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순번이 세 번째지만
남상선/수필가
지난 10월 중순 만원시내버스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 겨우 자리를 잡았다. 얼마를 가다 보니 중년 부인이 등에는 아기가 업혀 있고 한 손에는 꼬마 손을 잡은 채 차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다섯 살은 돼 보이는 꼬마와 부인이 안쓰러워 자리에서 일어나며 앉으라고 했다. 부인은 두 정거장만 가면 내린다며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 서 있는 꼬마한테 우리 아가라도 이리 와 앉으라고 했더니 꼬마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재차 꼬마를 불러 이리 와서 같이 앉자 했더니 그 꼬마 하는 말이,
“ 엄마 난 싫어 ”
하니, 엄마의 하는 말이,
“ 태진아, 그러지 말고 할아버지 무릎에 가서 앉아 ! ”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 할아버지 ’란 불청객의 단어가 뇌리를 자극했다.
내가 벌써‘ 할아버지 ’로 보이다니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이었다.
순간 스쳐오는 세월의 무상감에 가슴이 무지근했다.
방금 전 내가 내준 자리를, 부인이 사양한 것도 나를 할아버지로 생각해서 그랬다는 판단이 들었다.
별안간‘ 할아버지 ’란 호칭 한 마디에 숙연한 마음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이든 사람이면 거부반응 없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야 하는 호칭인데도 나는 그게 왜 그리 쉽질 않은지 모르겠다.
찻간에서 누가 자리 양보를 해 주어도 그 자리를 앉으면‘ 할아버지 ’로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 같아 그게 그렇게 싫었다. 빈자리가 있어 내 스스로 앉는 것은 모르겠지만 양보 받은 자리는 앉기가 싫었다.
어디 음식점을 가서도 종업원이나 주인이,
‘ 할아버지 어서 오셔요. ’하는 그런 업소는 가기가 싫었다.
요즈음은, 이런 사람의 심리를 잘 알아서인지 각종 업소의 종업원과 주인들도 연세 드신 노인들께‘ 할아버지 ’‘ 할머니 ’라 호칭하지 않고,‘ 아버님’이나‘ 어머님 ’아니면‘ 고객님 ’으로 부르는 것을 많이 보았다. 센스 있는 재치라 생각한다.
내가 벌써‘ 할아버지 ’나‘ 어르신 ’으로 불리는 나이가 됐다니 !
< 야, 이 꼬마야 ! >,< 게 있는 학생 ! >,< 저 믿음직한 청년 ! >,< 아저씨 ! > 하던 호칭은 다 어디 가고 신조어처럼 들리는‘ 할아버지 ’란 단어 하나에 기분이 좌우되는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 !
가는 세월 속에‘ 어허! ’소리 몇 번 하는 사이에 머리는 서리 밭이 다 돼 버렸네!
귀소본능으로 나이 들면 사람들은 고향을 자주 찾는데, 나는 고향에 자주 가질 못했다. 명절 때나 어른들 생신 때 아니면, 동리에 큰 일이 있을 때나 고향을 방문한 것이 고작이었으니 말이다.
고향에는 어머니 아버지 연배 되시는 어른이 유일하게 해로(偕老)하고 계셨다.
나는 그 어른들을 뵐 때마다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손길을 느끼는 것 같아 고향 갈 때면 으레껏 찾아뵙곤 하였다.
그럴 때는 부모님 뵙는 생각으로 쇠고기 한 근에, 어른들이 좋아하시는 박하사탕 한 봉지를 사들고 찾아뵙곤 하였다. 빈손으로 가기가 좀 민망하여 한 소행이었지만 어른들은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갈 적마다 그렇게 반가워하시고 동네 사람들한테까지 소문을 내곤 하셨다. 찾아뵙는 때가 건강하실 적도 있었지만 병환으로 아파 계신 때도 있었다.
부모님이 그리워서 찾아뵌 어른들이셨기에 어른들의 체취를 느껴 보고 싶었다. 손을 잡았다. 어머니 아버지 체온을 느끼고 싶어 만져본 손이었지만 군데군데 검버섯이 나 있는 쭈글쭈글한 손이었다. 평생 농사 이력으로 생긴 군살이 아직도 딱딱한 못이 되어 농부의 한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앙 마딘 어른들의 손길을 곱살한 내 손으로 체감하기엔 죄송했지만 그래도 그 손길엔 어머니와 아버지의 체온을 느끼는 기분이어서 좋았다. 잡은 손을 한 동안 놓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두 분을 뵙고 만지는 스킨십을 통해 어머니 아버지를 느끼는 대리만족에 취해보기 위해서였다.
아니, 그것은 남다른 도덕심이나 윤리의식에서가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 체취를 느껴보기 위함이었다.
인사를 드리고 나올 때는 뭐 하나라도 주고 싶어서 바리바리 싼 비닐봉투 꾸러미가 한 보따리나 되었다. 거기엔 직접 농사지은 거라며 검정콩 한 되에 마늘 반접도 참깨 반 됫박도, 들기름 병도 있었다. 이것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정성과 사랑을 담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또 다른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따뜻한 가슴으로 주시는 사람냄새를 그득 담은 보물임에 틀림없었다.
매정한 세월이라더니, 부모님 체온과 따뜻한 가슴으로 대리만족을 시켜 주셨던 그 어른들마저 먼 길 떠나신 지 벌써 대여섯 해나 되었다.
난 이제 어디서 그런 따뜻한 가슴과 손길을 느끼며 살아야 하나!
고향을 지키며 사셨던 분들이 한 분 두 분 다 떠나고, 번호표 받은 숙부님 내외분과 두세 살 연상 형뻘 되는 분들이 1, 2번으로 순번 대기를 하고 있다. 앞 번호 바로 비우면 다음엔 내가 갈 차례, 내 순번이 세 번째임에 틀림없다.
우탁의 백발가를 실감하는 나이,
‘ 내 순번이 세 번째지만 ’그냥 날개를 접을 수는 없다.
‘ 내 순번이 세 번째지만 ’
가는 날까지 백발이 사람냄새로 부피팽창하도록 불쏘시개를 쉬지 않고 지펴야겠다.
우탁의 백발가를 읊조리며 늘어나는 백발이 사람냄새가 되도록 살아야겠다.
한 손에 막대 들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 백발가 / 우탁-
‘ 내 순번이 세 번째지만 ’
백발한테 사람의 향기 뺏기지 않는 내 몫을 다해야겠다.
첫댓글 남상선수필가님ㆍ추운날씨감기하세요ㆍ감동을안겨다주는글이네요♡
박부기 시인님 바쁘신 중에도 제방에 들어오시야 관심과 사랑 주시니 감사합니다..
응원에 보답하는 글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알겠네요
누구나 가야할 길이지만 가는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남겨질 사람들에 대한
걱정과 못다한 정 때문에 힘이 들것
같네요 . 나도 선생님과 같은 일을 당한
적이 있어요 볼 일이 있어 아파트 문을
나서는데 대 여섯 살 쯤 되어 보이는
사내 녀석이 하는 말 " 할아버지
저기 거미 있어요" 10 여년 전 일입니다
가끔은 그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했지요
아무리 젊은 척해도 어린 아이들 눈에는
이미 할아서지가 되어 있나 봅니다
신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인걸도 물과 같아 가고 아니 오노매라
명월의 시조가 ~
나이가 들수록 살아온 삶에 만시지탄의 후회를 많이 합니다.. 후회를 자주 많이 하는 걸로
보아 제가 삶을 잘 못 산 것 같아 반성도 많이 해 가며 새로운 결심도 합니다.
할아버지, 어르신 호칭을 당당하게 받아드릴 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에스윈님 변함 없으신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
불현 할아버지 소리에 새삼 놀라시는걸 보니 아직도 청춘이십니다 그만큼 열정을 가지고 젊게 사셨다는 증거니
넘 걱정 안하셔도 될것 같습니다 ㅎㅎ 한번씩 느껴보는 공감된 마음이지요. 순번이 어디 있겠는지요. 모두 거쳐가는 세월인것을...아래시가 기가막힌 시예요 언제 보아도 고개가 절로 끄떡꺼려지는 소리 백발이 제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에고나 !~~ 기막힌 표현이지요 어디 백발이 사람의 향기를 뺐으려구요 백발은 제몫을 다 하고 있는게지요 ㅎㅎ 죄송~`작가님은 아마 절대 뺏기지 않고 몫을 톡톡히 다 하시고 있는 듯 합니다 ㅎㅎ 왜이리 명쾌해지죠? 백발이 저만큼 서서 저를 쳐자보고 어디 두고 보자" 하는것 같아요 안됑 !
제 삶이 열정 있는 삶은 아닌데 사람이 본능적으로 늙은이 대접 받는 것을 싫어하는
그 범주에서 제가 벗어나지 못했는가 봅니다.. 임의 말씀대로 만년 청춘으로
살 수 있는 열정으로 살아보겠습니다. 향기 있는 삶을 살아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ahrghk님 응원 댓글 주시어 많이 감사합니다.
"가는 날까지 백발이 사람냄새로 부피팽창하도록 불쏘시개를 쉬지 않고 지펴야겠다."
남 할아버지(?)의 다짐이 남같지 않네요! ㅎ
남 작가님이 얼마나 동안이신디...할아버지라니요!?
호칭에 익숙해질 때 쯤이면
저희 모두 바람의 나라에 가게되겄지요?
웃기면서도 서글픈 글, 공감하며 안부인사 여쭙니다.
미력한 힘이나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훈훈한 가슴으로 사람냄새 풍기며 사는 일에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힘이 부치는 자격미달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숨쉬는 날까지 진력해 보고자 헙니다. 높들꽃님 늘 한결같은
성원으로 힘 나는 보약 주시어 고맙고 감사함니다.
선생님은 어느 청춘보다 바삐사시고 열정이 넘치세요 저는 나이는 한참 선생님보다 어리지만 선생님을 뵈면서 부끄러울때가 얼마나 많은데요 열정과 마음으로 따지면 저보다 한참 더 젊으세요♡ 선생님을뵙는 날마다선생님께 포근한 사람냄새 느끼며 더 젊게사야겠다고 느끼는 전데요 그런생각하지마세요:)
노구의 육체는 할아버지가 다 됐지만 정신적인 면에선 만년 열혈 청춘이 되어 못다한
일을 하고 싶은 것이 저의 소박한 소망입니다.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열정으로 사시는
김정아님 같이 할아버지 소리를 듣지만 꿈을 가지고 살렵니다. 우리 같이 더불어사는
상생의 화기애애한 사회 만들어요. 김정아님 관심과 사랑의 댓글 주시어 힘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청춘이고
저 세상 가는 순서 나이 관계 없다 고 하는데
그래도 번호표 받은 기분?이해갑니다
어는 많은 형제들 가진분들 어느 새 다 노인이 된 형제들 모습 보면서 순번 대로 이어지길
기도하는 모습도 있답니다
미련없이 가도록 지금부터 비우기 연습할까요?잘읽었습니다
번호표 받고 더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 아니고 시간이 부족한 삶에다 또 하지 못한
일이 많아서 사는 날까지 하고 싶었던 인간성 부활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번호표 받은 자신의 나이를 인정하기 어려울 정도 인생무상을
느끼지만 순번 뒤바뀌기를 바라는 심사는 전혀 아닌데 이상한 시선이 작용하는 것
같군요. 색종이님 진솔한 댓글 감사합니다.
순서대로가자 엄마 돌아가신뒤 맨 맞이인 언니가 우리에게 했던 말입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따뜻한 마음을 느낄수있었지만 왠지 마음이 심쿵했습니다
우리 사람의 생사관계의 죽음에 있어서는 임의 언니 말씀대로 순서대로 가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허나 가는 날까지 자신의 존재가치를 실현하는데 최선을 다하다 가는 것도 천명을 다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서종순님 진솔한 마음 보여 주시어 고맙습니다.
성원 댓글 감사합니다.
순번이 세번째라는 말씀을 글 말미에 알고 두 가지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참으로 빠르구나!를 느끼는 요즘에 아쉽고 쓸쓸한 마음이 들게 되는 경건한 표현으로 한가지, 또 다른 하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너무 재미난 표현을 하셨다는 것이지요^^ 글을 참 맛나게 쓰시는구나라고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백발가를 처음으로 접한 느낌입니다. 가시와 막대. 지름길로 온 백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간의 흐름은 너무나 야속하고 막고 싶은 존재인가 봅니다. 선생님은 항상 젊게 사셔서 할아버지란 단어는 택도 없는 존재인 거 아시지요? 충남고등학교 교무실에서 아버지와 뵈었던 그 느낌 그대로 이십니다. 감사해요, 선생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