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온 지 딱 일년, 세월은 유수같이 흐르고 중국에 날 따라와 있던 아들놈이 18일에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 놈이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중국관광을 시켜주려고 생각하다가 백두산 관광을 생각하고
집사람과 함께 셋이서 북경 여행 동호회 모임에 함께 하기로 하고 13일
백두산 산행길에 올랐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 편하기야 하지만 너무 비싸니 기차여행이 경제적일 뿐 아니라 집사람은 북경에서
기차여행이 처음이니 무척 기대되는 모양이다.
북경역에서 길림성 통화역까지 무려 17시간을 기차를 탔다. 물론 침대칸이니 밤에는 자야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중국 열차는 저녁 10시만 되면 전체 전등을 꺼버린다. 그럼. 개인침대에 개인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을거라고요? 천만에! 개인 등이란 아예 없습니다.
그럼, 잠자지 않는 사람은 어떡하냐구요? 별 수 없습니다. 열차칸과 칸 사이에 있는 공간에서 서서 책을 보던가 아니면 불 꺼진 의자에 앉아 있던가 잠이 오지 않아도 누워있던가 그래야 합니다.
침대열차는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맨 하단은 그래도 앉아 있을 정도의 높이는 되지만 중단과 상단은
좁아서 앉아 있지도 못합니다. 문제는 제가 새벽 잠이 없다는 것이지요. 특히나 덜컹거리는 열차안이니
싫컷잤다 싶어 일어나 보면 12시고 또 자고 일어나도 2시고 또 자도 4시니 이거야말로 환장하겠더만.
결국 4시경에 일어나 복도에 나가 책도 읽고 창옆 의자에 앉아 스쳐지나가는 별도 보면서 통화역에
도착합니다. 중국은 어디가나 한국식당이 있어서 집보다 더 푸짐한 한국식사를 하고 집안으로 버스이동.
집안이라고 하면 그 옛날 고구려가 수도를 정하여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의 서울.
광개토대왕릉은 수리중이라 못보고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릉으로 알려진 장군총만 보았습니다.
광개토왕비는 일제시대 이전 일본놈 첩자가 몰래 돌의 비문을 고쳐서 일본역사에 유리하게 만들어
둔 중요한 고적입니다. 그런데 실제 이 비를 보면서 느낀 것은 왜 당시에 돌을 평평하게 깍지 않고
저렇게 울퉁불퉁한 상태에서 비문을 새겨넣었을까? 그것이 알고싶더군요.
또한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에 사망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옛 도읍인 집안의 아버지 능옆
에다 묻어달라고 했다지만 과연 장군총은 장수왕릉이 맞을까? 요것도 알고 싶더군요.
여하간 우리의 옛땅들이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 중국은 자신들의 역사라고 북북 우기고 있는데 참으로
우리 후손들이 못났다 싶더군요. 어느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중국 역사를 보면 주변 민족들이
전부 한 번씩은 장악했는데 우리만 못한 것 아니냐고요. 몽고족이 원나라를, 만주족이 청나라를,
일본이 이차대전때 동북지방 대부분을 먹었고 우리나라만 중국을 정복 못하지 않았느냐 이겁니다.
옛성터인 환도성터는 입장 불가라고 하고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쳐다만 보았으며
시내에 있는 국내성터는 그야말로
성벽만 앙상히 남아 있고 성벽안에는 중국인들의 아파트가 즐비하여 볼 거리가 하나도 없더군요.
<사진1:집안에 있는 장수왕릉으로 알려진 장군총 모습>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백두산 등산 코스 중 하나인 서쪽등산로로 갑니다. 입구에는 엄청난 인파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5년전만 해도 백두산을 찾는 90%는 한국인이고 10%정도가 중국인이
었는데 지금은 완전 역전되어 95%가 중국인이고 5%만 한국인입니다.
어찌어찌 비비고 들어가서 마침내 백두산 올라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올라가는 코스는 장관입니다. 온 갖 야생화가 활짝 피어 우리를 맞아히였고 아마도 천지에서 배어나온 물이
땅밑을 통과하여 나오리라 싶은 폭포가 줄을 이었습니다.
18번째 백두산을 오른다는 보보님 조차도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약 2100m높이정도까지 버스가 가고 거기에서 1442계단을 올라 마침내 눈 앞에 펼쳐진 장관! 즉 천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진2:백두산천지에서 나란히 선 우리 부부>
16개 봉우리들이 물속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우리를 맞이하는 그 장관과 여태 살아오면서 늘 소원하던
그 백두산을 올랐다는 감동의 물결이 정말 내려오기 싫게 만들더군요. 가이드 말로는 백두산 천지를 이렇게 깨끗하고 완전하게 보기가 정말 힘들다면서 중국 전 주석인 강택민도 세차례나 와서 천지를 못보고 갔다고
뻥치대요.
백두산이 우리민족의 영산인 이유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원류라는 것 말고도 단군신화에 나오는
태백산이라는 것이며, 여기에서부터 우리 민족의 역사가 탄생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 중국은
동국여지승람의 태백산은 묘향산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우리 역사를 부정하고 있으며 특히 만주족들은
백두산이 자기들의 조상이 발원한 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백두산천지에 가서 만세를 부른다던가 태극기를 게양해도 엄청난 벌금을 때린다고 가이드가 어찌나
겁을 주는 바람에 만세 삼창 한번도 못하고 조용히 내려왔습니다. 중국에 살다 보면 황당한 일이 한두가지
가 이닌 것을 알기 때문에요.
여하간 나라가 강성하지 못하면 역사도 민족도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그래도 이만큼 살기 때문에 중국 교포들도 목소리 높이고 산다는 게 현지 교포가이드의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전에 서쪽 등산을 마치고 오후에 장백폭포가 흐르는 북쪽로를 오르려고 했는데
글쎄, 이런 일이!!!
북경전 총서기(전북경시장)류치란 사람이 길림성총서기와 같이 백두산 관광을 오는 바람에 북쪽루트를
완전 봉쇄해버린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미 오전에 북쪽루트를 오르려고 기다리던 사람들조차 발이 묶여
난리가 나게 되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굉장히 심한 충돌이 있었답니다. 중국은 소위 영도(링다오)
가 나타나면 아예 길을 봉쇄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일요일 낮에 백두산을
올랐으며 또 그렇다고 통제할 것 까지 없었음에도 쫄따구들이 알아서 기는 바람에 난리가 났고,
그렇게 보고 싶던 장백폭포나 북쪽에서 보는 천지는 가보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 나마 서쪽루트를 통해 천지를 봤기 때문에 망정이지 모처럼 백두산 여행을 가서 백두산 구경도
못할 뻔 했습니다. 참으로 이해 안가는 대목입니다.
다음 날은 두만강가 도시 도문으로 갔습니다. 다리 너머로 중국인들은 관광을 다니는데 우리는 남들처럼
왕래도 못하고 멀거니 이북 땅을 바라만 봅니다. 중국과는 달리 북한 땅에는 산에 나무가 없습니다.
온통 개간을 했을 뿐 만 아니라 아마도 연료 부족으로 나무를 베었기 떄문이겠지요.
참으로 가슴이 답답해 옵니다.
<사진3:도문에서의 우리 가족, 뒤에 보이는 강이 두만강이고 그 너머가 북한 땅>
다음으로 간 곳은 시인 윤동주가 태어난 곳, 용정. 선구자의 "일송정 푸른 솔은~~~~"
그 구절 마냥 일송정은 이제 나무는 없고 정자만 남아 있었으며 이상설 선생이 세운 대성중학교가 있어
그 곳에 윤동주시비가 우리를 반겨주더군요. 대성중학교는 우리 교포만 입학시키는 전통을 여태 고수한다고하여 기꺼이 중국돈 200元을 기부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연길에서 기차를 타고 24시간을 여행하여 북경으로...
기차안에서는 우리 일행끼리 오손도손 이야기 하느라 그 나마 기나긴 기차여행이 재미가 있었으며
중국기차여행이 처음인 집사람도 정말 싫컷 기차를 탄 셈입니다.
참으로 우리나라가 잘되어야 우리 교포도,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인들도 자부심을 가진다라는
교훈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백두산 정기를 듬뿍 받고 돌아온 여행이었습니다. 저는 백두산 천지가
굉장히 오랜된 못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불과 400년 정도도 안되었더군요. 조선시대에도 용암을
분출했으며 16세기 이후에 물을 담기 시작했더군요. 이러니 앞으로도 얼마든지 화산활동이 가능하겠더군요.
늦기 전에 한번 가보이소! 준비해준 보보님과 함께 했던 일행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대한민국 만세!
첫댓글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북파도 오르셧음 더 좋앗을텐데 아쉽네요^^
네..저도 잘 읽었습니다..학교다닐때 한번 백두산을 간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글로 읽으니 참 새롭네요...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정말 다시 한번 추억의 여정을 잘 정리하여 주셔서 고맙게 읽고 갑니다. 돌아오는 열차간에서 여정을 함께 하며 나눈 귀한 중국생활사도 즐거웠읍니다. 저희 복덩이네는 이달 31일 귀국하며 인사 올립니다. 북경에서의 벨링가족님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드립니다.
멋지네요!! 천지도 보시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