인도대륙 침입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불교계에는 대승과 딴트릭 불교가 교체되던 시기였는데, 이때 불교의 핵심교단은 생존을 위해 히말라야를 넘는 비상탈출구를 찾아내어 티베트로 피난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 불교의 최대 수입처인 중국으로 가는 기존의 불교 전파로―파미르 고원을 넘는 실크로드나 해양로가- 이미 이슬람에 의해 차단되었기에 기존의 루트로는 중국 대륙으로의 탈출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불교학의 중심지였던 나란다 대학이나 비크라마실라 대학의 학자들은 이‘비상구’를 통하여 설역고원으로 피난을 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당시 유행하던 탄트릭 불교를 신봉하는 밀교학승들이 주류를 이루었기에 자연스레 탄트리즘은 설역고원에 전파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티베트 사자의 서(書)」의 저자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빠드마삼바바와 산타라크시타 등과 티베트 불교의 후홍기(後弘期)를 연 아티샤* 같은 밀교승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티베트가 처음으로 받아들인 불교는 우리 대승권과는 처음부터 갈래가 다른, 후기 밀교적인 불교였던 것이다. 물론 일찍부터 실크로드를 통하여 단계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여 대승불교의 꽃을 만개한 중국에 의한 티베트로의 역수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영향은 미미하였다.
반대로 중국은 8세기 이전에, 인도의 4단계의 밀교 중에서 3단계까지가, 선무외(善無畏)와 금강지(金剛智)에 의해 직접 해로를 이용하여 중원에 밀교의 씨앗이 뿌려졌지만, 그러나 시기적으로 티베트에 전래된 제4단계의 최후의 밀교인 ‘아누타라요가 딴트라’는 받아드리지 못했다.
그러나 후에 티베트를 점령한 원, 청나라에 의해 다시 간접적인 티베트의 밀교를 결국은 받아들이게 되었다. 유목민이었던 원제국은 당시 원시적인 샤머니즘 정도만 있었고 고급종교가 없었기에 티베트를 점령한 후 티베트의 고승들에 감화되어 황실의 전폭적인 장려에 의해 아이러니하게도 티베트불교는 만개되면서 국교화(國敎化)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이민족인 원, 청나라 황실의 정략적인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하여간 결과적으로 티베트 불교는 원,청이라는 광대한 땅 구석구석까지 전파되는 어부지리를 얻은 셈이었다.
현재 중국대륙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속칭 황교(黃敎) 또는 장전불교(藏轉佛敎)가 바로 티베트 불교의 밀교적 종파이다. 그리고 당·송나라를 거치며 만개되었던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불교는 모두 한데 묶여져서 이 황교에 대비되는 이름인 청교(靑敎) 또는 현교(顯敎)로 불리며 겨우 명맥만 유지되기에 이르렀다. 원, 청나라의 무력을 등에 업은 티베트불교의 세계화의 여파는 한반도에도 미쳐서 우리 해동의 불교도 티베트 밀교적 요소를 많이 함유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말을 바꿔보면, 고향인 인도에도 없고 대,·소승권 어디에도 없는 인도 마지막 후기불교의 진수가 바로 티베트불교의 본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세계가 히말라야 뒤에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던 설역고원의 불교에 관심을 갖는 이유 중에 첫 번째이다.
2) 딴트리즘
티베트의 딴트릭 부디즘(Tantric Buddism)을 ‘금강승(金剛乘)’ 또는 ‘밀교(密敎,)’라고 번역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견해를 조금은 달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상통되는 의미로 쓰이고는 있다. 그러나 엄격히 구분하자면 적지 않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딴트리즘은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 또는 자인교(Jain) 같은 인도에 뿌리를 둔 종교에 6세기 이후에 불어 닥친 새로운 사조를 총칭하는 말로, 여기서 ‘딴트라(Tantra)’는 산스크리트로 ‘씨줄’이란 뜻으로, 기존의 경전을 뜻하는 ‘슈트라(Sutra)’의 ‘날줄’이란 뜻에 상응되어 생겨난 말이다. 번역에서도 구별되어 기존의 그것을 경전(經典)- 슈트라(Sutra)로 번역하는 것에 대비하여 경궤(經軌)- 딴트라(Tantra)라고 부르고 있다. 이 경궤란 범어 ‘깔파(kalpa)’의 번역으로 밀교의 경전에서 설한 불보살을 찬양하는 의식이나 궤범을 말한다. 또한 반면에 밀교라는 용어는 이것의 전승방법이 스승과 제자사이에 비밀리에 이루어진다는 형식상의 문제를 강조한 중국식 번역에 중점을 둔 것으로 기존의 불교를 ‘현교(顯敎)’라 구분하면서 그 대한 상응되는 대칭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위와 같은 구별법은 오히려 딴트릭 불교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차라리 아래와 같은 시대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리라 생각된다. 당시 인도에서, 딴트리즘으로 대표되는 이 일련의 사조는 당시 사변적으로 치닫던 난해한 대승불교의 반작용으로 생겨난 것으로 종교를 중생들의 삶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에, 현학적 이론화보다는 <인간의 몸과 입과 뜻>을 활용하여, 몸으로는 무드라(契印)를 짓고 입으로는 만트라(眞言)을 외우고 마음으로는 만다라(Mandala)를 관상(觀想)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중생의 현세적 욕망인 양재초복(禳災招福)과 즉신성불(卽身成佛)의 추구에 목적을 두었다.
한역된 밀교경전에는 현세이익을 위한 부분과 다라니(多羅尼)의 공덕이 강조되어 있는 기복(祈福)불교적인 내용이 대부분이고 또한 밀교의 수행법이야말로 중생에서 붓다가 되는 지름길이라는, 즉신성불의 이론을 강조하고 있다. 성불(成佛)을 목표로 하는 것은 어느 수행법이든 기본적으로는 차이가 없겠으나, 소승은 성불을 목표하면서도 일체의 번뇌를 끊고 먼저 아라한이 되고자 하는데 반해 대승은 이론상으로는 누구나 성불이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현세에서의 성불은 쉽지 않으니 억겁의 긴 수행과 보살행이 필요하다고 설하고 있는데 반해 밀교는 <인간의 몸과 입과 뜻>으로 바로 붓다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하겠다.
그러니까 새로운 사상인 딴트릭불교는 시대조류에 발을 맞춘 ‘생활불교’ 이고 또한 어찌 보면 난해한 이론과 어려운 수행법과 긴 시간을 거치지 않고 바로 ‘즉신성불(卽身成佛)’할 수 있는 ‘경제적’ 불교라고 까지 표현할 수 있는 불교의 혁명적인 개혁운동이었던 셈이었다.
일반적으로 설역의 밀교는 넓게는 금강승으로 분류되지만 더 세분하면 구생승*(俱生乘:Sahaja-yana), 시륜승, 탄트라승, 길상승(吉祥乘:Bhadra-yana) 등으로 세분되는데, 이 중 시륜승(時輪乘) 즉 ‘칼라차크라야나(Kara-cakra-yana)’가 바로 티베트불교의 주류를 이룬다. 이 낯선 이름의 사조는 시간을 뜻하는 ‘칼라’와 수례를 뜻하는 ‘차크라’와 수례를 뜻하는 ‘야나’의 합성어로 11세기에 인도후기불교의 제일 마지막 단계로 성행했던 새로운 물결이었다. 당시 딴트라는 당시 서쪽으로부터 밀려드는 이슬람의 무자비한 침공으로 인해 나란다 대학을 비롯한 대사원에서 활동하던 딴트라의 고승들은 할 수 없이 그 이전에는 없었던, 히말라야를 직접 넘는 비상탈출구를 통해 티베트로 망명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전통적으로 불교의 최대 시장이었던 중국 같은 경우, 일찍부터 불교를 단계별로 수입하였지만 이 새로운 사조는 접해볼 수 없었던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리하여 설역고원에는 중원 권에는 전래되지도 못한 마지막 딴트리즘이 일거에 들어오게 된 것인데, 이것은 ‘4종류’로 구분되고 있다. 이런 분류법은 티베트의 3대 역사서 중의 하나인『부똔불교사』*의 저자인 부똔린뽀체에 의한 것이지만, 이 순서는 인도에서 명멸했던 이 사조의 발생순서와 맞아 떨어지고 있어서 현재도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1, 크리야 딴트라[kriya-tantra, 所作]로 불보살에 공양하거나 예배드리는 의례, 진언[眞言,Mantra] , 계인[契印, Mudra] 등의 외형적인 행위를 중심으로 한 것으로 이른바 잡밀(雜密) 또는 주밀(呪密)이라 부른다. 크리야는 여러 가지 종교적인 행위를 중심으로 한 것으로 그런 상황이 성행한 시대라는 의미이다. 이런 행위는 주로 현세이익적인 내용, 즉 중생들의 소망을 이루어 준다는 기복적인 수법을 말한다.
2, 챠리아 딴트라[Cariya-tantra, 行]로 크리야에 다시 내면적인 명상법을 덧붙인 것으로 밀교경전「대일경(大日經)」*에 근거한 것으로 대승불교의 여러 가지 수행법과 이론화(理論化)가 진행되는 과정을 말하는, 밀교의 티베트 전승의 제2기에 해당된다.
3, 요가 딴트라[Yoga-tantra, 瑜伽]는 요가의 명상법을 중심으로 불보살과 수행자가 일체를 이루는 방법론을 설한 것으로, 밀교경전「금강정경(金剛頂經)」*에 근거한 것으로 이른바 순밀(純密)이라 부른다. 요가 또는 삼마디 (samadhi)라고 하는 것은 선정(禪定)을 닦아 정신통일을 하고 그 속에서 부처님과 내가 합일한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시대적으로는 챠리아 보다는 늦지만 내용적으로 대일여래가 설법하고 즉신성불을 설하는 등의 의미로는 순수밀교(純密)에 속하지만 이 것을 전반과 후반으로 나눈다면 「금강정경」은 후반에 해당된다. 그러나 요즘은 동양삼국의 ‘양부불이(兩部不二)’라는 기존의 관점과 티베트의 해석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밀교의 분류의 새로운 쟁점이 되고 있다.
4, 아누타라요가 딴트라[Anuttarayoga-tantra, 無上瑜伽]는 요가행법보다 좀더 구체적으로 체계화하여 인간의 호흡, 기(氣), 혈맥 등의 생리작용을 응용하여 불보살과 합일을 추구한다. 대략 750년부터 1,000년까지의 인도대륙을 풍미한 이 최후의 딴트라는 다시 <방편(方便)-부(父)딴트라>과 <반야(般若)-모(母)딴트라>로 나누어진다. ‘방편(方便)’에 대립되는 나머지가 <반야(般若)-모(母)딴트라>인데, 이것은 불교적이라기보다 여전히 힌두교적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여기에는 헤바즈라와 삼바라 딴트라의 두 종류가 성행했다.
한편 <방편>계열은 불교에서 적극 수용되면서 일명 <비밀집회딴트라>로 불리면서 티베트에서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특히 실천방법에서 성(sakti, Sex)적인 소재가 등장하기에 잘못 해석된 부분이 생기면서 우리 북방 불교권에서는 좌도밀교(左道密敎) 또는 후기밀교라 하여 폄하되기도 했다. 그 발단은 이른바 ‘비밀집회’라는 용어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단어의 본연의 뜻은 “몸과 말과 뜻[身口意]이 일체화[集會]된다”라는 내용이지만, 이 단어의 뉘앙스 때문에 마치 “성의 개방을 통한 수행법”이란 뜻으로 해석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이런 오해를 받게 된 또 하나의 원인으로는, 시각적인 방편으로 미투나상(Mituna), 즉 부모불(父母佛)이나 남녀합체불상(男女合體佛像) 또는 합환불상(合歡佛像)같은 모습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티베트어로는 ‘야붐’즉 남신(Yab)과 여신(Yum) 합성어인 이 불상은 유교적 관습에 젖어 있는 북방불교도의 눈에는 해괴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런 형상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부모의 역할 같은, “모든 상반되는 원리의 합일”에 있기에, 다만 중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으로 상반되는 원리의 상징인 남녀가 붙어있는 모습으로 표현했을 것이라고 머리로는, 이론적으로는 이해했다하더라도 그것을 공식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 당시나 현재 사회의 현실이었을 것이다.
정리를 한 번 더 하자면, 티베트의 ‘칼라차크라 딴트라야나’는 인도후기밀교의 최후의 산물로써 위의 4번째 딴트라인 ‘아누타라 요가’ 의 핵심사상으로 이 두 요소, 즉 <반야와 방편>을 합일시킨,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 사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인도대륙에서 불교 자체가 사라져 버렸기에 세계적으로 오직 설역고원에만 그 사조의 영향을 받은 조소, 불상, 만다라, 회화, 음악, 의례 속에서 남아 있게 되어 우리는 이것들을 통해서만 지난날의 인도후기불교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농후한 성적 분위가 물씬 풍기는 이 마지막 밀교가 정말 중원에 전래되지 않았는가? 아니면 전래는 되었지만 수용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논쟁은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이 방편문(方便門)은 불교사적으로 볼 때 크고 넓은 대문은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결국 이런 야릇한 모습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조는 인도에서는 카쥬라호(Kajulaho)를 비롯한 도처에 남아 있는 생생한 ‘미투나상’ 만 남기고 사라져버렸고 그 것의 마지막 가닥이 히말라야 깊숙한 곳에서 고스란히 보존되어 내려와 현대에 이르러 발견되면서 세계인의 눈을 놀라게 한 것이었다.
3) 만다라
아마도 요즘처럼 이 ‘만다라(曼茶羅)’라는 말이 자주 들먹여지는 때가 또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치 시대적 화두처럼 흔히 쓰이는 말이 되었다. 실제로 얼마큼이나 그 뜻을 알고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히 하자면 이 단어는 산스크리트어의 만다라(Mandala)의 음역으로 ‘만다’와 ‘라’의 합성어로 “본질을 소유한 것”이란 사전적 의미를 갖지만 일반적으로는 ‘둥근 원(圓)’으로 인식되어 있다. 또한 실질적으로 딴트리즘에서는 원과 사각형으로 짜여진 구도 안에서 불보살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그림 자체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여러 겹의 원 또는 사각형 안에 4개의 문을 가진 여러 겹의 사각형 또는 원형의 누각이 있고, 그 누각 안에 여러 개의 불보살들의 방이 있는 구도를 가진 일종의 기하학(幾何學)적 구도를 한 우주도(宇宙圖), 즉 “신들의 궁전도” 를 가리킨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원과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큰 탑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그린 조감도(鳥瞰圖) 또는 “3차원의 공간의 모형을 2차원의 평면 위에 그려 넣은 우주설계도(宇宙設計圖)”라고 보면 이해하기 차라리 편할 것이다. 여기서 우주는 영원한 진리를 뜻하는 “자연적 질서의 상징”으로 대변된다. 그리고 만다라의 주인공인 대일여래(大日如來)와 4방불(四方佛)은 광대무변한 우주를 무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날아다니는 우주선의 선장과 선원들에 해당된다고 비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복잡한 의미를 가진 것이 바로 만다라이다.
밀교에서는 예술이 상당히 중대한 의미와 역할을 지닌다. ‘만다라도’는 전문수행인에게는 그것을 화두로 삼아 바라보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는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한편 일반인들에게는 예배의 대상으로 쓰이기 위한 성스러운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현학적 이론화가 진행되어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식으로 신비화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부적(符籍) 같은 용도로 권장되는 속화(俗化)의 과정이 현재도 진행되고 있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게 만든다.
밀교 예술은 대체로 몸, 언어, 마음의 3가지로* 분류된다. 마음에서 일으킨 것은 몸으로,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몸과 언어예술의 근원은 마음이라고 인식하여 ‘마음의 예술’을 가장 높은 차원으로 여긴다. 이 3가지 예술은 다시 ‘일반 예술’과 ‘성스러운 예술’로 나누는데, 전자는 아름답게 만들고 치장하는 세상살이에 필요한 온갖 예술이 포함되지만 후자는‘영혼의 예술’이라 해서 예술의 진수라고 여긴다. 그래서 밀교예술은 모두 6가지로 분류된다.
만다라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기존의 종교적 그림과 차원이 다른 작품이어서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서려 있다는 사실이다. 만다라의 의미심장한 공간 속에는 불교의 우주관이 그대로 들어있다. 물론 그것도 혜안을 가진 이들에게만 열리는 세계이기에 당연히 난해한 것이 사실이다. 불교의 우주관은 널리 알려진 대로 4세기 북인도의 대승학자인 세친(世親)의「구사론(俱舍論)」에서 한 학문으로 정립되었는데, 우주의 중심 수미산*(須彌山,Sumeru)를 중심으로 4대주가 펼쳐져 있는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다라는 이 경전에서 묘사되고 있는 이 우주의 모양을 누구나 이해하기 편하게 시각화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만다라는 언어와 문자로 되어 있는 우주과학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이 바로 실질적 불교를 표방하며 인도대륙을 주름잡는 사조를 만들어낸 밀교의 주도세력이었는데, 물론 그들은 이 그림에다 똑똑한 현대인들도 풀기 힘들 정도의 훨씬 복잡한 수수께끼를 감추어 놓았다. 마치 오묘한 ‘퍼즐게임’ 같이 말이다.
만다라는 일반 불화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중 하나는 기존불교에는 없는 밀교 특유의 자비나 분노를 상징하는 ‘존상(尊像)’이 다수 출현한다는 점도 꼽을 수 있겠지만 그 외에도 기존의 종교그림이 대개 장엄용에 알맞은 구상화(具象畵)인 것에 반해 만다라는 설계도에 가까운 반추상계열의 작품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지적할 만 하다.
만다라가 언제 생겨났는지에 대하여는 정설이 없지만, 대개 4세기부터 힌두교에서 <얀트라도(Yantra圖)>로 시작되어 6-7세기에 자인교나 불교에 차용되면서 좀더 복잡한 구도로 변해갔고 11세기 이후에는 딴트라 불교의 전유물이 되면서 크게 만개하였다가 이슬람의 침공으로 인도대륙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니까 인도불교가 그 수명을 다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크게 타올랐던 최후의 찬란했던 불꽃 놀이었다고나 할까?
원래 만다라의 기원은 법석용의 토단(土壇)을 쌓고 그 위에다 오랜 시간 동안 심혈을 기우려 오색(五色沙)모래로 만다라도형을 그린다음 그 곳에서 ‘푸쟈’의식을 행하고는 그 오색모래를 바로 모래의 고향인 강에다 버리는 일회용의 의식이었다. 말하자면 힌두사상의 핵심인 ‘생성․ 유지․ 소멸’의 과정을 충실히 실현하는 행위였는데, 후에 만다라가 수행용과 예배용의 대상이 되면서 회화로 표현되기 시작하여 벽화나 걸개용 탕카로 만들어져 사원의 벽을 장식하는 용도로 변했다. 이점이 현재 인도에서 고대의 불교만다라의 실물을 볼 수 없게 만든 한 이유로 꼽히기도 하지만, 인도 불교만다라의 전통을 고스란히 전래받은 티베트에서는 요즘도 중요한 법회에서는 옛 법식대로 오색 모래로 만다라를 만드는 전통이 재현되기도 하며 또한 흔치는 않지만 동(銅)으로 주조된 입체적 만다라가 발견되기도 한다.
흔히들 우리나라에서는 만다라 이야기만 나오면 자동적으로 ‘태장계’와 ‘금강계’만다라가 튀어나오게 마련이지만, 이는 완전히 일본식의 분류법이다. 중원에서 중국식 밀교[純密]가 한참 만개를 할 때인 8세기, 일본의 유학승 공해(空海)화상은 장안에서 위의 두 ‘만다라도’를 가지고 돌아와 지금까지 그 원본을 보관하고 있다. 그 이후로 일본은 이 두 종류의 만다라를 중심으로 밀교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티베트나 중국의 경우처럼 밀교의 시대적인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절름발이 분류에 해당된다.
4) 티베트 불교의 종파들
지나친 물질화에 따른 부작용인 인간성 상실에 대한 대안으로 요즈음 동양적인 가치기준이었던 사상과 종교에서 그 해답을 구하려는, 일종의 신드름이 세계적으로 불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나라 잃은 망명객인 달라이 라마에 대한 존경과 동정심도 한 몫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주된 요인은 속칭 라마교(Ramanism)라고 불리는 티베트 불교의 매력과 더불어 라마승의 독특한 수행법과 다각적인 포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교를 대․소승으로 가르는 대승권의 전통적인 방법은 이제는 서구인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만큼 티베트 불교의 신드름은 거세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서구인들은 불교를 셋으로 나눈다. 범어로 바즈라야나(Vajrayana)-금강승(金剛乘)을 하나 더 추가한 것인데, 우리에게는 전문 학자들 이외에는 조금은 생소하지만 바로 이 단어가 티베트 불교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금강승은 인도불교사적으로는 탄트릭 부디즘(Tantric Buddhism)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인데, 번역에서도 구별되어 소·대승의 그것을 경전(經典)- 수트라(Sutra)로 번역하는 것에 대비하여 경궤(經軌), 즉 탄트라(Tantra)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니까 바즈라야나는 한역권에서는 대승의 한 줄기로 인식하여 밀교(密敎)로 인식되고 있지만, 서구에서는 완전히 대·소승과 어깨를 같이 하는 큰 줄기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고향인 인도에서 불교는 중세기 이슬람의 인도대륙 침입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당시는 대승과 후기밀교가 그 전성기를 교대하던 시기였는데 이때 불교교단은 생존을 위해 히말라야를 넘는 비상탈출구를 찾아내어 티베트로 피난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 불교의 최대 수입처인 중국으로 가는 기존의 불교 전파로―파미르 고원을 넘는 실크로드―가 이미 이슬람에 의해 차단되었기에 중국 대륙으로의 왕래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불교학의 중심지였던 나란다 대학이나 비크라마실라 대학의 학자들은 이 ‘비상구’를 통하여 설역고원으로 피난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당시 유행하던 탄트라 불교(Tantrism)을 신봉하는 밀교학승들이 주류를 이루었기에 자연스레 이 신사조였던 탄트리즘은 설역고원에 전파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티베트 사자의 서(書)》의 저자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파드마삼바바와 산타라크시타 등과 티베트 불교의 후홍기(後弘期)를 연 아티샤 같은 밀교승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들이 받아들인 불교는 우리 대승권과는 처음부터 갈래가 다른, 후기 밀교적인 불교였던 것이다. 물론 일찍부터 실크로드를 통하여 단계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여 대승불교의 꽃을 만개한 중국에 의한 티베트로의 역수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영향은 미미하였다.
반대로 중국은 인도의 후기불교를 실크로드를 경유하는 루트로 직접 수입하지는 못하였지만 8세기, 인도의 밀교승들인 금강지(金剛智)나 불공(不空)이 직접 해로를 이용하여 중국대륙에 밀교의 씨앗을 심은 후에 다시 티베트를 점령한 원·청나라에 의해 다시 간접적인 티베트의 밀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유목민이었던 원제국은 당시 원시적인 샤마니즘 정도만 있었고 그럴 듯한 종교가 없었기에 티베트를 점령한 후 티베트 밀교의 고승들에 의해 오히려 감화되어 아이러니하게도 황실의 전폭적인 장려에 의해 만개되면서 국교화(國敎化)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이민족인 원·청나라 황실의 정략적인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하여간 결과적으로 티베트 불교는 원,청나라라는 광대한 땅 구석구석까지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지금 중국 대륙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속칭 황교(黃敎) 또는 장전불교(藏轉佛敎)가 바로 티베트 불교적인 종파이다. 그리고 당·송나라를 거치며 만개되었던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불교는 모두 한데 묶여져서 이 황교에 대비되는 이름인 청교(靑敎)로 지칭되며 겨우 명맥만 유지되기에 이르렀다. 원,·청나라의 무력을 등에 업은 티베트 불교의 세계화의 여파는 한반도에도 미쳐서 우리의 불교도 티베트 밀교적 요소를 많이 함유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말을 바꿔보면, 고향인 인도에도 없고 대,·소승권 어디에도 없는 인도 후기 불교의 진수가 바로 티베트 불교의 본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이 세계가 히말라야 뒤에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던 설역고원의 불교에 관심을 갖는 첫째 이유이다.
둘째로 티베트 불교의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불교 전래 이전의 토착신앙인 뵌포교(Bo촱po)와의 융합에 있다. 불교는 법륜이 굴러가면서 부딪혔던 모든 민족들의 토착신앙을 불교 안으로 끌어들인 종교사적으로 유일한 종교라고 일컬어진다. 상극하지 않고 상생한 포용력 있는 종교였다. 해동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설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뵌포교적인 요소를 받아들이다 보니 무속적인 냄새가 너무 진하게 배어 버린 점 또한 티베트 불교의 특색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셋째로는 대승불교의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부연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대승의 진정한 구경처는 자기 해탈에 있지 않고 이타행(利他行)에 있다.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고 나아가 해탈에 이르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의무를 가진 것이 진정한 대승불교도가 걸어야 할 보살의 길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대승불교가 탄생지 인도와 개화지 중국에서 거의 사라져 버린 듯한 현재 시점에서 유일한 ‘대승’의 종주국이라고 자화자찬하는 우리 불교계의 현실은 어떤가? 한 예문을 대신 들어보자.
『티베트 불교가 중국·한국·일본의 불교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점이 있다. 동양 3국의 불교가 ‘성불’이라는 말로 자기완성을 직접적인 목표로 삼는 것에 비하여 티베트 불교는 무한히 이타(利他)를 바라며 일체지자(一切知者)로의 길로 나아갈 뿐 결코 스스로를 위하여 열반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참된 이타행을 위해서는 먼저 자기완성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자기완성을 위해서도 이타행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어, 마침내 ‘타인을 구원하는 불교로서의 보살도가 아닌 스스로가 구원받는 불교’로 무의식중에 변질되어서 대승이 어느 새 소승적인 자세로 되돌아간 셈이었다.』
위의 지적대로 대승불교는 출가나 수행의 목적이 혼자 깨달아 윤회에서 벗어나려는 데 있지 않다. 그들의 원력은 한 영혼을 가지고 수없이 윤회하면서 전생에서 못 다한 원력을 성취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깔마파 린포체는 벌써 17번이나, 달라이 라마는 14번이나, 판첸 라마는 11번이나 계속 한 영혼으로, 그 의식을 유전자 속에 간직한 채 몸만 바꾸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점이 무엇보다 중요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설역고원에 뿌리를 내린 불교는 크게는 ‘4대종파’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첫 번째,닝마파는 8세기 히말라야를 넘어 설역고원에 불교를 전한 파드마삼바바, 일명 연화생(蓮花生) 즉 《티베트사자의 서(書)》의 저자로 알려진 유명한 초능력자로서 생몰연대를 비롯한 모든 인적사항이 신비의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다. 가장 오래된 종파이기에 고파(古派)라고도, 또는 붉은 옷과 모자를 쓰기에 홍교(紅敎) 또는 홍모파(紅帽派)라고도 하는데 탄트리즘적 성향이 강한 종파로 현란한 의식과 매장경전(埋藏經典)에 의한 수행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종파의 승려들은 대개 대처(帶妻)를 하고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현재까지도 히말라야권에서 적지 않은 세력을 가지고 있다. 현재 라싸 근교의 몇 개 사원이 이 종파에 속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11세기에는 까귀파가 등장한다. 인도로 직접 내려가 밀교수행과 경전 번역을 한 역경사 마르파에 의해 창립되어 밀라래파에 의해 널리 퍼진 밀교 종파이다. ‘하얀 옷의 거사’라는 이름의 이 2대조사 밀라래파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십만송(十萬頌)》이란 유명한 시집의 저자로 알려진 인물로 역시 신통력이 뛰어난 초능력자로서 알려지고 있는데, 전기에 의하면 그의 생애는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점철된 고행자로서 그려지고 있다. 카일라스 산, 즉 수미산 또는 캉린뽀체 산의 연고권을 놓고 뵌뽀교 사제와 겨룬 카일라스 산에서의 한판 싸움은 민간에 회자되는 유명한 설화이다. 이 종파는 초기에는 고행 위주의 두타행에 중점을 두었고 장발에 흰옷을 입었기에 백교(白敎)라고도 한다. 현재는 이 종파도 역시 게룩파와 비슷한 색깔의 가사를 걸치고 삭발을 한 모습을 하고 있다. 역시 부인과 가정을 꾸미고 살고 있으며 밀교의 전통대로 철저한 사도상승(師徒相承)을 전통으로 삼는다.
이 종파는 밀라래파의 제자 감보파에 의해 이론적인 체계를 갖춘 후에 ‘샹파와 다포’로 갈라졌는데, 후에 ‘다포파’는 다시 4줄기 8갈래로 분파되었는데 그 중에 ‘깔마파’와 ‘파모둑파’가 출현하였다.
12세기에 깔마파는 두숨켄파에 의해 다포파에서 분파되어 나왔다. 그가 바로 제1대 깔마파 린뽀체로 추존된 인물이다. 그는 라싸 근교에 출푸 사원을 건립하여 수행하다가 열반에 즈음하여 환생을 명확히 예언하였는데 정말 그의 말대로 그의 영혼을 가진 전생자(轉生者)가 발견되어 제2대 출푸사원의 법주로 모셔졌다. 바로 튤쿠(Trulku)- 활불(活佛)제도의 시작이었다. 리빙 붓다(Living Budddha)의 효시였다. 이 제2대 깔마빠는 원 세조 쿠비라이 칸에게 초빙되어 검은 모자를 하사받았기에 그 후로 ‘흑모파(黑帽派)’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이 신비스러운 활불제도는 후에 ‘게룩파’에 의해 모방되어 달라이 라마·빤첸라마로 이어지게 된다. 이처럼 ‘깔마 까귀파’는 법왕제와 활불제를 처음 확립한 종파이다. 현재 국내외에서 깔마파는 많은 분파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어서 게룩파 다음으로 중요한 종파이다. 특히 유럽에 많은 지부를 갖고 있어서 게룩파 못지않은 세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역사적 비중 때문에 2000년 출푸사원을 탈출하여 중국의 감시망을 뚫고 한겨울에 히말라야를 넘어 망명한 제17대 깔마빠 린포체는 아직 미성년이지만 그의 행동거지 하나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그의 망명이 받아들여지면 그는 인도 내의 또 다른 해외포교의 거점인 인도 동북부 시킴(Sikim)의 룸텍사원에서 망명생활을 할 것이지만 중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인도정부에 의해 아직도 공식적인 망명은 허락되지 않고 있어서 다람사라에 비공식적으로 머물고 있는 중이다.
세 번째로 11세기에는 싸갸파가 등장한다. 내륙 깊숙한 샤카라는 지방에서 ‘쾬’ 씨족에 의해 창건된 종파인데 문수·관음·금강을 의미하는 홍·백·흑색을 주된 문양색(紋樣色)으로 사용하기에 일명 화교(花敎)라고도 부른다. 13세기 원나라를 등에 업고 샤카 정권을 세워 설역고원을 통치하였다. 이 종파는 원나라의 황실을 움직여 원나라의 국교가 되게 하였으며 전 아시아로 그 세력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까 한반도에도 큰 영향을 끼친 종파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마치 중세의 요새같이 생긴 싸갸사원을 중심으로 남부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데 역시 대처를 하고 있다. 특히 이 사원은 고색창연한 불교문화재를 많이 보존하고 있어서 순례길에 꼭 들려보아야 할 의미 깊은 곳이다.
네 번째, 마지막으로 14세기에 게룩파가 부상한다. 토번제국의 마지막 왕인 랑다르마 암살사건 이후 티베트는 긴 암흑기에 들어갔는데 그 말기에 방글라데시 출신의 유명한 밀교승인 아티샤(Atisha)가 설역고원으로 넘어와 전법륜의 기치를 들어 티베트 불교의 후홍기(後弘期)시대를 열었다. 이 아티샤의 법을 이은 제자에 의해 카담파가 라싸 근교에서 세워졌는데, 이를 토대로 쫑카빠가 기존의 종파들의 폐단을 개혁하고 계율을 정비하여 승려들의 독신을 의무화하여 비구승단을 만들며 티베트 불교에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이를 처음에는 신(新)카담파라고 하다가 후에 게룩파로 이름을 바꿨다.
청해성 시닝(西寧)의 타르 사원 근처에서 태어난 쫑카빠는 현재 이 종파의 교조로 추앙되어 법당에 석가상과 나란히 앉아 있을 정도의 대접을 받고 있다. 황색의 옷과 마치 로마병사의 투구 같은 노란 모자를 쓰기에 황교(黃敎) 또는 황모파(黃帽派)라고도 부른다. 이 게룩파는 후에 깔마파를 모방하여 달라이 라마 제도를 확립하여 정교를 양손에 쥐고 토번제국 멸망 후 오랫동안 분열되었던 국토를 통일하여 라싸의 뽀따라궁을 중심으로 5백 년 간 설역고원을 다스렸으며 밀교 일변도의 역대 티베트 불교를 현밀양교(顯密兩敎)의 형평성을 유지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중국에 의해 1950년 국토를 점령당한 뒤에 게룩파는 강력했던 통치권을 잃어버리고 법왕인 14대 달라이 라마는 1959년 무력항쟁의 실패 후에 인도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 1966년부터의 문화혁명으로 모든 사원들은 거의 파괴되고 승려들은 환속당하였으나 1984년부터의 햇빛정책으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고 사원들도 복구되기 시작하여 게룩파는 다시 어느 정도 소생하였다. 현재 티베트 제2의 도시인 따시룬뽀 사원의 법주인 제11대 빤첸 라마를 중심으로 게룩파는 아직도 최대 종파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얼마 전 깔마빠의 망명으로 동요된 티베트 사회의 새 바람을 넣고자 새로 옹립되었다고 전하는 제7대 ‘레팅 린포체(현재 4세)도 이 파에 속한다.
첫댓글 음!!!
매번.. 공부가 되는 까페... ^^
감사히 읽습니다..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