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부석(望夫石)의 세호(勢護) 의미
망부석에는 일명 “하늘 다람쥐”“도룡뇽” 형상을 한 "세호(勢護)"가 새겨져 있다. 망주석(望柱石) : 혼이 놀러갔다가 망주석을 보고 찾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무덤 양옆에 세운 돌기둥으로 혼이 망주석에 새겨진 도룡뇽을 타고 봉분 안으로 드나든다고 한다.
그런데 한마리는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고, 한마리는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이다. 이를 두고 망자의 혼을 맞이하고, 보내는 전령과도 같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지만, 원래는 묘의 앞에서 묘를 바로보고, 좌측은 올라가고, 우측은 내려가는 것인데, 올라가는 것은 하늘 天을 말하니 夫親를 말하고, 내려가는 것은 坤, 땅이니 母親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뒤집어 반대로 세운다면 봉분 아래에 남녀가 반대로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 논리로는 조선조 왕들의 "능"이 모두 위의 설명과 같은데, 하필이면 "세조"부터는 長者가 아닌 "庶者"들이 득세하였으므로, 위와같은 배치를 따른다면 "나는 서자입니다"라고 나타내는 것이라는 낭설도 있는 것이다.
파평윤씨 문중은 위의 배치에 반대방향으로 배치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고, 실제로도 이같은 배치를 하고 있다.
위의 설명은 배치하는 원칙이라면, 망부석에 세겨져 있는 "하늘 다람쥐" "세호(勢護)"가 나타내는 의미는 곡장 안의 무형의 기 즉, 생기가 빠져 나가지 않토록 일종의 장애물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穴板에서 바라다 보이는 물이 빠져 나가는 곳을 破口라 할 때, 이 破口에 서 있는 암석들을 한문(悍門)이라고도 하는데, 氣가 빠져 나가는 것을 지킨다는 의미로 한문(悍門) 바위가 험악하고 크고 웅장하게 서있는 것을 으뜸으로 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한문(悍門)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용사한문(龍蛇悍門)은 공후가 나는 땅이요, 구사한문(龜蛇悍門)은 大貴가 나는 땅이요, 화표한문(華表悍門)은 한림학사가 나는 땅이요, 북신한문(北辰悍門)은 왕후가 나는 땅이다.라고 전해지고 있다.
왕릉에는 망주석의 2/3지점에 細虎(세호)라는 작은 호랑이 형상을 새겼으 나, 사대부의 망주석에는 細虎(세호) 대신 도룡뇽의 모양을 새겼는데 한쪽은 올라가고 한쪽은 내려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또한 후손들이 많이 번성 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세운다고 한다.
묘소(墓所) 석물(石物) 망주석(望柱石)의 다람쥐
고래(古來)로 왕릉(王陵)이나 현관(顯官), 사대부(士大夫), 서인(庶人)의 묘제(墓制)와 관련해서는 횡살문(橫殺門)을 비롯하여 지석(誌石), 곡장(曲墻), 봉분(封墳), 병풍석(屛風石), 난간석(欄干石), 상석(床石-혼유석[魂遊石], 향로석[香爐石], 북석[鼓石], 월석[月石]), 망주석(望柱石-華表柱), 장명등(長明燈), 문무인석(文武人石), 동자석(童子石), 석마(石馬), 석호(石虎), 석양(石羊) 기타의 석수(石獸), 정자각(丁字閣), 비각(碑閣), 신도비(神道碑) 등과 연관하는 많고 복잡한 절차와 격식을 따라야 하였다. 뿐만 아니라 묘역(墓域)의 경계, 넓이조차 제한이 있어서 1품은 무덤을 중심으로 사방 반경(半徑)이 100보, 2품은 90보, 3품은 80보, 4품은 70보, 5품 이하 50보, 서민 10보 등 까다로운 규정이 논의되었다.
주지하듯이 묘소 주위에 갖추는 다양한 석물(石物) 가운데 대표적인 것의 하나로 ‘상석’ 좌우에 있는 기둥 모양의 망주석(望柱石)이 있다. 이는 무덤을 꾸미기 위하여 무덤 앞의 양옆에 하나씩 세우는 돌로 만든 기둥 형태인데, 다른 이름으로 망두석(望頭石), 망주석표(望柱石表), 석망주(石望柱), 화표주(華表柱), 석주(石柱), 망주(望柱)라고도 한다. 가늘고 긴 형태로 망주석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멀리서 바라보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라 추측된다. 현재까지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망주석은 삼국통일시기 이후의 것으로 보이는 신라 괘릉(掛陵)과 흥덕왕릉(興德王陵)에 있는 것인데, 고려 이후의 능원(陵園)은 물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벼슬아치의 무덤에서도 거의 예외 없이 발견되고 있다.
본래 무덤을 장식하는 석물(石物)은 신분에 따른 규제가 있었다. 한국은 중국의 《광기(廣記)》 <분영조(墳塋條)>의 규정을 준용하여 왔으나 왕조정치가 끝난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이 규정과 관계없이 단순 장식물로서 설치되고 있는데, 망주석도 그러한 모습을 보인다.
이 망주석의 유래에 대하여는 다양한 이론(異論)들이 있어왔는데, 어떤 이는 망주의 모양이 남근(男根)을 상징하는 것으로 믿어 후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기자석(祈子石)뜻을 담았다 하였고, 또는 유택에 안주하던 영혼이 밖으로 나와 휴식하는 곳의 의미를 가진다 하기도 하였고, 먼 곳에서 바라보아 묘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표지이며, 나아가 영혼이 묘소를 떠나 멀리 출타하였다가 자기의 유택(묘)을 찾아오도록 안내 역할을 하며, 이 기능은 절에 당간(幢竿)을 세우는 것과 동일한바, 당간이 당주에 고정되고 그 끝에는 당(幢)을 매달아 멀리서도 절임을 알 수 있도록 표지하는 바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이밖에도 망주석이 상징하는 바가 '횟불’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믿어 그 망주석이 왕릉(王陵)에서 빠짐 없는 장명등(長明燈)과 같은 기능이라 믿는 사람도 있다.
근세에 이루어진 많은 사대부와 서인의 무덤에서 보는 망주석에는 위쪽 3분의 1 지점에 작은 동물 형상이 디자인되어 있으며, 그 동물 형상은 망주석을 오르거나 내려가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동물 형상이 전혀 없는 것 또한 많았다. 이는 왕릉 망주석의 같은 부위(部位)에 빠짐없이 조각되어 있으며, 지관(地官), 풍수가들이 세호(細虎)라는 상징동물로 일컫는 것이 후대에 변형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세호’가 어떤 동물을 상징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문화재청 문화유산국 궁능관리과’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망주석에 새겨져 있는 동물은 여러 가지 이름(다람쥐, 담비, 세호 등)으로 불리고 있지만, 주로 세호(細虎)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 정확히 무슨 동물인지는 알 수 없으며 거북, 사자, 코끼리, 뱀을 합친 동물이라고도 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세호에 대하여는 현재 유래와 의미 등 정확한 연구 결과가 없으며, 다만 풍수적으로 접근했을 때 세호의 의미와 상하운동설 등에 대한 해석 등을 하고 있을 뿐 정설로 정립되지는 않았습니다. 현재로서는 정확한 답변을 드릴 수 없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풍수설에서는 해석하는 사람마다 나름의 이론을 펴면서 어떤 이는 ‘도롱룡’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글자 그대로 믿어 ‘호랑이’의 부류라 하기도 했는데, 그 왕릉 ‘세호’의 변형이 민간에 전파되면서 아주 오래된 예로서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의 묘소의 망주석에서 보는바, 그 동물의 형상을 사람에 따라서 도롱뇽 혹은 확실한 논거로 파악할 수 없는 어떤 상상의 동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상상의 동물이 임진왜란을 지나면서 어느 사이에 산간 묘소 인근에서 너무 흔한 동물인 ‘다람쥐’로 변하였다고 생각하여 그것이 다람쥐로 된 연유를 견강부회(牽强附會)일까 다음처럼 나름으로 해석하였다.
“오래된 망주석에는 도롱뇽이 디자인되어 있다. 도롱뇽은 양서류로 물과 육지에서 활동이 가능하다. 민간에서 영혼은 육지보다는 물을 좋아한다고 믿는다. 때문에 영혼이 무덤을 빠져나와 속세를 구경할 때 수륙을 넘나드는 도롱뇽을 타고 다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양반들은 용도 용나름이지 도롱뇽을 타고 다닌다는 것이 어색했는지 세호(細虎 : 작은 호랑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을 지나면서 변화를 겪는다. 도롱뇽이나 세호까지는 귀족들의 문화였다면 세호가 민간으로 내려오면서 슬그머니 다람쥐가 된 것이다. 서민들은 다람쥐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다람쥐는 가을이 되면 열심히 도토리와 먹잇감을 주워 땅에 묻어 숨겨둔다. 하지만 다람쥐는 자기가 숨겨둔 도토리의 10%도 못 찾는다. 그렇다면 나머지 90%는 발화하여 도토리나무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육지에 남아 있는 도토리는 모두 동물의 먹이가 되거나 아니면 썩어 버린다. 하지만 다람쥐가 모은 도토리는 90%가 나무가 된다. 망주석의 다람쥐가 오르는 것은 쉬러가고 내려가는 것은 일하러 가는 것이다. 결국 다산과 만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심어놓은 것이다. 더욱이 도토리는 배고픈 서민들의 끼니였고 망주석의 모양이 기자석임에야.”
그런데 문제는 세호’이든 ‘도롱룡’이든 혹은 ‘다람쥐’이든 간에 그 상징적 동물이 어느 한쪽 망주석의 것은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고, 다른 한쪽은 내려가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묘소 앞에서 무덤을 향하여 보는 시각에서 오른쪽(무덤쪽에서는 왼쪽) 좌청룡쪽 다람쥐가 올라가고[우주상행/右柱上行] 왼쪽 우백호 쪽 다람쥐가 내려가는 모양[左柱下行]이 일반적이라 하나 그 반대인 경우도 흔한데 조선 왕릉 망주석의 세호 또한‘좌우, 오르내림’이 한결같지가 않아서 길이 세상 사람들의 의문을 품고 어느쪽이어야 한다고 설왕설래를 해 오기도 했다. 그처럼 위치(좌우)가 왕릉에서조차 일목요연하지 않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을 주고 있으니, 실제 거기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조차 불분명하였다. 그리고 왕릉 아닌 현관사대부 묘소로 망주석에 보이는 세호류 상징동물로서 아주 초기의 것인 ‘조남명’ 선생 묘소의 ‘세호’는 아예 오르내림이 없고, 양쪽 망주석의 것 모두 위로 오르는 형상만 나타난다.
이에 대해서도 호사 풍수가들이 나름의 언설을 펴고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주장이 있기도 했다. 곧 어느 풍수학자가 주장한 설에 의하면, 왕통이 중전에서 나온 적자(嫡子)이면 종(宗)을 붙이고, 중전이 아닌 서자(庶子)인 경우는 조(祖)를 붙인다는, 정말 말이 되지 아니하는 종조(宗祖)의 개념을 부여하고는 ‘종자(宗字)’가 들어간 왕은 좌상우하(左上右下)가 되어 청룡 쪽 망주석의 세호는 위로 올라가고, 백호 쪽 세호는 아래로 내려오는 형상을 조각하고, ‘조자(祖字)’가 들어간 왕은 그 반대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그러나 왕릉을 답사해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여럿 발견되어 전혀 정설이 될 수가 없었다.
혹 어떤 이는 혼령이 세호를 타고 세상 구경을 나가는데, 위로 오르는 것은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의미를,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묘소로 귀가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억측을 말하기도 하였다. 그게 정말 그러하다면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 마을 뒷산 정상부에 자좌오향(子坐午向)의 터를 대고 영면하는 남명 조식 선생 망주석의 세호는 양쪽 모두 위로 오르기만 한 형상을 하고 있으니, 위의 설명대로라면 선생의 영혼은 이미 광중을 떠나 귀소(歸所)하지 못하고 광중 밖에서 머물고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원(元)의 영향 아래 있었던 고려와는 달리 조선조의 문화가 중국 명(明) 나라의 영향을 입어 왼쪽을 더욱 숭상(左尙)하여 ‘좌의정’의 지위가 ‘우의정’의 앞이었던 증좌 등을 따라 ‘좌상우하’로 되었다